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장 사라진 여인

예전에 사귀던 (아니, 사실은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같이 들판을 걷다가 이별한 남자가 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순간 그는 말했다. 우리 사이가 서로 평행선으로만 뻗은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고. 그에게는 그것이 우리 관계의 본질인 것 같았지만 그 평행한 길이 우리의 애매했던 운명을 분명히 한 것인지 괜히 둘러대는 얘기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 P263

그의 이름은 마틴이었다. 그나저나 주책스럽게 마틴은 또 왜 떠올랐을까. 나는 빗속의 고양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억의 습지대에 거북하게 묻어둔 이야기였는데 실연당하며 비운의 여인이 되었던 그 일을 내가 뭐하러 끄집어냈을까.  - P263

그러고 보니 그 일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그 순간 내가 들어서던 들판이었다. 개간이 되어 하수구가 십자로 깔리고 수문들이 설치된 그 들판은 겨울이면 도랑에 수은 같은 물이 흐르지만 그 한여름 무렵에 찾은 도랑은 불쾌하고 칙칙한 녹색을 띠면서 습지대 특유의 안개를 피워 올렸고 낮은 깍깍 소리가 아니라 꽥꽥 소리를내며 우는 낯선 침입자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 P264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투신한 곳이 바로 이곳, 다운스 중간의 저지대였다. 느닷없이 참담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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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죽음의 모습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는가

1929년에 파리의 15구에 있는 병원에서 몇 주를 보낸적이 있다. 창구 직원들은 평소대로 내게 고문과 같은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그들은 입원을 허가하기까지 얼추 이십 분 동안 내게 수많은 질문을 했다. 라틴계 국가에서 서식을 작성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말하는 질문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 것이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 며칠 동안 나는 열씨로 잰 체온이 화씨로 몇 도가 되는지 몰랐지만 체온이 화씨 103도 정도였고, 면담이 끝날 때쯤에는 두 발로 서 있기가 조금 힘들었다. 내 뒤로는 체념한 듯 보이는 환자들 무리가 색이 들어간 손수건으로 싼 꾸러미를 들고 면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 P88

질문 다음은 목욕이었다. 감옥이나 구빈원에서처럼 신입환자들이라면 무조건 거쳐야 할 단계였다. 옷을 벗은 후, 깊이가 13센티미터 정도 되는 미지근한 물속에서 몸을 덜덜 떨면서 몇 분을 앉아 있다가 나오자 리넨 환자복과 짧은 파란색 플란넬 가운이 주어졌다. 슬리퍼는 내 발에 맞는 큰 것이 없다면서 주지 않았다. 그다음 나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P88

때는 2월의 어느 밤이었고 나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200야드쯤 떨어진 병동으로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병원 정원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누군가가 랜턴을 들고 비틀대며 앞장서고 있었다. 자갈이 깔린 통로에는서리가 내려앉았고 바람이 세게 불어 맨살 종아리를 덮고 있는 환자복이 펄럭였다. 병동 안으로 들어서니 묘하게 익숙한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밤늦게야 알게 됐다. 병동은 세로로 길었으며 천장은 좀 낮았고, 조명은 어두웠고, 웅얼거리는소리가 가득했다. 병상은 세 줄로 놓여 있었는데 충격적이게도 병상 간의 간격은 붙어 있다시피 할 정도로 좁았다. 똥 냄새와 약간 달짝지근한 냄새가 섞인 악취가 진동했다.  - P89

 그 두 사람이 내게 보인 비인간적인 태도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각인돼 있다. 병원의 공중 병동에 입원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의미에서 환자가 앞에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의사에게 치료를받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내 몸에잔 여러 개를 붙이고 난 후 물집이 잡히면 물집을 터뜨리고는 다시 유리잔을 붙이는 것뿐이었다. 잔 하나하나에서 디저트용 숟갈 하나 분량의 검은 피가 나왔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모욕감, 역겨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 P90

X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처음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 다양하고 모순된 일련의 처치를 받았는데 나는 이 점이 이해가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이 의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아니거나 의학적 지식을 늘리는 데 도움이될 만한 것이 아닌 한 치료는 좋든 나쁘든 아주 조금만 받는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새벽 5시면 간호사가 와서 환자들을 일일이 깨워 체온을 쟀지만 씻기지는 않았다. 혼자 씻을 수있는 상태면 혼자 씻었고, 그렇지 않으면 걸어 다닐 수 있는환자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병상용 소변기와 찜 냄비라는 별명이 붙은 역겨운 병상용 대변기를 치우는 일 역시대부분 환자들 몫이었다. 
8시에는 군대식 수프라 부르는 메뉴가 아침 식사로 나왔다. 가느다란 채소와 눅눅한 빵 조각이 둥둥 떠 있을 뿐이었지만 이름대로 수프는 수프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키가 훤칠하고 근엄하게 보이는 검은 턱수염을 기른 의사가 회진을 했다. 인턴 한 명과 의대생들 한 부대가 의사를 따라다녔다. 병동에는 나를 포함해서 환자가 예순 명 정도 됐고 이 의사는 다른 병동의 환자도 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P91

내 병상에서 약간 떨어진 병상에는 간경화를 앓고 있는57번 환자(57번이 맞을 것이다.)가 있었다. 우리 병동 환자들 모두가 이 환자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환자가 가끔씩의학 강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그 키 크고 근엄한 의사가 병동에서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는 했다. 
그들은 나이든 57번 환자를 소위 환자운반차에 태워 병동 한가운데로 데리고 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의사는 이 환자의 환자복을 배 위쪽으로 말아 올린 후 환자의 배에서 튀어나온 부분(내 추측으로는 그 부분이 병든 간인 듯했다.)을 손가락으로 눌러 팽창시키고는 와인을 마시는 나라사람들이 알코올중독 때문에 이런 병에 흔히 걸린다고 진지하게 설명을 하곤 했다. 
여느 때처럼 의사는 환자에게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미소도 전혀 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 같은 것을 결코 하지 않았다. 꼿꼿이 선 채 매우 근엄하게 강연을 이어 가는 의사는 중간중간 피폐해진 환자의 몸을 두 손으로 잡고서 마치 아녀자들이 밀가루 반죽을 밀대를 굴리듯 환자를살짝살짝 앞뒤로 밀곤 했다. 57번 환자는 이런 식으로 취급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 P94

어느 날 아침, 구두수선공인 환자가 내 베개를 확 잡아 빼나를 깨웠다. 간호사가 오기 전이었다. "57번!"이라고 외치면서 머리 위로 양팔을 머리 위로 휙 들어 올렸다. 병동에는 전구가 하나밖에 없었지만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됐다. 
57번 노인 환자는 몸을 구겨서 모로 누워 있는 듯했다. 내 쪽을 향한 얼굴이 병상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사망 시간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지난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간호사들이 와서 그 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무덤덤하게 전해 듣고는 곧장 자기 일들을 하러 갔다. 한 시간도 더 지난 후에 다른 간호사 두 명이 군인처럼 나란히 줄을 맞춰 저벅저벅 발소리를내며 병동으로 들어와서는 시신을 병상 시트로 싸맸다. 시신은 그날 늦게야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 사이 날이 좀 더 밝아져서 57번 환자를 더 잘 살펴볼 수 있었다. 그를 잘 보려고나도 아예 모로 누웠다. 신기하게도 죽은 유럽 사람을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죽은 사람들을 그전에도 여럿 봤었지만 거의가 다 아시아 출신 사람들이었고
그 전에도 험하게 죽은 사람들이었다.
57번 환자의 눈은 여전히 떠져 있었고 입도 벌어져 있었으며, 작은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P96

그의 창백한 얼굴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얼굴은 그 전에도 창백했었지만 지금은 병상 시트보다 약간 짙은 정도로 창백했다. 작고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트에 실려 해부실 시체 안치대 위로 던져 버려질 이 같은 역겨운 쓰레기도 연도 기도의 대상이 되는 자연사의 한 사례로 여겨지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나는 이십, 삼십, 사십 년 후 우리를 기다리는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 P96

 자연사는 얼추 더디고 역한 냄새가나고 고통스러운 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자연사는 심지어 집에서 벌어지느냐 공중시설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이 환자처럼 촛불이 꺼질 때처럼 깜박거리다가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는 가련한 노인은 임종하는 사람 한 명 없을 정도로 보잘것 없었다. 그는단지 숫자에 불과했고 의대생들 수술용 칼의 실험 대상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곳에서,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죽어 가야 하는 추악한 현실이란! 병원은 병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병상 사이에 칸막이도 없었다.  - P96

가렁 한때 나와 발을 맞대고 지내던, 병상보가 몸에 닿기만 해도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그 작은 환자를 상상해 보라! 감히 말하건대 "오줌 나온다!"라는 말이 기록상 그의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은 그런 일에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적어도 그런 것이 표준화된 반응이다. 그럼에도 죽어 가는 사람도 죽기 하루 이틀 전까지는 정신이 멀쩡한 경우가 흔하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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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그것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찾아서
(아사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메이 옮김, 봄날의책, 2017)

왜 화를 내서는 안 되는가? 왜 아픈 사람은 미안해하고, 사력을 다해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써야 하는가? 아서 프랭크는 이런 환경과 조건이 환자가주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거래‘의 일종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돌봄과 도움의 대가로 환자에게 명랑함과 용감함을 바라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누구나 아플 수 있다는 점, 누구도 평생 건강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다. 질병이 일탈의 상태가 아니라 건전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환자에게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아서프랭크는 말한다. 병듦과 고통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은유적 관념, 노화·질병·장애 · 죽음을 은폐하고 외면하는 사회적 시선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 P254

질병에 시달려본 사람은 자신도, 세계도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안다. 아서 프랭크 역시 아프면서 자신이 주변을 천천히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격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때로 반짝이는 햇살을 느끼고 비를 맞으며 몸의 경이로움을 인식했다. 배우자의 돌봄에 감사함을 느끼고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돌봄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곰곰 되새겼다.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의 경험도 소중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는 데서 질병이라는 것이 환자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 P254

아서 프랭크는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되고, 남의 인정을 받을 때 고통은 줄어든다고 말한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양쪽 모두 인생의 어떤 기회를 얻거나 잃어버릴 위험에 직면한다. 놀라운 점은 질병이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한쪽 측면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모두 죄책감 안에 가두는 일은 위험을 지속하는 일이며 돌봄의 핵심은 ‘너그러움‘에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자신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다. 너그러움은 종교적 자비심과도 연결된다. - P255

페미니즘 제2물결로 자기 몸의 통제권을 가져오려는 운동을 펼치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룹인 ‘보스턴 여성건강서 공동체‘는 1970년 《우리 몸우리 자신》이라는 역사적인 책을 남겼다. 지은이들은 몸의 정치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부장제가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여성의 몸을 다시 여성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는 기획을 선보인다. 
그들의 목표는 의학적 전문 지식을 자원 삼아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아서 프랭크는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환자가 자기 몸에 관한 담론의 주도성을 갖고 다양한 질병과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그는 아픈 몸은 침묵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 P256

 ‘몸‘이란 개념은 구체적 분석 대상이지만, 환자들의 이야기는 의학적 몸이 아니라 ‘경험된 몸‘lived body, ‘체현된 몸‘embodied body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접근은 몸에 대한 지식을 창출하는 권력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의사는 될 순 없지만, 누구나 환자가 되는 현실에서 ‘몸의 증언‘을 기록하고 말하는 일은 지나치게 편중된 ‘의료 권력‘을 좀 더 평등하게 재구조화하는 일로도 이어진다.
‘치료‘가 빼앗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기 위해 아픈 사람들은 누구나 스토리텔러가 될 필요가 있다고 아서 프랭크는 말한다. 아픈 사람들의 상처는 몸뿐 아니라 살아온 역사와 치료 과정 속에도 남아 있다.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치유의 길로 나아가게 하며 서로를 연결한다.
- P257

-마음의 그림자, 잘 다뤄내야할 중년의 과제

영원히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아이로 살아가는 피터는그림자가 없는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를융은 ‘아이다움‘에는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문명화된 어른은 아이를 볼 때 어떤 갈망을 느낀다. 채우지 못한욕구와 필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아이에게서 그가 느끼는 묘한 감정은 성인이 가진 ‘페르소나‘, 곧 연극적인 가면에서 떨어져 나간 인격의 한 부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 P283

존슨은 어둠을 거부하고 부정할수록 내면 다른 곳에 어둠이 저장되고 축적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선 잠깐 쉬거나 의례를 갖는 것도 좋다고 한다.
까다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끝냈을 때, 힘든 일을 마치고 어두움이 올라온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림자를 내려놓지 않도록 잠시시간을 두고 적극적인 명상을 하는 등 시간을 갖는다. 창조적인일을 한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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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 그 해석과 저항을 위한 여러 갈래 길들

미러링 논란이 거듭되면서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의 혐오 발언은 발간과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어판이 나온 2016년 8월 이전부터 이 책은
‘혐오의 시대‘를 맞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비평적 담론을 촉발할 것으로 예견되었고, 실제 그러했다. - P220

버틀러는 주저 《젠더 트러블》에서 솨회적 성을 가리키는 ‘젠더‘가 원본 없는 문화적 전략이며 반복, 모방이라는 주장을 폈다. 「혐오 발언에서도 발화자가 말을 반복할 뿐, 원저자가 아님을 강조하며 말의 권력을 해체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형태의 ‘상처 주는 말‘ injurious speech을 설명하면서 혐오 발언 규제, 반포르노그래피 논증, 군대내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 국가 검열 등의 논쟁을 검토한다. - P221

‘혐오 표현‘ hate speech은 책의 핵심을 이룬다. 이는 폭력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며 차별을 실행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예컨대 반포르노 활동을 펼친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일종의 혐오 표현이며 여성을 종속적 위치에 두면서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의 권력은 효력적이지 않다"고 본다.‘ 포르노그래피가 사회적 현실을 구성할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차별·혐오적인 표현이 곧바로 상처가 되며 행위로 연결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혐오 표현이 강자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약자의 입을 막아침묵시킨다(레이 랭턴)는 대부분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 P221

왜일까. 먼저 버틀러는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 등상처 주는 말을 하는 이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력을 가졌다는전제를 해체하려 한다. 말하는 자는 그 발언의 창시자가 아니며 말은 항상 통제할 수 없다. 말의 의미는 끝없이 변화•탈선하고, 청자의 개입에 따라 발화자의 의도와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혐오 표현이 고통을 야기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상처주는 말‘이 ‘저항의 도구‘로 바뀔수 있는가능성에 더욱 집중한다. - P222

혐오 표현에 대한 국가 개입과 법적 규제는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안이다. 버틀러는 원칙적으로 혐오 표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한다. 
법의 호명에 신성한 권력, 마법 같은 효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혐오 표현의 법적 규제는 수신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르르 맞받아치는 말도 함께 금지할 수 있다. 정치적 중립이 의심스러운 국가의 판결은 소수자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법의 말, 국가의 발언, 공적 영역의 목소리는 주로 주류 쪽의 언어나 견해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입법 의도는 국가에 의해 불가피하게 오용된다"고 그는 말한다." - P222

그 대신 버틀러는 ‘맞대응‘을 제안한다. 혐오적인 발언에 저항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 맞받아치기, 전복하기, 해체하기 등이다. ‘퀴어‘라는 욕설을 동성애자들이 해방적으로 바꿔버린 것이 한 예다(우리나라에서도 ‘잡년행진‘ 등의 사례가 있다). 주변화된 비주류는 말을 재맥락화하고 재구성해 혼돈을 만들고 개입하며 ‘기원‘을 해체할 수 있다. - P222

그럼에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혐오 집단의 위협은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력적(마리 마츠다)일 수 있는 까닭이다. 언어를 재가공해서 저항하고 전복하는 일을 ‘민주적 해법‘이라고 제안하는 버틀러의 사유가 엄혹한 현실에서는 너무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은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설명해주는 이론적 틀이 되기도 했지만 한쪽에서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사회학·여성학)는 이 책을 두고 ‘혐오 표현‘은 강자가 약자에게하는 정치적 폭력, 언어폭력의 맥락을 갖고 있는데, 이를 약자가 그대로 되받아치는 모습을 볼 때 구경꾼들은 ‘상호 폭력‘이라고간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베‘와 ‘메갈리안‘을 똑같은 혐1오 발화자라고 보는 이들의 시선이 단적인 예다.
ble Speech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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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홍수 속으로

나는 안달복달하는 바람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흩어지는 구름을 한동안 보았다. 강의 변형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나와 같은 종의 비뚤어진 탐욕이 실감나서였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세상을 멋대로 바꾸는 그 탐욕이 거북했다. 우리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홍수와 가뭄의 대참사로 돌아올 만한 행동이다. 오염된 하구를 베번으로 조금씩 홀러들게 하는 하수처리 방식이나, 다운스의 비밀 저장고에서 지하수를 야금야금 훔치는 생수회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 P250

그러다 앞으로 일이백 년 후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러다강이 완전히 말라붙는 건 아닐까? 계곡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던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쩍쩍 갈라진 땅바닥만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바다가 서서히 밀려오다 끝내는 이 도시를 집어삼키며 소금기 풍기는 늪지대로 되돌려 놓으면서 소들의 시체와 우리 인간이 세상에 그득그득 채워놓고 있는 플라스틱으로 오염되는 게 아닐까? 미래의 어느 날 이곳에 서서 지켜볼 누군가의 눈앞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사막 같은 세상일까, 유독물로 오염된 바다일까? - P250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루이스의 홍수는 하나하나 축적된 행동이 결국엔 화를 자초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범람원에 건물을 짓는 일은 아무리 많은 하수관을 설계해 넣는다 해도 여전히 위험한 모험이다. 물론 비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방법을 찾는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P250

특정 씨앗의 발아를 위해서꼭 필요한 산불처럼 홍수가 파괴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집이 하수 오물로 가득 차고 책마다 주글주글 주름이 잡히고 옷이 물에 쓸리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런 긍정적인 영향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환경청조차 수긍했다시피,
우즈강의 개간은 점차 적정 수준을 넘어섰고 루이스가 기후변화의 진통을 잘 버텨내기 위해서는 일부 땅은 강에게 내주어야한다. - P251

나는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우연히 우즈강의 둑에 천변저류지washland 를 복원하려는 프로젝트에 대해 보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변저류지란 범람한 물이 배수구와 하수구로 들어가 상점과 주택으로 흘러드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넘쳐난 물의 대기 공간 역할을 하면서 단기적으로 범람을 버텨주는 목초지를 말한다. 
농업이 점점 집약화되면서 주민들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지만 한때는 작물이 아주 풍성하게 자라서 1년에 세 차례나 활용할 수 있었다. 즉, 한여름에 건초 수확을 한 후 두 번째 자라난 풀로는 소가 가을까지 뜯어 먹고 또 그 뒤에는 양이 겨울 폭풍이 닥칠 때까지 뜯어 먹을 수 있었다. - P251

어쨌든 서식스 대학의 생태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짜낸 이 복원 프로젝트는 이곳의 야생 목초지를 복원하여 강 하류의 범람 위험성을 낮추는 동시에 내가 셰필드 파크 인근에서 봤던 수레국화, 칵풋, 왕바랭이, 김의털, 요크셔포그 등의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풀들이 다시 강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려는 구상이었다. - P251

 소소하지만 어딘지 기분을 아주 좋게 해주는 계획이었다. 경제적인 동시에, 넉넉한 마음이 배어 있어 다시금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인간이 어쩌면 이 세상에 잘 적응해볼 수도 있겠다고. 여기저기 깎아내다 결국엔 그 기반이 내려앉아 전부 다 무너지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 P252

갑자기 활기가 넘치면서 허기가 몰려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돌아 내려왔다. 창가에 빵과 자전거 한 대, 제라늄화분, 물레를 쌓아둔 별난 식료품점에서 피자 한 조각과 딱총나무 꽃의 향이 나는 달달한 청량음료를 점심거리로 사 들고 철로 변으로 내려가 햇볕을 쬐며 피크닉 분위기를 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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