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 마지막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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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젠더: 역사 분석의 유용한 범주




전통적인 정치사가들이 자신들의 연구에서 젠더 개념이 과연 유용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때 자주 언급하는 것이 전쟁, 외교, 상위 정치와 같은 주제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행위자와 그들의 말에서 드러나는 표면적 의미 이면의 것을 봐야 한다. 국가 간의 권력관계나 식민지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의 지위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논의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따라서 정당한 것)이 되었다.  - P98

전쟁 -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젊은 생명을 소비하는 
일의 정당화는 남자다움(그들이 아니었으면 공격에 취약했을 여자와 아이들을 지켜줘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노골적 호소, 지도자나 (아버지인) 왕을 섬겨야 할 아들의 의무라는 믿음에 대한 암묵적 의존, 남성성과 국력의 연계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해 왔다. 
상위 정치는 그 자체가 젠더화된 개념이다. 왜냐하면 상위 정치의 결정적 중요성과 공적 권력, 곧 그것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사실과 그 근거가
바로 그 작동에서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 P98

젠더는 정치권력을 이해하고 정당화하고비판할 때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들 중 하나다. 그것은 남/여의 대립이 갖는 의미들을 참조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확립한다.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면, 그 논거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즉,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혹은 신의 질서의 일부처럼 보여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젠더 관계의 이항 대립과 [젠더 관계가 만들어지는] 사회적 과정은 둘 다 권력 자체가 갖는 의미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그것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의문을 제기하거나
바꾸는 것은 전체 체계를 위협하게 된다. - P98

어떤 의미에서 정치사는 젠더라는 장을 무대로 삼아 왔다. 그 장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경합하고 있으며 항상 유동적이다. 
만약 우리가 성별 간의 대립을 주지의 사실로서가 아니라 문제적인 것으로, 즉 맥락에 따라 정의되고 계속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다룬다면, 젠더를 가져와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선언이나 논쟁에서 무엇이쟁점이 되는지뿐만 아니라 젠더에 대한 암묵적인 이해가 어떻게 환기되고 재각인되는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해야만 한다. 

여성과 관련한법률과 국가권력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여성 또한 인간역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참여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그리고 언제부터) 역사의 주체로서는 비가시적 존재가 되어 버렸는가? 젠더는 전문직의 출현을 정당화해 주었을까? (프랑스 페미니스트 뤼스 이리가레가 쓴 최근의 논문 제목을 인용하자면) 과학의 주제는 성별화되어 있는가? 국가정치와 동성애의 범죄화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회제도는 어떤 식으로 젠더를 그 전제나 조직에 통합해 왔는가? 진정으로 평등한 젠더 개념에 바탕을 둔 정치 체계가 건설되거나 최소한 계획되었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 P100

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역사학을 창출할 것이다. 그 역사학은 (정치적 지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전쟁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등과 같은)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것이며, (경제나 전쟁 연구에 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검토를 도입하는 식으로) 오래된질문들을 새로운 용어로 재정의할 것이고, 여성을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 P100

가시화할 것이며, 과거의 고정돼 보이는 언어와 우리 자신의 용어 사이에 분석적 거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게다가 이 새로운 역사학은 현재 페미니즘의 정치전략과 (유토피아적인)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역사학은, 젠더가 섹스뿐만 아니라 계급과 인종까지 아우르는 정치적·사회적 평등의 비전과 함께 재정의되고 재구성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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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18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장 읽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ㅠㅠ

은하수 2025-03-18 08:29   좋아요 0 | URL
저두요~~
전 2/5 정도만 알아들은거 같아요.
그래도 투지를 샘솟게 하는 문장들이 있어 계속 가게 만드네요.
3장 시작부터 어려워요~~~ㅎㅎ
 

2장 젠더: 역사 분석의 유용한 범주

가장 최근의 용법에서 "젠더"라는 단어는 
성sex에 근거한 구별이 전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어는 "성"이나 "성차"와 같은 용어들에 암묵적으로 내포돼 있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다. "젠더"는 또한 여성성에 대한 규범적 정의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적 측면을 강조했다. 여성학 연구가 너무나도 좁게, 다른 것과 분리해서 여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우려한 사람들은 "젠더"라는 용어를 사용해우리의 분석적 어휘 안에 관계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려 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은 상호 관계적으로 정의되며, 완전히 분리된 연구를 통해서는 그 어느 쪽에 대한 이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  - P66

그래서 1975년에 나탈리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성과 남성, 양쪽 모두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농민 계급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논의 대상인 성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된다. - P66

우리의 목표는 성별, 즉 젠더 집단이 가졌던 의미를 역사적 과거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다양한 사회와 시대에 나타나는 성 역할과 성적 상징의 다양성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 사회질서를 유지하거나 사회 변화를 촉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 P67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덧붙이자면, 여성의 학문 활동이 학제의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제안한 용어가 바로 "젠더"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일찍이 여성 연구가 단지 새로운 주제를 학문 세계에 추가하는 것일 뿐만아니라, 기존 학술 연구의 전제와 기준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도록 할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 P67

「여성사의 문제에서 세 명의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은 "우리는 역사 속에 여성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재정의하고 확장해,
공적이고 정치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사적이고 주관적인 경험까지도 역사서술에 포함하는 일이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비록 그 방법론을 실제로 도입하는 데 있어 머뭇거림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여성사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학을 시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라고 썼다. 이 새로운 역사학이 어떤 식으로 여성들의 경험을 포함하고 설명하게 될 것인지는 젠더가 분석의 범주로서 어느 정도까지 발전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는 계급이나 인종 같은 범주들과 확실히 비슷하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가장 폭넓은 관점을 가진 여성학자들은 이 세 가지 범주 모두가 새로운 역사를 쓰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자주 언급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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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시간 - 소설가 김별아, 시간의 길을 거슬러 걷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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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도시 서울! 그 도심을 걷다 어쩌면 자주 눈에 띄었을 수도 있는 표석에 담긴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살려내어 보여준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지였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꾸준히 오랜 시간 찾아가고 헤매고 걸어 찾아간 표석들에 의미를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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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오후의 햇살은 그냥 집에서만 즐기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밖으로 일이 있어 나갔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오후 5시 무렵의 햇살을 운전석 쪽에서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집 근처에 있는 '벗이 미술관'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무작정 미술관 정문으로 향했는데 밖에서 볼 땐 어두워서 폐관 했나 싶어 확인해 보려고 다가가니 자동문이 스르르 열리는 거다. 열리니 안들어갈 수가 없지 싶어 들어갔더니 아직 한 시간 가량 관람 시간이 남았대서 지역주민 우대로 표를 할인받고 들어갔다. ... 


전시작품들은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는 색감 예쁜 작품들이었고 미술관도 작은 곳이라 금방 둘러볼 수 있었다. 작지만 아담한 미술관 뒷편 정원까지 산책하고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 잔 사들고 마시며 봄햇살을 만끽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받아와 책상에 놓아 두었던 최순우 선생의 <한국미 한국의 마음>이 갑자기 생각나서 저녁부터 펼쳐 보기 시작했다. 책 가격이 너무 높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을 하면서도 승인이 날까 안날까 걱정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구입해 주어 반가운 마음에 얼른 가서 받아 왔다. 



<한국미 한국의 마음>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의 책을 처음 접한 건 학고재에서 1994년 간행되었고 2002년 보급판으로 재출간되었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최순우 선생의 글이 나에게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이 책의 처음 '건축' 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축물이 '부석사 무량수전'인데, 최순우 선생이 쓰신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논한 글은 1994년 7월 간행되었던 유홍준 교수의 <우리 문화 유산 답사기 2> 에서 이미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시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고 최순우 관장의 「무량수전」 한 편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왔다. 혹자는 이 글을 일러 너무 감상적이라고, 혹자는 아카데믹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감상적이면 뭐가 나쁘고 아카데믹하지 못하면 뭐가 부족하다는 것이냐고 되받아쳤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98쪽, 영풍 부석사 중에서)라고 유홍준 교수는 여러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또 2002년에 발간되었던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서문 격인 '보급판에 부쳐'에서 유홍준 교수는 평소에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뜰 수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지체 없이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고 했다. 그때의 좋은 선생은 사람일 수도 책일 수도 있는데, 좋은 책으로는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이상이 없다는 대답을 내어 놓는다. 최순우 선생과 유홍준 교수의 책을 다 읽었지만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나는 최순우 선생의 <한국미 한국의 마음>(지식산업사, 1980)이 새로운 옷을 입고 복간되었다는 소식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기웃거리게 되었다. 이 3 권의 책에서 최순우 선생이 쓰신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논한 글은 같은 내용이고 <한국미 한국의 마음>이 근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명문을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었는데도 금방 다시 익숙하게 다가온다. 가보지도 못한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이 큰 책의 두 쪽에 걸쳐 넓게 펼쳐진 사진으로 대하니 실로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으려면 정면에서보다는 건물의 오른쪽에서 찍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진이 비슷한 위치에서 찍은 걸 알 수 있다. 정면에서 찍게 될 경우 무량수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단아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석등(국보 17호로 지정되어 있다)이 무량수전을 가리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미 한국의 마음>에는 무량수전과 석등이 하나의 프레임에 담겨 있어 내가 본 무량수전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무량수전은 1043년, 고려 정종 9년,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할 때 지은 집으로 창건연대가 확인된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랜 것이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주심포집인데 공포장치는 아주 간결하고 견실하게 짜여 있다. 그것은 수덕사 대웅전에서 보았던 필요미必要美의 극치이다. 기둥에는 현저한 배흘림이 있어 규모에 비해 훤칠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기둥머리 지름은 34cm, 기둥밑은 44cm, 가운데 배흘림 부분은 49cm이니 그 곡선의 탄력을 수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유홍준,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2, 83~84쪽, 영풍 부석사 중에서)"





















이제 최순우 선생이 쓰신, '부석사 무량수전'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던 그 문장들을 다시 음미해 보자. 조금 길지만 전문을 실어보고 싶다. 책에서처럼 세로획으로 쓸 수 있다면 천천히 읽으며 운치있게 느낌이 살 거 같은데 그건 안되겠지?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柱心包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必要美여,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석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고웁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에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의 큰 이름은 이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진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案山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한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올린다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의 건축 부분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비원의 연경당, 비원의 부용정, 경회루의 돌기둥, 경복궁의 옛 담장 등 5개이고 도자는 청자, 분청사기, 청화백자, 백자로 나뉘어 36개의 글이 있는데 그 중 20 여 개의 글을 읽었을 뿐이지만 예전에 읽을 때는 알지 못했던 문장의 특별함과 '미문美文의 향연'에서 만나게 되는 생소한 단어들을 대하노라면, 나의 지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ㅠㅠ. 왜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특히 선생이 사용하신 단어들의 뜻을 몰라 사전으로 검색을 해도 알 수 없어질 땐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머릿 속에서 지진이 난다. 



'늣늣하다-느끼하다의 충청방언', '갓맑다-잡스럽고 탁한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아니하여 깨끗하다는 뜻의 순우리말', '연연娟娟하다-빛이 엷고 산뜻하며 곱다', '헤식다(사전에 검색하니 3가지의 뜻풀이가 나왔지만 어떤 것을 적용해야할지... 유의어 반의어로 서먹서먹하다, 실없다, 싱겁다 등이 있었는데... 청자죽절문병의 유려하고 청초하며 전아한 곡선의 감각, 그리고 "너그럽게 벌어진 입이 헤식어 보이지도 않고 긴 병목이지만 과장된 것 같지도 않아서 바라보기에 그저 정이 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라는 표현에서 사용하셨는데 고운 청자빛의 청자죽절문병의 사진을 보고 나면 어렴풋이 이해가 되기도 한달까...



"부드럽고도 홈홈한 병 어깨의 곡선이 허리로 흘러서(청자복사문 매병)", "또 이것이 어떤 서상적瑞祥的(검색은 안되지만 다행히 한자가 병기되어 있어 유추가 가능한데 '상서롭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였다-청자상감어룡문매병)인 뜻에 영합되어"와 같은 문장을 만나는 기쁨이라니... 모르는 단어들의 뜻을 찾으며 유추하며 공부하듯 읽어 나가는 것도 기쁨이고.




어젯밤 청자를 지나 분청사기를 감상하고 있는데 다른 두 책에서와 달리 이번에 복간된 책에서는 도자 부분의 사진이 정말 너무도 아름답게 제 색감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어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즐거움을 준다. 선생이 분청사기를 비롯한 이조시대의 자기에 대해 설명하는 글들을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만났다.



"한국 도자기사 2천 년의 자취를 살펴보면, 대개 시대가 내려올수록 아름다움의 방향은 더 한국적으로 바뀌어 왔으며, 이 한국적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에서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든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 속을 고요히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아울러서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도자기가 지닌 이러한 한국미의 바탕 속에서 이 잘생긴 아름다움을 때때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 한국인이 지닌 가장 행복하고도 존귀한 재산의 한 묶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85~86쪽)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선생의 자부심이 한껏 느껴지는데 그것이 결코 과하게 읽히지 않고 공감하게 되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싶어지지만 이러한 감정이 흔히들 말하는 '국뽕'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평생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했던 선생의 그 곱고 넉넉한 인품이 문장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거 같아서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오늘도 역시 후회하며 다시 책을 사러 간다. 이런 책은 소장 가치 백만퍼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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