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끄 부인은 그 다섯통의 편지에 호감을 가진 것 같았다. 내게서편지를 빌려간(그렇게 정중한 작은 여인에 대해서는 정중한 단어를써줘야 한다) 후 어느날, 생각에 잠겨 차분하게 나를 뜯어보고 있는 그녀의 눈길을 포착했다. 약간 혼란스러워하지만 악의는 없는눈길이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짧은 휴식시간에 학생들이 약 십오분의 휴식을 즐기러 운동장으로 나간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와 나 단둘이 1반 교실에 남아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녀의마음속에 있던 말의 일부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영국인들에겐 굉장히 놀라운 면이 있다니까." 그녀가 말했다. "어떤 면에서요, 부인?" 그녀는 "어떤 면"이라는 말을 영어로 되풀이하더니 작게 웃음을터뜨렸다. "어떤 면‘이라고 물었는데, 글쎄, 잘 모르겠지만 영국인들은 우정이나 사랑,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름의 견해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 견해를 감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일어나 다부진 망아지 같은 모습으로 나가면서 그녀가 덧붙인 말이었다.
*루시가 아무리 호의적으로 표현해놨어도-물론 베끄부인의 행동을 살짝 비꼬고 있지만, 난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너그러운 영국인의 미덕이랄까... ^^ - P72
"그러니 내가 바라는 것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앞으로는제발 내 편지를 가만히 내버려둬달라는 거예요."
아아! 이제는 그녀가 읽은 그런 편지가 더이상 오지 않으리라는사실이 다시 떠오르자 무언가가 눈 속으로 밀려들어와 눈앞이 흐려지고, 교실과 정원과 겨울의 빛나는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나는 마지막 편지를 읽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근사한 강의 강둑에머물렀고, 그럴 때면 강물이 튀어 내 입술에 활기가 돌게도 해주었는데, 이제 그 강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풍부한 물줄기는 내 작은 오두막과 황량하게 메마른 모래벌판을 남겨둔 채저 멀리 흘러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올바르고 지당하고 자연스러워 한마디 항의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라인강을, 나일강을 사랑했다. 나의 갠지스강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강들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신기루처럼 사라진게 슬펐다. 나는 금욕적이기는 했지만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눈물이 흘러내려 손과 책상을 적셨다. 나는 잠깐 엉엉 울었다. - P73
그러나 곧 자신을 타일렀다. "지금 애도하고 있는 이 ‘희망‘은 고통받았고, 또 나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어. 사라질 시간이 될 때까지죽지 않았지. 그렇게 미적대며 내게 고통을 주었으니 이 ‘희망‘의죽음을 환영해야만 해." 나는 ‘희망‘의 죽음을 환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사실은 긴 고통으로 인해 인내가 습관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마침내 나는 죽은 ‘희망‘의 눈을 아주 침착하게 감기고 얼굴을 덮어준 뒤 사지를 가지런히 매만져주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어야만 했다. 그런 상실을 체험한 사람들은 황급히 기념물들을 모아 멀찌감치 치우고 자물쇠로 채워놓기 마련 이다. 회한이 날카롭게 되살아나 매순간 가 슴을 찌른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 P74
어느 한가한 휴일 오후(그 목요일), 마침내 처분하려고 보물을둔 곳에 갔을 때 나는 다시 누군가가 편지를 만진 것을 알고서 이번에는 몹시 불쾌해졌다. 사실 편지 뭉치는 그대로 있었지만, 편지를 묶은 리본이 풀렸다가 다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서랍을 열어보았다는 다른 표시들도 있었다. 이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베끄 부인은 신중한 사람으로, 이세상 누구보다 머리가 좋고 판단이 명확할 뿐 아니라 사리분별이 뛰어났다. 그녀가 내 상자 속의 내용물을 아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견딜 만했다. 몰래 남의 뒤를 캐긴 했지만, 그녀는 사물을올바르게 판단했고, 왜곡하지 않고 이해했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정보를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내게는 더없이 신성한 편지들을 자신의 친구와 함께 읽고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였고, 그녀가 비밀을 털어놓은 상대가 누군지도 짐작이 갔다. 어제 저녁 그녀의 친척인 뽈 에마뉘엘 선생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꺼내지 않을 문제들을 그와 상의하곤 했다. - P74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이상한 집의 어느 구석에 숨겨두어야 안전하고 비밀이 보장될까? 어디에 두어야열쇠 자물쇠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P75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나는 기숙사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맑고 추운 오후였다. 이미 지고 있는 겨울 해가 ‘금지된 오솔길‘의관목 위에서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배나무 고목, 수녀 유령의 전설이 서린 배나무가 헐벗은 채 드리아드처럼 뼈대를 길게드러내고서, 회색빛의 여윈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고독한 사람에게종종 떠오르는 기상천외한 생각이 한가지 떠올랐다. 나는 보닛을쓰고 외투를 입고 털목도리를 두르고는 시내로 나갔다. - P75
내가 원하는 것은 납땜을 할 수 있는 철제상자나 마개를 닫아밀봉할 수 있는 두꺼운 유리병이었다. 나는 잡동사니들 중에서 그런유리병을 발견하고는 그걸 샀다. 그러고는 편지들을 조그맣게 말아 기름 먹인 비단으로 싼 다음노끈으로 묶어서 병 안에 넣고 늙은 유대인 고물상인에게 마개를닫고 공기가 새지 않도록 밀봉해달라고 했다. 내 지시를 따르면서도 그는 서리처럼 하얀 속눈썹 아래로 의심스럽다는 듯 힐끔힐끔나를 보았다. 뭔가 사악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속에는 쓸쓸한 느낌이 기쁨이 아닌 슬프고 외로운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 P76
일곱시에 달이 떴다. 일곱시 반이 되자 학생과 선생들은 공부가한창이었고, 베끄 부인은 어머니와 자식들과 함께 식당에 있었고통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로진도 복도를 떠나 사방이 고요해졌다. 나는 숄을 걸치고 밀봉된 병을 들고 몰래 1반 교실을 거쳐 밖으로 빠져나가 정자를 지나 ‘금지된 오솔길‘로 갔다. 배나무 므두셀라는 오솔길 끝, 내가 늘 앉던 자리 근처에 있었다. 그 회색빛 나무는 야트막한 덤불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모두셀라는 고목이지만 여전히 단단했다. 주위의 무성한 담쟁이와 덩굴에 약간 가려져 있었지만 뿌리 근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내 보물을 감출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물만 감출 생각은 아니고 슬픔도 함께 묻을 작정이었 다. 얼마 전 날 울린 슬픔에 수의를 입혀 매 장할 생각이었다.
*정말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다!
- P76
만일 인생이 전쟁이라면 나는 혼자 그 전쟁을 치러야 할 운명인것처럼 보였다. 겨울을 지낸 숙소, 식량과 사료가 다 떨어지고 없는막사를 이제 어떻게 부수고 떠날까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그런 변화를 위해서는 운명과 다시 한번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나는결전을 벌일 각오는 있었다. 신은 너무 가난해서 잃을 것이 없는나를 승자로 점지하실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역시 예상대로 여길 떠날 생각이구나! 너무 가련해서 한숨만 나오네...
- P78
"포세뜨가에서 나와서 우리와 함께 살아요. 베끄 부인보다 아빠가 월급을 훨씬 더 많이 줄 거예요." 홈 씨는 내가 딸의 말상대가 되면 훌륭한 보수, 즉 현재 내 월급의 세배를 주마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더돈이 없고 앞으로 더 어렵게 살 형편이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직업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이 될 수 있고또 개인 지도를 할 수도 있지만, 가정교사가 되거나 말상대가 되는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훌륭한 집안의 가정교사가 되느니 차라리 하녀가 되어 질긴 장갑을 사서 끼고 침실과 층계를 쓸고난로와 자물쇠를 청소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 편이 더 마음편하고 독립적이었다. 말상대가 되느니 차라리 셔츠를 만들다 굶어 죽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빛나는 숙녀의 그림자, 바송삐에르 양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루시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난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고.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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