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 주었다.‘ - P38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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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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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뇌리에 박히는 것은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이다. 일체의 감정은 배제되고 현재형으로 쓰인 문장들을 읽는다. 그래서 더 상상하게 되는 힘이 있다.
이 작고 얇은 책으로 읽는 작가의 인생사는 암울하고 우울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양차 대전의 사이에서 강대국의 논리에, 침략에 두 번이나 이리저리 바둑판의 돌처럼 놓여지는 헝가리에서 여자로 태어났고,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도 없이 남의 나라(러시아) 역사와 문화를 배워야했고 결혼해서 아기를 데리고 살기 위해 국경을 넘어 난민의 삶을 살아야했으니까.
그러나 생존을 위한 일에 매진하면서도 작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고 단조로운 공장 노동 중에도 머릿 속으로 끊임없이 시를 지어냈다. 스위스에 정착했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배웠고 글을 익혀야만 했다.
헝가리의 국경을 넘었을 때 그녀는 제 나라 말을 잃어버린 영혼의 난민이 된 것이고 -거기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인사도 하지 못하고 이별을 했다 - 영원히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게 되었다. 그녀의 첫 소설인 <비밀노트>가 파리의 쇠유 출판사에서 발매되었고 우리 나라에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으로 묶여 소개가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작가의 문체를 보며 든 생각..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영작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간단한 4-5줄의 일기를 이런 단순한 나열 형식으로 감정 표현 없이 썼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길고 감정이 표현된 문장은 불가능했으므로. 즉 그 당시 영어에 관한 한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작가의 이런 감정이 일절 배제된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의 배경에는 헝가리어를 잃고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던 저간의 사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구구절절 맘속의 감정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서툴지만 쏟아내야만 내가 살아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읽는 나는 그것이 더 절절하게 와 닿는 것이고 극도로 자제한 그 표현의 사이를 나의 상상력으로 메우게 하는 작가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비밀노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의 공부‘에 보면,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략)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열린책들,2018,38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문맹>, 112면)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읽고 나서 작가의 말로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읽다 포기 했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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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2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읽었는데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쓸 수 없는 환경에 직면한다는게 얼마나 큰일인지 암담하더라구요. 작가의 절망과 그 절망을 딛고 어떡하든 다시 쓰는 그 마음도 짧고 건조한 문장속에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은하수 2023-02-26 22:45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절절하게 장황한 표현보다 더 와닿았어요
사람의 심장을 찌르는 문장입니다^^ 용감한 여자이자 어머니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더 공감하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이런 말듣고 화 안날 여자 있을까?
이런 싸가지 없는 말 하면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앟아진다. 아무 것도 해주지 말아야 한다. 왜 해주어야 하나. 저나 나나 같이 일하고 같이 공부하는데!

이혼하길 백번, 천번 잘했다.
혼자 사는게 백번, 천번 낫다!


그제야 내가 요리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란 걸알게 되었다. 요리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왜 우리 두 사람 모두가 필요로 하는 이 서비스를 왜 번번이 내 쪽에서만 제공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의문이 들었다. 그리하여 필요 이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일부러 요리에 무심했고 무능했다.

 결혼하고 3개월쯤 지난 어느날 아침 스테판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끓였네." 나는 충격받았다. 우리 둘 다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 커피 맛을 따지지도 않았고 맛이 있건 없건 누가 커피를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식탁 위 맛없는 커피는 나라는 인간의 결함이 되었다. 그가 언급함으로써 기정사실화 되어버린 내 실패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동네 이탈리아 카페에 들어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던 은퇴한남자들에게 청승을 떨었다.
 "우리 남편이요. 제 커피가맛이 없다네요" 남자들은 즉각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한 사람은 인스턴트 커피가 문제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주전자 때문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물이 중요하다고했다. 
그래서 드립커피용 주전자와 갈지 않은 원두와 병에든 생수를 샀다. 그런데도 여전히 커피는 맛대가리 없었다.
너무 약했다. 너무 강했다. 너무 연했다. 너무 썼다.  - P216

우리가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침실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작업실로 갈 때마다 우리가 들인 이 과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결혼이라는 마법이 통하게 하기 위해수행해야 하는 행동들을 점점 더 예리하게 느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의적인 작업에만 집중할 줄 아는 사람들로 보았다.
 인테리어를 새로 한 아파트는 우리 의도를 밝혀주는 선언이 될 것이었다. 고취된 정신의 연대를 반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공간은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딱히 그 이유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 P217

우리는 5 년을 같이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스테판이 집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혼은 그런 식으로 끝나버렸다. 끝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린 끝나지 않는 싸움 끝에 결국 지쳐 나가떨어졌다. 둘 다 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긴장이 없는 방에서 한 번이라도 숨을 내쉬고 싶었을 것이다. 함께 있는 것보다 그 공기를 원했다. 나는 집에 있던 물건들을 싹 내다 팔고 대학원을 그만두고(대학원은 언제나 추상적 관념일 뿐이었다)뉴욕으로 돌아왔다. 서른 살이었고 혼자가 되니 마음이 놓였다. 1번 애비뉴의 작은 다세대 주택에 세를 얻었고 주간지 기자로 취직했다. 그리고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꾸미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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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갑자기 강렬한 빛이 우리를 비추고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지!"
우리 중 한 명이 독일어로 말한다.
"우리는 난민입니다."
오스트리아 국경 경비원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럴 줄 알고 있었소. 따라오시오."
그들은 우리를 마을의 광장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많은 수의 난민들이 있다. 마을의 군수가 도착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우리는 농부의 집에서 묵게 된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다. 그들은 아이를 돌보고 우리에게 먹을 것과 침대를 준다. - P72

흥미로운 것은 내가 그날 밤 일에 대해 가지고있는 기억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마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생에서 일어난 일 같다.
마치 내 기억이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을 잃어버린그 순간을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헝가리에 내 비밀 작문 노트뿐만 아니라처음 쓴 시들도 놓고 왔다. 나는 그곳에 나의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미리 알려주지도 못하고 잘 있으라거나 또 보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두고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1956년 11월 말의 어느 날, 나는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 P73

*제 자리에 있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로잔에 도착한다. 우리는 축구장 근처,
도시의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막사에서 지낸다. 군인처럼 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이 안심을 시키려는 듯 미소 지으며 우리의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샤워를 하기 위해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 사람들은 우리의 옷을 소독하기 위해 가져간다. - P80

이와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어본 적 있는 우리 중 일부는 겁이 났었다고 나중에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잘 먹고 깨끗해진 우리의 아이들을 되찾았을 때 모두 안심한다. 나의 아이는 내 침대 옆 예쁜 요람 안에서, 마치 한 번도 그런 잠자리를 가져본 적 없다는 듯이, 조용히 잠을 잔다. - P80

일주일에 여러 번, 공장 사람들이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다. 친구들, 지인들은 일자리나숙소를 구하고 주소를 남긴 채 떠난다.
로잔에서의 한 달이 지난 후, 우리는 한 달 정도더 취리히의 숲 속에 위치한 학교에 머물며 지낸다. 언어교육을 제공해주지만 나는 어린 딸 때문에 거의 참석하지 못한다. - P81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 P82

*사막
공장에서는 모두들 우리를 친절히 대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웃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 P89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이들은 끝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 P91

 *우리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어느 11월의 오후, 내가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것은 다른 출판사 주소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즈음이다. 수화기 저편에 있는 사람은 쇠유 출판사의 질 카르팡티에다. 그는 내 원고를 지금 읽었고, 몇 년 동안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읽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내 소설을 한 번 읽은 이후 다시 한 번 전체를 읽었고, 이것을 출판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

 그는 나에게 몇 주 후에 전화하겠다고 말한다. 일주일 후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계약서를 준비할게요"라고 말한다.

3년 후, 나는 나의 번역가 에리카 토포벤과 함께베를린의 거리를 걷는다. 우리는 서점들 앞에서멈춰 선다. 서점들의 진열창 안쪽으로 나의 두 번째 소설이 보인다. 우리 집의 선반 위에는 열여덟개 국어로 번역된 <비밀 노트 Le Grand Cahier》가 있다. - P103

베를린에서 어느 저녁, 우리는 낭독회를 갖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러 내 이야기를 들으러 나에게 질문하러 올것이다. 나의책, 나의 삶, 나의 작가로서의 여정에 대해.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 P103

*문맹
몇 번의 수업 이후 선생님이 내게 말한다.
"프랑스어를 아주 잘하는데 왜 초급반에 있어요?"
나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몰라요. 전문맹이에요."
그는 웃는다.
"그걸 앞으로 살펴보죠."
2년 후,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프랑스어 교육수료증을 받는다.

나는 읽을 수 있다. 다시 읽을 수 있다.  - P111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
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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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의 요리와 침대에서의 잠자리까지 모든 것은아빠의 사랑이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나는 아주 일찍부터섹스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잠자리를 질색하지는 않았지만 참아내야 하는 것쯤으로본 것 같다. 한 번도 육체적인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거나여자에게는 귀찮기만 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너희 아빠 정열적인 남자였어." "아빠는 언제나 준비가 돼있었어. 하룻밤에 여자 열 명이랑도 잘 수 있었을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고 어떤 남자 옆에 눕기 위해서는 그 남자를진짜로 진짜로 사랑해야만 하는구나. 그러지 않으면이 모든 사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구나. 열여섯 살,
처음으로 순결을 위협받았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 P37

때마다 짜증이 치밀 정도로 계속되는 머리와 몸의 전쟁을느꼈고 조용히 엄마의 자비를 빌었다. 하지만 엄마, 내가이 사람을 정말 정말로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아는 건 나도 몸이 달았고 이 남자가 날 밀어붙이고있다는 것, 끈질기게 조르고 있다는 것뿐이야. 골목에서, 공원 벤치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방에서 엄마가 뒤척이며누워 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전쟁터에 나와 있는 것같아...... 하지만 나에겐 지원군이 없어.

엄마의 사전에 있는 그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진짜 사랑하는지어떻게 아냐고? 그냥 아는 거야." 엄마는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이 문장은 시나이 문자처럼 엄마에게서 내게로 계승되었다.  - P38

엄마가 드러커 아줌마에게 창부라고 하고 1년 뒤에드러커네는 이 건물에서 나갔고 그 아파트에 네티러바인이 들어왔다. 드러커네가 이사 가고 네티가 이사 온낮은 기억에 없다. 트럭이나 봉고차가 들어와 가구 식기옷가지 들을 내가고 들여오는 장면도 없다. 사람들도 집도마치 아파트에서 증발하듯 싹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이 그공간을 차지했을 뿐이다. 나는 애착이 절대적이지 않고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 아주 어린시절에 알게 되었다.  - P51

엄마는 맞은편에 앉은 나를 찬찬히 훑어본다. "그래서우리 잘난 딸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즘에는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엄마는 황당한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입이 떡 벌어졌고눈은 딱한 사람 보듯 연민으로 가득 찼다. 내가 방금 한말이 하도 무식하기 짝이 없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주무기인 말발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그러다 고개를천천히 주억거리더니 말한다. "아까 그 꼬마가 한 말을해줘야겠구나. ‘아줌마 완전히 반대로 아시네요." - P70

 네티는 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물론 레이스도 많았다. 어딜 가나 네티가 짠 레이스가 있었다.
네티는 재능이 출중한 레이스 기술자였다. 사실릭 러바인을 만난 곳도 일하던 레이스 공장이었다.
레이스 실로 옷과 침대보는 물론 드레스와 코트까지 뜰실력이 됐지만 그걸로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대신 인형베갯잇, 의자 등받이 덮개 같은 소품을 짜서 아파트를화사하고 앙증맞게 꾸미곤 했다.  - P80

나는 열네 살이 되었고 네티의 레이스는 나의 내면세계성장에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이듬해였고 내가 우리 집 비상계단에 밤늦게까지 앉아서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 분위기는 딱 영안실 같았다. 엄마의 비애는너무도 원초적이어서 생활을 전부 지배해버렸다. 슬픔은공기 속에서 산소만 빨아들였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머리와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그저 원치 않는 곳으로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셋, 그러니까 오빠 나엄마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평온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유배지에 갇혀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유일한 안식처였다.
- P85

아빠는 11월 말 새벽 네 시에 돌아가셨다. 아빠가입원했던 병원에서 다섯 시 반에 전보가 왔다. 아빠는산소텐트에 일주일 동안 들어가 있었고 의사들은 최선을다해 생명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기대하지 않았다.
아빠는 닷새 동안 세 번의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마지막발작이 아빠의 생명을 앗아갔다. 쉰 살이었다. 그때엄마는 마흔여섯, 오빠는 열아홉, 나는 열세 살이었다. - P96

초인종이 울렸을 때 가장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튀어나간 사람은 오빠였다. 엄마가 오빠 뒤를 따랐고 내가그 뒤에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 손바닥만 한 전실에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오빠는 문 앞에 서서 60와트전구가 비추는 연노란색 종이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손톱이 박힐 정도로 오빠의 팔목을 세게움켜쥐면서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셨지? 그렇지, 그런거지?" 오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곡소리가터져나왔다.
"아악."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아, 하느님."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또 소리를 질렀다.
눈물은 바닥에 떨어지고 샘물처럼 솟아올라서 복도를가득 메웠고 부엌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거실로 흘러들어 - P96

두 개의 침실 벽에 부딪혔고 우리 모두를 떠내려가게 했다.
그날 낮과 밤에 흐느끼는 여자들과 충격받은 얼굴을한 남자들이 우리 엄마를 에워쌌다. 엄마는 머리를쥐어뜯고 살갗을 찢고 몇 번씩 혼절했다. 누구도 감히엄마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엄마는 기이한 투명 막 안에홀로 격리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엄마 주변을 에워쌌지만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침범할 수 없었다. 엄마는 마법에걸렸다. 귀신에 홀려 있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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