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이미 일흔넷이었으므로 고희연이라고 주장하기는다소 애매했지만, 부모님에게는 소정의 목적이 있었다. 오빠들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 사는 먼 친척들까지 평양으로 불러 모아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이었다. 칠순 잔치는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평양으로 갈 통행 허가증을 얻기 위한 ‘공식‘ 사유였다. 정년퇴직후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간부가 된 아버지는 칠순 잔치를 당신이건강할 때 해야 할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다. 6.25 전쟁 전에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갔다가 차별과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북송 사업으로 북에 넘어간 친구들도 초대해야 한다며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 P70

아버지는 북송 사업의 선봉대 역할을 자처했다.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동포 사회에서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인 활동가였다.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미화해서 타인에게 이주를 추천하는 무모함을 혁명적 임무라고 믿고 수행했던 것이다. 자기 자식들 손에까지 편도 표를 들려서 북한에 보낸 몇 년 후, 그 나라에 방문해서야 누구보다 북송 사업의 실태를 잘 알게 된 사람이었다.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뿐더러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을 것이다. 세 아들들과 가족들이 ‘인질‘이 되고야 말았으니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훈장을 달고 활짝 웃는 부모님의 얼굴이 피에로 같다고 생각하며 나도 웃었다. - P71

2001년 1월, 미국 뉴욕의 뉴스쿨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연구학과에 입학한 나는 가족이 모두 모이는 평양의 일상을 촬영하기 위해 가을 학기 휴학 절차를 밟았다. 9월말에 뉴욕에서 오사카로 날아가, 10월에는 조총련의 가족 방문 투어로 부모님과 북한을 방문해 평양에서 몇 주를 보낸 다음,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 연내에대학원으로 복학할 예정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촬영 생각으로 가득했다. 세 오빠와 그 가족들을 촬영할 때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폐를 끼치지 않을지 상상력을 동원해, 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촬영 과정을시뮬레이션했다. 그런 가운데 전 세계를 경악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P74

"안녕, 영희.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파일이 학생비자 신청을위해 대사관에 제출할 서류예요. 불안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요.
당신은 우리 대학원의 정식 학생이고,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도학생의 배울 권리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만약 미국에오기 위한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접 주일 미국대사관에 요청할 거예요. 이 건에 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우리에게 맡겨요. 가족을 만나러 간다면서요. 여행 잘해요!"
나고 자란 일본에서도 이렇게 따뜻한 격려를 받은 적은 없었다. 대통령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대범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P80

2001년 10월, 드디어 아버지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평양에 모였다. 평양에 사는 오빠들과 친척들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 사는 먼 친척에 지인까지 찾아왔다. 명목상 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100명을초청한 옥류관 행사 비용 25만 엔은 부모님이 지불했다. - P85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어른들이 그렇게본심과 명분 사이를 오가지 않을까. 본심 속에도 명분이 있고 명분도 본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다면체라 여러 측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평범해 보여도 인간이란 그러한 생명체인 것이다. 훈장을 단 아버지를보면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혁명을 외치는 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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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부 기관의 검열을 거쳐 일본 부모님 손에도착한 오빠들의 편지에는 ‘영광스러운 조국과 경애하는 김일성수령님의 사랑 아래 면학에 힘쓰고 있습니다‘라는 추상적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빠들의 진심을 들을 방법은 없었다.
언젠가 평양에 방문했을 때 오빠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다른 평양시민에 비해 대우를받았어?"
"하루에 계란 하나는 먹었나? 그 당시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배가고파 쓰러질 것 같아서 공부가 눈에 안 들어왔다. 하루 종일 먹을 거 생각만 했지."
건화 오빠가 오사카 사투리로 대답했다. 북한 주민들의 식생활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귀국자‘들은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원주민‘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영희였으면 한 달도 못 버티지."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오빠들의 웃음이 퍼져나갔다. 나는 그 상황이 웃지 못할 코미디 같아서 그만 할말을 잃었다.


---1960년대에 북한주민들이 굶고 있었던건 이해한다 해도 아직도 굶고 있는건 이해를 해야하는건지...연일 쏘아대는 미사일은 북한주민들의 고혈이 아닐런지! - P34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며 가난한 거리의 대명사였던 이카이노에서 자라면서도 오빠들과 나는 데미그라스소스라든가 햄버그같은 요리에 익숙했다. 집에서 양식을 먹을 때는 포크와 나이프를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란 오빠들이 북한의 식생활을 견딜 수있을 리 만무했다. 특히 북송당시 열네 살이었던 셋째 오빠 건민은 매운 음식을 싫어해서 김치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그 당시에는 모르셨을테지... - P35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량 배급으로 배를 채우는 건 어림도 없는일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돈을 마련하고 물물교환을 하고 친척에게 의지하고 연줄을 써서 살아남았다. 절도와 사기도 횡행하는 가운데, 북에 친척도 연출도 없는 귀국자는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이 전부 북으로 건너가 일본과 연이 끊긴 귀국자는 실로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 P40

아이들을 북에 보냈다고 후회할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세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졸업한 다음에 건강히 일할 수
있도록,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이 웃는 얼굴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겠노라 다짐했다. 손주들이 태어나자 어머니의 결심은 신념이 되고, 다시 집념이 되었다. 무언가에 쓴 것처럼 소포를 보내고 북을방문하는 어머니에 아버지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 P41

오로지 3층 내 방에서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방에는 교과서말고는 북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 사진도 북에서 받아온 선물도 장식하지 않았다. 벽에는 뉴욕 지하철노선도를 붙이고 책장에는 해외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 잡지, 연극, 영화 관련 서적들을 채워 넣었다. 음악은 대부분 재즈, 클래식, 샹송, 영화음악, 팝송 등 서양음악이었고 일본과 한국 가요도 있었다.
2층에 올라가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고, 3층 내방에 도착하면 마치 공산권의 감시 체제를 뚫고 자본주의국가에당도한 기분이었다. 나는 2층 복도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베를린장벽‘이라 명명하고 2층을 동독, 3층을 서독이라 불렀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도 그 이름에 찬성했다. 당시 우리 중 누구도 베를린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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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카이노라고 불렸던 오사카시 이쿠노구, 어머니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재일코리안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이곳은 주민의 4분의 1이상을 재일코리안이 차지하고 있었다. 국적이나 사상과 관계없이 이곳에 사는 재일코리안의 9할은 한반도의 남쪽, 한국 출신이다. 일본 사회의 민족 차별과가난으로 고통받던 이들의 생활은 조국 분단으로 인해 더 큰혼란에 빠졌다. 북이냐, 남이냐. 모두가 이념을 따져야 했다.
정치와 떼어놓을 수 있는 일상이란 없었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 중에서 - P17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갈등이 격화되는 본국의 상황은 재일 사회에도 그대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술집이나 고깃집에서는 테이블마다 남한 지지자와 북조선 지지자가 따로 앉았고, 문득들려오는 대화의 말꼬리를 잡아 말싸움을 시작하거나 주먹다짐까지 했다. 남한을 지지하는 거류민단과 북조선을 지지하는 조총련의 대립도 심각했다. 김치 가게와 한복점이 늘어선 미유키모리 상점가를 찾는 손님들은 김치 맛보다 가게 주인의 정치 성향을 기준으로 가게를 골랐다. 상점가에 걸린 현수막에도 "죽음의 신청 ‘영주권 취소하고 괴뢰 ‘한국적‘을 조선으로 고치자!"라는 강렬한 정치적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반도는 삼팔선으로 둘로 분단되었지만, 재일코리안 사회는 거리 구석구석까지 구불구불 삼팔선이 얽혀 있었다. - P19

내 기억 속 이카이노는 여성들이다. 이카이노에 사는 할머니,
어머니, 며느리, 딸들은 제주도와 경상도, 오사카 사투리로 말했다. 뼈 빠지게 일하고 호탕하게 웃던 그녀들 뒤에는 가혹한 역사가감춰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둘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계속 파헤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 P24

사상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아버지와 꼭 한번 술을 마셔보고 싶다는 이들도 많았다. 강렬한 캐릭터의 아버지 덕에<디어 평양>은 사람들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기며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발표한 지 17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팬들이 전 세계에 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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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뜻한 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다가도 내일이면 그 거지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구걸할지도 모르는 삶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아니고 밥 딜런이 그 노래에서 한 말이다. 자신이 뭔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Like A Rolling Stone>의 배음을 지켜가는 알 쿠퍼의 오르간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 자신이 어설프게만 느껴진다면 밥 딜런의 말처럼 ‘소리를 키우도록.‘ 때로 단순히 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음반에 참여한 역사적인 키보디스트가 탄생하기도 하니 말이다. - P109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옛날 카세트테이프더미를 뒤졌더니 표지도 사라지고 케이스도 없는 2집 앨범이 나왔다. 처박아 두고도 잊어버렸던 카세트테이프였다. 조심스럽게데크에 집어넣고 플레이를 누르니 이제는 누구도 찾아듣지 않는노래들이 나왔다. <Stay>라든가 <Liberty> 같은 곡들. 춤추기에는느리고 발라드라고 하기에는 빠른 곡들. F. R. 데이비즈만의
‘Greatest Hits‘, 1980년대 초반 어두운 밤만의 ‘Greatest Hits.
그리고 I see the rising sun. This is the special day‘로 시작하는 F.R. 데이비즈식의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잊혀졌던 마을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오래된외투 주머니처럼 익숙한 골목길들,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무들, 푸르디푸른 밤하늘에 검은 그림자로 선 지붕들.
잊혀진다는 것은 물론 꽤나 슬픈 일이지만, 잊혀졌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마을은 괴기할 정도로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이다. <Long Distance Flight>를 들으며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읽는데 왜 눈물나지? 난 아직 잊고 싶지않은 이름들이 있는데...
노래는 들어보았다. F.R.데이비즈의 노래니까...

I see the rising sun. This is a special day. Driving my car already on my way. You‘re travelling in the night glidin‘ over the earth.
Long distance flight I think of her You‘re flyng high, high in the sky over the clouds, bright shooting star. You‘re flying high, high in the sky, You‘re coming back. - P117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소중한 것은 왜 지나고나서 깨닫게 되는 것일까???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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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like watching you go."
민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돌아선다. 민자에게 등을 보인 채로 걷는다. 민자는 내가 가는 걸 본다.
민자도 내가 가는 걸 보는 게 싫을 테지만 뒷모습을봐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도 있다. 웃으면서 돌아서는 건 나의 사랑 방식. 조금 더 쓸쓸한사람이 되기를 자처하는 건 민자의 사랑 방식. 민자는 내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서 먼지만큼 작아질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그걸 안다. - P122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앞으로 더 가볼 수도 있었고 언제든 뒤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다. 파도가 우리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파도에 이리저리 출렁이면서도 현희진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그런 현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도대체얘를 어떻게 때렸을까. 이렇게 몸이 작은데 어디를때렸을까. 왜 때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눈물이나서 바다에 얼굴을 푹 담갔다. 바닷물이 내 눈물보다 짤 것이라 맘 편히 눈을 헹궜다. - P134

태초에 노래를 가르쳐준 어른들이 있었다. 노래와 그들을 번갈아보며 세상을 배웠다. 그들은 내게노래를 들려주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이제는 내 노래를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안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래한다.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지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릉ㅅ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게 내가 먼저 노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노래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노래를 짝사랑할 것이다. 이 사랑을 계속하면서 점점 더 오래된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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