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날들》 조 앤 비어드 지음

지난달부터 책이 안읽히고 집중이 안된다.
왜 그런건지 명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런 상태다.
생각해보면 하나의 이유는 아닌, 복합적인 이유이지만 일단은..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매일 운동을 다녔더니 체력의 한계가 오기도 해서 평소라면 책을 읽었을 시간에 졸고 있는 날이 많아져서이기도 하고...
튀르키예 여행 직전에 감기에 걸렸었는데 여행최적기라는 5~6월에 비바람 몰아치고 강풍에 기온도 오르락내리락 널을 뛰고 그래서 감기는 나을 줄 모르고 악화된 상태로 귀국해 일주일을 골골대며 앓았다. 지독한 감기의 여파로 몸무게도 쑤욱 빠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걱정스런 인사를 들었다.

그럼에도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도 하고 얼마 전 책도 구입했다. 물론 잘 읽히진 않는다. 책읽기도 체력이 필요하단걸 깨달았다. 이제 내몸은 젊지 않다. 잘 챙기자!

조 앤 비어드의 《축제의 날들》에 수록된 단편 <워너>를 읽고 있다. 주인공 이름이 ‘워너‘이다.
한밤중,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잠든 다세대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워너는 이 건물 5층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시끄럽게 소리치는 사람들의 외침에 잠에서 깨어난다. 워너가 사는 집 세 개 층 아래에서 불이 난 것이다.

˝캔털루프 멜론색의 일출, 줄무늬 소들, 데어리 퀸(아이스크림가게), 검은 플라스틱 산을 이루는 엄청난 쓰레기와 개 오줌 냄새를 제외한 모든 것들. 하지만 그날 밤은 그렇지 않았다. 어두운 거리는 춥고 상쾌했다. 모퉁이를 돌아 워너가 사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991년 12월 19일 자정이 되기 직전, 바로 그 세기말적인 주택에서 또 다른 뉴욕다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벽 속 아주 깊은 곳, 워너가 사는 집 세 개 층 아래에서, 천으로 감싼 전선의 잔가지가 지글거리더니 마치 꽃망울 터지듯 피어나버린 것이다.˝(22쪽)

색다르고 새롭게 읽히는 문장들에 마음이 간다. 긴박한 상황 속에 놓여있는게 분명한데도 문장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슬로우로 보여주는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빠르게 읽을 수 없었다.
˝비명소리와 연기 냄새˝ 목숨을 걸고 불과 연기를 피해 탈출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지금 여기에 이 순간들이 왜 필요한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기억‘들이 파고든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천천히 읽으면서 문장에도 집중하라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마침내,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9 년을 함께 산 고양이 ‘투‘를 왼팔에 끼운 후 반대편 건물의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날 밤 마침내 잠든 워너는 마치 심해 바닥까지 
1패덤씩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선이 마침내 점화되어 건물 위로 화염을 올려 보내기 시작했을 때, 워너는 아마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향해 손을 뻗기엔 그를 짓누르는 물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 P23

아주 희미하지만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릴 적 오리건 숲속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때 맡았던 냄새였다. 따뜻한 커피, 축축한 양말, 무릎 위에 활을 놓고 그루터기에 앉은 채로 얼어붙은 워너.
"사슴은 말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적어도 두 가지 감각을 이용해 확실한 위험 상황인지 판단한다. 시각, 청각, 후각 중 두 가지를 함께 쓴다는 거지. 그래서 확신이 없으면 그냥 거기 그대로 서있는다더라." - P25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워너의 방은 코딱지만 했고 비좁았다. 천장에 달린 전구 때문에 고문실처럼 값싸고 선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창가로 가는 길에 전구의 줄을 당겨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창틀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여닫이창 위쪽에 달린 환풍기 때문에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환풍기 창살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잡아당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화염처럼 그를 집어삼키려 하는 공황 속에서 끄떡 않는 환풍기를 뜯어내려 하는 자기 모습이 잠시나마 짐승같이느껴졌다.
그는 손을 놨다.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 P26

이제 입자들 사이에 산소는 전혀 없는 듯했다. 아무것도 나올게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산소가 생명이라면 무산소는 죽음일 테고, 연기는 독이 섞인 무산소였다.
멈춘 채로 숨이 막혀오는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불현듯 터져 나와 소용돌이치는 검은 기둥에 창백하게 걸렸다.
뛰어내려야 했다. - P36

워너는 어떻게 할 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솟구친 상태였다. 워너는 투를 왼팔에 끼운 후 상체를 최대한 바짝 붙여 안전하게 고정하고는, 오른손 관절을 아래로 향하게 한다음 열린 창문의 나무 창틀 위에 놓았다.
워너는 투에게 말했다.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그러고는 한 번에 올라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발가락이 창틀을 휘감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창틀 위에 발가락이 올라오긴 했지만 제대로 휘감지는 못한 상태였다. 발가락이 창틀을 완전히 휘감은 후, 워너는 도약했다.
워너의 두개골은 나무를 부러뜨렸고, 창문 유리는 기다란 단검 모양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무릎 높이까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워너의 무릎은 돌로 된 창틀에 착지했고, 몸은 낯선 이의 아파트 안 침대까지 통과해 들어갔다. 모든 방에 불이 켜져 있었던 만큼 환하게 빛났다.

놀랍게도 이제 모든 것은 삽시간에 지나가는 영화 장면처럼 빨리 감기 됐다. 이쪽에서 보니 오렌지빛의 붉은 블라인드는 조잡하게 짜여 있었고, 바닥으로 떨어진 램프는 하얀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올록볼록한 이불은 끈적하게 워너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두려움과 난처함이 섞인 워너의 외침이 울렸다.
"아무도 안 계세요?" - P38

새벽 5시의 응급실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뚜렷한 침묵이 지나간 후, 여덟 명의 사람들이 워너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를 찔러대고 만져대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구급대원은 워너가 불타고 있던 건물에서 불이 나지 않은 다른 건물로 뛰어 들어간 덕분에 스스로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동요했다.
"뉴스에 제보해야겠네요. 의사가 말했다.
"아뇨." 워너는 그중의 누군가를 쳐다보는 대신 그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처나 치료해주세요."
젊은 레지던트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일한지 꽤 오래됐다. 극한의 상황들을 겪어봤다. 안 좋은 상태의 환자들을 봤다. 머리에 총을 맞은 환자도 봤다, 기타 등등. 응급실에실려 온 환자에게 무슨 얘기까지 들어봤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하지만 당신 얘기가 가장 놀라워요."
레지던트는 감탄했다. 프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사람 좀 여기서 내보내주세요." 워너가 말했다.
의료진은 차가운 소독제로 워너의 얼굴을 닦아줬지만, 얼굴을 뺀 나머지 몸은 여전히 그을음과 흙과 말라붙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 P44

워너는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진 듯 실체가 없고 거미줄처럼 얇고 가볍게 느껴졌다. 여전히 약에 취해 있었지만 충분치 않았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잇몸까지 아팠다. 고통이 사라지려면 오래 걸릴 터였다. 중환자실과 중간 치료실 복도의 길이보다,
소리를 잔뜩 키운 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수염 난 남자들로 가득한 병동 복도의 길이보다 더 긴 시간일 터였다.  - P56

본질적으로 구조적인 듯한 통증과 잔류 통증은 일종의 날것 그대로의 강제적인 행복처럼 수개월 동안 워너를 괴롭힐 터였다. 그가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될 수 있을 때까지. 두개골 위쪽에 가해진 타격으로 인한 이명은 오래도록 워너 안에서 덜커덩거리며 잠시라도 워너가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혼동하게 두지 않을 터였다. - P57

2주 후, 건물 관리인 프랭크는 워너를 데리고 건물 뒤쪽으로 가서 화재의 잔해를 헤치고 건물 사이 틈으로 들어갔다. 워너는 무릎을 꿇고 프랭크가 발견한 고양이를 살펴보았다. 폐쇄된 출입구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고양이는 몇 미터나 되는 자갈과 잔해를 뚫고 안전한 장소까지 자기 몸을 끌고 가 그곳에서 죽었다. 워너는 회색과 갈색 띠를 이룬 꼬리를 알아보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워너

워너 회플리치는 센트럴파크를 마주 보는 널찍한 아파트에서열린 케이터링 행사에서, 화이트 와인 스프리츠를 만들고 보드카와 콜라를 섞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난초와 두꺼운러그, 털이 길고 금빛인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워너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철책과 자물쇠로 가득한 어퍼이스트 사이드 거리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가 사는 구역의 나무들은 영향력 없는 고모들처럼 앙상하고 꼿꼿했다. - P21

어느 날엔가 워너는 그중 한 나무 위에서 왼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길 반복하며 그를 내려다보는 잉꼬 앵무새를 본 적이 있다. 앵무새는 나뭇가지에 부리 양쪽을 날카롭게 갈더니 한참 위에 있는 창틀을 향해 발작하듯 갑작스레 비행했다. 그에게 은유적인 순간들은 대부분 그림처럼 다가왔다.  - P21

거리 쪽에서는 워너가 사는 집 건물이 한 채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서로 꼭 붙어 있는 쌍둥이 주택이 앞뒤로 연결된 형태였다. 워너는 왼편에 있는 입구로 들어간 후 뒤쪽으로 걸어가 5층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워너의 고양이 투가 그를 맞이했다. 투는 신나게 앞장서서 부엌으로 달려가, 펼쳐진 은박지 위에 놓일 얇은간 파테와 반투명한 생선회 몇 점을 기다렸다. - P22

그날 밤 마침내 잠든 워너는 마치 심해 바닥까지 1패덤**씩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선이 마침내 점화되어 건물 위로 화염을 올려 보내기 시작했을 때, 워너는 아마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향해 손을 뻗기엔 그를 짓누르는 물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단위 - P23

새벽 4시인가 5시쯤, 2C에 사는 세입자들은 천장에서 시끄럽게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곧 천장이 무너졌다. 바로 위층 3C에 사는 세입자들도 같은 소리를 들었고 그 천장도 무너졌다. 무사히 비상계단에 다다른 그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2C에 - P23

시는 세입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계단으로 탈출했다. 혼란과 두려움에 그대로 굳어버린 아내를 남편이 끌어내야 하긴 했지만, 공황속에서 그들은 집 문을 열어둔 채 나와버렸다.
화재는 2C를 에워싸더니 복도로 번졌다. 워너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에 잠에서 깼다. 그는 창가에 놓인 1.8미터 높이의 이층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킨 워너는 천장 전구에 달린 줄을 당겨 불을 켰다. 눈부신 빛 속에서 사각형 형체들이 튀어나왔다. 옷장, 출입구, 러그까지. 그리고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비명이 들렸다. - P24

워너의 머릿속에 생각들이 스쳐갔다. 너무 빠르게 굴러가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바퀴들 같았다. 그는 익숙한 침실 구조와 창문 환기구의 날개 사이로 흐르는 무거운 연기 냄새, 그리고 무릎꿇은 채로 이불을 덮고 있는 자기 다리를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리로 나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만했다. 워너는 옷을 집어 들기 시작했지만 정작 가장 먼저 필요한 속옷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뒤로 돌았다가 다시 앞으로 돌았다.
분명 기억 속에는 존재했다. 깔끔하게 개어 선반에 둔 밝은색 사각팬티를 비롯한 갖가지 속옷들이. 하지만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다음 단계와 워너 사이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막 같은 게 있는 듯했다. 워너는 뚫을 수 없는 커다란 옷장 앞에 섰다.
잠에서 깬 지 약 15초가 지났다. 점점 미쳐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소란스럽게 계속됐다. - P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 엄격함 X 소설적 상상력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알 수 없는 아홉개의 글. 

저자는 일상의 작고 빛나는 순간과 삶과 죽음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을 동시에 포착한다.
그리고 마치 과학을 탐구하듯 한 사람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를 집요하게 기억하고, 미처 기억이 닻지 않는 곳에선
상상력을 발휘해, 영원히 잊지 못할 이야기로 재탄생시킨다.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 불타는 건물에 갇힌 남자, 암 투병 끝에 안락사를 선택하는 여자, 그리고 죽어가는 친구와 배신한 남편을
마주한 채 공포와 격투를 벌이며 지난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리는 이야기까지.
기억의 엄격함과 소설적 상상력을 결합한 대담한 도전 앞에서 이 이야기들의 장르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책 날개의 소개글에서 발췌)

처음 만나는 작가인 조앤 비어드. 
조 앤 비어드Jo Ann Beard는 미국의 에세이스트, 소설가, 시인,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며 현대 산문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가, 에세이 장르를 혁신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보편적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강렬하면서도 우아한 문체로 풀어내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한다.  
... ...
<축제의 날들>은 한 권의 책에 소설과 에세이를 동시에 싣는 파격적인 결정으로, 작품에 깊이와 다양성을 더하고 독자들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선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아가 어떤 작품이 소설이고, 어떤 작품이 에세이인지 구별하기 힘들만큼 경계를 넘나드는데 성공해, 시그리드 누네즈, 조너선 프랜즌, 제프 다이어 등 최고의 작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소개글만 읽어도 관심이 간다. 편히 읽을만한 소재의 단편들이 아님에도 왜 제목은 그렇지 않은지 궁금하다. 




마지막 밤

식사 중, 아니면 식사 직후였던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그녀는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하더니 멈추질 못했다. 부엌에서도, 차 안에서도 동물병원 진료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벽에 기대어 서서 그녀와 함께 바닥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울고 있었지만, 의사는 못 본 척했다. - P15

"저한테 부탁하신 적 있죠." 의사는 파일을 훑어보며 말했다.
"때가 된 것 같으면 말해 달라고요."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뇌에 일종의 이상이 생긴 것 같아요. 무언가가 자랐거나 변형되었거나, 우선 증상이 더 심해지는지 하루이틀 정도 지켜보죠.
하지만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의사는 말을 멈췄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수를 같이 건넌 친구와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 더 핀란드에 가고 싶었을 거 같다.
나라도 다시 가고 싶었을 거다!
가슴이 간지럽고 몽글몽글해지는 ... 젊음의 싱그러움으로 빛나던 시간들...!

아... 너무 좋다!

어느 겨울날, 이 호수를 걸어서 횡단한 적도 있었다.
예진이와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걸어서 호수를건너는 것이 목적이었다. 누가 먼저 그러자고 했는지대체 왜 그러기로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마음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 P158

아마도 1월이었을 것이다.
호수를 건넜던 그날도 해가 거의 뜨지 않는 나날 중 하나였다. 간밤에 새로이 내린 눈이 켜켜이 쌓여 
꽁꽁 얼어붙은 호수를 비밀스러운 눈부심으로
가려주고 있었다.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은 군청에서 연보라를 거쳐형광 핑크색으로 이어지는 그러데이션이었다. 뾰족뾰족한 침엽수 모양의 산그림자가 오묘한 그러데이션의 하늘과 눈 덮인 호수의 경계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 P158

그 아래에서 우리는 방수 부츠를 신고, 내복에 스웨터를 몇 겹이나 껴입고, 스키복과 패딩을 차례로 덧입고, 털모자와 장갑을 단단히 착용하고, 목도리를 코끝까지 칭칭 두른 채로 언 호수 위를 냅다 걷기 시작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보송하고 새하얀 눈더미에 다리가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 P159

얼마간 걸었을 때, 마침내 우리는 호수 가운데에 있던 그 정체 모를 쇠기둥을 마주할 수 있었다. 높낮이가 조금씩 다른 가느다란 쇠기둥에는 각각마다 뾰족하고 예리한 삼각형이 대칭으로 달려 있었고 그 높이와 위치가 기둥마다 미묘하게 다 달랐다. 그 간단한 대칭의 삼각형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아, 이건 새다! - P159

왜 그동안 몰랐는지 의아한 일이었다. 호수가 호수인걸 몰랐던 것처럼. 국기 게양대인 줄 알았던 그 가느다란 기둥들은 새를 테마로 한 조각품이었다. 삼각형 한쌍은 분명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조금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면 한 마리의 새가 아래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궤적을 따라 그린 것도 같았다. 시간이 지나 호수가 녹고 나자 호수에 거울처럼 비친 모습 때문에 새떼들이 V 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했다. - P159

그날 예진이와 나는 호수 위 눈밭을 한참이나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호수의 끝이라고 생각했던그 나무 그림자까지 도달했다. 사실 그건 호수의 끝이아니라 호수 속 거대한 섬일 뿐이었지만, 호수는 얼기설기 엮인 그물처럼 여러 섬을 사이에 두고 한참이나더 연장되고 연결되어 있어서 실제 호수의 극히 일부귀퉁이만 건넌 셈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 닿았을 때 다시 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꼈다.
부츠는 이미 푹 젖어 더 걷다간 동상에 걸릴지도 몰랐지만, 몇 번은 미끄러져 온몸을 수영하듯 눈 속에 담그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 P160

다시 뭍으로, 학생회관 앞 잔디밭으로 도착했을 때,
우리는 뒤돌아 우리가 걸어온 눈밭 위 발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아마도 그래서 호수를 건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바로 여기 이곳에, 이 드넓은 지구위에서도 바로 이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저곳은 녹아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만이 이곳에 이렇게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여름의 핀란드가 선사하는 완벽한 날씨라니...
이런 행운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여행을 떠나보면 금방 깨닫게 된다.
거기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하늘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더더욱 좋다.
거기다 커피가 또 그렇게 맛있단다.

튀르키예 여행 최적기래서 5월 말 6월 초에 갔던건데 여행 내내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카파도키아 하늘은 바람 불고 흐려서 열기구는 타지도 못했고 다음날도 흐렸다 비 왔다..
파묵칼레에선 느닷없이 강풍을 동반한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갑자기 기온까지 떨어져 추위에 덜덜 떨기까지 했다.
안탈리아에서도 흐렸다 해떴다 비와서 습도높고 더운 날씨였고 다음 날 이즈미르에선 땡볕의 습격에 더워 죽을뻔...ㅠㅠ
좀 덥긴 했지만 그나마 이스탄불 날씨가 최적!

다음 튀르키예 여행은 일정을 당겨서 5월 초 정도에 떠나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열기구는 꼭 타고 싶었는데...
아참 튀르키예는 커피보단 차이를 마신다.
하루에 보통 7-8잔 마시는 튀르키예 사람들~~
가운데가 잘록하고 갸름한 유리잔에 유리받침이 있는 ... 홍차...










1년 전부터 기대했던 자전거 타기는 허무하게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예진이도 나도 걷는 걸 좋아했다. 특히 이런 날씨라면 더더욱 걷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늘은 더없이 쾌청했고, 햇살은딱 기분 좋게 내리쬐며 온 세상의 표면에 기분 좋은 반짝임을 선물 포장처럼 한 겹 더 감싸주고 있었다. - P134

평소에 미세먼지에 민감한 편도 아니고, 이제는 거의 무감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서 오히려 그 부재를 통해 미세먼지의 존재를 역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미세먼지라는 게 없는 공기란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말이다. - P134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너무 습하지도 너무
건조하지도 않았다. 신기하게 바람조차 거의 불지 않았다. 상쾌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머리를 흩날릴 정도의 바람은 아니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날씨였다. 단언컨대 이런 날씨는 어느 곳에서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여행자에게 이렇게 멋지고 완벽한 날씨가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북유럽 여행은 추울것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여름의 북유럽, 여름의 핀란드 여행은 이토록 근사한 날씨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알려졌으면 한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내내 계속 들었다. - P135

열흘간의 여행 내내 예진이와 내가 도합 백 번쯤 했던 말, 우리의 유행어는 바로 이거였다.
"아니, 서유럽을 왜 가? 파리를 왜 가? 여름에는 무조건 핀란드야!" - P135

우리는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마실 커피를 사기로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자전거 못탄게 오히려 좋은 것 같아. 막상 거기 가면 우리 마실 게 없잖아. 사실 호수에서 커피 마시면 딱좋겠다 생각하긴 했거든." - P135

어느새 우리는 신발까지 벗어두고 피크닉 타월 위에거의 눕다시피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고 구름이 이동하는 것만이 느껴졌으며 이따금 호숫가의 이름 모를 진분홍색 풀꽃들이 조금씩 흔들리며 공기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 P140

"내가 지난 세월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호수만큼은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잊히지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찍은 이 호수 사진을 자주, 오래 봐서 그런것 같아.‘
"나 그 사진 뭔지 알아. 호수 위에 별 박힌 것 말하는거지?"
예진이도 그 사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그때부터 거의 10년 동안 그 사진을 컴퓨터바탕화면으로 해놨거든."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윤슬이 너무나 명확하게찍힌 사진이었다. 네 귀퉁이의 모서리가 날렵하게 뾰족한 마름모 스티커를 수백 개 갖다 붙인 것처럼 찍혀서 처음 모니터로 사진을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예진이의 표현처럼 별을 박아둔 것만 같았다. - P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