장미를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달콤한 향기는 그대로이다. 여전히 장미이다. 아버지 이야기를 끝으로 말없이 도시락을 비우고 있는 마마두에게 내가 말을 건넸다. "장미를 세네갈에서는 뭐라고 불러?" 입에 넣은 생선튀김을 천천히 씹어 넘긴 다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짐짓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프랑스어도 똑같아. 장미의 이름은 장미." <장미의 이름은 장미> - P104
마마두는 수업시간에 자주 늦었다. 그는 내 옆자리가비어 있으면 거기 와서 앉았고 아니면 맨 뒷자리에 앉았다. 의도적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언제나 무표정했고 내게 건네는 말은 ‘하이, 수진‘과 ‘바이 수진‘뿐이었기 때문이다. 마마두가 가까이 다가오면숲의 내음 같기도 하고 도서관의 책 냄새 같기도 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으므로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숲과 책의 냄새는 그가 즐겨 신는기다란 회색 스웨이드 로퍼와 함께 등장하곤 했다.<장미의 이름은 장미> - P85
민준은 월요일 오전 수업이 끝난 뒤 카페테리아와 도서관을 잇는 구름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야구 모자를 쓰지 않아서 서글서글한 눈동자와 곧은 콧대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카고 반바지 위에 입은 푸른색스트라이프 티셔츠가 하얀 얼굴에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오후 수업에서 마야를 만날 수 있는 민준의 얼굴에는 보는 사람이 따라서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설렘과 싱그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장미의 이름은 장미> - P119
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해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작가 마마두가 나무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가서 뜨거운 소금을검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푸른 하늘과 호수의장밋빛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를 상상해본다. 누군가의 왜곡된 히스토리는 장밋빛으로 시작한다.<장미의 이름은 장미> - P135
어떤 헌신은 당연하게 여겨져 셈에서 제외된다. 시기와 처지에 따라 개인의 욕망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바뀌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자기애가 강하다고해서 모두가 자신의 삶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아가씨 유정도 하지> - P211
만약 내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쓴다면 뭘 쓰게 될까. 어린 시절 나는 밥상 위의 반찬들이 유리그릇에 담겨 있는걸 보고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았다. 다시 도자기 그릇으로 바뀌면 겨울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 돈이면 반찬한 가지를 더 올리겠다며 주변의 빈축을 샀지만 어머니는 작은 사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 - P225
"늙으면 이상하게 평소 기억하던 것보다 더 어렸을 때 일이 기억이 나. 내가 마당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마루끝에 앉아서 웃으며 손짓하던 것, 그런 게 말야. 그걸뭐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작가니까, 제대로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꼭 죽으려고 연습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지금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 - P246
수진이 겨울의 코니아일랜드를 좋아할까. 그럴 것 같았다. 비록 아이스크림 가게는 문을 닫았지만 눈이 펄펄 내리는 날 보드워크를 걸으며 갈매기의 춤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한 번 와본 장소라 해도, 그리고같은 사람과 온다 해도 다른 눈으로 본다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될 수 있으니까. 그 풍경 속에서 수진은 눈을 돌려다시 나를 바라볼지도 모른다.<아가씨 유정도 하지>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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