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비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그 순간 떠올린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몇 년 전 인간의 타도를 위해 열심히 일하자고 결의했을 때 분명 이런 학살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늙은 메이저가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키자고 촉구했던 그날 밤에 그들이 기대했던 건 이런 공포와 살육의 현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꿈꾸던 미래상은 굶주림과 채찍에서 자유롭고, 모두가 평등하고,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일하고, 약자는 굳건히 보호되는(메이저가 연설하던 그날 밤 그녀가 앞발을 구부려 뒤늦게 들어온 오리 새끼들을 보호해준 것처럼) 그런 동물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이상한 세월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무도 감히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사납고 으르렁거리는 개들이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동무들이 충격적인 죄를 고백한 뒤 찢겨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세월이었다. 클로버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P96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불복종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이렇게 모질기는 하지만 존스가 있던 때보다는 훨씬 나으며, 무엇보다 인간들이 되돌아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는 지시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일을 열심히 하고, 주어지는 지시를 수행하며, 나폴레옹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이었다.  - P96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와 다른 모든 동물이 고생을 감내하며 바랐던 건 지금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이 풍차를 짓고, 존스가 쏜 총알에 맞섰던 건 지금 이런 꼴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적절히 표현할수 있는 어휘를 알지 못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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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소설의 쓸모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
박산호 지음 / ㅁ(미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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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게 잘 쓴, 책에 대한 리뷰라고 하면 딱 알맞을 것 같다. 그러면서 18편 이상의 작품이 등장.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나 상황들을 보며 짜릿하고 통쾌한 대리 만족을 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쓸모로 충분하다고...관심 가는 책 찾아 기꺼이 도서관으로 달려가 보겠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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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법 배우기 ㅡ《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귄

게센의 종교인 한다라교(에스트라벤도신자이다)의 핵심 교리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해서는 안 될 질문이 뭔지 판단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의중요성을 아는 것이다. 이는 상대가 어떤성인지 알 수 없고, 알려 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아는 게센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철학일 것이다. (137/211)

서서히 게센인들의 철학을 이해하게된 겐리는 마침내 임무에 성공하고 몇 년만에 동료들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는다.
그는 남성과 여성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동료들의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끼다가 중성적인 게센인들을 보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나는 누구의 편인지 구분 짓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우며 의미 없는 행동이자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결말이 아닐까 싶다. (137/211)

이 결말을 보며 완경후 한동안 방황했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나는 내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조금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그 시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을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일부러 소위 ‘여성성‘이 더 강조되는 옷차림을 하고, 좀 더 ‘여성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깨닫게 됐다. 내 모습이, 내 태도가 세상이 정해놓은 여자라는 틀에 가까운지, 남자라는 틀에 가까운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완경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고,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고, 세상이 여자인 나에게 거는 기대에 부응 (138/211)

해야 한다는 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라는 것이 점점 깎여나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축소되고 밋밋해지고 있는 나를 알아차린 순간 마침내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가 여성스러운지, 남성스러운지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고, 전보다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사안이 있을 때는 목소리를 높였고, 전보다 더 호탕하게 웃었으며,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힘과 자유를 가진 기분이 들었다. (139/211)

*지구인과도 소통이 안돼ㅡ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코니 윌리스 지음

그러나 오프라인, 즉 현실에 생생히 존재하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을 그렇게 쉽게 삭제하거나 차단할 순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남자들이 모여 노래방의 마이크를 독점하듯이 발언권을 독점하는 모임에 더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고 앞에 썼지만, 실은 아주 최근에 그와 비슷한 어떤 모임에 나갔다가 색다른 경험을했다.
  거기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고(여자 다섯, 남자 셋)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언권을 독점하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누군가가(사실 여자들이 돌아가며) 유머러스하게 발언을 제지해서그의 입을 막았다. (207/211)

그 모습을 보며 신산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렇게 ‘나 홀로 잘났소‘ 스피커가 모임에서 제지를 당하는 상황이 최근 몇년 사이에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피부로 느끼긴 했다. 
그건 아마도 더는 그런 식으로 소통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발언의 기회는 공평하고 동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주로 여성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파티는 즐거웠고 알찼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정말 외계인 같은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20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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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에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 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 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없었다.
- P217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 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지는 압박감과 적대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4백 명이나 되는 호텔 손님, 벽, 대들보, 거대한 지붕, 차갑고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 쾌적한 휴식을 위한 의자들, 행복한 표정을 비추어 보던 거울, 잘자라고 유혹하듯 꽃무늬로 장식된 보들보들한 깃털 이 - P217

불로 덮인 침대가 있는 침실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의자에 계속 앉아 있으면 그대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창문을 깨버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울어버려서 자는 사람들을 모두 깨울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가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가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이 갑갑하고 적막한 곳에서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 어서 밖으로 나가야 해.‘
여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자가 박차고 나간 문 뒤로 침실의 휘황한 불빛 아래 황동과 유리 장식들이 의미없이 빛나고 있었다. - P218

여자는 몽유병 환자처럼 공중을 떠다니듯 계단을 내려갔다. 카펫, 벽에 걸린 그림들, 호텔 가구들, 계단, 조명, 손님들, 웨이터, 여종업원들………. 
물체도 사람도 마치 유령처럼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아는 척해도 몰라보는 여자의 반응에 놀란 사람 몇몇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자의 두 다리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 P218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절하는 몸의 어떤 기능이 마비된 것 같았다. 두려움에 쫓기면서 목적도 없이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홀 입구에서 멈춰 섰다. 이곳에 앉아서 식사하고, 춤추고, 웃고, 즐거운 만남을 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 P218

여자는 가공의 자신을 밀쳐내고 본래의 자신을 되찾으려고 했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많이 편찮으시거나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자극해도 격렬한 고통이나 불안에 몰입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느낌이 다른 모든 느낌을 밀쳐냈다. 그것은 분노였다. 분출구도 없이 몸 안에 갇혀 부글부글 끓는 무력한 분노, 끝없이 솟구치는 분노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이모인지, 어머니인지, 혹은 자신의 운명인지. 그것은 불공평한 처사로 억울하게 고통을 받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분노였다. 여자의 상처받은 영혼은 온전했던 자신에게서 어느 한구석이 떨어져 나갔음을 느끼고 있었다. 축복받은 날개를 떼어버리고 이제는 땅바닥을 기는 눈먼 구더기가 되어야했다.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 P218

드디어 짐 정리가 끝났다. 여자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야회복, 댄싱슈즈, 허리띠, 분홍색 셔츠, 장갑등 원래 그녀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들이 침대에 널려있었다. 마치 환상이 만들어낸 허깨비 같은 존재였던 폰 볼렌 양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처럼 보였다. 크리스티네는 몸서리쳤다. 자기 물건은 하나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소유물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침대에서 자게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 창문을 통해 황금빛 풍경을 바라보고, 이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이제 여자는 그 누군가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 P230

그런데 또다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여자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호텔 데스크 직원이 전보 한 장을 흔들며 뛰어왔다.
"어제저녁에 온 전보입니다. 야간 근무자가 수취인이 누군지 몰라서 전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께서 체크아웃하셨다는 것을 방금 알았습니다."
크리스티네는 전보를 펼쳤다.
ㅡ어머니 상태 악화. 조속한 귀향 바람, 폭스탈러
기차가 출발한다.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 - P234

ㅡ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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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츠바이크의 문장을 읽는 기쁨을 한껏 향유하고 있다!

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에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 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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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2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이 나왔군요~!! 표지부터 제목까지 완전 마음에 드네요~!!

은하수 2023-05-24 09:43   좋아요 1 | URL
책 내용도 흥미진진합니다^^
예전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됐었다는군요
다락방님 서재 가서 봤답니다
아무튼 저는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