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에서의 우체국 아가씨

ㅡ크리스티네는 다시 우체국 아가씨로 돌아온 자신과 주변 사람들, 상황들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결국 무기력해진 채 무작정 빈으로의 주말 여행을 감행한다.
그곳에서 돌아오기 전 언니네 가족을 방문하고 우연히 형부의 옛 전우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페르디난트
전쟁(제 1차 대전)이 끝나 체코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중 체코군이 철로를 폭파하는 바람에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가야 했고, 볼셰비키와 차르 지지군(백군)의 내전에 휘말리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고생 끝에 적십자사의 노력으로 귀환한다. 귀환하던 중 압사할 것 같은 기차 안에서 겨우 버티다 손가락 힘줄이 끊어지고 손가락 두개가 기형적으로 굽는 몹시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다. 이 손가락 때문에 건축설계를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었고 타자기도 칠수가 없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한다.
하지만 손가락 두개를 잃고 살아남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사소한 부상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이제 정부도 정부의 어떤 고위 관료도 믿지않는 사람이 되었다. 지극히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며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 페르디난트의 생각에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나! 전쟁이 끝났는데도 2 년이나 남의 나라 내전에 휩쓸리고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국가는 국민의 귀환도 관심없고 팽개쳐 두었다. 돌아와보니 국적회복도 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고 바뀐 정책에 대해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일을 할 수도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전쟁에서 돌아왔는데 말이다.


크리스티네가 전쟁으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고 ˝치졸한 안락 속에 사는˝ 언니를 미워하게 된 것이 십분 이해된다.
크리스티네와 이 페르디난트는 어떻게 인연이 이어져 스토리 전개가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잘 알고 있어. 자네는 할 수만 있다면 국립은행을 털어서라도 나를 장관으로 만들어 주고 싶겠지.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 이용만 당했지.  - P293

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 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나는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 P293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언젠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다 버리거나 토해낸 찌꺼기를 먹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때까지 나는 계속 그렇게 할 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이해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정열이 담긴 큰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소리쳤다. 크리스티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이 남자와 똑같은 감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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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식료품 가게 주인 미카엘포인트너 씨가 우체국 문을쾅 닫고 나오면서 소리쳤다.
"저 교만한 년, 정말 역겨워! 뻔뻔스럽고 싸가지 없는년! 내가 그런 말은 난생 처음 들었네. 마녀 같은 년!"
"자, 자, 흥분하지 마.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누가 자네를 물어뜯기라도 했나?" 빵집 주인 헤르트리트슈카씨가 우체국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흥분한 포인트너 씨를 진정시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 P250

씩씩거리며 울분을 토하는 포인트너 씨의 말이 옳았다. 우체국 여직원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양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던 것이다. 지난 2주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엾은 처녀가 어머니를 잃고 상심한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목사가 여자를 위로하러 두 차례나 집에 들렀다. - P251

이제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쇼핑할때면 마치 급하게 기차라도 타러 가는 사람처럼 바삐 걸어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예의와 친절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직장에서도 이제는 사람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무뚝뚝하고 거만하게 굴었다.
여자에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본인만 알고 있을 터였다. 여자가 잠든 동안에 누군가 그녀의 눈에 독약을 뿌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독이묻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 P252

악의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추하고, 사악하고, 적대적으로만 보였다. 여자는 매일 아침 증오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것은 연기에 그을린 다락방 천장의 대들보였다. 낡은 침대, 싸구려 누비이불, 등나무 의자, 깨진 물주전자가 놓여 있는 세면대, 벗겨진 벽지, 판자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모든 것이 지지리도 궁상맞고 흉측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명종 소리는 여자의 귓전을 때리며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었다. 해진 속옷,
역겨운 검은색 원피스…. 원피스의 소매는 이미 오래전에 찢어졌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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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비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그 순간 떠올린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몇 년 전 인간의 타도를 위해 열심히 일하자고 결의했을 때 분명 이런 학살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늙은 메이저가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키자고 촉구했던 그날 밤에 그들이 기대했던 건 이런 공포와 살육의 현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꿈꾸던 미래상은 굶주림과 채찍에서 자유롭고, 모두가 평등하고,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일하고, 약자는 굳건히 보호되는(메이저가 연설하던 그날 밤 그녀가 앞발을 구부려 뒤늦게 들어온 오리 새끼들을 보호해준 것처럼) 그런 동물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이상한 세월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무도 감히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사납고 으르렁거리는 개들이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동무들이 충격적인 죄를 고백한 뒤 찢겨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세월이었다. 클로버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P96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불복종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이렇게 모질기는 하지만 존스가 있던 때보다는 훨씬 나으며, 무엇보다 인간들이 되돌아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는 지시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일을 열심히 하고, 주어지는 지시를 수행하며, 나폴레옹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이었다.  - P96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와 다른 모든 동물이 고생을 감내하며 바랐던 건 지금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이 풍차를 짓고, 존스가 쏜 총알에 맞섰던 건 지금 이런 꼴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적절히 표현할수 있는 어휘를 알지 못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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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설의 쓸모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
박산호 지음 / ㅁ(미음)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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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게 잘 쓴, 책에 대한 리뷰라고 하면 딱 알맞을 것 같다. 그러면서 18편 이상의 작품이 등장.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나 상황들을 보며 짜릿하고 통쾌한 대리 만족을 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쓸모로 충분하다고...관심 가는 책 찾아 기꺼이 도서관으로 달려가 보겠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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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법 배우기 ㅡ《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귄

게센의 종교인 한다라교(에스트라벤도신자이다)의 핵심 교리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해서는 안 될 질문이 뭔지 판단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의중요성을 아는 것이다. 이는 상대가 어떤성인지 알 수 없고, 알려 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아는 게센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철학일 것이다. (137/211)

서서히 게센인들의 철학을 이해하게된 겐리는 마침내 임무에 성공하고 몇 년만에 동료들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는다.
그는 남성과 여성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동료들의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끼다가 중성적인 게센인들을 보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나는 누구의 편인지 구분 짓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우며 의미 없는 행동이자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결말이 아닐까 싶다. (137/211)

이 결말을 보며 완경후 한동안 방황했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나는 내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조금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그 시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을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일부러 소위 ‘여성성‘이 더 강조되는 옷차림을 하고, 좀 더 ‘여성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깨닫게 됐다. 내 모습이, 내 태도가 세상이 정해놓은 여자라는 틀에 가까운지, 남자라는 틀에 가까운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완경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고,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고, 세상이 여자인 나에게 거는 기대에 부응 (138/211)

해야 한다는 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라는 것이 점점 깎여나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축소되고 밋밋해지고 있는 나를 알아차린 순간 마침내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가 여성스러운지, 남성스러운지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고, 전보다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사안이 있을 때는 목소리를 높였고, 전보다 더 호탕하게 웃었으며,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힘과 자유를 가진 기분이 들었다. (139/211)

*지구인과도 소통이 안돼ㅡ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코니 윌리스 지음

그러나 오프라인, 즉 현실에 생생히 존재하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을 그렇게 쉽게 삭제하거나 차단할 순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남자들이 모여 노래방의 마이크를 독점하듯이 발언권을 독점하는 모임에 더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고 앞에 썼지만, 실은 아주 최근에 그와 비슷한 어떤 모임에 나갔다가 색다른 경험을했다.
  거기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고(여자 다섯, 남자 셋)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언권을 독점하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누군가가(사실 여자들이 돌아가며) 유머러스하게 발언을 제지해서그의 입을 막았다. (207/211)

그 모습을 보며 신산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렇게 ‘나 홀로 잘났소‘ 스피커가 모임에서 제지를 당하는 상황이 최근 몇년 사이에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피부로 느끼긴 했다. 
그건 아마도 더는 그런 식으로 소통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발언의 기회는 공평하고 동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주로 여성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파티는 즐거웠고 알찼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정말 외계인 같은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20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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