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이 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야콥." 그가 내게 말했다. "말해보렴, 이곳에서 하고 있는 생활이 너무 메말랐다고 생각하지 않니, 메말랐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어떠냐?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솔직히 말해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반항심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항심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침묵을 택했다. 그것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그런 침묵이었다. "주인님, 저에게 침묵을 허락해주세요. 기껏 제가 대답이라고 해보았자 듣기 민망한 소리뿐일 거예요." 벤야멘타씨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고, 나는 그가 나의 묵묵부답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것을 이해했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알 수 있다. "너는 우리가 이 학원에서 이렇게 나태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안이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 않니, 야콥? 내 말이 맞지? 알아차린 거냐? 알아차린 거냐? 너에게 뻔뻔스러운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네게 솔직히 털어놓을 것이 있어, 야콥. 들어봐라.

난 네가 영리하고, 예의바른 젊은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부탁하건대, 이제 좀 무례하게 굴어다오.
너에게 또 다른 고백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건 말이다, 내가, 너의 원장 선생님인 내가 너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고백도 있다. 내가 너에게 설명할 길 없는, 매우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막을 길이 없는, 그런 관심 말이다. 이제는 내 앞에서 뻔뻔스러워질 수 있겠지, 그렇지 않니, 야콥? 너에게 내 약점을 다 드러냈으니 넌 나를 쓰레기 취급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 반항을 할 마음도 있는 거냐? 내 말이 맞느냐, 말해봐라, 그런거냐?" 우리 두 사람, 턱수염을 기른 남자와새파랗게 어린 나,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면의 시합과 같았다. 입을 열어 뭔가 비굴한 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불쑥불쑥 솟았다. 하지만 간신히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고,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거인처럼 건장한 체구를 가진 원장 선생님이 조용히, 조용히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 들어섰다. 그것을 나는 느꼈다. 그래,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벤야멘타 선생님이 나를 존중한다." 섬광처럼 나를 덮친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침묵하는 편이 낫겠다고, 아니 그저 침묵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한 마디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는가. 단 한 마디 말이 나를 보잘것없는 훈련생으로 격하시켰을 것이다. 이제 막 훈련생이아닌, 인간이라는 
고지에 간신히 다다랐는데 말이다. 그 모든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원장 선생님은 내게로 바싹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딘가 눈길을 끄는 데가 있다, 야콥."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금세 느낄수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내가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래서 얼굴 근육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아무 생각 없는 듯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냉엄하고 굳은 표정으로 원장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냉정함과 새침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의 얼굴에다 대고 웃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선생님이 나의 태도에 흡족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얘야,
이제 돌아가서 할일을 해라. 무슨 일이든 해라. 크라우스와 이야기나 나누든지." 하던 대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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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상실

나는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표현들이 늘 싫었다. ‘돌아가셨다passed away ‘라거나 ‘더는 우리 곁에 없다no longer with us‘, ‘세상을 떠났다departed‘ 같은 표현들은 비록 선의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내게는 위안이 된 적이 전혀 없다.  - P13

이런 표현들은 요령껏 말한다는 미명으로 죽음의 충격적인 둔탁함을 외면하고,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아름다움이나 그리움을 불러내기보다 안전함과 친숙함을 택하는데, 내게 그런 선택은 언어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처럼, 얼버무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게 죽음의 근본적이고 확고한 사실이다.  - P13

죽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은 현혹적이게만 느껴진다.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 Lowell의 말처럼, "일어난 대로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P13

하지만 일어난 대로 말하는 편을 선호하는 내게도 예외가 있다. "제가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처음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던 건 아버지가 사망하고 열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 P14

제가 지난주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전과는 다르게 이 표현의 생경함에 붙들렸던 까닭은 그때까지도 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익히 알던 세계의 많은 부분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왜곡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어서였으리라. - P14

아버지는 분명 소풍을 간 아이처럼 멀어진 것도, 난장판인 사무실에서 사라진 중요한 서류처럼 찾을 수 없게 된 것도 아니었다. 한데 이 표현은 죽음을 에둘러 말하는 여느 말들과는 달리 면피한다거나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슬픔 그 자체처럼 단순하고, 애달프고, 쓸쓸하게 들렸다.  - P15

그날 통화하면서 처음으로 입에 올린 이 말은 그 후로 삽이나 종 당김줄처럼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냉정하고, 울림이 있고, 모종의 절망이나 체념을 고루 포괄하는 사별이 남긴 황폐함과 혼란스러움에 맞춤한 말이었던 것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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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서를 나는 아직도 쓰지 못했다.
나의 과거에 대해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은 좀 껄끄러운 일이다. 크라우스는날이 갈수록 점점 더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난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옳지 못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대담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 어울린다. 

나는 다소 병적인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견해들을 잔뜩 갖게했다는 것을 끔찍하게 의식하며 죽음을 맞는 일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여겨진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항 속에서 아름다움의 전율을느낄 수 있는 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겁 없이 저지르는 행동, 어리석은 짓거리 때문에 비참하게 죽는 것. 

이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 천박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짓거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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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의 언덕길

21시 50분, 밀라노의 리나테 공항 출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트리에스테로 혼자 떠나는 여행치고는 비상식적일 만큼 늦은 시간의 비행 편이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도 공항 로비는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로 떠나는 여행객으로 북적여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그들의 열기에 휩쓸려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일이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까지와서 전송해준 친구들과 헤어져 탑승 대기실로 가보니 트리에스테행 승객은 그저 몇 사람밖에 없었다. - P7

문화적인 면에서도 트리에스테는 특이한 도시라고 할수 있다. 독일어 문화권과의 정신적인 연결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채, 트리에스테 사람은 존경과 동경과 증오가 뒤얽힌 감정으로, 이미 과거의 것이 된 빈의 문화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에게는 북쪽 나라들과의 연계가 정신적 사활의 문제인데도 언어적·인종적으로는 끊임없이 이탈리아를 동경하는 이중성이 트리에스테 사람의 정체성을 비할 바 없이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다음에는 이탈리아어로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하인리히 하이네의 서정시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형식사이에서 동요하고, 그 복잡함은 프로이트에게 경도된 사바의 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P19

증권거래소에서 움베르토 사바 서점이 있는 산 니콜로거리까지는 백 미터도 안 될 터였다. 하지만 곧장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쉬웠다. 언젠가 자기 것이 되리라는것을 알고 있는 보물에 일부러 서둘러 뛰어갈 필요는 없다. 그런 기분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몹시 그리워해 온 대상을 실제로 손에 넣는 게 어쩐지 두려웠다.
서로 맞서는 마음의 골짜기에 추락한 채 나는 산 니콜로거리와 교차하는 몇몇 좁은 길 여기저기를 향해 걸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색도 모양도 기묘한 마네킹이 세워져있거나 그저 상품 상자만 쌓여 있을 뿐인 쇼윈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 P21

움베르토 사바 서점은 좁은 길이 끝나는 부근 왼쪽에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 걸까. 예전에 남편이 이야기해주었을 때부터 내내 나는 이 가게가 경사 급한 언덕 위,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일에 지쳐 가게 앞으로 나온 사바가 허리에댄 두 손으로 등을 지탱하듯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파란 눈에는 하늘의 파랑이 비치고 있다. - P23

하지만 현실의 서점은 좁고 낡아 보이는 부티크 거리의 막다른 길에 있었고, ‘두 세계의 서점‘이라는 원래 이름은 약간 속된 느낌의 ‘움베르토 사바 서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용기를 그러모아 나는 문손잡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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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탐심 - 인문의 흔적이 새겨진 물건을 探하고 貪하다
박종진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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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探心)과 탐심(貪心) 그 중간 어디쯤에서 요동치는 마음을 눌러야하는 만년필 비기너의 하루가 오늘도 지나가고 있다. 오늘 하루는 탐심(探心)에 가까운 하루~. 수 많은 정보들 속에서 시간과 경험을 쌓아가며 나만의 만년필을 찾아가는 여정은 지금부터다! 그 여정에 꼭 함께 해야 할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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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9-1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 벌써 읽으셨군요! 이전 판으로 갖고있는데 개정된 부분이 궁금하네요 ^^

은하수 2024-09-19 21:46   좋아요 1 | URL
아~~수하님께서도 만년필 러버시군요~~
전 이책 읽으며 옛날 친정아버지 파카만년필 생각나서 추억에 젖어 재밌게 읽을 수 있었어요.
초보들에게 좋은 책이네요^^
어떤 부분이 바뀌었을까요...^^

건수하 2024-09-20 09:33   좋아요 1 | URL
저도 비기너 쪽에 가까워요 ^^

세세한 개정은 모르겠지만 목차를 보면 뒷부분에 새로운 글이 추가된 것 같아요.
·오래된 것의 매력
·Shall we dance?
·볼펜과 만년필의 암흑기
·동갑내기 학생 만년필
·만년필의 완성은 클립
·생존의 조건
·유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글들이 궁금해서 언제 읽어보긴 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