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화기 내부 습도는 65~70퍼센트 사이다. 부화기는 전자동 기러기 엉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알들은 야생에서 엄마기러기가 엉덩이 아래에 품은 것과 똑같은 상태로 유지돼야하니까.
말이 쉽지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러기 엉덩이는정교한 창조물이라서 적정한 온도와 습도로 이루어진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기계 안에서 부화가 성공하려면 전체적인 매개 변수를 온종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정확한 습도다. 습도가 너무 낮으면 알 내부의 막이 말라서조직이 가죽처럼 질겨진다. - P10

이프로젝트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아홉 마리 기러기의 목숨뿐 아니라, 비용이나 내 일의 성공 여부도 달려 있다.
기러기들은 이른바 ‘데이터 로거‘라는 것을 등에 지고 다닐 예정이다. 데이터 로거는 성냥갑만 한 측정 기구인데, 온갖 데이터를 기록한다. 이 측정 데이터의 도움을 받아 비행역학과 기체역학, 현재 대기 상황에 관해 정확하게 진술할수 있다.
이 일에 성공한다면, 몇 년 또는 몇 십 년 후에는 새와 기타 동물들이 있는 세계 여러 곳의 기류와 풍속 데이터를 얻는 일이 가능하다. 이 귀중한 정보들은 위성을 통해 자동으로 모이고, 평가를 위해 지상으로 보내질 것이다. 기상관측에서 이런 정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데, 안 그러면 지상 관측소에서 측정한 데이터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2

왜 하필 내가 아빠 기러기가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행글라이더를 조종했고, 얼마 전에는 초경량비행기 면허를 땄다. 연구소에서 누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것인지 문제가 되었을때, 내가 기러기 양육을 담당한다는 결정이 일찌감치 내려졌다. 모든 게 예정대로 이루어진다면, 몇 주 후에 기러기들과 함께 날것이다!
책임감과 긴장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 P13

물건이나 사람이 부화 전후에 기러기의 인식에 새겨지는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과정을 ‘각인‘이라고 한다.
각인에는 소리와 외관이 중요하지만 냄새도 한몫한다. 얼마 전에 입던 티셔츠를 부화기 안에 넣었다. 신던 양말도 괜찮았을 테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새끼 기러기들을 괴롭히고싶지는 않았다. - P16

사태가 심각해진다. 아침 일곱시에 전화기가 울린다. 전화를 건 연구소 사육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데, 그녀가 하는 말이 들린다. "알 하나가 부화하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 P20

새장들 뒤편, 연구소 뒤쪽의 드넓은 풀밭에는 소박한 캠핑카가 외롭게 서있다. 숲과 바로 연결되는 곳이다. 다음 몇주 동안 나는 그곳에서 기러기들과 살 것이다. 자그마한 우리 기러기 가족을 위한 도시 근교의 단독주택, 새로 꾸민 아이들 방이다. 버킹엄 궁전이 아니라 더킹엄 궁전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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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갑은 외환위기 때 이혼했다. 정부는 외국은행에서 달러를 꾸어다가 구제금융을 풀었지만 중소기업들은 부도의 쓰나미에
쓸려나갔다. 연매출 십육억 정도를 올리던 이춘갑의 구두공장은 초기에 무너졌다. 어음은 연쇄부도로 꽝이 되었고 유통업자들이 잠적하자 물건은 묶였고 판매 대금은 증발했다. 영업 이윤은 전망이 전무했는데 은행은 신규 대출을 중단했다. -<저녁 내기 장기> - P93

이춘갑은 오개남과사흘째장기를 두고 있었다. 오개남은 겨우내 오리털 파카에 등산화를 신고 귀덮개가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장기판에 모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개 비슷했다. 이춘갑은 오개남과 통성명했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고, 오개남도 마찬가지였다. - P96

오개남은 1·4후퇴 이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남쪽에서 태어났으므로 남쪽을 열어젖히라고 이름을 개이라고 했다는데,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개남‘은 ‘야‘와 마찬가지였다. 일이 없는 날 공원에서 장기를 둘 때도 장기판 사람들은다들 이름이 없었지만 장기를 두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 P102

이춘갑은 부도난 지 이년만에 채무를 면책받았다. 부도난어음으로는 만기가 다가오는 어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닥쳐오는 부도는 지나간 부도 속에 잠복해 있었고 영남의 부도가 호남의 부도에 포개져서 부도는 파도로 밀려왔는데, 법원은 잇단 부도들의 상관관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법원은 이춘갑의 채무 변제 과정이 신의 성실의 원칙에 부합된다고 인정하고 면책을 허가했다.  - P105

휴먼타운 오피스텔 일층에 점포를 계약할 때 이춘갑은 권리금 일억을 깔았다. 모아둔 돈이 있어서 가게를 얻은 것이 아니라. 돈이 갑자기 생겨서 가게를 얻을 생각을 했다. ‘갑자기‘라기보다는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구나 싶었다.
전 아내가 이혼 위자료 명목으로 받은 아파트를 처분해서 매매가의 반액을 온라인으로 보내왔다. 이혼한 지 오 년이 지났는데도 전 아내는 전에 쓰던 통장 번호를 알고 있었다. - P112

이준갑은 다섯시 삼십분에 제생병원 영안실에 도착했다. 시간이 일러서 영안실은 썰렁했다. 영정사진 속의 전 아내는 앞머리 한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와 있고, 시선은 사진틀 밖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날려서, 영정 속에 바람이 부는 듯했다. 빈소에 김영자의 새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아들은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이춘갑은 흰 봉투에 십만원을 넣고 겉봉에 "왕생, 이춘갑‘이라고 썼다. 이춘갑은 봉투를 부의함에 넣고영정 앞으로 나가서 두번절했다. 맞절을 할 상주가 없는 것이다행으로 여겨졌다. 김영자의 남동생 내외가이춘갑을 알아보았다. - P119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으려니까 삼 년 전 잘라낸 자리에 다시 용종이 돋아나지는 않았을지 싶어서 불안하기도 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는 한두 시간 동안 나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병원에 전화해서 내가 일흔 살이 넘기는 했지만 아직도 멀쩡하니까 보호자 없이 검사받게 해달라고 떼를썼다.

_안 됩니다. 우리 병원 규칙입니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요즘 알바로 그거 하는 사람들 많아요.
라고 병원 직원은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아파트에 와서 청소해주는 도우미 여자에게 ‘보호자‘ 역할을 부탁했다.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 P124

나은희의 편지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송되어서 나의 전직장인 오션블루에 도착했고, 비서실 직원이 나의 주소로 우송했다. 꼽아보니 나은희가 미국으로 간 것은 사십 년 전인데, 구석기시대처럼 오래된 과거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워진 자리에 세종로, 덕수궁 돌담길의 추위와 그 거리에서 함께 먹던 뜨거운 우동 국물이 떠올랐다.
나은희는 서울에서 종합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다가 연봉이 더 많은 미국 병원에 취직해서 이민 갔다. -<대장 내시경 검사> 중에서 - P127

_사십년만에 처음편지해서 아들 취직 부탁하는 꼴이 되어서 염치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떼를써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동안 윤수씨나 저나 서로 소식 전하고 살 처지가 아니었지요. 지나고 나니까 편안해지네요.
라고 나은희는 편지에 썼다. - P129

대장 내시경 검사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종합검진 프로그램의선택 사항이었다. 종합검진은 매년 12월에 했는데, 검진 때가다가오면 나는 밀린 일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검진 결과 암 같은난치병의 중증 진단을 받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려는 심사였는데,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 P135

나는 식당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저절로그렇게 되었다.
식당 문 오른쪽 자리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 앉아있었고, 월롱동은 그 자리에 있었다. 월롱동은 뒷모습만 보였다.
나는 사람들 틈으로 뒷모습만 보고도 나의 전처, 월롱동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특징이 그런 식별을 가능케 하는지는 알 수없었으나, 전처 월롱동은 확실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간세월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불화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익숙한 만큼 낯설었다. 월 거스를 수없는 그 시간의 무게를 모두 깔고 앉듯이 문상객들 틈에 앉아 있었다. 남의 뒷모습이 마음속에 새겨진 듯이 익숙하게 느껴지는사태는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월롱동도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까, 월롱동도 알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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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영국왕립식물원을 방문했을 때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런던 중심가에서 식물원까지 가려면 지하철을타고 꽤 멀리 이동해야 합니다. 복잡한 중심가를 벗어나면 지하철은 지상 구간을 지나가는데, 이때 차창 밖으로 수많은 고사리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식물원에 도착해 영국 식물학자에게 오는 길에 한국에서 먹는 고사리와 비슷하게 생긴 종을 많이 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영국식물학자는 철로 주변뿐만 아니라 식물원 근처 공원에서도 고사리가 자라는데, 봄마다 고사리를 꺾는 아시아인이 많다고 합니다. 아시아 음식을 잘 알지 못하는 영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이 고사리를 어디에 쓰는지 매우 궁금해 한다고 합니다. -<고사리의 4억년> - P50

고사리를 보면서 새로운 변화에 잘 적응하는 방법은 무엇인까 생각해 봅니다. 천지개벽 같은 환경 변화라도 그것에 맞춰 혁신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하겠지요. 또 옛것을 간직하면서도 새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지혜와 유연함이 필요하지않을까요. 그것이 우리 인간보다 더 오래 지구에 살고 있는 고사리가 알려주는 장수의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 P54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를 일요일에 혼자 간적이 있습니다.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광경을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운동장에 일렬로 자라던 은행나무는매일 점점 더 노랗게 물들어 잎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바람이 강해지는 것을 보고 얼른 학교로 뛰어갔습니다. 노을을 배경으로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 장관을 혼자 보고있으니 함께 구경하는 이가 없어 어찌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 P58

‘부평초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나 인생을 비유하는 말인데, 옛 유행가에 종종 등장하지요. 부평초는 ‘물 위에 뜬 풀‘이라는 뜻으로 개구리밥을이릅니다. 저는 부평초가 개구리밥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알게 되었을 때 의아했습니다. 개구리밥이 정처 없이, 준비 없이떠돌아다니는 신세를 의미하는 식물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밥은 수생식물 중에서도 가장 작은 식물이지만, 삶의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탄탄합니다. 개구리밥이 얼마나 특별한 방법으로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면 부평초 같은 인생도괜찮다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물 위를 떠도는 용기> - P69

다른 식물에서는 볼 수 없는 개구리밥의 폭발적인 번식력과 작고 간단한 구조, 독특한 생활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개구리밥은 미래의 동물사료, 수질 오염 개선이나 이산화탄소 감소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미개구리밥은 빠른 성장과 높은 담백질 함량으로 어류나 가금류의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다른 가축 사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연료의 일종인 바이오에탄올로 개발되었고, 높은 수질 정화 능력을 이용해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생물 정화제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 P74

식물이 살기 힘든 곳 가운데 지구에서 가장 추운 두 곳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남극과 북극입니다. 두 곳 중 식물이 더 많이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남극과 북극은 서로 반대편에 있지만 극지방이라 살고 있는 식물의 수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북극에는 약 1천7백 종의 다양한 식물이 살아가는 반면, 남극에는 단 두 종, 볏과 좀새풀속에 속하는 식물 한 종(데스샴시아 안타르티카 Deschampsia antarctica)과 석죽과 식물 한 종(콜로반더스퀴텐시스 Colobanthus quitensis)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북극은주변에 육지가 있지만 대부분 얼어붙은 바다이고, 남극은 육지이기 때문입니다. 육지는 바다에 비해 훨씬 온도가 낮기 때문에식물이 살기에 남극이 더 혹독한 환경이지요.  -<이런 곳에도, 초록> - P81

식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런 곳에도 식물이 자라고 있어??
하고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못 하는 식물이지만 어려운환경에 맞게 현명하게 살 방법을 찾아낸 것을 보면 기특하다는생각마저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어려운 상황과 환경을헤쳐나가고 계신가요? 열악한 환경에 맞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과학적으로 생존법을 찾아낸 식물에게서 삶의 지혜 한자락을 얻어봅니다.
-<이런곳에도, 초록> - P83

독도를 대표하는 동물이 괭이갈매기와 강치라면, 독도를 대표하는 꽃으로 해국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해국은 독도 전역에서 볼수 있고, 가을이면 그 꽃이 독도를 아름답게 수놓습니다. 해국은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주로 바닷가 바위틈에서 자랍니다.
독도의 해국 한 줄기를 떠냈더니, 뿌리가 길게는 1미터까지 달려올라왔습니다.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척박한 땅을 뿌리로 힘겹게 붙잡고 견뎌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독도의 식물> - P105

그런데 무화과나무 앞에 strangle, 즉 ‘교살하다‘ ‘목을 졸라 죽이다‘란 뜻의 단어가 붙어
strangler fig, ‘교살자무화과나무‘
라고 불리는 식물이 있습니다. 흔히 열대우림에 사는 여러 종류의무화과속Ficus 식물들을 일컫는데, 이 교살자무화과나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열매를 먹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식물 그룹이지만,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교살자무화과나무는 줄기가 다른 식물을 감고 올라가는 덩굴식물로, 이들은 열대지방의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들을 촘촘히 타고 올라가 꽁꽁 싸매고 결국에는 그 식물의 숨통을 조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교살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지요. 줄기가 위로 곧게 자랄수 없어 이웃의 기둥을 의지해 살아가는 덩굴식물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방향을 돌려 더 가까이>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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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계 형사실은 일층 복도 맨 끝이었다. 담당 형사는 피부색이 검고 어깨가 다부졌다. 목이 굵고 주먹이 컸다. 강력계 형사라면 무술솜씨도 대단할 것이었다. 그에게 잡히던 순간의 철호의 모습이 떠올려지지 않았다.
_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일로 뵙게 되어서 유감입니다만, 경찰관의 직무를 이해해주십시오.
나는 형사와 마주앉았다. 내키지 않으면 답변하지 않아도 좋다고 형사는 나에게 일러주었다. 나의 진술은 철호의 범죄 사건기록에 첨부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배경과 범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서 형사정책연구원에 제출된다고 형사는 말했다. -<손> 중에서 - P51

나는 사내에게 목례를 보냈다. 사내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크고 흐린 눈이 뒤로 물러서는 듯하면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내 눈도 겁에 질려 있을 것이었다. 나는 얼굴의 화장이들뜨는 느낌이었다. 사내는 철호가 강간한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그 사내도 나처럼 참고인으로 불려온 참이었다. 나는 두시까지, 그리고 그 사내는 세시까지 출두해서 강간범의 어머니와피해자의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형사는 시간을배려했는데, 내가 화장을 고치느라고 늦고, 그 사내는 조금 일찍도착해서 결국은 형사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 P53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에게는 휴가를 주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철호가 구속돼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고, 편지도 쓰지 않았다. 철호의 생애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나는 그럴 방법이 없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러서 아파트 열쇠를 맡기고 이사올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철호와 살았던 시간과 공간이 이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P62

겨울에 큰 개 한 마리가 수월천 얼음 위를 건너다가 얼음이떠내려갔다. 개는 땅에 닿지 못했다. 개는 저녁 불빛이 돋아나는 마을을 향해 울부짖으면서 바다 쪽으로 떠내려갔다. 나는 빨래를 걷으러 베란다에 나갔다가 얼음조각에 실려서 떠내려가는개를 보았다. 하늘에는 초저녁 반달이 떠 있었다. 개의 비명은물과 달 사이에 가득찼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개는 천지간에 홀로 울부짖었다.  - P68

강물에 떨어진 연옥이의 몸이 하구쪽으로 떠내려가는 환영이 물 위에서 보였다. 환영 속에서 연옥이의 긴 머리카락이 물결에 너울거렸다. 나는 연옥이가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살아서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내망상 속에서 철호의 정자도 죽지 않고 연옥이의 몸에 들러붙어서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남쪽 항구도시에서 살 때 수월천의 얼음조각에 실려서 바다로 떠내려가던 개의 비명소리가 대교 밑의 물길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때 수월천에 달이 비치었고, 물과 달 사이에는개의 비명소리뿐이었다.  - P79

목수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름을 물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연옥이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는 당신의 말이 맞다고 말해줄까. 아마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목수는 아직도 그 하얀 개를 데리고 있을까.  -<손> 중에서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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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건 어쩌면 그냥 마음이 산산이 흗어지는 건지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처음에 기능을 다하는 건 몸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머물곳이 없어지니까 마음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 그러면 너라고 할 만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거야. 너는 여러 마음들의집합체 같은 거라서. -<내가 울기 시작할 때> 중에서 - P197

삼의 본명은 삼이 아니었지만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삼이 자기를 삼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남자친구를 삼이라고 부르는 건영 내키지가 않아서 웬 헛소리냐고 싫다고 거절했는데 잠이 끈질기게 주장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삼이라고 불러주었고 나중에는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 P200

얼마 뒤 우리는 헤어졌다. 아빠의 조직 검사 때문은 아니고 내가 삼에게 드라이아이스를 먹인 때문이었다. 진짜 먹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눈을 감고 입을 아, 벌린 채 아이스크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삼이 입 앞까지 가까워진 냉기를 느끼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스푼 위의 것을 덥석 삼켰다가 혀가 탈 듯한 통증에깜짝 놀라 뱉어냈다. 눈을 뜬 삼은 드라이아이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았다. 드라이아이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주변의온도에 따라 승화되어 바닥에는 축축한 습기만 남을 것이다. 더나중에는 그런 게 거기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난정말 모르겠어, 하고 삼이 말했다. 그건 당연했다. 영영 모를 거야 라고도 했다. 그건 뜻밖이었다. 그리고 삼은 양손으로 얼굴을감싸며 헤어지자고 말했다. 몇 번이나 참았다가 겨우 말한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212

삼은 마지막에 나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어째서 그 말에 모든 것이 녹는다는 생각을 했
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로 가는 버스에 앉아서 울고 말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는데 한참 말을 않자 삼이 눈치를 챘는지 혹시 우는 거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삼은 울지 말라고 하지 않고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다울고 난 다음에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삼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삼은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답을 주었는데그러지 못해서 삼에게 미안하다. - P218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영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그야말로 ‘안물안궁‘의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나는 네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네가 자라는 내내 나와의 가정 내 이권 다툼에서 늘 교묘히 우위를 점하던 네가 나와는 접점이 거의 없어 십 분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무리인 네가 나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생각이란 걸 하든 말든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응원이고 나발이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정말 어쩌라고 싶었지만, 내 인생 하나 살기도 벅차다! 하고 외치고도 싶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보여준 하해와 같은 아량에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같은 표정을 짓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일> 중에서 - P235

"근데 있지."
"어."
"나도 사랑 같은 게 뭔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너는 너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해?"
그렇게 묻는 순간 나는 영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알 것 같았다. 나는 영지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영지의 입에서나올 대답이 뭔지는 몰라도 내가 들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얼른영지의 입을 막았다. - P247

"그리고 일찍일찍 다녀요. 말만한 처녀가."
나는 차라리 남자로 오해받는 편이 나았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 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 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 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 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공원에서> 중에서 - P261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을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냐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머리통을 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겁먹고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가 뒷머리를 낚아채 쓰러뜨려서는 운동홧발로 마구 짓이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적이고 싶으니까. 남자는 너도 이렇게 하고 싶었잖아, 힘만 있었으면 이렇게 했을 거잖아, 말하듯이 사정없이 나를차고 밟았다. 마치 우리가 합의하에 링 위에서 서로를 때리며 싸우다가 내가 진 것처럼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것 같았다. 남자가계집년이 어디서 까부냐고 침을 뱉고 떠난 다음에야 나는 공원의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쫓아와 모든 걸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 P267

지독한 악취가 나를 싸고도는 것 같았다. 악취는 그날 남자가뱉은 침이 내 얼굴에 떨어졌을 때, 그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아주 끔찍한 냄새였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것은 절대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처럼 내 몸에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리며 저사람한테서 악취가 나, 하고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 P269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이야기를 아이한테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이 공원에서모르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도 되나. 아주 두들겨맞았다고 말해도 되나. 그야말로………… 인간적인 폭행이었다. 그때문에 자다가 벌떡벌떡 깬다고 말해도 되나. 티브이를 보며 태평하게 웃다가도 문득 몸서리가 쳐진다고 말해도 되나. 애인을 더는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해도 되나. 사실은 그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건 또 어떨까. 아이는 한창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고 해야할 나이가 아닌가. 세상은 굉장히 끔찍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줘도되나.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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