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부터 단단히 낚였다. ㅋㅋㅋㅋㅋ

정원사를 구하라니...ㅠㅠ
카렐 차페크 님, 글을 너무 재밌게 쓰셨다^^
위트 있으시고 아주 유머러스하시다.
신나게 열두달 읽어봐야겠다.
❤️🧡💛💚💙💜❤️
어머낫 하트 색깔이 자꾸 바뀌네!

아담한 정원을 조성하는 법

아담한 정원을 조성하려면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만, 뭐니뭐니 해도 역시 정원사를 구하는 게 제일입니다. 정원사가 오면, 막대기며 나뭇가지며 빗자루 같은 것들을 잔뜩 푹푹 꽂아놓고는, 이런 것들이 단풍나무 산사나무고 라일락이고 장미목이고 덤불 장미고 기타등등 모종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흙을 파고 갈아서 토닥토닥 두드려 놓고는 자갈을 깔아 작은길을 내고 칙칙하게 색바랜 이파리를 군데군데 꽂고는 여러해살이라고 할 테죠. 그리고 장래 잔디밭이 될 자리에 씨를 뿌리겠지요.  - P7

그래요. 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아담한 정원에 물 주는 일은 무척 간단할 거라고 쉽게들 착각하곤 합니다. 호스까지 갖췄는데 뭐가 그리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금세 똑똑히 깨닫게 됩니다. 이 호스란 놈은 길이 들 때까지 참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듣는 위험한 짐승임을요. 온몸을 뒤틀고 펄쩍 뛰고 꿈틀거리고 여기저기 흥건하게 물바다를 만들고는 아주 신이 나서 제가 저질러 놓은 난장판에 풍덩 뛰어들고, 급기야는 주인한테 홱 달려들어 다리를 휘감고똬리를 튼다니까요. 발로 꾹 눌러 밟아 제압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호스는 핵 머리를 곧추세우고 여러분의 허리와 목을 휘감고 꼬일 겁니다. 코브라와 싸우듯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이 괴물이 황동 아가리를 갑자기 돌려서 어마어마한 물살을 하필 활짝 열어 둔 창문 안으로 발사할 겁니다. 엊그제 새로 걸어 둔 커튼이 엉망이 되어 버리겠지요! 
어쨌든 아랑곳없이 단단하게 붙드셔야 합니다. 그러면 짐승은 고통으로 뒤채며 물을 뿜기 시작할 겁니다. 그런데 아가리가 아니라 아예 수전에서 물보라가 샘솟습니다. 아니면 몸뚱어리 어딘가에서물살을 뿜든가요. 사태를 진압하려면 넉넉잡아 장정 셋이 매달려야 합니다.  -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이삼촌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이삼촌>에는 10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순이삼촌', '도령 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아버지'의 네 편이 모두 제주 4.3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에 대해 쓰엿기 때문이다. 작가의 4.3 등단작인 '아버지'는 4.3 사건을 겪은 어린 소년의 개인적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을 아이들의 머리 역할을 하던 소년이 아버지가 산으로 올라간 후, 한없이 스스로 움츠러들어가는 심리와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4.3 사건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순이삼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인 1979년은 가해자였던 육지의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였고 그 일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떠한 진 상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피해자들은 입밖에 내어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살아있는 권력들이 무서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4.3 사건은 공식 역사에서 오랫동안 '공산폭동'으로 왜곡되었다.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고 긴 세월을 이어오던 섬 공동체를 일거에 파괴시킨 4.3사건의 진실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철저하게 은폐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건 이후 제주도는 '붉은 섬'으로 낙인찍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4.3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되새기고 싶지 않은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였다."(김영범'기억투쟁으로서의 4.3문화운동 서설).(임규찬, 해설 337면)


  아,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 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삼만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순이삼촌, 85면)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 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 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삼십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순이삼촌,86면)


  현기영의 4.3 사건 관련 작품들은 소설이지만 내게는 단순히 소설로만 읽히지 않았고, 어떤 기록물보다 더 설득력을 발휘하면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4.3 사건의 피해자들은 무고하게 죽은 3 만여명의 희생자들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의 기억 속에 지옥의 모습으로 남았겠지만, 나는 이 피해자들 중에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역시 힘없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었다는 것에 더 분노한다. 특히 부녀자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악행은 그들이 진정 짐승으로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짐승도 제 울타리에 들어온 동족들에게는 이런 행동을 일삼지 않는거 아니었나?

  표제작인 '순이삼촌'의 주인공인 순이삼촌은 산으로 피신한 남편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 할머니에게 맡겨 놓은 오이리를 찾아 잠시 산에서 내려온 날 그 사단(소개작전)이 난 것이다. 그날 밤 소개(제주방언은 소까이,疏開)작전이 전개되면서 반동분자로 분류가 되었고 난리통에 오누이를 잃었으며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총살하기 전 먼저 기절하는 바람에 죽은 사람들 밑에 깔려있다 간신히 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이후의 삶은 산 것이 아니었고 유복자 딸 때문에 산 세월이었으며 결벽증, 신경 쇠약과 환청에 시달리는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였다. 


  그들은 또 여맹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女盟)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순이 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 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 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 날 마당에서 도리깨질하던 순이 삼촌이 남편의 행방을 안 댄다고 빼앗긴 도리깨로 머리가 깨어지도록 얻어맞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다.(순이삼촌, 79면)


  도피자 가족들은 함덕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취조를 받고 닷새만에 풀려나왔는데 순이 삼촌도 그중에 끼여 있었다. 그 닷새 동안 할머니 심부름으로 길수 형과 내가 번갈아가며 차좁쌀 주멱밥을 매일 한 덩어리씩 차입해주었다. 마지막 날엔 내가 주먹밥을 가지고 가다가 도중에 풀려 나오는 순이 삼촌을 만났는데 그 몰골은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비녀가 빠져나가 쪽이 풀리고 진흙으로 뒤발한 검정 몸빼에다 발은 맨발이었는데, 길가 돌담을 짚고 간신히 발짝을 떼며 허위허위 걸어오고 있었다.(순이삼촌,89면)


  소까이날에 피해 입은 것은 대부분 아녀자나 노인들이었는데 중호네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남정네는 미리 피하고 없었다. 단지 젊다는 이유 때문에 폭도로 몰려 공연히 죽기 쉬운 그들인지라 벌써 한 두달 전에 산과 들로 도망가 굴속에서 피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호 아버지도 소까이 보름 전 어느 날 마루에서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마당가의 수리대숲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면서 저편 고샅길로 올라오는 토벌군들 한떼가 보이자 기겁해 일어나 뒷담 넘어 도망쳤던 것이다.(해룡 이야기, 151면)


 

   순이 삼촌뿐만 아니라  '도령마루의 까마귀'에서 귀리집, '해룡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호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에서의 10살짜리 소년과 같은 사람들이 지금 제주도에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 무섭던 소까이(疏開). 온 섬을 뺑 돌아가며 중산간 부락이란 부락은 죄다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을 훤히 밝혀놓던 소까이. 통틀어 이백도 안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삼만이 죽었다. 대부분 육지서 들어온 토벌군들의 혈기는 그렇게 철철 넘쳐 흘렀다. 특히 서북군은 섬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만큼 혈기방장하였고 군화 뒤축으로 짓뭉개어 이 섬을 지도상에서 아주 없애버릴 만큼 냉혹했다.(해룡 이야기, 149면)


'순이삼촌'이 발표될 당시만 해도 제주 4.3사건은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제주사람들의 억눌린 울음으로만 구전되던 4.3사건을 기록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소설이 바로 <순이삼촌>이고,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공식화된 문헌으로서도 최초였다고 한다. 역사적 진실 복원의 첫 시발점이 된 <순이삼촌>은 실제 역사가 하지 못할 대체 역사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인 제주 '북촌 너븐숭이'는 4.3 유적지 가운데 모슬포 대정의 '백조일손지묘'와 함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작가의 고향인 노형리가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음에도 작가가 굳이 북촌을 선택한 것은 한날 한시에 양민 사백여명이 군인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집단 학살의 상징성 때문이다.(임규찬, 해설 340)


  자정이 넘어 큰아버지가 우리들을 깨워 세수하고 오라고 방 밖으로 떠밀었을 때 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사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 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가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순이삼촌,60면)



  <순이삼촌>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제주도에 가서 제대로 즐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

차를 타고 제주도 중산간을 가면 이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저기 능선 어딘가에 있던 마을이 다 불타 없어지지 않았을까 동굴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죽음으로 남았을가,  대나무 숲이 있는 호젓한 마을을 보면 지금은 이리 평화로워 보이지만 저 아래 어딘가에 총 맞아 죽은 시신이 묻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할 것이고, 오름에 오르면서는 읍내에 홀로 떨어진 아들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 도령마루를 오르던 그 이름도 생소한 귀리집(귀리댁이 아닌)을 생각할 것이고, '노형, 서호, 대정, 북촌, 대정 모슬포, 일주도로' 라는 마을 이름이나 도로표지판을 보면 트라우마처럼 소설의 내용들이 오래오래 자동재생될 거 같아 몹시 힘들지도 모르겠단 그런 생각.

그래서,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고 나서 한동안 다시 책을 펼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기사를 읽거나 지식 검색으로 제주 4.3 사건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고 나서 그 동안 검색으로 알아왔던 지식으로 내가 제주 4.3 사건을 제대로 알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신들린듯한 필력으로 제주 4.3사건의 작품을 줄줄이 써낸 현기영 작가에게 정말 한없는 경의를 표한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1970년대 말 필화사건으로 거의 일년 반 동안 펜대를 꺾은 채 술로 허송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나타나서 어서 일어나라고 무섭게 야단쳤던 꿈이 너무도 생생했다고 한다. 그 여인이 바로 '순이삼촌', 그제야 작가의 분신으로서 그녀가 항상 내면에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임규찬,해설 348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23-02-0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책을 읽고,
제주도 여행에서 많은 일정을 4.3사건 관련된 곳으로 다녀왔었죠.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속에 35년을 관통한 아픔이..라는 문장이지 싶은데. 잊혀지지 않네요~!

은하수 2023-02-09 15:53   좋아요 1 | URL
북프리쿠키님께서도 그러셨군요 저도 벌써 저만의 4.3추모 여행이랄까 계획을 하고 있어요
이 책은 읽고 제주에 간다면 그렇게 될거 같아요.
 

《순이삼촌》 첫문장

내가 그 얻기 어려운 이틀간의 휴가를 간신히 따내가지고 고향을 찾아간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 제삿날에 때를 맞춘 것이었다. 할머니 탈상 때 내려가보고 지금까지이니 그동안 팔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바쁜 직장 핑계 대고 조부모 제사에한번도 다녀오지 못했으니 큰아버지나 사촌 길수 형은 편지 글발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던히도 욕을 하고 있을 터였다. - P42

내게 고향이란 무엇이었나. 나에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곳이었다. 관광지니 어쩌니 하지만 그것도 지역 나름이어서 나의 향리인 서촌은 이렇다 할 관광자원도 없고 하늬바람이 몰아쳐 귤농사도 안되는 한촌(寒村)이었다. 적어도 내 상상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 이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년 전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외면하여 살아오길 팔년, 그 유맹(流氓)의 십년 전으로 되찾아가려면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주저주저하며 다가가야 하리라. - P43

가족장지 매입에 대한 의논을 끝내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한담을 즐기고 있는데 불현듯 순이順) 삼촌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어릴 때 보면 큰집 제삿날마다 부조로 기주떡 구덕을 들고 오던 분이었다. 촌수는 멀어도 서너집 건너 이웃에 살아서 큰집과는 서로 기제사에 왕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길수 형과 나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고향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불러 가까이 지내는 풍습이 있다). 
어서 삼촌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더구나 삼촌은 일년 가까이 서울 우리 집에 올라와 밥을 해주며 고생하다가 불과 두달 전에 내려오셨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퍽 궁금했다. 혹시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닐까? 나는 길수 형에게 물어보았다.
"형, 순이 삼춘이 통 안 보염싱게 무슨 일이 이서?"
그런데 웬일인지 내 말에 사람들은 하던 말을 문득 멈추고 조용해졌다. 길수 형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큰아버지도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얼굴을 돌렸다. - P47

"겨를 없어 너한티는 못 알렸져마는 그 삼춘은 며칠 전에 죽어부러시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우꽈? 순이 삼춘이 돌아가셔서 마씸?"
그분이 돌아가시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불과 두달 전만 해도 잔병치레 없이 늘 정정하시던 분이 아니던가.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작은당숙이 나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몰랐는디 형님, 무사(왜) 나헌티는 기별도 안합디가?"
이렇게 고모부가 말해도 큰아버지는 담배만 풀썩풀썩 피워댈 뿐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에 친누이 같이 지내던 사이인지라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 좌중은 한참 침묵이 흘렀다. 싸르락, 싸르락, 창호지창에 싸락눈 흩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P48

그러다가 결국 당신은 국민학교 근처 일주도로변의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부패한 정도로 봐서 죽은 지 이십일은 좋이 넘어 보였다. 그 밭이 일주도로에서 한밭 건너에 있었음에도 이십일이 넘도록 사람 눈에 안 띈 것은 거기가 후미지고 옴팡진 밭인데다밭담으로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흰옷 아닌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서 더더욱 눈에 안 띄었을 것이다.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올 때 입었던 밤색 두루마기에 따뜻한 토끼털 목도리까지 두르고 자는 듯 모로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는 먹다 남은 꿩약 싸이나가 몇 알갱이 흩어져 있고...
그렇게 발견된 것이 불과 여드레 전이라는 것이었다. - P50

그의 속삭이는 말로는 순이 삼촌은 심한 신경쇠약 환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환청 증세까지 있어 시골에 있을 때도, 한 적이 없는 말을 들었노라고, 보지도 않은 흉을 봤다고 따지고 들기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밥 많이 먹는 식모‘라는 것도, 우리에게 품은 오해도 모두 환청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역시 그랬었구나, 옆에서 얘기를 듣던 아내는 방정맞게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당신의 신경쇠약은 지독한 결벽증과도 서로 얽힌 것인데 이런 증세는 꽤나 해묵은 것이라고 했다. 

그건 사오년 전 콩두말을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얻은 병이었다. 
하루는 이웃집에서 길에 멍석을 펴고 내다 넌 메주콩 두말이 감쪽같이 없어졌는데 그 혐의를 평소에 사이가 안 좋던 순이 삼촌에게 씌워놓았다.
두집은 서로 했느니 안했느니 하면서 옥신각신 다투다가 그집 여편네가 파출소에 가서 따지자고 당신의 팔을 잡아끌었던 모양인데 파출소 가자는 말에 당신은 대번에 기가 죽으면서 거기는 못 간다고 주저앉아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당신이 콩을 훔친 것으로 소문나버릴밖에. 당신이 그전서부터 파출소를 피해 다니는 이상한 기피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일단 씌워진
누명을 벗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P58

왜 고향엔 유별나게 싸락눈이 많을까? 바람 많이
부는 기상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언제나 고구마, 조팝을 상식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내리는 산디쌀일 것이다. 모처럼 제삿날에나 먹어보던 ‘곤밥‘. 왜 ‘곤밥‘이라고 했을까?  ‘곤밥‘은 ‘고운밥‘에서 왔을 것이고, 쌀밥은 빛깔이 고우니까. 어린 시절에도 파제 후 곤밥을 몇숟갈 얻어먹어보려고 길수 형과 나는 어른들 등 뒤에서 이렇게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곤 했다. 제상마저 소각 때 태워먹고 송진내 물씬 나는 날송판때기 위에다 제물이라곤 마른생선 하나에 메밀묵 한쟁반, 고사리, 무채 각각 한보시기밖에 진설할 것이 없던 그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메는 꼭 산디쌀밥이었다.  - P60

 자정이 넘어 큰아버지가 우리들을 깨워 세수하고 오라고 방 밖으로 떠밀었을 때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싸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것들은 이 골목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 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 P60

그리고 파제 후 이집 저집 지붕 위에 던져올린 퇴줏그릇의 세숟갈 밥을 먹으러 날 새자마자 날아드는 까마귀들도 기분 나빴다. 까마귀가 죽은 귀신의 혼령이라든가 저승차사라고 하는 것 때문이아니라, 그 광택 있는 검은 날갯빛이 마을 어른들을 잡으러 오던 서청(西) 순경들의 옷빛하고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얕보던 까마귀들, 사람이 다가가도, 우여우여 소리쳐도 달아날 줄 몰랐다. 그것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 심심하면 겨울 하늘로 떼 지어 날아오르며 세찬 날갯짓으로 하늬바람 타기를 잘했다.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 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시체를 뜯어 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 P61

"순이 아지망은 죽어도 발에 죽을 사람이여. 받을 에워싸고 베락같이 총질해댔는디 그 아지망만 살 한점 안 상하고 살아나시니 참 신통한 일이랐쥬."
"아마도 사격 직전에 기절해 쓰러진 모양입디다. 깨난 보니 자기 우에 죽은 사람이 여럿이 포개져 덮연 있었댄 허는 걸 보민......
그때 발써 그 아지망은 정신이 어긋나버린 거라 
마씸" 하고 작은당숙어른이 말을 받았다.
"해필 그 밭이 순이 아지망네 밭이어시니."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 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 덩어리만씩 큼직큼직해시니까."
"그핸 숭년이라 보릿겨범벅 먹던 때랐지만 그 아지망네 밭에서 난 감저는 사람 죽은 밭엣거라고 사름들이 사 먹질 안했쥬."
"그 아지망이 필경엔 바로 그 밭이서 죽고 말아시니, 쯧쯧."

어른들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야릇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순이 삼촌은 한달 보름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 그날 그 밭에서 죽은 게 아닐까 하고. - P62

이런 북새통에 별안간 군중 속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났다.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그때 서편 울타리 돌담이 여기저기서 매달린 사람들의 체중에 못 이겨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 울타리 터진 데로 몰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지체 없이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다시 운동장 복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너진 돌담 위에 흰 무명적삼에 갈중이를 입은 노인이 한사람 엎어져 죽은 모양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군인 여남은명이 빠른 동작으로 돌담 위로 뛰어오르더니 아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조회대 뒤에 늘어서 있던이십여명의 군인들도 앞에 자세로 잽싸게 뛰어나오더니 정면에서 사람들을 포위했다. 단상의 그 장교는 권총을 어깨 위로 빼들고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강하게 턱을 올려젖히자 철모가 햇빛에 번쩍 빛났다. - P67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 수행 둥에 있소. 여러분의 집은 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여러분을 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 둥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없이 총살할거이니 명심하라우요."

장교의 귀선 이북 사투리가 겁 집어먹은 부락민들의 머리 위에카랑카랑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제주읍으로 소개시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군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당장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만 완전히 넋 잃고 절망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무엇을 예감하고 두려워하는가? 마을 쪽에서 해풍을 타고 매캐한연기 냄새가 더욱 심하게 밀려오고 불티가 까맣게 뜬 하늘에 불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게다가 이따금 총소리가 탕탕 울렸다. - P68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교문을 향해 늘어서기 시작했을때 별안간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 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 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 P68

장대 두개가 서로 번갈아가며 사람들을 몰아갔다. 장대가 머리위로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장대에 걸린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렸다. 장대 뒤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공포를 쏘아대자 사람들은 장대에 떠밀려 주춤주춤 교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휘둘렀다. 사람들은 휘둘러대는 개머리판이 무서워 엉금엉금 기어갔다. 가면 죽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떻게 제 발로 서서 걸어가겠는가. 뒤처지는 사람들에게는 뒤꿈치에다 대고 총을 쏘아댔다. - P71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어 일제사격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 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 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 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 P71

"겔쎄, 나도 중산간 부락민들을 해안지방으로 소개시키는 데 참가했었쥬마는....… 겔쎄 말이여, 일단 몇날 몇시까지 소개하라고 포고령이 내린 후제도 계속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자는 공비나 공비 동조자로 간주해서 노인 아이 할 거 없이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은 있었죠. 
사실 작전지역 내의 어떤 부락에 들어서민, 바로 전날에 두집 건너서 하나씩 붙여놔둔 소개하라는 포고문이 발기 발기 찢어젼 바람에 펄럭펄럭하는디, 이건 틀림없이 공비 소굴이구나 하는생각이 팍 들어라. 그런디 이 부락 사건은 소개하라고 사전에 포고령도 없어시니.." - P74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 검속을 하니, 결국 마을 남정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순경들이 도피자라고 찾던 폐병쟁이 종철이 형은 공비가 습격해온 밤에 궤 뒤에 숨어 있다가 기침을 몹시 하는 바람에 발각되어 대창에 찔려 죽었고, 헛간 멍석세워둔 틈에 숨어 있다가 역시 비의 대창 맞고 죽은 완식이 아버지도 순경들이 찾던 도피자였다. 

우리 종조부님도 사건 석달 전에부락 출신 공비의 대창에 찔려 돌아가셨다. 당시 1구 구장이던 종조부님은 밤중에 내려온 마을 출신 폭도들로부터 식량을 모아달라는 요구에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 P75

그러나 대부분의 남정네들은 마을에 그대로 눌러 있었는데, 이들은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할 수 없이 한라산 아래의 목장으로 올라가 마른 냇가의 굴속에 피난했다.
행방을 알 길 없는 남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던 순이 삼촌도따라 올라갔다. 이 섬은 워낙 화산지대라 곳곳에 동굴이 뚫려 있어서, 우리 부락처럼 폭도에도 쫓기고 군경에도 쫓긴 양민들이 몰래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 P76

하여튼 이렇게 남정네들이 마을을 비우자 군경 측에서는 자연히입산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고 그러한 오해가 저 섣달 열여드레의끔찍한 사건의 소지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건은 마을남정들이 그 냇가 동굴에서 혈거생활을 시작한 지 아흐레 만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순이 삼촌은 우리 할머니에게 맡겨두었던 오누이 자식을 데리러 내려와 있다가 그만 화를 당하고만 것이었다. - P77

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숨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굴에서 여러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 P79

 그들은 또 여맹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순이 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날 마당에서 도리깨질하던 순이 삼촌이 남편의 행방을 안 댄다고 빼앗긴 도리깨로 머리가 깨어지도록 얻어맞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들은 밭에서 혼자 김매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냅다 덮친다는 소문이었으니 나이 찬 딸을 둔 집에서는 이래저래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딸이 겁탈당하기를 기다리느니 미리 선수를 써서 서청 출신 군인에게 시집보낸 우리 할아버지의처사는 백번 잘한 일이었다.  - P79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삼만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 P85

그날밤 사람들은 한기를 피해 모두 한 교실로 몰려들어가 서로붙안고 밤을 지새웠는데, 밤중에 우리들은 두번 호되게 놀랐었다.
한번은 마을에서 대밭이 타면서 마구 터지는 폭죽 소리를 총소리로 잘못 알고 놀랐고, 또 한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 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밤이 이슥해진 그때까지 시체 무더기 속에 파묻혀 까무러쳐 있었던 것이다. 교실 안어 들어선 당신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 P88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 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더운 여름날 당신은 그 고구마밭에 아기구덕을 지고 가 김을 매었다. 옴팡진 밭이라 바람이 넘나들지 않았다. 고구마 잎줄기는 후출근하게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점 없는 대낮 사위는 언제나 조용했다. 오누이가 묻힌 봉분의 뗏장이 더위 먹어 독한 풀 냄새를 내뿜었다. 돌담 그늘에는 구덕에 아기가 자고 있었다.

당신은 아기구덕에 까마귀가 날아들까봐 힐끗힐끗 눈을 주면서 김을 매었다. 이랑을 타고 아기구덕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이랑을 타고 돌아오곤 했다. - P94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일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지를 못했다. 흰 뼈와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 P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리커버)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지하철도)라는 제목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제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처음 이 책에 끌린 것은 언뜻 보면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놓은 표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아름다움은 액자에 끼워 집 벽을 장식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책의 내용을 생각해보면-책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 지식조차도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 이 책의 표지는 그냥 흑인 노예들의 비참하고 비참하고 비참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하철도'는 사실은 진짜 철도가 아니다. 미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 이전 남부의 도망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던 일종의 점 조직으로 이루어진 지하 단체의 이름이다. 지하 철도가 진짜 철도인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가 점 조직을 비유해서 한 말임을 알고 화가 났다는 작가가 2000년 봄 진짜 지하 철도가 땅 속을 다니는 기차라는 설정의 작품을 구상하였고, 2016년 드디어 작품으로 출간이 된 것이다.


** 주인공 '코라'가 지하철도에 올라타고 남부의 조지아 주를 넘어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를 지나고 테네시를 지나 북부의 인디애나까지의 여정은 차마 머리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참혹하고 잔인한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이것이 진정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인지... 자꾸 되묻고 싶어지고 끓어 오르는 화와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중간에 그만 두고 싶었지만... 이런 악인들에게 맞서 자유를 갈망하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 '코라'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인간으로 입은 상처는 인간만이 치유할 수 있기에... 마지막에 서쪽으로 가는 짐마차를 얻어 타고 가는 장면으로 '코라'의 여정은 다시 시작되지만 그것은 희망의 여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서두!)


**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된 것이 1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백인과 흑인의 지위가 여전히 법에서 명시하는 '평등'한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오늘날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흑인 노예들의 희생이  절대적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지만 대표적인 인종차별 국가 중의 하나가 미국이라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에서 차별이 없는 세상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책을 읽고 나서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더 막막해진다. 변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야 스토리가 연결되는 듯해서 좀 읽기가 좋아졌다. 빙빙 에둘러 돌아왔으니 술술 읽어봐야지~~

그러니까 여태 발베크, 베네치아, 피렌체 세 도시를 날아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여행을 간다고 하더니.. 결국 여행 가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은 거네.

그토록 고대하던 이탈리아 여행은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샹젤리제에서 첫사랑의 그녀를 다시 만난다. ‘질베르트 스완‘. 그렇다. 스완과 오데트의 딸!

막다른 골목인줄 알았는데 또 다른 샛길이 열린 것일까...

**19세기에 샹젤리제는 파리지앵들이 즐겨찾던 산책로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것이 "인도양의 암초와도 흡사한 자수정 바위" 사이로 스며 들어가는 듯 느껴졌다. 내 힘을 넘어서는 최상의 운동이, 나를 둘러싼 방의 공기를 내용물 없이 텅 빈 껍질마냥 벗겨 버리면서 나는 그곳을 베네치아의 공기로, 내 상상력이 베네치아라는 이름 안에 가두어 놓았던 꿈의 분위기처럼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바다의 분위기로 채워 놓았고, 그러자 나는 내 영혼이 기적적으로 육체에서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 P350

 이 느낌은 목이 심하게 아플 때 느끼는토하고 싶은 막연한 욕구와 겹쳐졌고, 그래서 난 침대로 옮겨져야 했는데,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의사는 지금은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떠나는 것을 단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후에도 적어도 앞으로 일 년 동안은 여행 계획이나 흥분의 원인이 되는 것은 모두 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 P351

그리고 슬프게도 의사는 내가 라 베르마를 들으러 극장에 가는 것도 단호히 금지했다. 베르고트가 천재라고 한 그 뛰어난 여배우가 피렌체와 베네치아, 발베크에 가지 못하는 나에게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일깨워 줘, 그곳에 가지 못하는 나를 위로해 줄 수도 있었으련만, 부모님께서는 매일 나를 샹젤리제에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고, 게다가 내가 피곤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사람을 딸려 보냈는데, 그사람이 바로 레오니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 일을 하러 오게 된 프랑수아즈였다.  - P351

 잔디밭 저쪽 끝에는 분수가 있었고, 조각상 하나가 분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분수 수반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붉은 머리 소녀에게, 또 다른 소녀가 외투를 걸치고 라켓을 집어 들며 가로수 길에서 빠른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 질베르트 나갈게. 오늘 저녁 식사 후에 우리가 너희 집으로 가는 거 잊지 마!" 질베르트라는이름이 내 곁을 지나갔다. 그곳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해 직접 불러,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존재를 그만큼 더 환기하면서 지나갔다. 그 이름은 그렇게내 곁을 활동 중인 상태로, 말하자면 내곁을 따라 던져진 이름의 곡선을 따라 이름의 표적인 질베르트의 귀에 가까워지면서 힘이 더 커진 상태로 지나갔다.  - P352

 가장 시급한 일은 우리가, 질베르트와 내가 다시 만나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고, 말하자면 그때까지 우리 사랑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그녀를 보고 싶어서 그렇게 초조해하는 여러 이유들도 틀림없이 성숙한 인간에게는 그토록 절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훗날 쾌락을 가꾸는 일에 좀 더 능숙해지면, 내가 질베르트를 생각하듯,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실제에 부응하는지 어떤지 알려고 초조해하지 않고, 그 여인을 생각하는 기쁨만으로, 또 그녀가 우리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확인할 필요 없이 그 여인을사랑하는 기쁨만으로 만족하리라.  - P362

 나는 질베르트의 모습이 여자 가정교사를 따라 조각상 뒤에서 나타날 순간만을 기다렸다. 조각상은 팔에 안은 아이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듯했고, 태양의 축복을 받아 빛으로 넘쳐났다.

 《데바>> 애독자인 노부인은 늘 앉던 안락의자에서 정다운 손짓으로 관리인을 부르며 소리쳤다. "정말 좋은 날씨군요!" 그리고 "의자를 빌려 주는 여자"가 안락의자 값을 받으러 오자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자신이 구하고 있는 것이 마치 꽃다발이기라도 한 듯 장갑 아래 트인 부분에 10상팀짜리 표를 끼워 넣었다. 표를 준 사람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넣어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새로운 직업의 발견^^
샹젤리제의 공원에 의자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 P3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