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자식을 죽인 여자와 여성해방

여자가 자연에 좀 더 가깝다고 보는 근거는 여자의 비생산적인 가치관, 사고방식이 문명이라는 것에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비생산성은 여자의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것에, 여자가 남자처럼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남자는 이론(말)으로 총체성을 획득하려 하나,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총체성을 갖고 있다.... - P205

여자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과거 원시공동체에서도 인간이 우주를 가는 아폴로 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자의 안정도에는 변함이 없다. 요즘 경박하게 떠들어대는 ‘여성 상위 시대‘와는 아무 상관없이, 여자는 본래 여성 상위로 살아왔다. 삼종지도로 인해 어디에도 안주할 곳 하나 없이 궁지에 몰려 살던 시대에서조차도 여자는 강한 모습으로 불안정하고 교활한 남자들을 품으며 견디고 살아왔다. 우리 여자들은! - P207

흔히 여자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한다. 체제와 반체제의 정점인 존재, 혹은 그 접점 너머에 있는 여자를 어느 편이 데려갈 것인가에 따라 앞으로의 세상이 결정될 것이다. 여자의 안정성을 장점으로 한다면 급진적인 힘이 될 것이고, 여자의 보수성을 발휘하게 한다면 지배 체제의 기반이 될 것이라 본다. 강함도 보수성도 아주 조그만 계기, 상황으로 서로 뒤집힐 수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같다.

_____<변소로부터의 해방> 중에서 - P207

여자의 생리 구조는 여자의 강함, 총체성의 원천일 수 있다. 단 그러려면 창조 활동으로 연결된 삶이 필요하다. 이런 전제 조건은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안기는 것 이외에 자아를 확인할 터전을 가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구만 갖고 있다면, 어떤 직업을 갖든 아무리 급진적이든 간에 여자는 아이를 낳는 기계로 ‘물화한 자궁‘이다. 

더욱이 더 큰 문제가 있다. 창조활동을 바라며 자아를 추구하는 여자의 자기 응고 방식은 남자처럼 서랍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그 흐트러진 서랍을 계속 고집하면서 자기 응고를 시도할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된다. 여자의 총체성은 자아의 확산을 버티는 가운데 되살아난다.

그러니까 서랍 속에 있는 것을 전부 뒤집어 꺼낸 상태로 버티면서 여자는 자신을 총체적인 존재이자 자연의 일부로 만들 수 있다. - P209

한 여자의 몸에는 확산하는 (마음이 흐트러지는) 자아 즉 자신 속에 있는 자연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 있기에 자기 응고력이 따라올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이런 예감은 ‘생각하는 자궁의 복권‘과도 같이 자연의 생명력과 여자를 하나로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되풀이할 무수한 만남 속에서 여자는 늘 새롭게 될 수 있고 늘 되살아날 수 있는 존재이다. 그 원천은 여자의 자궁과 자연, 그 공포, 그 생명력에 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게 있어서 인간이 그나마 조금은 제대로 살 수 있다고들 하는데, 이런 말은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 같다.  - P211

내가 지금 말한 공포는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성추행범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자궁에 있는 자연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다. 그래서 모임에서 "항문 섹스를 할 때 무서우니 아프지 않우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강연자한테 떼를 쓰며 묻던 남자들의 엉터리 같은 소리, 그런 적당함이 싫다. - P212

중절, 출산, 또 매달 하는 생리 때마다 나의 자궁과 그 두려움을, 그 자연을, 그 생명력을 공유해야 하는 여자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자연에게 묻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여자는 자연과 호응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희망하는 진짜 자유 해방이란 무엇일까? 말할 나위 없이 숨겨진 천재성을, 위대한 잠재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다. 이 말은 외적인
압박이든 지식의 부족이든 자기 발전에 방해가 될 모든 것을 먼저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 외적인 압박이나 지식의 부족이 완전히 방해가 된다고도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역시 발전의 바탕이며 주가 될 것은 나 자체. 천재성의 소유자, 천재성이 깃든 왕궁인 바로 나다. 우리가 들떠 있을 때, 숨겨진 천재성이 밖으로 나온다. 내면에 숨겨둔 천재성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희생해야 한다.

히라쓰카 라이초《태초에 여자는 태양이었다元始, 女性太陽》(1971년) - P212

‘여자에게서 여자들로‘ 향하는 길은 먼저 스스로 자신의 자궁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먼저 나와 만나야 한다. 남자의 문화, 즉 다른 경쟁자들과 경쟁하는 가운데서 자아를 찾을 수밖에 없게끔 하는 그런 문화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첫째 조건이다. 나의 자궁에 깃든 자연, 그 생명력과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은 풀 한 포기와 내 목숨을 걸고서 마주했던 옛 선조들의 그 모습 그대로 한다는 것이다. 

내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걸고 즉 나의 서랍을 모두 다 열어 놓은 채로, 내가 있는 상황이나 자연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 중에 자신을 확실히 찾을 수 있다. - P214

V. 신좌익과 여성해방

I장에서 진짜 속내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썼다. 체제의 가치관에 알랑거리고 싶은 자신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이다.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자기 모순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인 나를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두 가지 상반된 속내가 서로 ‘내가 진짜 나‘라고 주장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엉망인 상태인 자신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 엉망인 상태 가운데 바로 우리의 내일을 풍부히 품어 낼 수 있다. 그런뜻에서 나는 "자신의 어둠은 자신의 어둠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둠은 부조리한 것이니 체념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체제의 가치관에 따르고 싶지 않은 자신이란, 그 고통과 어둠에서 이끌어 낸 자신이다.
왜냐하면 고통을 느끼고 알면서 그 고통에서 체제의 가치관(빛)을 바라본다면, 체제의 가치관이 얼마나 빈약한지,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또 체제의 가치관을 좇아 봤자 자신이 죽 헛돌 수밖에 없음을 싫어도 이제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 P253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을 두고 감탄한 남자들에게서 내가 느낀 불편함, 나는 그 불편함을 필사적으로 지적하려 했고,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모든 것이 사실로 증명되고 말았다. 적군파의 탄생과 궤를 같이한 나의 여성해방운동. 그래서 나는 "그들이 애벌레가 나비로 되는 식으로 어느 틈엔가 제멋대로 과오를 키울 만큼 키우고,
심지어 반복해서 과오를 저질러 버렸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들은 ‘나비에서 애벌레‘로 되면서 생명의 가능성을 변증법적으로 후퇴시켰다. 그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눈치챘으면서도 그들에게 그저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만 했을 뿐인 나.
그래서 나는 남의 일처럼 적군파 그들의 과오를 논할 수가 없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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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이야기》 F. 스콧 피츠제럴드/빛소굴

지난 주 우리집 김장을 끝내고 엄마, 딸램네 배추, 동치미, 파김치 실어다주고 목요일엔 아랫집 어르신 댁 김장 도와 드리고 왔다. 이로써 올해 김장도 잘 마무리가 되었다.
김장 마무리 기념으로 남편과 강원도 양양으로 1박 2일 여행 가는 길~~
평창 지나 정선 진부령 지나는데 저 앞쪽 산으로부터 구름이 올라온다 싶더니 쨍한 하늘인데 약한 눈발이 날렸다. 지금은 대관령 터널 지나는 중인데 비가 내리는 건가? 분간이 안되게 강풍을 동반한 빗방울이 내린다.
산꼭대기 올랐으니 암것도 안오면 그게 이상한거지..ㅠㅠ
어... 또 금방 해가 났네~~^^
뭐야~~~ 이러면서 웃어 버렸다.

빛소굴에서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었다.
1권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집 《바질이야기 》, 2권은 헤밍웨이의 《닉 애덤스 이야기》이다. 단편집은 보통 하나의 단편이 표제작이자 단편집의 제목이 되는데 이번 《바질 이야기》는 그와 달리 사춘기 소년 바질 듀크 리의 모험과 달곰쌉쌀한 성장기를 그린 연작소설집이다.
언뜻 《위대한 개츠비》를 집필한 장편작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피츠제럴드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160 여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이었다고 한다.
달곰쌉쌀하다니 즐거운 여행길에 가볍게 읽어도 좋지않을까 싶어 가방에 넣어왔다.

다시 하늘이 쨍해졌는데 저 멀리 보이는 산과 바다 위엔 먹구름이 뚜렷이 자릴 잡고 있다. 오후에 강원도는 비소식이 있던데...


그런 파티

1
파티가 끝난 후 도도한 스티븐스 두리에이 한 대와 1909년형 맥스웰 두 대가 빅토리아 한 대와 함께 도롯가에 대기 중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쾌활한 소녀들을 가득 실은 스티븐스가 부르릉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서너 명씩 짝지어 줄줄이 거리를 걸었다. 왁자지껄한 
무리도 있고, 말없이 생각에 잠긴 아이들도 있었다. 남들에게 뒤질세라 숨 가쁘게 주변 세상을 흡수하며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을 경험하는 열 살과 열한 살의 그들에게도 잊지 못할 오후였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10~11세의 아이들이 키스 게임을 한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그런 파티>를 거절했다. 그러자 피츠제럴드는 주인공의 이름을 바질 듀크 리에서 테런스 R. 팁턴으로 수정하여 단독 작품으로 팔려 했지만, 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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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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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는 말, 그리고 누군가의 친절을 받아들이면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면서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며 나아가는 주인공들, 에이미와 이저벨, 그리고 지금도 조난당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세지...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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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저벨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온 얼굴에, 겨드랑이에 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넋이 나간 채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도티를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이저벨은 재앙을 눈앞에서 목격한 느낌, 지진의 강한 충격으로 집이 폭삭 주저앉는 장면을 지켜보는 느낌에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지진도 아니었고 ‘신의 섭리‘도 아니었다. 아니. 이런 일로는 신을 탓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서로 저지르는 것은 인간,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망가뜨렸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취했고, 애크미 타이어 회사에서 일한다는 앨시어라는 여자는 윌리 브라운을 원해 그를 차지했다. - P415

이저벨은 이 아이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담요를 끌어당겨 에이미의 팔과 목을 잘 덮어주려고 했을 때 그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에이미는 이저벨과 분리되어 있다. 모두와 분리되어 있다. 등받이가 사다리같이 생긴 의자를 침대 가까이 끌어다놓고 앉아, 이저벨은 이 얼굴의 각기 다른 그림자와 형태를 뜯어보았다. 몇 년 사이 아이의 생김새는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 P480

분리된 사람, 이저벨은 에이미의 뺨에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머뭇거리는 손길로 만지며 또다시 생각했다. 하물며 할머니가 쓰던 벨리크 자기 크리머도 물려받지 못할 아이. 이쯤에서 이저벨은 기대앉았고, 산산조각 난 크리머가 떠오르자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그 하얀 도자기는 이저벨에게 섬세하고 비현실적이고 다정한 어머니를 상징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그 최후가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린 사건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엄청난 슬픔을 안겨다주었고,
이저벨은 아직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깜빡했어요. 이저벨."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 언저리에 가혹한 흰색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었다.
- P480

에이미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늘 아침 두번째로 잠에서 깼을 때 엄마에게 도티의 이야기를 들었고, 몽롱한 괴로움 속에서 최근에 가슴을 두들겨맞고 심장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네 엄마는 정말 친절했어." 베브가 바닥에서 베개를 집어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아니요." 이저벨이 말했다. "실은 두 분이 저한테 정말 잘해주셨죠." - P507

그랬다. 조난당한 여자들이 있는 이 공간에는 어제도 오늘도친절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간직해야할 비밀은 남아 있었다. 에이미에게는 당연히 로버트슨 선생의어처구니없는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습니다."이저벨의 비밀은 에이버리 클라크를 에이버리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위치에서 무의미한 위치로 남몰래 쫓아내는 것이었다. 심지어 도티조차 자신의 슬픔을 베브에게 모조리 털어놓지는 않았다 - P507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도티, 베브, 이저벨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어렸다. 무엇을 참을 수 있는지 혹은 참을 수 없는지 아직 몰랐고,
이 자리에 있는 세 엄마에게 어리둥절한 아이처럼 말없이 매달려 있었다. - P508

... 그 순간 이저벨 굿로는 담배 연기가 아직 자욱하게 남은 그녀의 조촐한 거실에서 에이미에게 제이크와 에벌린 커닝햄 이야기의 결말과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그들의 세 자녀에 대해 나직이 일러주고 있었고, 지금까지 에이미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자기 잘못이었다고 마무리했다.
에이미는 엄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소파와 창문과 의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뒤따르는 긴 침묵 속에서 에이미의 눈동자는 거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또다시 이저벨에게로 옮겨갔다. 
"엄마." 마침내 소녀가 입을 뗐다. 이해했다는 듯 눈과 얼굴과 입이 커졌다. "엄마, 저도 저 바깥에 이어진 가족이 있었네요." - P515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듯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이저벨의 은밀하고 깊숙한 기억 속에는 이날이 그녀가 에이미를 가진‘ 마지막날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나뭇잎들은 항상 금빛이고, 고속도로에는 아침 햇살로 샤워하고 가을 날씨로 빳빳해진 금빛 나뭇잎들이 나부끼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을 것이다. - P537

다시 차에 올라탄 뒤 에이미와 이저벨은 서로 쳐다보았다. 에이미는 "좋아요. 이제 가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웃으면서 눈썹을 치키고 숨을 짧게 들이마셨고, 두 사람 다 로켓을 타고 떠나기로 합의한 뒤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하나가 
되었다. 
이저벨은 오랫동안 그 순간을 기억하며 딸에게 사랑한다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는데, 고속도로에 다시 들어서자 지금 하늘로 날아오르는 사람, 영원히 떠나는 사람은 에이미뿐이며, 이저벨이 여기 있는 것은 로켓을 조종하여 이 아이를 이저벨의 품이 아닌 가족과 형제와 친척의 품에 데려다주기 위해서라는 느낌이 점점 강하게 밀려왔기때문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다. 이저벨은 함께 달리는 이 순간을, 노란 잎들을, 가을의 황금빛을 기억할 것이다.  -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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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이저벨이 눈치를 챘어야 할 단서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 당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을 일들의 장면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휙휙 스치자, 그 행복한 봄의 기억은 송두리째 악의적이고 교활한 것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기억들을 피할 안식처마저 없어 보였다. 이를테면 빨래를 할 때, 이저벨은 세탁기에서 딸의 속옷을 꺼내면서 새삼 궁금해진다.  - P270

이 브래지어를 그 혐오스러운 남자가 만졌을까? 지금 손에 든 이 분홍색 팬티들은? 그 남자가 껴안으면서 머리를 기댄 블라우스가 이거고, 이 단추에
그의 손가락이 닿았겠지? 그 혐오스러운 인간이 손댄 옷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아낼 방법만 있다면 이저벨은 당장에 그 옷들을 내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옷이나 팬티는 오염된 채로 그녀의 집에 빨래 바구니에 서랍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녀의 집은 침범당했다. - P271

모든 것이 침범당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녀의 직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꼼짝없이 딸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을 뿐 아니라ㅡ도티 브라운의 자리에 앉은 에이미의 존재를 한순간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ㅡ에이버리 클라크도 당황스러운지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이저벨에게는 달콤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겨졌던 생활의 일부마저 사라져버렸다. - P271

적어도 그녀는 그의 입이 무거우리라는 것은 알았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와 같이 일하고 지금 같이 점심을 먹는 이 여자들이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녀는 앉아서 복숭아를 야금거렸다. 하지만 뚱뚱이 베브가 <에이번> 지를 곁눈질하면서 "립스틱 두 개와 영양크림 하나. 이걸 계산하려면 펜이 필요해. 나는 수학에는 늘 젬병이었거든" 하고 말하자 이저벨의 점심은 끝나버렸다.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수학에는 젬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 P271

‘수학‘이라는 한 단어로 이저벨은 배를 걷어차인 것 같았고, 그해 겨울밤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이 텅 빈 것을 알고 딸이 데비 케이 돈처럼 유괴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듯이 집안을 뒤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그 딸이 그녀를 속여온 사실을 알게 된것이다! (에이미가 말하지 않았던가. "몇몇 아이들은 수학을 잘해서 학교 끝나고 남아요." 그래서 한번은 이저벨이 "네 할아버지도 숫자를 잘 다루셨거든, 네가 할아버지를 닮았나보다" 하고멍청하게 지껄이지 않았던가?) 에이미가 그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신을 속였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이저벨은 정신이 멍했다. 그녀는 복숭아를 도시락 봉지에 넣고 통째로 버렸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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