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요?"
방을 둘러본 게드는 마법사의 눈으로 바닥에 깔린 돌들 중하나를 잡아냈다. 다른 것과 똑같이 거칠고 습기로 축축한, 무겁고 모양이 일정치 않은 바닥돌이었다. 그러나 게드에겐 그것의 힘이 느껴졌다. 그것이 큰 소리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게드는 숨이 탁 막혔고 잠시 동안 욕지기가 일었다. 그 돌은 이 탑의주춧돌이었다. 이곳이야말로 탑의 중심부이며, 몹시, 몸서리칠정도로 추웠다. 그 무엇도 이 작은 방을 따뜻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돌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해묵은 무시무시한 넋이그 속에 갇혀 있었다. 게드는 봤다 못 봤다의 대답도 없이 그저서 있기만 했기에 이윽고 세레트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흘끗 던지곤 돌을 가리켰다. - P187

"저게 테레논이에요. 그토록 귀중한 보석을 이렇게 깊고 깊은보물 창고에 처박아 둔다는 게 이상한가요?"
게드는 여전히 대답 없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세레트는 게드를 시험하려 한 듯했다. 그러나그 돌을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한다는 건 그 돌이 어떠한 돌인지전혀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할 만큼 충분히알지 못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나에게 이것의 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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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 쏜살 문고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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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 가장 기억에 남는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하여


  이 책은 조지 오웰이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산문집이다.  대부분의 글들이 책, 작가와 관련이 있거나 자신의 경험이 깊게 녹아들어 있는 글이라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작가 조지 오웰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책이나 작가에 관한 한 조지 오웰은 상당히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지만 약간의 위트를 가지고 글을 풀어내고 있다.  


  우선, 표제작인 '책 대 담배'에서 작가가  한 해 동안 책에는 약 25파운드, 담배에는 40파운드 정도의 돈을 썼다고 했으니 책보다는 담배에 훨씬 많은 금액을 썼다는 계산을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애연가이니만큼 책과 담배를 비유하여 설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년 출간되는 책을 추정치로 하여 한 사람이 1년 동안 평균 3권 정도의 책을 산다고 계산해보면 고작 1 년에 책에 들이는 돈이 1파운드 정도라는 결과도 보여준다. 대영제국인데... 흠, 이 정도면 심히 걱정스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책을 읽지 않는 현상의 원인을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 두지 않는다.


  과거나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책 소비가 계속해서 저조하다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현상이 적어도 독서가 개 경주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것, 그리고 펍에 가서 한잔하는 것보다 재미가 없어서이지 돈이 훨씬 많이 들어서 ㅡ구입해서 읽든 빌려서 읽든 ㅡ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13)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결국 책을 재미없게 만든 작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매우 맞는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책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개탄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구나...!  계속해서 '서평가의 고백'에서는 한 해 백 편 이상의 서평을 쓰는 사람들의 고충과 현실을 묘사하였는데 또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써야 할 서평이 너무 많아서, 혹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여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50 페이지 정도를 읽어야 서평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서평을 쓰기도 하고, 책 같지도 않은 쓰레기를 들여다보며 "맙소사, 이런 걸 책이랍시고." 하는 절규를 내뱉는 이러한 작가, 또는 작가이자 서평가의 찬사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기 전까지 대부분의 책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평론이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써진다면 열에 아홉은  "이 책은 하잘것 없다"일 것이고 평론가 당사자의 반응 역시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가 없고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의 평론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18)



  서평가와 작가를 두루 거쳐본 오웰이 하는 말이니 거의 백퍼센트의 확률로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럼 책 살 때 무엇을 참고해서 책을 사야하나... 요즘은 서평이 너무 일반화되어 있어서 책 사기 전에 당연한 순서로 미리 읽어보게 된다. 서점에 가서 옛날처럼 한 권, 한 권 다 들쳐보고 내 맘에 들어오는 내용일 때만 산다면 지금처럼 미친 듯이 책을 들이는 일은 줄어들까. 생각해보면 그땐 오로지 나의 흥미와 감을 믿고 샀었다. 물론 실패의 경험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순식간에 책꽂이의 빈자리가 줄어드는 마법을 부리지는 않았었다.   




  오웰 자신의 작품을 어느 쪽에 두었는지 예로 들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은 가는 바다. 자신의 책은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 아닌 것이다. 그럼 어느 쪽에 속할까? 꽤 훌륭한 책일 것이다!  아무튼 세상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책들이 많이 있으며,  "문명이 지속돠는 한 우리에게는 가끔씩 여가가 필요할 것이므로 가벼운 문학이 놓일 지정석은 언제나 있을 테고"(45) 그래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 필요한 것이라는 작가의 피력에 일견 동의를 하고 말았다.  파렴치하고 무례한 많은 손님들, 과다한 근무시간, 끔찍할 정도로 추운 겨울의 책방을 생각하면 넌덜머리가 나서 책방은 결코 운영하지 않을 것이고 또 오래된 책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더 이상 끌리지 않으며 요즘에도 이따금 책을 사긴 하지만 빌려볼 수 없을 때 뿐이고 더 이상 쓰레기 같은 책을 결코 사지 않는다(책방의 추억)니 그 또한 -너무 단정적으로 말해서 살짝 빈정이 상하긴 하지만 - 찬동할 수 밖에.  이렇게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작가의 태도는 내가 생각해도 꽤나 설득력이 있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 작가의 적은 작가! 뭐 이런 논리가 성립되는 것인지... 책에 대해서도 작가, 서평가, 책방의 추억 등등 모두 비판적이기만 한데 작가는 그럼 왜 글을 쓰는 것인가?




  그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나는 왜 쓰는가'에서 간단하게 나마 설명해 놓았다. 오웰이 자신이 대 여섯살 무렵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습작기까지의 기간, 그리고 첫 책이었던 <버마 시절>을 출간하기까지의 배경을 주욱 설명한다. 



  내가 굳이 이런 배경 설명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모르고는 그 작가의 글쓰기 동기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쓰는 글의 주제는 작가가 살아가는 시대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ㅡ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혼란스럽고 혁명과 같은 시대에는 ㅡ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작가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 특정한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된다.(58)



  작가가 글을 쓰는 네 가지 중요한 동기를 제시하는데,

  1. 온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거나 사후에 기억되고 싶거나 어렸을 때 자신을 막 대했던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다는 등등의 욕구.  이것이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것은 사기와 다름 없다는 것.

  2. 미학적 열정. 외분 세계의 아름다움, 또는 단어와 단어의 올바른 배열이 주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려는 열정 등등.

  3. 역사적 충동.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찾아내 그것을 후대를 위해 보존하고 싶은 욕구 등.

  4. 정치적 목적. 정치적 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한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쓸 때. 정치적인 편향이 없는 책은 이 세상에 단 한권도 없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 중 앞의 세 충동이 네 번째 충동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웰이 말하길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화려하고 기교를 한껏 부린 책을 썼을지 모르고, 또한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버마에서의 제국 경찰 노릇을 5년간 하면서 일종의 팸플릿 작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기에 권위에 대한 혐오감이 커졌고 생전 처음 노동 계급의 존재를 완전히 아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의 등장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결정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싸우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6년과 1937년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미학적, 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는, 예술적 글쓰기로 만드는 것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한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쓸 때 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고 말 테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폭로하고 싶은 거짓과 관심을 둬야 할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책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최우선 관심사는 독자들이 내 생각을 듣게 하느냐다. 그러나 미적 경험이 없다면 책을 쓰는 일은 물론이고 장문의 잡지 기사를 쓰는 작업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63)



  선전물 한 장을 쓰더라도 미적 경험을 중시하였고 노골적인 선전글을 쓸 때조차 전업 정치인이 본다면 관련성이 부족한 글이 상당히 많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이는 오웰이라는 작가의 진실성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카탈루냐 찬가>에서 작가의 이러한 진실성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누명을 쓰고 명예를 훼손 당한 일을 참지 못한 오웰은 작품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될 여러 챕터(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잘 드러내는 글인데 함께 내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변호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를  포함시킴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실제 책을 읽어보면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음을 곧 알아볼 수 있으며, 스스로 한갓 보도물로 만들어버린 그 행동을 수긍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다. 나는 우연히 영국에서 극소수만 알 수 있는 내용, 즉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했다. 내가 그 사실에 분개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64)





  이 작은 책은 내가 처음 읽는 작가 조지 오웰의 글이었다.  우화적인 소설도 싫어하고 전체주의라는 말도 정말 싫어해서 아무리해도 <1984>나 <동물농장>은 책장이 펼쳐지지 않았었지만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를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책을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웰의 장미>는 나에게 여러모로 참 고마운 책이 됐다.  페미니즘과도 맞닿아 있는 작가의 책을 보면서 오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다른 책으로 계속해서 확장되는 독서 경험을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 잘 만들어진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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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 - 새로운 길을 낸 여성들의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한 세계
이유진 지음 / 나무연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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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 이유진, 나무연필, 2021


  나처럼 한정적인 독서(주로 소설, 에세이를 읽는)를 하는 사람이라면 독서의 지평을 넓히는 책(특히 페미니즘, 여성학)으로는 꽤 도움이 될 책이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이지만 잠시 잠깐 길을 잃은 사람(여성학에 대해 좀 아시는 분)보다 전혀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데 길이 보이지 않을 때(나 같은 사람) 저 멀리서 보이는 '등불', 혹은 '등대처럼'이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렇다.  전혀 모르는 길을 가는데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할 책이 되었다. 소설이나 에세이 외에 요즘 나의 주된 관심사는 페미니즘.  그런데 이쪽은 정말 1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적인 여자 무리"들의 이름은 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정도의 정보는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이 책은 '1장 어떤 여자들에 대하여:지성은 여성의 것', '2장 어떤 여자들을 위하여:말,몸,피,신,그리고 페미니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2장 목차만 훒어도 페미니즘의 역사를 약간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 일단 이 책은 반납을 해야하니까 1장에 등장하는, 작가가 말하는 우리 "지적인 여자 무리"들의 이름이라도 남겨놔야 한다. 


  나혜석, 하야시 후미코, 버지니아 울프/연단에 오를 권리를 위해 싸우다가 단두대에 오른 올랭프 드 구주/말이 필요없는 여성 대법관이자 시대의 아이콘이 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시몬 베유/냉소적, 열렬한, 야망적이기까지 한 수전 손택/<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작가 에이드리언 리치/클라라 슈만/거다 러너/수전 브라운 밀러/마사 누스바움/바버라 에런라이크/록산 게이/멜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등이다.


  처음 읽을 땐 많은 것 같았는데 막상 적고 보니 그리 많은 거 같지 않다.  그런데 그들의 책까지 적으면 목록이 어마무시하게 늘어난다. 뭐부터 읽어야할지 벌써 막막하다. 읽어야 할 책은 늘 끝이 없다 정말...!(머리 나빠서 금방 잊는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

  1장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책들도 소개되어 있는데 당연히 기록해 두었다(사진으로 찍어서).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참 큰일이다.  2장에서는 새로운 책들이 또 대거 등장하니 말이다.  2장은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다양한 영역별 페미니즘에 대한 소개라고 할 수 있다. 혐오 표현, 사고 파는 감정 노동으로서의 사랑, 한국 사회 담론전의 최전선에 있는 여성의 몸과 문화 정치학의 측면에서 재 사유하게 만드는 월경, 질병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겪는 이와 돌보는 이 사이의 목소리들을 기록한 여러 저작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남성 중심적 권위에 맞서는 여성 종교인들, 특히 신학과 불교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을 실현하려한 여성들의 작품들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생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지금까지 "여자들을 위한 세계는 없었다. 그 가운데서 읽고 쓰고 나아간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금기와 금지를 넘어 읽으며 썼고 닫힌 문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린 이들이었다는 것이" 이 책에 실린 등장인물들의 하나의 공통점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이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고 말한 록산 게이처럼 나도 한발짝 앞으로 내딛어 보고 싶어진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나를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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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 장 사라진 여인

예전에 사귀던 (아니, 사실은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같이 들판을 걷다가 이별한 남자가 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순간 그는 말했다. 우리 사이가 서로 평행선으로만 뻗은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고. 그에게는 그것이 우리 관계의 본질인 것 같았지만 그 평행한 길이 우리의 애매했던 운명을 분명히 한 것인지 괜히 둘러대는 얘기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 P263

그의 이름은 마틴이었다. 그나저나 주책스럽게 마틴은 또 왜 떠올랐을까. 나는 빗속의 고양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억의 습지대에 거북하게 묻어둔 이야기였는데 실연당하며 비운의 여인이 되었던 그 일을 내가 뭐하러 끄집어냈을까.  - P263

그러고 보니 그 일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그 순간 내가 들어서던 들판이었다. 개간이 되어 하수구가 십자로 깔리고 수문들이 설치된 그 들판은 겨울이면 도랑에 수은 같은 물이 흐르지만 그 한여름 무렵에 찾은 도랑은 불쾌하고 칙칙한 녹색을 띠면서 습지대 특유의 안개를 피워 올렸고 낮은 깍깍 소리가 아니라 꽥꽥 소리를내며 우는 낯선 침입자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 P264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투신한 곳이 바로 이곳, 다운스 중간의 저지대였다. 느닷없이 참담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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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죽음의 모습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는가

1929년에 파리의 15구에 있는 병원에서 몇 주를 보낸적이 있다. 창구 직원들은 평소대로 내게 고문과 같은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그들은 입원을 허가하기까지 얼추 이십 분 동안 내게 수많은 질문을 했다. 라틴계 국가에서 서식을 작성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말하는 질문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 것이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 며칠 동안 나는 열씨로 잰 체온이 화씨로 몇 도가 되는지 몰랐지만 체온이 화씨 103도 정도였고, 면담이 끝날 때쯤에는 두 발로 서 있기가 조금 힘들었다. 내 뒤로는 체념한 듯 보이는 환자들 무리가 색이 들어간 손수건으로 싼 꾸러미를 들고 면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 P88

질문 다음은 목욕이었다. 감옥이나 구빈원에서처럼 신입환자들이라면 무조건 거쳐야 할 단계였다. 옷을 벗은 후, 깊이가 13센티미터 정도 되는 미지근한 물속에서 몸을 덜덜 떨면서 몇 분을 앉아 있다가 나오자 리넨 환자복과 짧은 파란색 플란넬 가운이 주어졌다. 슬리퍼는 내 발에 맞는 큰 것이 없다면서 주지 않았다. 그다음 나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P88

때는 2월의 어느 밤이었고 나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200야드쯤 떨어진 병동으로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병원 정원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누군가가 랜턴을 들고 비틀대며 앞장서고 있었다. 자갈이 깔린 통로에는서리가 내려앉았고 바람이 세게 불어 맨살 종아리를 덮고 있는 환자복이 펄럭였다. 병동 안으로 들어서니 묘하게 익숙한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밤늦게야 알게 됐다. 병동은 세로로 길었으며 천장은 좀 낮았고, 조명은 어두웠고, 웅얼거리는소리가 가득했다. 병상은 세 줄로 놓여 있었는데 충격적이게도 병상 간의 간격은 붙어 있다시피 할 정도로 좁았다. 똥 냄새와 약간 달짝지근한 냄새가 섞인 악취가 진동했다.  - P89

 그 두 사람이 내게 보인 비인간적인 태도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각인돼 있다. 병원의 공중 병동에 입원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의미에서 환자가 앞에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의사에게 치료를받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내 몸에잔 여러 개를 붙이고 난 후 물집이 잡히면 물집을 터뜨리고는 다시 유리잔을 붙이는 것뿐이었다. 잔 하나하나에서 디저트용 숟갈 하나 분량의 검은 피가 나왔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모욕감, 역겨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 P90

X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처음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 다양하고 모순된 일련의 처치를 받았는데 나는 이 점이 이해가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이 의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아니거나 의학적 지식을 늘리는 데 도움이될 만한 것이 아닌 한 치료는 좋든 나쁘든 아주 조금만 받는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새벽 5시면 간호사가 와서 환자들을 일일이 깨워 체온을 쟀지만 씻기지는 않았다. 혼자 씻을 수있는 상태면 혼자 씻었고, 그렇지 않으면 걸어 다닐 수 있는환자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병상용 소변기와 찜 냄비라는 별명이 붙은 역겨운 병상용 대변기를 치우는 일 역시대부분 환자들 몫이었다. 
8시에는 군대식 수프라 부르는 메뉴가 아침 식사로 나왔다. 가느다란 채소와 눅눅한 빵 조각이 둥둥 떠 있을 뿐이었지만 이름대로 수프는 수프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키가 훤칠하고 근엄하게 보이는 검은 턱수염을 기른 의사가 회진을 했다. 인턴 한 명과 의대생들 한 부대가 의사를 따라다녔다. 병동에는 나를 포함해서 환자가 예순 명 정도 됐고 이 의사는 다른 병동의 환자도 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P91

내 병상에서 약간 떨어진 병상에는 간경화를 앓고 있는57번 환자(57번이 맞을 것이다.)가 있었다. 우리 병동 환자들 모두가 이 환자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환자가 가끔씩의학 강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그 키 크고 근엄한 의사가 병동에서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는 했다. 
그들은 나이든 57번 환자를 소위 환자운반차에 태워 병동 한가운데로 데리고 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의사는 이 환자의 환자복을 배 위쪽으로 말아 올린 후 환자의 배에서 튀어나온 부분(내 추측으로는 그 부분이 병든 간인 듯했다.)을 손가락으로 눌러 팽창시키고는 와인을 마시는 나라사람들이 알코올중독 때문에 이런 병에 흔히 걸린다고 진지하게 설명을 하곤 했다. 
여느 때처럼 의사는 환자에게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미소도 전혀 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 같은 것을 결코 하지 않았다. 꼿꼿이 선 채 매우 근엄하게 강연을 이어 가는 의사는 중간중간 피폐해진 환자의 몸을 두 손으로 잡고서 마치 아녀자들이 밀가루 반죽을 밀대를 굴리듯 환자를살짝살짝 앞뒤로 밀곤 했다. 57번 환자는 이런 식으로 취급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 P94

어느 날 아침, 구두수선공인 환자가 내 베개를 확 잡아 빼나를 깨웠다. 간호사가 오기 전이었다. "57번!"이라고 외치면서 머리 위로 양팔을 머리 위로 휙 들어 올렸다. 병동에는 전구가 하나밖에 없었지만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됐다. 
57번 노인 환자는 몸을 구겨서 모로 누워 있는 듯했다. 내 쪽을 향한 얼굴이 병상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사망 시간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지난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간호사들이 와서 그 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무덤덤하게 전해 듣고는 곧장 자기 일들을 하러 갔다. 한 시간도 더 지난 후에 다른 간호사 두 명이 군인처럼 나란히 줄을 맞춰 저벅저벅 발소리를내며 병동으로 들어와서는 시신을 병상 시트로 싸맸다. 시신은 그날 늦게야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 사이 날이 좀 더 밝아져서 57번 환자를 더 잘 살펴볼 수 있었다. 그를 잘 보려고나도 아예 모로 누웠다. 신기하게도 죽은 유럽 사람을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죽은 사람들을 그전에도 여럿 봤었지만 거의가 다 아시아 출신 사람들이었고
그 전에도 험하게 죽은 사람들이었다.
57번 환자의 눈은 여전히 떠져 있었고 입도 벌어져 있었으며, 작은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P96

그의 창백한 얼굴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얼굴은 그 전에도 창백했었지만 지금은 병상 시트보다 약간 짙은 정도로 창백했다. 작고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트에 실려 해부실 시체 안치대 위로 던져 버려질 이 같은 역겨운 쓰레기도 연도 기도의 대상이 되는 자연사의 한 사례로 여겨지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나는 이십, 삼십, 사십 년 후 우리를 기다리는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 P96

 자연사는 얼추 더디고 역한 냄새가나고 고통스러운 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자연사는 심지어 집에서 벌어지느냐 공중시설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이 환자처럼 촛불이 꺼질 때처럼 깜박거리다가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는 가련한 노인은 임종하는 사람 한 명 없을 정도로 보잘것 없었다. 그는단지 숫자에 불과했고 의대생들 수술용 칼의 실험 대상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곳에서,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죽어 가야 하는 추악한 현실이란! 병원은 병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병상 사이에 칸막이도 없었다.  - P96

가렁 한때 나와 발을 맞대고 지내던, 병상보가 몸에 닿기만 해도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그 작은 환자를 상상해 보라! 감히 말하건대 "오줌 나온다!"라는 말이 기록상 그의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은 그런 일에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적어도 그런 것이 표준화된 반응이다. 그럼에도 죽어 가는 사람도 죽기 하루 이틀 전까지는 정신이 멀쩡한 경우가 흔하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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