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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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자매 중 언니인 앤 엘리자가 동생 에블리나에 대해 갖는 순간순간의 감정묘사도 뛰어나고 변해가는 심리가 너무 잘 드러나게 쓰인 소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화와 물질 만능의 시대로 변해가는 뉴욕. 하층민 자매의 삶은 누구도 도울 수 없었던 것인지 읽는 내내 너무도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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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리나는 늦은 시간에 혼자서 돌아왔다. 무엇을 디디는지모를 만큼 흔들리는 동생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앤 엘리자는위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언니는 애정을 동생의 운명에 너무 강렬하게 투사했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면 마치 자기의 삶과 동생의 삶, 두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행복을 갈망하는 동생을 보자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은 침묵으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의 기분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법이 없는 에블리나는 언니가 이미 자기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고통이 덜했더라면 앤 엘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동생도 그렇게 무심한 척하며 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준비했다. - P75

그 뒤로 앤 엘리자는 자기 생각을 동생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에블리나도 언니의 충고나 동정을 원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계획하면서 벌써 언니의 존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앤 엘리자는 잔인한 운명을 맹신하다시피 했기에 그녀 자신이 이렇게 배제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생살이 찢어지듯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에블리나에 대한 사랑에서 모성애 같은 열정을 없애버릴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매로서 느끼는 애정의 온도를 낮출 수는 없었다. - P78

그때 앤 엘리자는 고통스럽게 수련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에블리나가 떠나고 나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고독을, 온갖 실험을 하며 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외로움에 단련되리라 믿었다. 그들은 그리 멀리 떨어져 지내지 않고, 동생은 날마다 시계 수리공의 가게에서 자기에게 ‘뛰어올‘ 터였다. 동생 부부는 일요일마다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터였다. 그러나 앤 엘리자는 에블리나가 시간이 갈수록 그 일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대충하리라는 게 벌써 짐작이 갔다. 특히 에블리나에 대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해 질 녘에 가게 문을 닫고 홀로 래미 씨 가게 앞에서 서성거릴 게 뻔해 보였다. 하지만 그럴가능성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원하면 나한테 찾아오겠지. 내가 여기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 P79

앤 엘리자는 래미 씨가 그의 약혼녀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가 버리면 징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 에블리나가 그와 대화하면서 짜증나는 게 있었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앤 엘리자는 한눈에 알아챘다. - P82

두 자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벗었다.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고 불을 끄자 어둠 속에서 에블리나가 흐느껴 우는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앤 엘리자는 들썩거리는 동생을 건드리지 않고 자기 쪽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동생이 그처럼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밤은 더디게 흘러갔다. 그들의 삶에 그렇게도 큰 부분을 차지했던 시계가 지루하고 고집스럽게 똑딱거렸다. 에블리나의 흐느낌에 침대가 계속 들썩이다가 서서히 뜸해졌다. 앤 엘리자는 동생이 결국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어 자매는 눈이 마주쳤고, 에블리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앤 엘리자는 그만 용기를 잃었다.
그녀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애원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울지 마, 동생아. 제발 울지 마."
"견딜 수가 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동생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앤 엘리자는 들썩이는 동생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제발, 제발 울지 마." 그녀가 반복해서 말했다. "나머지 1백 달러를 마저줄게.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처음부터 네게 주려고 생각했었어. 다만 네 결혼식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 P85

다음 날 아침, 래미 씨와 그의 아내는 세인트루이스로 향하고 앤 엘리자만 가게에 홀로 남았다. 미스 멜린스와 호킨스 부인과 조니가 뒷방의 장식을 떼고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들렀을때, 겉으로는 첫 이별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앤 엘리자는 그들의 친절을 당연히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위로‘라 믿고 건네는 말들은 그녀에게 빈껍데기와 같았다. 그녀는 익숙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 바로 저편에 ‘고독‘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봤다.

앤 엘리자는 그 엄청난 손님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 없었다. 그 손님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집 안에 새로 들어온 동반자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없었다. - P88

에블리나가 떠난 다음 날, 가게와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냉담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상황이 달라지자 가게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가게 문을 처음 열고 들어선 손님을 보고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또 밤이면 침대의 자기 자리에 누워 밤새 뒤척였고, 때때로 한 번씩 졸다가 문득 깨어나 비몽사몽간에 에블리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침묵이 그녀 주위를 둘러싸자 벽과 가구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혼 녘과 자정에들리는 낯선 한숨 소리와 은밀한 속삭임에 기겁하곤 했다. 유령이 손으로 창문 셔터나 바깥쪽 걸쇠를 흔들었다. 
한번은 에블리나가 어두운 가게 안을 살금살금 걷는 것 같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다가 문지방쯤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국에는 그것이 침대 틀이 뒤틀리는 소리였다든가, 미스 멜린스가 위층에서 쿵쿵대며 걷는 소리였다든가, 맥주를 잔뜩 실은 수레가 우렁차게 지나가며 문 걸쇠를 흔드는 소리였다는 등 소음이 난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긴 시간 동안 정처 없이 떠돌던 공포심이 온갖 불길한 억측으로 단단히 굳었었다. - P89

그녀는 언제나 되도록 늦게 가스등을 켰는데, 혹시라도 누군가 오면 재빠르게 가스화구에 불을 붙일 수 있게 성냥갑을 팔꿈치에 놓아 뒀다. 점점 짙어지는 어스름 속에서 드디어 가게 밖 계단을 내려오는 호리호리하고 짙은 그림자가 보였다.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가스등에 불을 붙이려고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꼭 이름을 물어봐야지‘ 하고 그녀는생각했다. 

그리고 가스등을 높이 치켜들자 문간에는 동생이 서있었다. - P115

마침내 그녀가 가련하고 창백한 망령 같은 에블리나가 온 것이다. 여윈 얼굴은 옅은 분홍빛이 바래고 머리카락은 뻣뻣한 물결 모양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앤 엘리자의 것보다도 더 초라해 보이는 망토가 그녀의 좁은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환한 가스등 불빛이 앤 엘리자를 마주보고 선 동생을 비췄다. - P116

"동생아...… 아, 에블리나! 네가 올 줄 알았어!"
앤 엘리자는 기쁨의 탄식을 쏟아내며 동생을 와락 붙잡았다.
에블리나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입에서 마구 쏟아 냈다. 호킨스 부인이 아기에게 중얼중얼 길게 내뱉는 것 같은, 별 의미도 없고 발음도 분명치 않은 애정이 어린 말이었다.
에블리나는 잠시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러더니 언니에게서떨어져 나와 가게를 쭉 둘러봤다. "나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아. 난롯불 없어?" 그녀가 물었다.
"없기는 왜 없겠어!" 앤 엘리자는 동생의 손을 꽉 붙들고 뒷방으로 끌고 갔다. 아직은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텅빈 방이 그녀에게 온기이자 빛인 동생의 존재로 다시 한 번 가득 채워지는 것을 그저 느껴 보고 싶을 뿐이었다. - P116

앤 엘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문제였어. 그때 이미 마약을 했던 거야. 하지만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끔찍했어. 우리가 그곳에 간지 한 달쯤 됐을 때 그 사람이 일주일간 사라졌어. 상점에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그이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줬었거든. 하지만두 번째엔 해고했고, 그런 다음 다른 일을 구하기까지 한참 동안 실직 상태였어. 우린 있는 돈 다 써 버렸고, 더 싼 곳으로 집을 옮겨야만 했어. 그러다가 그 사람이 일자리를 구했지만 임금은 거의 받지 못했고, 거기서도 오래 일하지 않았어. 그러다가 그사람이 아기에 대해 알고 나서…………."
"아기라니?" 앤 엘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죽었어. 단 하루밖에 살지 못했거든. 어쨌든 그 사람이 임신에 대해 알고서는 의사에게 줄 돈이 없다고 화를 내면서 언니한테 당장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 그 사람은 언니가 나 모르게 돈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에블리나는 고개를 돌려 후회 가득한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그 사람이 나보고 언니한테 나머지 1백 달러를 얻어 내라고 했던 거야." - P123

신부가 천으로 덮은 무언가를 두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오자 앤 엘리자는 슬며시 가게로 나오며 뒷방의 문을 닫아 방에 에블리나와 신부 단둘이 있게 했다.

그날은 5월의 따뜻한 오후였다. 맞은편 보도의 갈라진 틈바구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구부러진 가죽나무는 신록을 분수처럼 뿜어 대고 있었다. 얇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봄날에 걸맞게 나른한 걸음걸이로 지나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팬지와 제라늄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미는 남자가 쇼윈도 밖에 서서 앤 엘리자에게 꽃을 사라고 신호를 보냈다. - P139

앤 엘리자의 반감을 알아챘는지 그 후로 신부는 가게를 오갈 때마다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걸음을 멈춰 서서 그녀를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동생분은 마음에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가 여자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분은 영적 위안을 충만하게 받았어요."
앤 엘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부는 가볍게 목례하더니 가게를 나갔다. - P139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에블리나는 다시는 말을 하거나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오기 전 그 고요한 시간, 앤 엘리자는 이불 밖에서 쉬지 않고 떨리던 에블리나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봤다. 그녀는 동생 몸 위로 허리를 굽혀 동생의 입에서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장례식은 사흘 뒤에 치러졌다. 에블리나는 ‘갈보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신부가 필요한 절차를 모두 맡아서 진행하는 동안, 앤 엘리자는 방관자처럼 자신의 과거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부정되는 모습을 차갑고 무심한 태도로 바라봤다. - P140

한 주가 지나 그녀는 보닛 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그 작은 가게의 현관문에 섰다. 가게 안의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 계산대와 선반은 텅 비었고, 조화며 편지지, 와이어로 만든 모자틀, 염색 집에서 가져온 축 늘어진 옷 등 갖가지 친숙한 잡화들로 가득했던 창가도 말끔히 치워졌다. 그리고 문에 있는 판유리에는 "가게임대"라고 쓰인 표지가 붙어 있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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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인 앤 엘리자에게 청혼한 것이었어.
에블리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왜 레미 씨는 그런 오해를 하게 행동한거냐!




하지만 래미 씨는 앤 엘리자에게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저기, 미스 버너." 그가 스툴을 계산대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제가 오늘 여기 왜 왔는지 그냥 빠르게 말하는 게 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져 결혼하고 싶습니다."

앤 엘리자는 자정에 기도할 때마다 그 고백을 들을 것을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수없이 애써 왔다.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되자 준비가 하나도 안 된 것처럼 한심하리만큼 겁이 났다. 래미 씨는 계산대에다 양쪽 팔꿈치에 대며 기댔다. 깨끗해진 손톱과 손질된 모자가 앤 엘리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신호가 있었는데도 준비를 하지 못했다니! - P66

이윽고 심장이 쿵쾅대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가 내뱉었다. "어머, 래미 씨!"
"결혼하고 싶어요." 그가 되풀이해 말했다. "져 너무 외로워요. 사람이 혼자 산다는 게 죠은 게 아니죠. 그리고 매일 찬 음식만 먹는 것도요."
"물론이죠." 앤 엘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게다가 먼지를 당해낼 수가 없어요."
"아, 먼지………. 무슨 말인지 잘 알죠."
래미 씨는 뭉뚝한 손 하나를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져를 받아 쥬셨으면 합니다."
앤 엘리자는 여전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단추 바구니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 - P66

"저, 제가요?" 그녀는 숨이 가빠왔다.
"네, 그래요." 구혼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미스버너야말로 져에게 제격이에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길 가던 여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가게 창문을 들여다봤다. 앤 엘리자는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으면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이리저리 두서없이 둘러보더니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드나요?" 앤 엘리자가 아무 대답도 하지않자 당황해서 그가 물었다.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술이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돌려 말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져는 늘 우리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래미씨는 잠시나마 들었던 의심이 사라지자 말을 이어 나갔다. "져는 늘 조용한 스타일이 죠았어요. 차분하고 젠체하지 않고 일하는 걸 겁내지 않는 그런 여자분 말이죠." 그는 냉정하게 그녀의 매력을 하나하나 열거하듯 말했다. - P68

"제겐 충분히 활달해 보이는데요."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가 차분하게 계속 밀어붙이자 그녀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결심이 확고해 보이지 않을까 봐 몸을 떨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속눈썹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되풀이하여 말했다.
 "래미 씨, 전 결혼할 수가 없어요. 결혼할 수가 없다고요. 전 지금 너무 놀랐어요. 전 그 상대가 항상 에블리나일 거라 생각했어요. 언제나 말이에요. 그건 저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고요. 에블리나는 너무나 밝고 예쁘니까요. 그게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 P68

그녀는 다시 가게에 홀로 남자 매우 안도했다. 그녀는 자기 삶에서 결정적 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理想)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 기뻤다.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두려움과 황홀함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두 가지 사실이 아쉬웠다. 첫째는 그가 가게에서 고백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녀가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P71

마침내 에브리나의 귀가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두려움이 이러한 생각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동생과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앤 엘리자는 자기에게서 기쁨의 후광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을 것만 같아서 에블리나가 어스름이 질 때에야 돌아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애당초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늘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는 에블리나는 근래 들어 가게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앤 엘리자는 그날 오후 가게에서 일어났던 일을 추궁당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자 수치심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 P71

이 일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자기 가슴속에 있던 놀라운 비밀을 겉으로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굴욕적이었다. 에블리나와 자신이 결국 동등하다는 사실을 동생이 알지 못해 김빠지기도 했고 심지어 약간 불합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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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8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엇. 저도 이 책 읽으려고 준비해두었는데요!!

은하수 2023-05-18 17:39   좋아요 0 | URL
제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얼른 읽으셔야지요
전 뒤에 단편 먼저 읽어었어요
징구, 로마열이요.. 어느 플친님 말씀대로 버너 자매보단 뒤 단편이 더더 재밌네요~~^^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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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최고 👍 👍 👍
다른 작품을 안읽어봤지만 한 편, 한 편 모두, 14편 모두 다 개성있고 좋았다. 첫번째 수록작 <종이 동물원>과 마지막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 역시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가족으로 시작해 역사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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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5-18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종이 동물원> 쵝오!

은하수 2023-05-18 12:30   좋아요 1 | URL
저도 넘 좋아졌어요~~^^
맛난 점심은 드셨나요
오늘도 근수저 잠자냥님 파이팅!

그레이스 2023-05-1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딸이 읽고 재밌다고 하더라구요. 사 준 보람이 있게...! 다들 좋아하시니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은하수 2023-05-18 22:46   좋아요 1 | URL
좋은 따님 두셨네요
책 보는 안목 인정합니다~~
천천히 단편 하나씩 읽기 좋았어요^^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더라구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잔혹 행위의 오염된 열매˝를 더 귀하게 여긴 우리도 죄인이다.

마지막 단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정말 마음에 콱콱 와서 박힌다. 소제목만 보고 동북아시아 역사라니 분명 일본도 연관 있을거란 생각에 읽지말고 패스할까 생각했는데 시작하는 순간, 숨도 안쉬고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 중에서 요즘 이슈는 위안부 할머니 문제지만 작가가 주목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사실은 731부대에서 자행됐던 잔인한 인체 실험과 중국인들의 학살에 관한 것이었다.

‘뵘기리노 입자‘라고 불리는 시간여행 장치를 통해 731부대 내부로 가서 당시의 끔찍한 만행은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보려던 주인공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하지만 작가가 차용한 역사적 문건들은 모두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역사를 보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부정되는 현실도 굉장히 씁쓸하게 다가온다. 역사는 개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개별 사건(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 731부대에서 실험대상으로 겪은 체험담 등)은 역시 개인이 겪은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접근하려는 우리나라와 마수를 뻗쳤던 일본의, 두루뭉실한 전체로만 뭉쳐서 보려는 일본의 입장차는 결코 합치점을 찾을 수 없겠지!

아무튼, 이 단편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참 한결같은 일본이구나였다. 어쩜 대응방식이 그리도 한결같은지... 머리로 스팀 올라온다. 일본새끼들 결코 안바뀔거야. 지진나서 바닷속으로 갈아앉아버려라 하고 말하고 싶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역사를 부정하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일어났던 ˝잔혹한 행위의 오염된 열매˝의 수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작가는 미국 하원 의원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기억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작가가 준비한 작품의 마지막 반전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다‘느니 ‘고통이 뒤따랐다‘느니 하는 식의 목적어 없는 자동사 구문 뒤에 숨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또한 저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수법인 부정과 회피라는 치졸한 화법을 제가 존경하는 미합중국 의회의 동료 의원님께서 몸소 사용하신 것이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 P522

역대 일본 정부는 한결같이, 이 나라 역대정부의 격려와 공모에 힘입어서, 731부대의 활동을 사과하기는커녕 인정하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사실 731부대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2차 대전동안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직시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부정하고 외면하는 행위는 전쟁 기록을 폄하하고 부정하는 정형화된 행태로 자리 잡아서, 이른바 ‘위안부‘ 문제, 난징 대학살, 한국과 중국의 강제징용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행태는 일본과 이웃한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우호 관계를 손상시켰습니다. - P522

731부대 문제는 우리에게 특수한 난관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미국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제삼자가 아닙니다. 일본의 동맹이자 우방으로서, 미국은 우방이 저지른 잘못을 지적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미국은 731부대의 전범들이 법의 심판을피하도록 적극 방조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731부대의 실험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부대원들의 사면을 허가했던 것입니다. 우리가부분적으로 부정과 은폐의 공범인 까닭은, 우리가 스스로의 양심보다 그러한 잔학 행위의 오염된 열매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죄를 지었습니다. - P522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호가트 의원님께서 결의안을 오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위원장님, 증인들과 저는 현재의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유죄를 인정하라고 요청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가 요청하는 바는 731부대의 희생자들은 마땅히 명예를 되찾고 기억되어야 하며, 극악무도한 범죄의 실행자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이 미합중국 의회의 믿음이라고 본 위원회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재판 없이 특정인의 권리를 박탈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특정인의 재산 행사 권리를 몰수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기억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 P523

홀로코스트 추모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선언의 가치는 오로지 우리가 희생자들과 인류애라는 공통된 유대관계를 지닌다는 것, 또 우리가 731부대 도살자들 및 그들에게 허락과 지시를 내린 일본 군국주의자 집단의 잔악성과 야만성에 한뜻으로 반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일본‘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단지 일본 정부만을 가리키지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 두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한 만행들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용감히 투쟁해온 일본 국민 개개인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거의 언제나 정부의 저항에, 또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대중의 저항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저는 그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 P523

진실은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 중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희생자 유족과 중국 국민에게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고, 또 거대한 불의가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가려지고 감춰져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희생자들이 미국의 우방국 국민이었다면 어떠한 구속력도 없는 이 결의안이, 심지어 이보다 더욱 엄중한 결의안이라 할지라도 통과되는 데에 과연 눈곱만큼의 문제라도 있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전략적‘ 이유 때문에 단기적인 이익이 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진실을 희생시킨다면, 그러면 우리는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우리 선배들이 저지른 과오를 단순히 되풀이할 뿐입니다. - P524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아닙니다. 웨이 박사는 우리에게 과거의진실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정부와우리 정부를 향해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당당히 다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과연 미국의 정신은 그런 것이 아닐까? - P524

웨이 박사가 품은 신념의 핵심은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국민 개개인은 희생자의 고통을 공감하지도, 기억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라는 함정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우리 개개인이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있는, 개인화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웨이 박사의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그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 P531

에번은 역사 연구에 공감과 감정을 더 많이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학계의 기득권층이 에번을 호되게 비판했던 겁니다. 

그러나 공감과 개인 서사의 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역사에 덧붙인다고 해서 진실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실의 가치를 높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약점과 주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진실을 이야기할 도덕적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 ‘진실‘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공유 경험이자 공유 이해로서 다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 P543

일본의 헤이안 시대를 전공한 젊은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 에번 웨이와 일본계 미국인 실험 물리학자 아케미 기리노는 세계를 전쟁 직전으로 몰고 갈 혁명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의 기대를 비웃게 마련이다.

만약 증거 부족이 문제라면, 두 사람에게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할 방법이 있었다. 역사를 일어난 그대로 목격할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 P548

세계 각국의 정부는 광란 상태에 빠졌다. 웨이가 731부대 희생자의 유족들을 과거로 보내어 핑팡의 수술실과 감방에서 자행된 참상을 목격하게 하는 동안, 중국과 일본은 법정과 카메라 앞에서 상대국의 과거에 대한 주장을 비난하며 진흙탕 싸움을 이어갔다.  - P548

미국은 마지못해 이 싸움에 끌려 들어갔고, 국가 안보라는 명분하에 결국은 웨이의 관측 장비를 폐쇄했다. 

웨이가 한국 전쟁 중에 미군이(731부대의 연구를 통해 얻었을 공산이 큰) 생물학 무기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진상 조사 계획을 발표했을 때의 일이었다. - P549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티베트인, 아메리카 원주민, 인도인, 케냐의 키쿠유족, 신대륙 노예의 후손들까지, 세계 곳곳의 희생자 집단이 길게 늘어서서 관측 장비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개중에는 현재의 권력자들이 자기네 역사를 지워 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현재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자기네 역사를 이용하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관측장비를 옹호하던 국가들도 그장치의 함의가 뚜렷해지면서 한 발 물러섰다.
 프랑스인들이 2차 대전 당시 괴뢰정권이었던 비시 정부 치하에서 자기네 동포들이 보여준 타락상을 재현하려고 할까? 
중국인들이 자기들 손으로 저지른 문화 대혁명의 참상을 다시 체험하려 할까? 
영국인들은 자기네제국의 번영 뒤에 감춰졌던 인종 청소를 목격하고 싶을까? - P549

민주국가, 독재 국가 할 것 없이 세계 각국 정부는 놀랄 만큼 신속하게 ‘시간 여행 전면중지 협약‘에 서명하는 한편으로, 과거의 영유권을 어떻게 분점할지에 관한 규칙의 세부 사항을 놓고 씨름했다. 
모든 나라가 아직은 과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 모양새였다. - P549

웨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록된 역사는 모두 한 가지 목표를 공유한다. 바로 일련의 역사적 사실에 일관된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실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에 빠져있었다. 이제 우리는 시간 여행을 통해 마치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손쉬게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P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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