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중국을 걷다 - 이욱연의 중국 도시 산책
이욱연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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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중국 여행은 하고 싶지 않지만 책은 읽을 수 있잖아 하는 맘으로 읽었다가 무색해짐. 역사, 문학, 문화, 정치적 사건들과 어우러진 중국인들의 평범한 일상과 거리와 맛있는 음식과 술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중국의 도시를 사랑했던 우리의 작가들과 안중근 의사는 잊지 말아야 할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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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고난을 대하는 한가지 삶의 철학

위화<인생>
... 크게 보면 뺄셈의 연속이지만 그 중간에 덧셈도 있었다. 물론 뺄셈은 컸고, 덧셈은 작았다. 그래서늘 적자였다. 삶은 결국 고난으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삶은 불행했다. 하지만 행복학 전문가들이 말하지 않는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는 한두차례 큰 행복을 겪는 것보다는 크기는 작아도 작은 행복을 여러번 겪는 게 더 낫다고! 주인공은 큰 불행을 겪었지만 삶의 순간순간 작은 행복도 많았다. 그런 작은 순간순간의 행복에 즐거워하고 그것을 즐겼다. 이런 그의 삶의 태도야말로 행복론 교과서에서 말하는 행복 찾기의 전형적인 예다. 그는 반복된 고난 속에서도 순간순간 삶의 작은 행복에 기뻐하고, 그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고난과 불행을 견뎠다. - P214

운명을 친구로 삼는 삶의 철학
그런데 소설에는 이런 행복학 교과서 차원만이 아니라 고난과 불행을 대하는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주인공의 태도가 들어 있다. 원망 없이 비극의 삶을 대할 수 있는 주인공만의 사고방식이 있다. 이런 주인공의 사고방식은 중국의 많은 독자가, 심지어 작가 위화조차도 주인공을 진정한 중국인의 상징이라고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국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나 사고방식, 즉 삶의 철학이나 인생관과 관련되어있다. 예고 없이 언제 삶에 닥칠지도 모르는 불행이나 절망에 대응하는 마음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그 삶의 철학으로 들어가보자. - P215

중국인의 삶의 철학을 가장 잘 압축하여 보여주는 고사성어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날 뜻밖에 생긴 말이 행운을 가져오기도 하고
불행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연히 말이 생긴 것은 행운. 그 말을 타다가 아들이 다친 것은 불행. 그런데 아들이 다쳐서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되었으니까 이건 또 행운이다. 인생이란 이렇게 행운과 불행이 교차한다. 인생에서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달과 같다. 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처럼 행운과 불행은 늘 인생이란 하나의 원에 같이 있고, 다만 어느 순간 밝은 면이 커지기도 하고 어두운 면이 커지기도 할 뿐이다. - P216

더구나 그런 행운과 불행은 내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처럼 행운과 불행이 오고 간다. 그러니 인생의 행운에 자만하거나 도취하지 말 것이며, 불행에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게 새옹지마 고사의 교훈이다. 중국인이 때로는 운명론자이고 때로는 비극 앞에서도 낙관과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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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삶의 경계와 허상을 넘는 욕망
엄마가 해준 음식이 그리운 한국인, 아빠가 해준 음식이그리운 중국인,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문화적으로 보면, 한국 남자나 중국 남자나 다 공자의 후예다. 같은 유교 문화권에 속한 남자다. 
그런데 어디서 차이가 난 것일까? 중국 남자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를 무시하고, 부엌일은 여성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통 시대는 물론이고 근대 시기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 남자와 같았다.  - P102

그런데 사회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달라졌다. 마오쩌둥 사회주의 시대를 두고 긍정적. 부정적 차원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남녀관계 차원에서 보자면 마오쩌둥 사회주의 시대는 가부장 문화를 단절하고, 남녀관계를 새롭게 세운 시대다. 무엇보다 여성에게 사회적 노동을 제공하는 한편, 가사노동, 육아노동 부담을 줄였다. 밥도 공동 식당에서 먹거나 사다 먹어서 집에서 밥할 일이 없어졌다. 마오쩌둥 시대에 지은 아파트의 주방이 손바닥만 한 것은 이런 때문이다. 탁아소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서, 출근할때 아이를 직장 탁아소에 맡기고, 퇴근할 때 찾았다. 심지어 아이를 일주일 동안 맡기는 시스템도 있었다.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는 것은 보장되어 있지만, 밥하고 아이 키우는 부담이 여전하다면 여성은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오쩌둥 시대 중국은 여성의 가사와 육아 부담을 줄여주는 시스템을 마련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확연히 달라지는 계기를 맞았다. - P103

여기에 가부장인 남자의 경제권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면서 남녀관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자녀의 결혼 같은 집안 중대사에 대한 결정권이 가부장의 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직장의 장에게로 넘어갔다. 노동 점수에 따라 집에 필요한 물자를 배분하고, 돈을 줄 때도 집안 단위로 가부장에게 주는 게 아니라 집안 식구 수에 따라 배분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P103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우리 정부가 코로나 생계지원금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통장이 아니라 집안의 가장 통장에 넣어준 것을 떠올리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권력은 결국 경제권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마오쩌둥 시대에 가장이 지닌 경제권과 집안 의사 결정권이 해체되었고, 이게 가부장제 해체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 P104

남녀의 경계가 그렇듯이, 삶을 나누는 경계란 한 걸음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참 부질없는 허상이다. 대개 인간의 삶에 놓인 수많은 경계는 현실과 대상을 관념으로 재단하고 나누어서 생긴다. 달에게는 어둠과 밝음이 원래 자신안에서 하나인 채로 있는데, 인간의 눈은 그것을 상현달과 하현달로 나눈다. 원래 하나이고 분절할 수 없는 현실과 대상을 원래대로 보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관념의 눈으로 나누고, 그것을 질서로 만들고, 심지어 그 질서에 가치와 우열을 부여한다. 그러한 관념의 질서는 당연히 허상이다.  - P104

여름철 산둥의 농촌은 붉은 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 많은 수수는 식재료와 사료, 술을 만드는 데 쓴다. 붉은수수밭의 세계에 살던 순종 인간에게 고량주는 단순한 술이아니라 잠자는 야성을 깨우고 원시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도화선이었다. 그래서 고량주를 마실 때 첫잔은 으레 한입에털어넣어 가슴에 불을 질러야 한다. 소설에서 붉은 수수밭공간에 사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술을 잘 마신다.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여성도 이곳에 시집와서는 독한 고량주 반병은 너끈히 마신다. 소설의 언급에 따르면 술은 이들을 의협심이 넘치게 만들고,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한다. 이들에게 술은 억압된 야성의본능과 원시적 충동을 불러일으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하는 마법의 액체다. - P162

인문여행에는 자연경관을 찾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인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인문의 한자 뜻풀이는 사람의 무늬(人)다. 사람의 무늬는 슬쩍 봐서는, 겉을 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보이고,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느낄 수 있다. 그래야 건물과 거리 풍경 속에 새겨진 사람의 무늬가 보인다 - P177

정신승리법은 아큐만이 아니라 누구든 사용한다. 그것은 정신승리법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방어 기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방어 기제로는, 유쾌하지 않거나 불안을 가져오는 일에서 도피하거나 부정하는 것,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게 그것을 투사하거나 전이하는것, 그리고 합리화하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아큐도 이런 자기방어 기제로 정신승리법을 잘 사용한다. 이렇게 보자면 정신승리법은 자기를 보존하고, 힘들고 상처 입은 삶을 회복하는 방법의 하나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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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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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2월 10일 밤 12시부터 오늘 새벽 사이에 방송된 노벨상 시상식 현장의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면서 온전히 한강 작가의 작품과 언어에 빠져 있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시상식을 맞고 싶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며 미리 책을 구입해 놓고 기다리다가 엊그제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전에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가 심하게 트라우마를 겪은 경험이 있었고,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읽으며 제주 4.3의 진상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나름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소년이 온다>나 <순이 삼촌>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큰 동요 없이 언어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서 작가가 이끄는 대로 보여주려는 그 세계로 바로 진입하여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사람처럼 의연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순이 삼촌>은 제주 4.3 그날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보여주어 충격을 던져 주었고, 반면에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날의 진실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면서 실종된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고자 기울이는 노력의 과정을 보여주는 설정이어서 서로 상보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강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제주 4.3의 참혹함이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습의 결과로 인해 개인적으로 그리 느낀 거라고 생각한다.



새벽 시간에 방송된 시상식 현장의 라이브 방송에서 한 강 작가의 심사평을 작성하여 읽는 스웨덴 아카데미 위원이자 노벨문학상 위원회 위원인 작가 엘렌 마트손의 심사평은 한강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이어간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절묘하게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쓰인 심사평이어서 더 유심히 듣게 되었고 그 하나하나의 문장들을 받아 적어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은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없다. 펜을 열심히 놀려 적어놓은 심사평을 여기에 남겨본다.



*한강 작가 심사평 : 엘렌 마트손(스웨덴 아카데미 위원, 노벨 문학상 위원회 위원, 작가)


한강의 작품에서 두 가지 색, 흰 색과 붉은 색이 만납니다. 흰색은 눈을 나타내며 작가의 여러 작품에 눈이 내려서 화자와 세상 사이의 보호막을 드리워 줍니다. 하지만 흰색은 동시에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붉은 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고통, 피, 그리고 칼로 깊게 베인 상처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목소리는 매혹적일만큼 부드럽지만 차마 형용할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말합니다. 학살로 쌓인 시체 더미에서 피가 흐르고 짙어지다가 이내 호소가 되며 또 그리 답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질문으로 변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죽은 자들, 납치된 자들, 그리고 실종된 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을까요?

붉은 색과 흰색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다루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합니다.

2021 년 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만날 공간을 생산합니다. 중간에 떠다니는 자들은 어디에 속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 소설은 내내 눈보라 속에서 전개됩니다. 소설 속의 화자는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면서 시간의 층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하고 죽은 자들의 그림자와 소통하고 이들의 지식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것은 지식과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과정이 견디기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절묘하게 구현된 한 환상에서 소설 속 친구는 육체가 머나먼 병상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에서 자료집이 담긴 상자를 꺼내 역사의 모자이크 한 조각을 더해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냅니다. 꿈은 현실로 넘쳐흐르고 과거는 현재로 이어집니다. 경계가 녹아 사라지는 이러한 변화는 한 강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더듬이를 뻗어 양 방향을 가리키며 신호를 포착하고 또 해석하려 합니다. 인물들은 때때로 본인이 보고 목격하는 것으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며 그럴 때는 매번 마음의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한 힘을 가지고 계속 나아갑니다. 결코 잊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죽였지? 살해 당한 소년의 혼이 묻습니다. 소년의 이목구비가 문드러지고 윤곽선이 무너집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오로지 고통만 남겨준 이 몸뚱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문으로 으스러져 피 흘리는 이 몸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몸이 포기하려 하면 영혼이 말을 이어갑니다. 혼이 피폐해지면 육체가 걸음을 이어나갑니다. 깊은 내면에는 고집스러운 저항, 말보다 강한 고요한 주장 또한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 입고 취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힘을 가졌습니다. 또한 꼭 필요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자료를 하나 더 요청하고 살아남은 목격자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 희미해지며 죽은 자들의 그림자는 벽 위를 계속 맴돕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끝나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한 강 작가 님, 한림원을 대표하여 2024년도 노벨상 수상에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출처: SBS TV)




시상식이 끝나고 이어진 축하연에서 한 강 작가가 수상 소감을 영어로 낭독하였는데 한 편의 단편소설 같았던 이 글도 남겨둔다. 1,300 여 명만 초대 받은 연회장에 한강 작가를 소개하는 한국어가 울려 퍼졌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약간 어색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소개하는 음성이 귀에 쏘옥 하고 들어와 박혔다. 올 블랙의 수수한 롱 드레스를 착용한 한강 작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약 4 분간 연회장에 울려 퍼진다. 


제가 여덟 살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주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너무 세차게 내리자 20 여 명의 아이들이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처마 밑에 또 다른 작은 군중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제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물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이 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에 촉촉이 젖은 비를 그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일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면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니 이 경이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습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또 다른 마음 속 깊이로 들어가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질문을 실에 매달아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 

그 실을 믿고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학을 위한 이 상이 주는 의미를 폭력에 맞서는 분들과

이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SBS TV)




아침 나절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 염색을 하고 왔다. 외출할 일이 별로 없어 흰머리가 몇 센티미터나 올라오고 있는 것도 상관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부부 동반 모임이 있어서 외출할 일이 생겼다. 한강 작가는 화장 안한 수수한 얼굴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했던데 ... 그래서 더 멋지지 않으냔 말이다. 근데... 난 그게 안된다. 돌아와서 오후에 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펼쳤는데 서문에 이런 문장이 첫 문장으로 나온다. 


     우리 마을의 규범을 따르지 않던 타보 디디(Tabo Didi)는 언젠가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철학적인 말을 잊지 않았다.(9쪽)


한강 작가의 소감문을 읽으면서도 자연스레 든 거지만 이 문장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를 보고 드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우리 나라의 상황과 연결이 되었다. 물론 작가의 작품 제주 4.3 사건 당시의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힘없는 국민들은 국가 권력의 총칼 앞에, 장갑차 앞에 맨몸으로 맞선다.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인데 다시 또 계엄이라니... 머리가 쭈뼛 서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12월 3 일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살아서 계엄을 또 겪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한강 작가와 마리아 미즈는 잊지 않기 위해서, "망각에 저항해" 쓰고 또 쓰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거다. 문학의 힘을 믿는 한강 작가의 소감문이 주는 감동으로 오늘 하루도 이겨내고 다시 힘을 내본다. 

기어코 ... 이루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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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12-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강 작가 심사평, 한강 작가 수상 소감 둘 다 너무 좋네요^^b

은하수 2024-12-12 11:10   좋아요 1 | URL
그쵸~~~~?^^
저 새벽에 이 문장들 들으면서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더라구요!
조곤조곤 읽어나가는 두 작가의 목소리에 위안 받았답니다.~~
넘 멋진 여성들이지 않습니까!^^

고양이라디오 2024-12-13 22:10   좋아요 1 | URL
목소리 직접 들으면 더 좋을 거 같네요!!!

한강작가님 낭독도 너무 좋아요ㅜ
 

동서로 긴 타원의 섬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놀라울 만큼 노이즈 없이 선명한 흑백 무성 영상이 뒤따라 들어왔다. 초가지붕들이 불탔다. 검은 연기가 불꽃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검이 장착된 장총을 멘 옅은 색 제복의 병사들이 현무암 밭담을 뛰어넘었다. - P161

흑백사진 석 장이 차례로 화면을 채우고 
사라졌다. 해송 숲 가운데 흰옷 입은 남자 넷이 서 있었다. 철모를 쓴 군인 넷이 그들에게 과녁 조끼를 입히고 있었다. 네 쌍의 모습이 측면에서 클로즈업되어 차려 자세로 서 있는 청년들의 콧날과 인중,
턱과 목을 잇는 앳된 선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카메라에 가장 가까워 얼굴이 크게 보이는 청년의 입술은 긴장한 듯 다물렸고, 막침을 삼킨 듯 목의 얇은 피부 아래 성대가 튀어나왔다.
다음 사진에서 청년들은 과녁 옷을 입고 한 명씩 소나무에 묶여 있었다. 사진의 화각이 좀전보다 넓어져, 오 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엎드려 쏴 자세로 과녁을 겨눈 병사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 왔다. - P163

마지막사진에서 청년들의 몸은 비틀려 있었다. 끈으로 묶인 허리 위쪽 상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턱이 들리고 고개가 젖혀졌다. 무릎이 오그라졌다. 입이 벌어졌다. - P164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P317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 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 P317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 P318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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