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그것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찾아서
(아사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메이 옮김, 봄날의책, 2017)

왜 화를 내서는 안 되는가? 왜 아픈 사람은 미안해하고, 사력을 다해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써야 하는가? 아서 프랭크는 이런 환경과 조건이 환자가주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거래‘의 일종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돌봄과 도움의 대가로 환자에게 명랑함과 용감함을 바라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누구나 아플 수 있다는 점, 누구도 평생 건강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다. 질병이 일탈의 상태가 아니라 건전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환자에게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아서프랭크는 말한다. 병듦과 고통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은유적 관념, 노화·질병·장애 · 죽음을 은폐하고 외면하는 사회적 시선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 P254

질병에 시달려본 사람은 자신도, 세계도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안다. 아서 프랭크 역시 아프면서 자신이 주변을 천천히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격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때로 반짝이는 햇살을 느끼고 비를 맞으며 몸의 경이로움을 인식했다. 배우자의 돌봄에 감사함을 느끼고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돌봄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곰곰 되새겼다.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의 경험도 소중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는 데서 질병이라는 것이 환자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 P254

아서 프랭크는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되고, 남의 인정을 받을 때 고통은 줄어든다고 말한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양쪽 모두 인생의 어떤 기회를 얻거나 잃어버릴 위험에 직면한다. 놀라운 점은 질병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한쪽 측면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모두 죄책감 안에 가두는 일은 위험을 지속하는 일이며 돌봄의 핵심은 ‘너그러움‘에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자신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다. 너그러움은 종교적 자비심과도 연결된다. - P255

페미니즘 제2물결로 자기 몸의 통제권을 가져오려는 운동을 펼치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룹인 ‘보스턴 여성건강서 공동체‘는 1970년 《우리 몸우리 자신》이라는 역사적인 책을 남겼다. 지은이들은 몸의 정치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부장제가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여성의 몸을 다시 여성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는 기획을 선보인다. 
그들의 목표는 의학적 전문 지식을 자원 삼아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아서 프랭크는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환자가 자기 몸에 관한 담론의 주도성을 갖고 다양한 질병과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그는 아픈 몸은 침묵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 P256

 ‘몸‘이란 개념은 구체적 분석 대상이지만, 환자들의 이야기는 의학적 몸이 아니라 ‘경험된 몸‘lived body, ‘체현된 몸‘embodied body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접근은 몸에 대한 지식을 창출하는 권력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의사는 될 순 없지만, 누구나 환자가 되는 현실에서 ‘몸의 증언‘을 기록하고 말하는 일은 지나치게 편중된 ‘의료 권력‘을 좀 더 평등하게 재구조화하는 일로도 이어진다.
‘치료‘가 빼앗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기 위해 아픈 사람들은 누구나 스토리텔러가 될 필요가 있다고 아서 프랭크는 말한다. 아픈 사람들의 상처는 몸뿐 아니라 살아온 역사와 치료 과정 속에도 남아 있다.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치유의 길로 나아가게 하며 서로를 연결한다.
- P257

-마음의 그림자, 잘 다뤄내야할 중년의 과제

영원히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아이로 살아가는 피터는그림자가 없는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를융은 ‘아이다움‘에는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문명화된 어른은 아이를 볼 때 어떤 갈망을 느낀다. 채우지 못한욕구와 필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아이에게서 그가 느끼는 묘한 감정은 성인이 가진 ‘페르소나‘, 곧 연극적인 가면에서 떨어져 나간 인격의 한 부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 P283

존슨은 어둠을 거부하고 부정할수록 내면 다른 곳에 어둠이 저장되고 축적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선 잠깐 쉬거나 의례를 갖는 것도 좋다고 한다.
까다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끝냈을 때, 힘든 일을 마치고 어두움이 올라온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림자를 내려놓지 않도록 잠시시간을 두고 적극적인 명상을 하는 등 시간을 갖는다. 창조적인일을 한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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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 그 해석과 저항을 위한 여러 갈래 길들

미러링 논란이 거듭되면서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의 혐오 발언은 발간과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어판이 나온 2016년 8월 이전부터 이 책은
‘혐오의 시대‘를 맞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비평적 담론을 촉발할 것으로 예견되었고, 실제 그러했다. - P220

버틀러는 주저 《젠더 트러블》에서 솨회적 성을 가리키는 ‘젠더‘가 원본 없는 문화적 전략이며 반복, 모방이라는 주장을 폈다. 「혐오 발언에서도 발화자가 말을 반복할 뿐, 원저자가 아님을 강조하며 말의 권력을 해체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형태의 ‘상처 주는 말‘ injurious speech을 설명하면서 혐오 발언 규제, 반포르노그래피 논증, 군대내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 국가 검열 등의 논쟁을 검토한다. - P221

‘혐오 표현‘ hate speech은 책의 핵심을 이룬다. 이는 폭력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며 차별을 실행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예컨대 반포르노 활동을 펼친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일종의 혐오 표현이며 여성을 종속적 위치에 두면서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의 권력은 효력적이지 않다"고 본다.‘ 포르노그래피가 사회적 현실을 구성할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차별·혐오적인 표현이 곧바로 상처가 되며 행위로 연결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혐오 표현이 강자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약자의 입을 막아침묵시킨다(레이 랭턴)는 대부분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 P221

왜일까. 먼저 버틀러는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 등상처 주는 말을 하는 이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력을 가졌다는전제를 해체하려 한다. 말하는 자는 그 발언의 창시자가 아니며 말은 항상 통제할 수 없다. 말의 의미는 끝없이 변화•탈선하고, 청자의 개입에 따라 발화자의 의도와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혐오 표현이 고통을 야기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상처주는 말‘이 ‘저항의 도구‘로 바뀔수 있는가능성에 더욱 집중한다. - P222

혐오 표현에 대한 국가 개입과 법적 규제는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안이다. 버틀러는 원칙적으로 혐오 표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한다. 
법의 호명에 신성한 권력, 마법 같은 효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혐오 표현의 법적 규제는 수신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르르 맞받아치는 말도 함께 금지할 수 있다. 정치적 중립이 의심스러운 국가의 판결은 소수자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법의 말, 국가의 발언, 공적 영역의 목소리는 주로 주류 쪽의 언어나 견해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입법 의도는 국가에 의해 불가피하게 오용된다"고 그는 말한다." - P222

그 대신 버틀러는 ‘맞대응‘을 제안한다. 혐오적인 발언에 저항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 맞받아치기, 전복하기, 해체하기 등이다. ‘퀴어‘라는 욕설을 동성애자들이 해방적으로 바꿔버린 것이 한 예다(우리나라에서도 ‘잡년행진‘ 등의 사례가 있다). 주변화된 비주류는 말을 재맥락화하고 재구성해 혼돈을 만들고 개입하며 ‘기원‘을 해체할 수 있다. - P222

그럼에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혐오 집단의 위협은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력적(마리 마츠다)일 수 있는 까닭이다. 언어를 재가공해서 저항하고 전복하는 일을 ‘민주적 해법‘이라고 제안하는 버틀러의 사유가 엄혹한 현실에서는 너무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은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설명해주는 이론적 틀이 되기도 했지만 한쪽에서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사회학·여성학)는 이 책을 두고 ‘혐오 표현‘은 강자가 약자에게하는 정치적 폭력, 언어폭력의 맥락을 갖고 있는데, 이를 약자가 그대로 되받아치는 모습을 볼 때 구경꾼들은 ‘상호 폭력‘이라고간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베‘와 ‘메갈리안‘을 똑같은 혐1오 발화자라고 보는 이들의 시선이 단적인 예다.
ble Speech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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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홍수 속으로

나는 안달복달하는 바람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흩어지는 구름을 한동안 보았다. 강의 변형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나와 같은 종의 비뚤어진 탐욕이 실감나서였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세상을 멋대로 바꾸는 그 탐욕이 거북했다. 우리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홍수와 가뭄의 대참사로 돌아올 만한 행동이다. 오염된 하구를 베번으로 조금씩 홀러들게 하는 하수처리 방식이나, 다운스의 비밀 저장고에서 지하수를 야금야금 훔치는 생수회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 P250

그러다 앞으로 일이백 년 후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러다강이 완전히 말라붙는 건 아닐까? 계곡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던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쩍쩍 갈라진 땅바닥만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바다가 서서히 밀려오다 끝내는 이 도시를 집어삼키며 소금기 풍기는 늪지대로 되돌려 놓으면서 소들의 시체와 우리 인간이 세상에 그득그득 채워놓고 있는 플라스틱으로 오염되는 게 아닐까? 미래의 어느 날 이곳에 서서 지켜볼 누군가의 눈앞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사막 같은 세상일까, 유독물로 오염된 바다일까? - P250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루이스의 홍수는 하나하나 축적된 행동이 결국엔 화를 자초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범람원에 건물을 짓는 일은 아무리 많은 하수관을 설계해 넣는다 해도 여전히 위험한 모험이다. 물론 비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방법을 찾는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P250

특정 씨앗의 발아를 위해서꼭 필요한 산불처럼 홍수가 파괴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집이 하수 오물로 가득 차고 책마다 주글주글 주름이 잡히고 옷이 물에 쓸리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런 긍정적인 영향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환경청조차 수긍했다시피,
우즈강의 개간은 점차 적정 수준을 넘어섰고 루이스가 기후변화의 진통을 잘 버텨내기 위해서는 일부 땅은 강에게 내주어야한다. - P251

나는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우연히 우즈강의 둑에 천변저류지washland 를 복원하려는 프로젝트에 대해 보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변저류지란 범람한 물이 배수구와 하수구로 들어가 상점과 주택으로 흘러드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넘쳐난 물의 대기 공간 역할을 하면서 단기적으로 범람을 버텨주는 목초지를 말한다. 
농업이 점점 집약화되면서 주민들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지만 한때는 작물이 아주 풍성하게 자라서 1년에 세 차례나 활용할 수 있었다. 즉, 한여름에 건초 수확을 한 후 두 번째 자라난 풀로는 소가 가을까지 뜯어 먹고 또 그 뒤에는 양이 겨울 폭풍이 닥칠 때까지 뜯어 먹을 수 있었다. - P251

어쨌든 서식스 대학의 생태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짜낸 이 복원 프로젝트는 이곳의 야생 목초지를 복원하여 강 하류의 범람 위험성을 낮추는 동시에 내가 셰필드 파크 인근에서 봤던 수레국화, 칵풋, 왕바랭이, 김의털, 요크셔포그 등의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풀들이 다시 강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려는 구상이었다. - P251

 소소하지만 어딘지 기분을 아주 좋게 해주는 계획이었다. 경제적인 동시에, 넉넉한 마음이 배어 있어 다시금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인간이 어쩌면 이 세상에 잘 적응해볼 수도 있겠다고. 여기저기 깎아내다 결국엔 그 기반이 내려앉아 전부 다 무너지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 P252

갑자기 활기가 넘치면서 허기가 몰려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돌아 내려왔다. 창가에 빵과 자전거 한 대, 제라늄화분, 물레를 쌓아둔 별난 식료품점에서 피자 한 조각과 딱총나무 꽃의 향이 나는 달달한 청량음료를 점심거리로 사 들고 철로 변으로 내려가 햇볕을 쬐며 피크닉 분위기를 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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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의 피가 수은 중독을 넘어 아예 수은으로 변하기라도 한듯 극심한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갑자기 지난 몇 달이 버겁게 느껴져 눈물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전엔 내가 도망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해봤지만 지금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P196

 다시 숲으로, 그 마법 세계 같은 울창한 안드레데슬레지로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고, 내 이름도 모르는 그곳으로. 왜 과거는 늘 이런 식일까. 왜 기억은 흐려지지 않고 자꾸만 맴도는 걸까. 왜 가끔씩 이렇게 무턱대고 떠올라서 지금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을, 내 육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 공간을 그저 신기루처럼 느껴지게 하는 걸까. 과거는 붙잡을 수가 없다. 되돌아갈 수도,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을 수도, 그렇다고 무심하게 툭툭 떨쳐버릴수도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것인지.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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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 ㅡ 머리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책이라도 막상 읽어 보면 재미있고, 흥분되고, 심지어 감동까지 줄 수 있다는 사실 ㅡ 은 예술이 대뇌 활동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 P44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문명이 지속되는 한 우리에게는 가끔씩 여가가 필요할 것이므로 가벼운 문학이 놓일 지정석은 언제나 있을 테고 박학다식함이나 지적 능력보다 훨씬 생존력이 뛰어난 순수한 기능이나 타고난 은총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P45

 같은 취지로, 작품의 수준을 판단하는 문학적 잣대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면 버지니아 울프나 조지무어의 전집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데 기꺼이 한 표를 던질 것이다. - P46

-책방의 추억

하지만 우리 책방 제2의 수입원은 뭐니 뭐니 해도 대여 문고였다. 오로지 소설책 500~600권으로만 구성된 대여 문고는 여느 대여 문고처럼 "예치금 없이 2페니"만 받고 책을 대여했다. 책 도둑들이 이 같은 대여 문고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책방 한 곳에서 2페니를 내고 책 한권을 빌리고 나서 식별표를 떼버린 후 다른 책방에 1실링을 받고 팔아먹는 짓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범죄다. 그럼에도 책방 주인들은예치금을 요구해서 대여 문고 이용자 수를 떨어뜨리느니 차라리 어느 정도의 책은 도둑맞는 게 (우리 가게에서는 한 달에 열두 권 정도를 잃어버렸다.)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았다. - P50

 그리고 한가지 놀라운 점은 영국의 고전 소설가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디킨스, 새커리, 제인 오스틴, 트롤럽 등을 대여 문고 도서 목록에 넣는 일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들을 대여해 갈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세기 소설을 힐끗 쳐다보고는 "흠, 엄청 옛날 거네!"라며 외면한다. 

하지만 디킨스 작품을 파는 일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파는것만큼 언제나 무척 쉽다. 디킨스는 사람들이 항상 읽을 의향이 있는 작가의 한 명인지라, 헌책방에서는 성경과 마찬가지로 꽤나 유명하다.  - P50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 책의 인기가 점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출판사들은 이삼 년마다 이런 문제로 마음을 졸인다. 단편 소설이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읽을 책 한권 추천해달라고 대여 문고 담당자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우리 문고의 한 독일 고객이 즐겨 하는 표현처럼 한결같이 "단편 소설은 말고요."나 "짧은 이야기는 빼 주세요."다. 이유를 물어보면 종종 단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에 익숙해져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 싫기 때문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그들은 첫 장 이후부터는 많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장편 소설에 몰입하기를 더 좋아한다. - P50

그럼에도 나는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단편 소설 대부분에는 생기와 가치가 철저히 결여돼 있다. 그 정도가 대부분의 장편 소설들보다 훨씬 더하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단편 소설은 충분히 인기가 많다.
D. H. 로렌스의 단편 소설은 그의 장편 소설만큼 인기가 많다. - P53

 진정으로 책을 사랑했던 때가 있긴 했다. 최소 오십 년은 된 책의 모습과 냄새와 감촉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시골의 경매장에서 단돈 1실링을 주고 책 한 무더기를 살 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예상치 못하게 구입한 책에는 독특한 운치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18세기 시인들, 고지명 사전들, 지금은 거의 잊힌 소설 희귀본들, 1860년대 여성지 제본판들이 그러하다.  - P52

하지만 책방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책을 더 이상 사지않게 됐다. 한 번에 5000 혹은 1만 권 정도의 책이 쌓여 있는 장면을 보다 보니 책이 별볼 일 없어졌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물론 요즘에도 이따금씩 책을 사긴 하지만 빌려 볼 수 없을 때뿐이다. 
그럼에도 쓰레기 같은 책은 결코 사지 않는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나는 더 이상 끌리지 않는다. 오래된 책을 보면 편집증 환자 같은 손님들과 죽은 금파리들이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금방 연상되기 때문이다. - P52

-작가와 리바이어던

물론 정신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것이 사회주의자들과 좌파들 전반의 특수한 현상이라거나 그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퍼져 있는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어떤 특정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문학적 진실성이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 투쟁의 영역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와 개성주의 같은 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실 주의로 끝나는 단어는 그 단어만 들어도 선전의 냄새가 풍긴다. 집단에 대한 충성은 필요하지만 문학이 개인의 산물인 한, 문학에는 독이 된다. 집단에 대한 충성이 문학 창작에 영향을,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것이 허용되는 순간 창의성은 왜곡되고 사실상 고사한다.
- P84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이" 모든 작가들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이미 앞에서 말했듯 오늘과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와 거리를 둘 수도 없고 두어서도 안 된다. 

나는 정치적 충성과 문학적 충성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지금의 방식보다 더 선명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리고 마음에는 안 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을 기꺼이 한다고 해서 대체적으로 그런 일에 따르는 신념까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 P85

 작가가 정치에 참여할 때는 한 명의 시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참여해야지 한 명의 작가로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 예민한 작가라는 이유로 보통 정치의 지저분한 현실을 회피할 권리가 작가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작가도 바람이 새는 강연장에서 강연을 하고, 길바닥에 분필로 무엇인가를 쓰고, 유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선거 운동도 해 보고, 전단지를 나눠 줘보기고 하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내전에라도 참전해 싸울 각오도 돼 있어야 한다.  - P85

자신이 속한 당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하든 상관없지만, 자기 당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만큼은 절대 해서 안 된다. 자신의 글이 자신이 속한 당과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고자 한다면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당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일련의 사고 과정이 자신의 생각을 혹시 이단으로 이끌지 모를까 하는 걱정으로 포기해서도 안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비정통 사고를 감지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이십 년 전에는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작가로 의심받는 것이 작가에게는 나쁜 신호였듯, 요즘에는 반동적인 성향이 있는 작가로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나쁜 신호일 수 있다.
- P85

갈등의 시기를 살아가는 창작 작가라면 자신의 삶을 두 영역으로 분리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패배주의적이거나 경솔한 짓처럼 비칠지 모르지만 이것 말고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상아탑에 스스로를 가둬 둔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작가가 주체적으로 당의 기구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은 작가라는 자아의 파괴를 부른다. 우리는 이 딜레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정치가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품격을 낮추는 일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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