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1.아찔한 비밀
기관차가 쉰 소리를 내질렀다. 젬머링‘에 도착한 것이다. 시꺼먼 객차들은 은빛으로 빛나는 고지에서 1분간 멈추고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뱉어 낸 후 이내 다른 사람들을 삼켰다. 이리저리 짜증 섞인 말소리가 오가는가 싶더니 맨 앞의 기관차는 다시 쉰 소리를내지르며 시꺼먼 찻간을 줄줄이 매단 채 덜컹덜컹 저 아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확 트인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보이는 경치는 비바람에 씻긴 듯 말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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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어슐러 르 귄, <지금 이모랑 낚시하러 가도 돼?>

바다 옆의 해변, 야외, 여성들이 글을 쓰는 장소인가? 방 안의책상이 아니란 말인가? 여성은 어디서 글을 쓰는가? 글 쓰는 여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글 쓰는 여성에 대한 나의 이미지, 당신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글 쓰는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잠시 침묵하다 눈이 반짝 빛나며 생각한다. 몇몇은 내게 화가 프라고나르Fragonard와 카세트Cassat의 그림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림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편지를 들고 있는 여성을 그린 것이었고, 그마저도 실제로 편지를 쓰거나읽는 모습이 아닌 편지에서 눈을 떼고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냄비 올려놓은 거 불 껐던가?
한 친구는 냉정하게 말했다. 
"글 쓰는 여성은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거야."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부엌 식탁에 앉아 있어. 그리고 옆에서 애들이 소리를 지르지."
이 마지막 대답의 이미지가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이야기다.  - P227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고, 또 가족을 보호하고그들의 안녕을 지키려 고생한 올콧을 위해 이번에는 가족들이 올콧을 보호하고 돕는 걸 보니 기쁘다.
당시의 수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올콧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있었다. 올콧은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자유는 사랑보다 더 좋은 남편이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책임에서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올콧은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심지어 올콧에게는 아기도 있었다. 동생 메이의 아기였다.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한 메이는 당시 마흔여덟 살이던 사랑하는 언니에게 아기를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올콧은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메이의 아기를 키웠다. - P235

여기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여러 아이의 엄마이자 성공한 소설가인 여성이 있다. 이 편지는 어쩌면 150년 전에 쓴 것일수도 있고, 지난밤에 쓴 것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이 하나 필요해요.
제 방이요. 지난겨울 내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들어가서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요. 저곳[식당]에서는 글을 쓸 수가 없어요. 식탁 위에는 뭐가 잔뜩 있고 그걸 전부 치워야 하고 저기서 애들 옷도 갈아입혀야 하고 씻기기도 해야 하고 그 밖에 할 일이 많아 노력해봤지만 저기선 절대 편안하지가 않았어요. 당신이 있는 거실로 가면 꼭 제가 당신을 방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 적 있지요."

이 여성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다. 대부분 식탁 위에서. - P239

자기만의 방, 그렇다. 누군가는 왜 해리엇 비처 스토 씨는 글을쓸 수 있는 방이 있었는데 19세기 가장 감동적인 미국 소설을 쓴해리엇 비치 스토 부인은 부엌 식탁뿐이었는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는 왜 그녀가 식탁을 받아들였는지 물을 수 있다. 자존감 있는 남성이라면 식탁에 앉은 지 5분 만에 벌떡 일어나 이렇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이 정신없는 데서는 아무도 일못 해! 저녁 다 되면 그때 불러!" 하지만 자존감 있는 여성인 해리엇은 계속해서 발아래 애들을 달고 저녁을 준비하면서 소설을 썼다. 물론 경외심을 담은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다. 그다음엔,
‘왜?‘다. 왜 여성들은 그렇게 바보처럼 고분고분한가?

이 질문에 대한 페미니즘의 즉각적인 대답은 여성이 가부장제의 희생자 그리고/또는 공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이지만우리에게 그다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진 않는다. 또 다른 여성소설가에게 도움을 구해보자. 나는 스토의 글과 다른 글들)을 틸리 올슨의 <침묵>에서 슬쩍 가져왔다. 이 글은 <침묵>의 사랑스럽지만 불효자인 딸 격이다. 있잖아요 엄마, 인용된 저 글 좋은데, 제가 좀 써도 돼요? 다음 글은 마거릿 올리펀트Margaret Oliphant의《자서전 Autobiography》에서 내가 직접 찾은 것으로, 스토의 바로음 세대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올리펀트는 성공한 작가로 무척 젊고 기혼에 아이가 셋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썼고, 어마어마한 빛과 아이 셋에 더해 오빠의 아이 셋까지 떠맡으며 과부가 되었고 그리하여 더욱더 계속해서 글을 썼다…. 두번째 책이 출간되었을 때 올리펀트는 조 마치처럼 여전히 집에 있는 소녀였다. - P240

"글을 쓰는 게 무척 즐거웠다. 하지만 책이 성공하고 3쇄를 찍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엄마와 [오빠] 프랭크를 제외하면 나에게 찬사를 건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엄마와 프랭크의 칭찬은, 글쎄, 정말 기뻤고, 세상의 전부였고, 내 삶이었지만,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둘은 나의 일부였고, 나는 둘의 일부였다.
우리는 하나였다."

정말 놀랍다. 남성 작가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 상상조차 할수 없다. 여기에 열쇠가 있다. 그동안 무시되고, 감춰지고, 부정되어왔던 현실 말이다.
- P241

하지만 그는 만약 당신이 아이를 "얻으면" 책을 "얻을"수 없으므로 아빠들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불알 저술이론을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상징적 유사성을 아예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아이를 낳으면 창작은 할 수 없다‘는 믿음은 오직 여성에게만 적용된다.

여기에서 이 정도로 멈추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아니다. 나는 부모가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여성이 책을 쓰거나 아이를 낳는 것 중 하나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작가가 되는 것처럼여성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 하나다. 그건 특권이다. 의무나 운명이 아니다. 나는 글을 쓰는 엄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거의 금기시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아이와 책이 둘 다 그 대가를 물을 것이므로 엄마인동시에 작가가 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 P248

이처럼 여성이 창작과 출산을 둘 다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정말 지독하게 파괴적이다. 주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학을 빈곤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자기 파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울프는 절대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현명한 의사의 말을 따랐다. 플라스는 아이들의 침대 곁에 우유를 준비해두고 오븐에 머리를 넣은 채 죽었다.
여성 예술가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반면 고갱 같은 태도를 취하는 남성 예술가들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 나는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온전히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여성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에도 해롭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P249

이제는 가족을 돌보는 동시에 예술가로 일하고 싶어 하는 여성이 질책보다는 지지를 더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건 상황이 약간 개선된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행복과 책의 탁월함을 위해 매일 매시간, 어쩌면 20년 동안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애쓰는 건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다. 끝없는 에너지 소모와 서로 충돌하는 요소들에 대한 매우 곤란한 저울질이 수반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해 잘 모른다. 
그동안 엄마인 작가들이 엄마됨에 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랑처럼 보일까 봐두려워서일까? 엄마라는 덫에 걸린 것으로 치부될까 봐 두려워서일까? 엄마인 작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부모 노릇과 연결시켜 글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영웅주의적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두가지는 정반대이며 서로를 파괴한다고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 P249

1970년대에 니나 아우어바흐Nina Auerbach는 제인 오스틴이 무아이Child-free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했기에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균이라는 말은 들어봤다. 무취라는 말도 들어봤다. 그런데 무아이라고? 그것도 수많은 조카들에게 둘러싸여 서재에서 글을 쓰던 오스틴이? 하지만 당시 난 아우어바흐의 말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나의 경험이 아우어바흐의 이야기에 들어맞았던 건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 또한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경험이 잘못되었고 옳지 않다고, 그러니까 틀렸다고 느끼곤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로 가득 찬 공간에서 계속 글을 써 나갔던 나의 행동은 아마도 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적사고는 훨씬 더 복잡하고 현실적인 입장으로 빠르게 전개되었고,
그 뒤를 비틀비틀 따라가던 나는 페미니스트적 사고 덕분에 조금은 나 스스로를 위해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 P250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조력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언제나버지니아 울프다. 여기서 그녀의 글 
<여성을 위한 직업Professions forWomen> 초고를 인용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울프는 글 쓰는 여성에 대한 너무나도 멋진 이미지를 제공한다.

"나는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여성을 상상한다. 그녀는 어부처럼 호숫가에 앉아 물 위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이것이 나의 상상 속 글쓰는 여성이다. 그녀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추론하고 있지도 않다.
플롯을 구성하고 있지도 않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얇지만 반드시 필요한 이성이라는 끈을 붙잡고 깊은 의식 속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드리우는 중이다."
- P251

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세 아이를 낳고 스무 권의 책을씀으로써 책 아니면 아기라는 규칙을 누가 봐도 명백하게 거역했다. 스무 명의 아이와 세 권의 책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속한 인종과 계급, 내가 가진 돈과 건강 덕분에, 특히 남편의 지원 덕분에 나는 아슬아슬한 두 줄타기를 그럭저럭 해낼 수있었다. 남편은 내 아내가 아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에 상호 협력이라는 전제를 두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는 정말 많은 일을할 수 있다. 우리의 노동 분업 방식은 상당히 관습적이었다. 나는 집안일과 요리, 아이 돌보기, 소설 쓰기를 맡았는데 내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교수로 일하며 자동차와 고지서, 정원을 책임졌는데 남편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렸을때 나는 밤에 글을 썼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사이에 글을 썼다. 그때 나는 풀을 뜯는 소처럼 글을 썼다.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남편은 도와주었고, 내요청을 대단한 부탁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남편은 내가 글 쓰는 시간과 내 작품이 받은 축복을 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 P261

바로 그게 문제다. 원한과 부러움, 질투, 앙심, 남자들은 자기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신체와 안락함과 자녀들을 배불리는 일이 아니라면 여성이 하는 모든 일에 원한과 부러움, 질투, 앙심을갖는 것이 너무나도 자주 허용되고, 또 그렇게 훈련받는다. 그 원한에 맞서서 계속 일을 하려는 여성은 축복이 저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반항하며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야 하거나, 절망에 빠져 입을 다물어버린다. 예술가라면 누구든 수년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다른 이들의 철저하고 합리적인 무관심속에서 일하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앙심에 찬 개인적 반대에 맞서 일을 잘할 수 있는 예술가는 아무도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같이 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얻는 반응이다. - P262

나는 그런 반응을 면할 수 있었다. 나는 자유로웠다. 자유롭게태어났고, 자유롭게 살았다. 수년 동안 이런 개인적 자유는 나의글이 특정 판단과 가정에 얼마나 통제받고 제한받았는지를 무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그러한 판단과 가정이 나의 것인 줄알았으나 사실 그것은 남성 우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것이었다. 관습을 뒤엎을 때조차 나는 스스로를 속였다. 내가 공상과학, 판타지, 청소년 소설이라는 괄시받는 변두리 장르를 선택한 것은 이 장르들이 비평과 학계, 규범의 감시에서 배제되어예술가를 자유롭게 놔두기 때문임을 깨닫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이 장르들이 "문학"에서 배제되는 것은 정당하지 않고 정당화될수도 없으며 이건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사실을깨닫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재치와 배짱을 기르는 데까지 10년넘는 시간이 걸렸다. 주제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62

아이는 한숨을 쉬고 엄마가 낚시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어부여성은 상상력이 낚싯줄을 물고 있지 않다는 걸, 낚싯줄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는 걸 잊고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
아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뗀다. "이모, 질문이 있어. 작가에게 꼭 필요한 한가지가 뭐야?"
"그건 말해줄 수 있지."상상력이 말한다. 
"작가에게 꼭 필요한한 가지는 불알이 아냐. 무아이 공간도 아냐. 증거를 갖고 엄정하게 말하자면, 자기만의 방도 아냐. 비록 자기만의 방은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의 호의와 협력, 또는 같은 지역에 있는 출판 대리인만큼이나 큰 도움이 되지만, 꼭 자기만의 방이 있진 않아도 돼.

작가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연필과 약간의 종이야. 그거면 충분해, 자기 홀로 그 연필을 책임진다는 걸, 그 연필로 종이 위에쓴 것을 자기 홀로 책임진다는 걸 알고 있다면 말이지, 즉, 자기가 자유롭다는 걸 안다면 말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건 아냐.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어쩌면 정말 조금밖엔 자유롭지 못할지도 몰라. 어쩌면 간신히 얻어낸 짧은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글 쓰는 여성이 되어 머릿속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오로지 이 순간에만 자유로울지 몰라. 하지만 이때만큼은 책임을 지는거야. 이때만큼은 자율적인 거야. 이때만큼은 자유로운 거야."
"이모." 작은 소녀가 말했다.
"지금 이모랑 낚시하러 가도 돼?"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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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옆의 해변, 야외, 여성들이 글을 쓰는 장소인가? 방 안의책상이 아니란 말인가? 여성은 어디서 글을 쓰는가? 글 쓰는 여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글 쓰는 여성에 대한 나의 이미지, 당신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글 쓰는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잠시 침묵하다 눈이 반짝 빛나며 생각한다. 몇몇은 내게 화가 프라고나르Fragonard와 카세트Cassat의 그림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림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편지를 들고 있는 여성을 그린 것이었고, 그마저도 실제로 편지를 쓰거나 읽는 모습이 아닌 편지에서 눈을 떼고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냄비 올려놓은 거 불 껐던가?
한 친구는 냉정하게 말했다. "글 쓰는 여성은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거야."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
"여자는 부엌 식탁에 앉아 있어. 그리고 옆에서 애들이 소리를 지르지."
이 마지막 대답의 이미지가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이야기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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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엄마됨!
양립하기 힘든 두 명제 사이에서 언제나 여성들은 방황한다. 무언가를 강요받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해볼 시간적 여유 따윈 주어지지 않는다.
흔히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다 보면‘이라고 시작되는 대화를 시작하면 남자들은 변명이라는 말로 매도한다. 엄마도 부족한 사람이지 신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어이없는 말이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엄마를 주었다‘고 하는 종류의 말이었다. 내 엄마도 결코 신과 같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엄마로서의 어떠한 위로나 인정, 사랑을 충족해주지 못했는데 나에게 강요하는 ‘신‘과 같은 존재성이라니!

어린 아이가 둘이 되었을 때 나는 ‘집‘이라는 곳에서 하루 빨리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케어하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건데 그게 내 발등을 찍은거란걸 곧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그저 웃고 말지만 절대 다시 살고 싶진 않다.

요즘 아들과 통화하다 물어볼 때가 있다.
뭐 필요한거 있어? 엄마가 보내줄게.. 이러면
다 필요없고 내 집에 엄마만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다. 미친! 이놈아 장난하냐! 엄마도 늙었다!
‘신‘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엄마‘를 만들어줬을까?
아마 끝없는 인간, 특히 남자 인간들의 요구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수전 그리핀의 <페미니즘과 엄마됨>을 읽고 있다.
수전 그리핀은 유명한 작가이자 시인이라고 한다.
에코 페미시즘에 영감을 주 고전 《여성과 자연》이 2001년 출간이 되었다는데 도서관에서도 서점에서도 전혀 찾을수가 없다.

수전 그리핀의 이 글은 매 문장이 공감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핀은 자기 아이가 ‘귀찮고‘,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으며 여전히 터부시된다.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려면 여전히 많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힘든 건 힘든 거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끊임없이 나의 노동력을 요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존재인데 어떻게 매번 사랑스럽기만 하지? 그게 더 이상한 일이잖아.

˝우리 문화에서의 엄마됨의 정의에 따르면,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엄마는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그녀 자신은 사라져버린다.˝(81~82)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다. 희생은 강요하면 안된다. 절대로!



ㅡ페미니즘과 엄마됨, 수전 그리핀

엄마됨이라는 주제에 관한 글은 거의 쓰인 적이 없다.
아이를 낳고 무엇을 배웠나요?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아기와 단 둘이 있었다.
낮에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봤다. 
낮에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여성은 언제나 수술을 받는다. 나는 그 여자들과 나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던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전에는 꼭 잠을 오래 자야 했다. 이제는 딸이 세시간마다 한 번씩 나를 깨운다. 
전에는 대화를 좋아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린 아기와 단 둘이 집에 머무른다. 
외출은 언제나 아이와 남편과 함께였다(이들 없이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리라 믿었다. 멍했고,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무언가 심오한 것.
나는 말하지 못하는 게 어떤 건지를 배웠다. - P78

딸을 낳고 어린아이가 될 때까지 키운 일은 무언가에 대해 알아가는 매우 고된 과정이자 우리 둘 모두에게 부과된 일종의 신체적 고난이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생존에 관한 지식, 그러니까 먹고 자는 것 같은 극도로 단순한 일과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에 관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내 주위에는 온통 전형적인 엄마, 이탈리아의 성모마리아, 이 여성들의 젖가슴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미소만큼이나 때묻지 않은 붉은 벨벳 천, 들판을 슬로모션의로 뛰어가서 천사 같은 아이들을 어루만지려고 달려드는 젊고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여자, 깨끗한 담요에 싸인 깨끗한 아기들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고 있는 참을 수 없이 보드라운 모델들만이 떠다녔다. 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경험은 눈멀고 입다문 채 말해지지 못한 뭔가로 남았다. - P78

나에게는 엄마됨에 관한 페미니스트 이론이랄 게 없다. 그저 이 기록과, 이 단락과, 얼마간의 통찰이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이 글은 엄마됨에 대한 또 다른 여성의 글과 형태가 같다. 그 글은바로 어린 아이가 둘 있는, 알타Alta라는 여성의 책 《모마(Momma>다. 또한 이 글은 르네 클레르René Clair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 당시 썼던 일기, <히프노스의 잎사귀Leaves of Hypnos>와도 형태가 같다. 
우리는 어느 정도 레지스탕스다. 해야 할 일이 끊이질 않아서 생각을 분석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줄줄이 적어둔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 P79

사람들이 가난, 또는 질병, 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상태. 또는, 어머니와 아이들이 언제나 보호받는 건 아니라는 것. 
여성과 아이들에게 지붕과 입을 옷, 음식을 제공받을 자격은 타고난 권리가 아니다. 여성이 필수품을 얻으려면 아이들의아버지와 결혼해야만 하고, 아이 아버지에게 이들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후레자식‘이라고 불리고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간다.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는 것에 관해 말할 때, 어떤 여성과 아이들이 보호되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 P80

그리고 사회가 개입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할 때 사회의 도움을받는 여성은 반드시 비천해야만 한다. 복지 제도의 모든 측면이 작정한 것처럼 인간의 존엄을 빼앗아간다. 가난한 여성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내 정신은 그 모욕 이후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남편이 나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후 내 마음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던 것처럼. 거의 굶어죽을 뻔했던 이후 내 몸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해 겨울부터 나는 시들어가기 시작했고, 해가
지날수록 전보다 더 지치고 소모되어 갔다."
ㅡ앨리스 워커, <한나 캐후프의 복수> - P80

가난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그린 문학작품에서는 이들의 정신과 신체가 파괴되는 모습이 되풀이된다.

"돈, 그녀는 생각 중이다. 질병. 거리. 오물, 아이들, 내 아이들. 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아가들, 내 아이들. 바깥에는 답이 없다. 
오직 땅 냄새, 비가 올 것 같은 기운, 모든것에 내려앉아 있는 신비한 푸른 빛, 하늘을 뒤로 하고 사지가 마비된것처럼 가지를 흔들어대는 나무들, 화물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귀에 거슬리는, 껄끄러운, 깨지는 것 같은 소리. 내 아이들, 그 아이들.
너무 힘든 일이다. 다시 가난한 엄마로 살아가는 건."
ㅡ틸리 올슨, 《요논디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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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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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렷하게 뭔가 잡히지 않는 듯한 7편의 단편을 읽다보니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회상, 체념, 추억, 원망, 집요함, 절망, 기억의 저편, ... 한편으로는 길을 잃고 헤매다 다시 길로 돌아온 듯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이 희망의 노래를 하고 있는 듯해서 위안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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