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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ㅣ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를 읽으며 친구들과 갔었던 이탈리아 여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두살 터울로 고만고만 모인 친구들이지만 제일 큰언니와 막내의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8명이 경비를 모아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 것은 코로나로 난리가 나기 전인 2018년 봄이었다. 북부의 피렌체, 로마, 밀라노, 당시 한창 핫했던 친퀘테레와 피사, 아씨시 등의 소도시 여행, 그리고 남부의 나폴리로 가서 레몬과 오렌지 가로수가 아름답던 소렌토, 카프리섬과 폼페이를 둘러보고 베네치아까지 그야말로 이탈리아를 북에서 남까지 싹 훑는 일주 여행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겨우 날짜를 맞춰 여행 전날까지 다들 바쁘게 출근했다 떠나게 된 여행이라 그야말로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그 전의 여러 나라를 며칠 만에 찍고 찍고에 지쳐 있던 터라 - 그렇다고 그 여행들이 나쁘진 않았다. 시간을 내기 어려운 입장에서 겨우겨우 맞춰 가는 여행인지라 한국을 벗어나고 직장과 가정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했으니까 - 이번엔 여유롭게 한 나라만 선택을 해보자는 의견에 따라 선택된 여행지였던 것이다. 물론 패키지의 특성상 '여유로운'이란 있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역시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로 이동하는 과정들이 바쁘게 이어졌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즐길 준비만 되어있다면 되는 여행이었고 거기다 우리 손으로 밥을 안하지 않니? 너무 좋아 이러면서 마냥 신이 나 있었고 즐거워했다. 날씨도 너무너무 좋았고 다양한 국적의 엄청난 관광객을 보는 것도 좋았던, 그야말로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좋은 여행이었다.
물론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책 스가 아쓰코의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인생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스가 아쓰코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유학을 간 것은 1958 년이었고, 밀라노에서 코르시아 서점을 운영하던 페피노(주세페 리카)를 만나 결혼한 것은 1960 년이었다. 결혼을 하여 밀라노에 정착을 하였고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망 이후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3년이란 시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그녀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여학교를 졸업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였고, 해외여행조차 쉽게 하기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다. 패전 이후 일본의 경제 상황도 어려웠고 스가 아쓰코도 유학을 떠나기 전 몇 년은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어려운 시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자 유학을 감행하고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을 하여 정착을 하려 마음 먹었던 그 저변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며 약해진 마음은 그녀가 더 이상 밀라노에 머물지 못하고, 1971년 일본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이탈로 칼비노, 안토니오 타부키, 그리고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움베르토 사바 등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였고, 1989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만초니가의 사람들> 번역으로 피코 델라미란돌라(이탈리아의 철학자)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 <밀라노, 안개의 풍경>이 처음으로 발간이 되고 이후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베네치아의 종소리>,<트리에스테의 언덕>,<유르스나르의 신발>등의 주옥같은 에세이들이 연달아 발간이 된다.
"순수한 시간만 따지면 육십 평생에 십삼 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보낸 십삼 년은 내 안에 지울 수 없는 궤적을 남겼다. 이십대 말에서 사십대 초, 인생의 한창때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한창 때, 동양에서 온 젊은 여자의 시선으로 보았던 이탈리아의 일상들, 그리고 긴밀하게 맺었던 인간 관계와 도시의 모습들은 뭔지 모르게 아련하기도 하면서 마음 속에 피어나는 쓰라림과 고통을 동반하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작가가 그 시절에 느꼈을 사랑과 행복, 좌절과 외로움, 고통의 순간들을 모두 이 한 권의 책 속에 풀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차오르는 밀라노의 안개와 남편 페피노와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그리고 만난 지 얼마되지 않은 젊은 동양 여자에게 밥을 권하는 친절한 나폴리 야채 가게 아줌마,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어머어마한 귀족 가문의 식사 초대, 그리고 트리에스테의 바다, 관광객이 모두 빠져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베네치아 사람들의 무표정한 일상, 파르티잔(빨치산, 레지스탕스)대장을 숨겨주었다 독일의 수용소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레지스탕스의 영웅' 마리아 보토니의 인생 이야기는 결코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간을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스가 아쓰코가 밀라노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서유럽은 역사상 인간 정신이 가장 고상하게 발현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신분, 학력, 피부색, 국적, 나이, 빈부 너머 사람들의 표정이나 눈빛, 목소리, 마음에 직접 가닿는다. 사람을 그야말로 사람으로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잊게 한다."(송태욱, 번역가)
바쁘게 쫓기듯 쓸려다니는 패키지 여행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진짜 얼굴을 보는 경험, 도시의 진면목과 그 곳 사람들과의 마음이 담긴 교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너무도 꿈 같기만 한 먼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인생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베네치아에 대하여 쓴 '무대 위의 베네치아'에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다. 여행자로서 보았던 풍광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때도 '나는 단지 스쳐가는 여행자일 뿐이구나!' 하는 감정이 너무도 선명하게 들어서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방문으로 내가 베네치아를 이해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아주 없진 않으나, 특히 베네치아에서는 물 위에 뜬 둥지 같은 도시의 매력에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 작은 섬이자 도시는 판단 기준이 그간 방문한 도시들과 크게 달라서 뭐가 어떻게 아름다운지 설명할 수 있게 되기까지 솔직히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렇다고 베네치아가 폐쇄적인 도시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찾아갈 때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을 발하며, 지금껏 알고 있던 것이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매력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 방문자를 놀라게 한다."(198면)
"관광 안내서를 따라 미술관과 성당을 방문하고, 산 마르코 광장의 비둘기에 압도되기도 하고, 메르체리에라는 좁디 좁은 중심가 양쪽을 장식한 눈부신 쇼윈도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다. 때로는 리알토 다리 난간에서 몸을 내밀어 쉴새없이 오가는 곤돌라와 수상버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무언가 부족한 기분이 내 안에 계속 남았다. 아직 베네치아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200면)
"한 해가 저물어 가던 12월에 모임이 있어 베네치아를 찾은 적이 있다. 관광객이 없는 계절의 베네치아는 처음 보았다. 참석자들은 아침 여덟시 반 행사장에 도착하라고 해서 나는 여덟 시쯤 호텔을 나섰다가 신기한 광경에 맞닥뜨렸다.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추운 아침이었고, 얼어붙은 공기 속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 코앞의 가구점 쇼윈도도 가물거렸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호텔과 옆 건물 사이로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만한 좁은 골목이 있고, 그곳을 통과하면 대운하의 수상버스 선착장이 나올 터였다. 그 골목으로 접어들려는 참에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출근하는 듯 보이는 남녀들이 호텔 앞 광장을 바쁘게 지나쳐갔다. 내가 놀란 것은 그 무리 속 여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돌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걸음을 재촉한다는 사실이었다. 여름날 귀를 간질이던 높고 떠들썩한 웃음소리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옷차림. 대부분 검은색이나 진녹색의 긴 망토를 두르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몇 년 전에 본 루칠라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그때 다소 무대의상 같다고 느꼈던 그녀의 옷차림은 베네치아 여자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로부터 몸을 지키려 고안해낸 무장이었던 것이다. 연극의 계절은 지난 지 오래지만 그녀들은 등장인물임을 잊지 않고 종종걸음치고 있었다. 어쩐지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겨울의 베네치아 여자들에게 눈길을 빼앗긴 나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2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