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봐야 할 작품

오른쪽 작품은 <나무와 여인>으로, 박수근 화백의 나목 시리즈 중 한 점입니다. 소설가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의바탕이 되었던 작품입니다. 그는 유독 나무와 여인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림의 크기를 바꾸거나 구도를 조금씩 바꾸며 반복해서 그렸죠.

*박수근, 나무와 여인, 1962

박수근 화백의 유년기를 이야기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19세기 프랑스의 농민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존경했다는 겁니다. 그의 대표작이 된 <만종>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은더할 나위 없이 유명하죠. - P145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않겠습니까?"
화가들의 삶을 공부하며 예술가들의 감수성과 어휘력에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고 로맨틱한 구혼 편지라니요. - P151

박수근은 그녀를 빨래터에서 처음 만났는데요, 그래서일까요.
그곳은 그의 작품세계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 김복순 여사를 만난 곳이니만큼, 그에게 더욱 특별한 장소였을 겁니다.
여섯 명의 여인이 냇가에 줄줄이 앉아 빨래하는 중인 이작품은 2007년 45억 2천만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낳았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불리기도 했죠.

*박수근, 빨래터, 1950년대후반 추정 - P152

박수근은 평창동판자촌에 터를 잡아 본격적인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데요, 가족과 함께 살면서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이곳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꾸려가던 시기가 화가로서는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엔 유독 여성과 나무가 자주 등장합니다. 힘든 노동을 하는 여성과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목은춥고 배고팠던 전후 시대를 맨몸으로 견뎌야 하던 우리의자화상입니다. 무겁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죠.  - P155

질감이 느껴지는데요, 그림에 나타나는 우둘투둘한 특유의 마감은 박수근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기도합니다. 그는 물감을 아주 두께감 있게 덧칠한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치 화강암 위에 그림을 그린 듯한 느낌을 주죠. 그래서 초가집의 흙벽이나, 사찰의 돌조각 등을 연상시키죠.  - P155

박수근 화백은 지인의 소개로 미군 부대에서 잡부 자리를얻게 됩니다. 다행히 크지는 않아도 꾸준한 봉급을 타게돼 가난을 조금은 덜 수 있었죠. 그러다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면 또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해 초상화도 그리기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나목》을 쓴 박완서작가와의 인연이 생기죠. 이 둘은 1951년 PX 초상화부에함께 일했습니다. 20살 박완서는 정규직 영업사원이었고 30대 후반 박수근은 비정규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박완서가 영어로 미군을 불러오면 박수근은 미군의 손수건이나 스카프에 가족, 애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 P157

1964년 국전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출품했는데요. 이시기 박수근의 몸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런 처지에 끝까지 작품 활동을 이은 것만 봐도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죠.
작품 속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4 - P163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출품작이었습니다. 그는 간경화심해져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의 가망이없었습니다. 결국 한 달 후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 눈을 감습니다. 1965년 5월 6일이었습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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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봐야 할 작품

저는 이응노 화백을 <군상>으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볼때마다 놀랍습니다. 먼저 멀리서 보고 그다음 쭉 가까이가서 봐보세요. 각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구상화된 그들이 모여 하나의 추상으로 거듭납니다. 말년 10년에 집중된 군상 연작 중 하나이지요. 한땀 한땀 그렸을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노력과 정성이 대단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그리기 시작했다는군상 연작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세상이 긍정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스며 있기도 합니다.

*이응노, 군상, 1986 - P208

서양식으로 꾸민 여성들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쳐다봅니다. 뒤인물들의 수근거림이 들리는 것 같죠. 그림에 써 있는 글은 이렇습니다. "바라볼 때에 눈물이 앞을가리워마지 않노라. 빨리 반성하야 새옷을 벗고 직장으로직장으로, 제이국민의 현모가 되어주기를 원하노라." ~~~~~ 하지만 그와 동시에 편견에 가득 찬 눈으로 ‘양색시‘를 바라보는 무리의 사람들을 꼬집긷느 하죠. 화법으로 보장션 전통기법으로 그린 서양화 같은 느낌이고요.

*이응노, 거리풍경-양색시, 1946 - P222

전쟁마저 승화시키는 예술혼

1950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 피난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 <피난>을 보시죠. 짐을 머리에 이고 아이를 업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뒤에 보이는 기차에는 사람들이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올라타 있고요.
전쟁은 그저 아픔만을 낳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남쪽으로 피난 갔지만이응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게 되었는데요, 남북이 서로 다투는 사이 그의 아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맙니다. 이응노는 이후 수덕사 근처의 시골집에서 지내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응노 화백은 텅 빈 마음을 그림으로나마 승화합니다. 그저 계속해서 그리는 것만이 살 길이었습니다.

*이응노, 피난, 1950 - P223

동양의 미학은 서양에 뒤처지지 않았다

이응노 화백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화가로서 이응노 화백의 삶은 이 시기를 기준으로 나뉘게 되죠. 예술의 중심지이자 현대미술의 심장이라할 수 있는 곳으로 오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환골탈태합니다.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양의 미학을 담은 콜라주 작품과 ‘문자추상‘ 등이 탄생했고 현재까지도그만의 아이덴티티가 됐습니다.

*이응노, 구성, 1964
*이응노, 구성, 1963 - P225

그런데 그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1967년 어느 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연락이 옵니다. 한국전쟁 당시 끌려간 아들이 북한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베를린으로 오면 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죠. 꿈만 같았습니다. 죽은 줄만 알고 살았던 아들이 살아 있다니 그 어느 아비가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후 몇 번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이응노는 간첩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옥살이를 하게 되죠. 그해 12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됩니다. - P231

1983년 이응노는 프랑스로 귀화합니다. 또 한 번의 누명을쓰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응노의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의 한국인들도 그를 만나기 꺼려 했죠. 그리고 1989년 1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지만 정부는 여전히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작가없는 전시회라는 어이없는 일이 생깁니다. ~~~
전시회가 성대하게 열린 그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작업하던 이응노는 쓰러졌습니다. 심장마비였죠. 병원으로 이송되어 잠시 회복하는 듯했지만 결국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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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등장
근데 시작부터 맘이 불안해지네
올리브...제발...!
케빈을 지켜주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불현듯 데이지 포스터가 춤추러 가는이야기를 할 때 내비치던 미소가 생각난다. 방금 데니즈의 카드에 대해, 데니즈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대해 느낀 안도감이 갑자기, 묘하게도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변한다. "올리브." 그가 불러본다. - P55

그녀는 수돗물 소리 때문에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게 틀림없다. 그녀는 전처럼 키가 크지도, 어깨가 넓지도 않다. 물소리가 그
친다. "올리브" 그가 부르고, 그녀가 돌아본다. "당신, 날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 있다니까." 그녀는 얼른 수건에 손을 닦는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올리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데니즈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오랜 세월 동안, 데니즈에 대한 작은 미련 한 톨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아니지, 그런 생각은 감히 품을 수도없어 그는 곧 아니라며 이 생각을 떨쳐버릴 것이다. 누가 스스로를 남의 행복에 배 아파하는 좀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 P56

갈비뼈 속에서 감각이 느껴지면서 낮은 파도에 물 끝자락이 찰싹대듯 편안한 정적이, 안도감이 찾아왔다. 뒷좌석에는 담요가 하나 있는데,그는 집 안에 아이들이 없다핻느 담요를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집 안에 아이들이 없다해도 담요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지금 담요에는 라이플이 싸여 있지만, 다시 돌아올 때(곧, 여기까지 오랫동안 차를 타고 오면서 느꼈던 내면의 공허함이 아직 안도감으로 남아있는 동안 돌아올 터였다) 그는솔잎 위에 누워 담요를 덮을 것이다. - P62

키터리지 선생님! 이런 젠장. 그녀는 7학년 교실에서 봤던 것처럼 똑같이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거침없는 얼굴이었다. 케빈은 그녀를 좋아했지만, 다른 아이들도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논짓으로 그녀를 물리치거나 차의 시동을 켤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을 존중했던 예전의 기억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차 유리를 톡톡 두드리자, 케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조수석으로 쑥 빼고 반쯤 열린 창문을 완전히 내렸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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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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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잠시 후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거나,
아니면 그런 반성조차 전혀 없는 뻔뻔함으로 할머니?하고 부르면 할머니는 언제나 응, 하는 평온한 대답을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평온하게 대답할 것을아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할머니를 부르는 내 마음에는불안함이나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조금 전 우리 사이에 오간 못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말들과 실쭉한 얼굴이아예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평온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나는 그렇게 넘치는 관용속에서 자랐고, 내 못됨에 대해서 별다르게 반성하지 않았다.

*그렇다. ‘관용‘
이 말이 눈에 딱 들어온다
우리 외할머니에게도 그런면이 있으셨다.
무슨 말이건 하면 "그랬나?" 하며 대꾸해주시던.
엄마에게선 결코 볼수 없었던...
아버지 병구완에 바쁜 엄마 대신 우릴 키우시고 살림을 맡으셨던 외할머니 생각난다. 마지막 몇 년을 저 아래 합천의 요양병원에서 지내시다 돌아가셨는데도 가보지 못한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 P179

환한 웃음과 시무룩한 한숨 사이 정도에 불과한 할머니의 작은 감정 표현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마도 모종의 동화과정이었을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그속상한 얼굴 정도로 마음이 잦아들고, 좋아서 깔깔대고흥분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또 그 환하게 웃고 있는얼굴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는 식이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정신없이 치달리던 내 감정의전류계는 할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좀 더 느긋하고 묵직해졌다. - P188

그런데 그다음에 하셨던 말씀은, 친구가 이전까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근데! 거 뭐 될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이북 사투리를 좀 더 문어체로 옮기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근데 상담대학원 갔다고 해서 꼭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다."
듣던 나도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말이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친구는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빠는 언제나 좋은 아버지였지만, 그날 해주신 말씀은 가장 중요한 말씀이었어. 대학원에 합격해서 기뻤지만, 사실 완전히 좋기만 한 건 아니었거든. 내가 무슨일을 한 건가, 애들 키우면서 이 공부를 내가 끝까지 할수 있을까? 난 두려웠어. 대학원만 다니고 상담사는 되지 못할까 봐서 정말 두려웠다고. 근데 아빠는 내가 두려워하는 걸 아셨던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기뻐하시면서도 ‘거 뭐 될 필요는 없다‘라고 하신 거지. 그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정말로 편안해지고, 그래 결과야 어찌되든 한번 해보자고 용기가 솟았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함께 울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훌쩍훌쩍 울면서 산길을 걸었다.

*나도 그렇던데..
늦은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했지만, 딱히 취업을 할수 있단 생각은 안했는데, 죽어라 공부하고 썩히기 아깝다고 왜 취직안하냐고 그런말 듣고나니 용기가 오히려 꺾여서 지원서 내볼 생각도 안하게 됐다.
아이 씨... 나두 저런말해주시는 아버지 갖구싶네.
나두 저런말 해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근데... 역시 기대와 격려는 무서운거야! - P199

할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유산의 마지막 챕터는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내 몸에 늘어가는 주름살과 검버섯이 반갑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노년의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프거나 두려울 것이 없다.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궁극의아름다움이었으므로, 나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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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믿었는데, 그만 1930년대 잡지 영인본을 들여다보다가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나만의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문득궁금해졌다. 나만의 것. 진짜 나만의 것. - P140

그런 식으로 오후를 보낸 뒤,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저녁이었다. 5월의 푸른 밤이 교정 위로 드리워졌다. 도시의붉은 불빛에 검게 기대선 저녁 산 이마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 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노랫소리 크게 울려 퍼졌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텅 빈 방안에 가득한데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저도 모르게 나는 그 노래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노래는 계속됐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 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무슨 일인지 학교 가운데 있던 금잔디 광장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작은 사내 하나가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며 서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김광석이었다. 나는 김광석의 그 노래와 완벽하게 소통했다. 그 느낌은 죽어도 잊지못할 것이다.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고 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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