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전화해, 제발.
실수인지 안부용 서식으로 전송되었다.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진 편지와 분홍빛 장미 꽃봉오리로 장식된 전보를 함께 들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엘런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어도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 P222

엘런은 아이의 침실로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해치워 버릴 생각에 급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아이가 가지고 놀던 요새와 군인 장난감이 있었고 침대 위에는 다림질해 차곡차곡 개켜 둔 깨끗한 옷이 그대로였다. 엘런은 생각했다. ‘지금 눈물을 터뜨리면 절대 멈추지 못할 거야.‘ 엘런은 옷을 집어 서랍장에 넣어 두고는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바쁘게 집 안 곳곳을 살펴보며 전부 떠날 때모습 그대로인지 확인했다. 정원은 처참했다. 화분의 제라늄이 죽어 있었다. 엘런은 흙을 만져 보았다. 
시멘트 같았다. 호스를 꺼내 정원 여기저기로 다니며 화단, 돌, 심지어 죽은 제라늄에도 물을 뿌렸다. 정원이 다시금 살아 숨 쉬는 듯했고 흙에 물이 스며들며 촉촉하게 바스라졌다. - P222

그 즉시 엘런의 익숙한 상처가 다시금 욱신거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엘런의 머리도 허리까지 올 만큼 길었다. 그때 웬일인지 엘런의 감정에 변화가 생기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안도의 눈물이었다. 남편은 황량한 삶의 한복판에서 새로 시작할 힘을, 건강한 젖이 흐를
것만 같은 깨끗한 초원 같은 가슴에 머리를 누일 힘을 낸 것이다. 이상하게도 엘런은 고마웠다. 남편은 엘런이 느껴야 했을 영원한 죄책감의 압박을 없애 주고 그를 해방시켰다. 엘런은 무엇보다 그들이, 남편과 미지의 여자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여자가 남편을 찾아온 이유가 그저 집이 필요하거나 파손 위험이 있는 우편물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견딜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엘런 안의 호기심이 죽어 버렸다. 그토록 열렬한 무관심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죽음과 덧창 닫힌 집이 두 사람의 결혼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더 이상 고통은 없다.
때가 되면 남편이 우편물을 보내겠지만 절차 진행을 위한 연락일 테고 엘런의 답변 역시 사무적일 것이다. - P224

"결과가 나왔어요." 여자가 결과지를 들고 말했다. "이차 감염이 있었지만 임질은 아닌 것 같아요......."
"걱정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엘런이 말했다. 속은 듯한 기분이었으나 어쨌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손뼉을 치는 것 같은 불경한 짓을 저지를 뻔했다. 엘런은 처방전을 받아 알약과 제비꽃 빛깔 로션을 샀고, 약국을 떠나며 바지에 로션 얼룩이 묻어난다면 그 자체로 애도의 증명이 되리라 생각했다. 들쑥날쑥하고 추한 보랏빛 얼룩. - P235

엘런은 약 꾸러미를 꼭 붙든 채로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갔다. 자작나무는 잎사귀마다 자력을 발휘해 외양을 바꾸는 듯했다. 거친 풀의 밑동부터 흙빛이 피어났고, 땅에는 빛바랜 듯 희미한 노란색이 번졌으며, 공기는 녹녹했다. 엘런은 빠르게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제 서두를 필요가 없고,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이 없고, 그저 가만히 호흡할 뿐이고, 행복하지 않으나 불행하지도 않았다. 낮이 전처럼 찬란하고 밝지 않다면, 밤도 그렇게 새카맣지는 않으리라. - P235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좋았다. 
나뭇잎이 떨어졌고, 엘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너울너울 떨어져 낙엽 더미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잎이 사방에서 그렇게, 단순하고 무던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두 달쯤은 이렇듯 서늘하고 감미로운 가을이 이어질 것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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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든 변소든 여자는 남자의 이미지 속에 있다. 여자는 자신을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로 찾아 헤매며 살아갈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듣자 하니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끊임없이 "예쁘다"는 말을 해 주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 불안해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는 물론 남성이다. - P23

여자는 만들어진다. 암컷으로 만들어진다. 시집 못 가면 어쩌려고!" 협박하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한 남자의 품속에서 여자는 여성다움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여자의 삶에서 보람은 남자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데에 있다고 한다. 꼬리 흔들기 방식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부터 진한 화장을 한 것까지 다양한 암컷의 모양새로 나타난다. 
남한테서 찾으려는 자신이라는 건 어차피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자‘가 삶의 보람을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로 삼는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찢기고 마는 것이다. 
교태란 자신을 남의 가치관에 팔아넘기는 것을 말한다. 암컷으로서 꼬리를 흔들고 교태를 부리며 살아오게끔 된 여자의 인생이 끊임없이 존재의 상실감으로 위협받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 P23

"당신은 예쁘다"는 마약 같은 말이 끊기면 금세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 못하게 되는 금단 증상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여자를 남성에게 향하게끔 하는 원흉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자는 남자 눈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두려워한다. 암컷으로 살아온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는 먼로와 같은 여성으로만 존재한다. - P23

단지 암컷으로 잘할지 못할지, 억지로 팔 것인지 솜씨 좋게 비싸게 팔것인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한 화장을 하든 맨얼굴이든 남자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게 바로 여자의 역사성이다. - P24

그런데도 남자들은 ‘예쁘고 멍청해 보이는‘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를 찾는다. 주부와 창녀는 먼로 같은 여자의 양끝에 존재한다. 
거지가 주인인 것마냥 행세할 때는 누구를 살리건 죽이건 자기 마음대로니까 그런 남자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남자한테 ‘지금 여기에 있는 여자‘는 기껏해야 엄마 정도이다. 
남자는 자신에게 교태를 부려서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여자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라는 점을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하고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를 좇는다.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란 남자의 이미지 속에서 사는 모든 여자를 일컫는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가 되려고 스스로를 잃어가는 모든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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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여자 같으니." 엘런이 말했다.
"정말이야......." 데니스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교회에서 대화할 때처럼 낮은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외모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얼굴이 아이처럼 통통했다. 그 순간 엘런은 갸름하고 핼쑥한 얼굴로 데니스에게 달가운 미소를 보냈다.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한가. 간 보호제를 먹고. 돈을 따고. 하지만 그보다 더 단순한 행위, 포옹하고, 구애받고, 하룻밤 숨을 헐떡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대적인 세뇌가 시작된다. 여자는 정숙해야 한다는 교리의 가르침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은밀한 메시지, 남자와 남자의 몸이야말로 진정하고 절대적인 위로라는 것.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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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니 청명하고 푸른 하늘 아래, 잔디와 화단이 촉촉했다. 하지만 도로는 벌써 빗물이 말라 건조했고, 공기에 상쾌한 기운이 없었다면 태풍이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날씨였다.  - P142

엘런은 간밤에 올랐던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빠르게 나아갔다. 그런데 자꾸 굽이가 나타나서 발걸음을 재촉하면 잠시 후 또 다른 굽이가 나타났다. 높은 담벼락이 솟아나서 바다 풍경을 가리기도 했다. 야자수가 담장보다 높이 솟아 있었음에도 가지가 풍성하지 않아서 그늘은 없었다 무화과나무 몇 그루만이 익숙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 P142

날이 점점 뜨거워졌다. 언덕 꼭대기에 멈춰 서서 브래지어를 풀었다. 저 밑에서,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기는 힘들었으나 저기 내려다보이는 마을에서 호텔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기를 바랐다.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러자벌써 기분이 좋았다. 배우를 놓친 아쉬움도 사라졌다. 시드니로인한 메슥거림, 서글픈 여자로 인한 슬픔도 전부 엘런의 삶에서사라졌으므로 이제 엘런은 안전했으며, 집에 가면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엘런은 달리다가 멈춰 서서 숨 고르기를 반복했는데, 달릴 때든 멈출 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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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니 청명하고 푸른 하늘 아래, 잔디와 화단이 촉촉했다. 하지만 도로는 벌써 빗물이 말라 건조했고, 공기에 상쾌한 기운이 없었다면 태풍이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날씨였다.  - P142

엘런은 간밤에 올랐던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빠르게 나아갔다. 그런데 자꾸 굽이가 나타나서 발걸음을 재촉하면 잠시 후 또 다른 굽이가 나타났다. 높은담벼락이 솟아나서 바다 풍경을 가리기도 했다. 야자수가 담장보다 높이 솟아 있었음에도 가지가 풍성하지 않아서 그늘은 없었다. 무화과나무 몇 그루만이 익숙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 P142

높은 담벼락이 솟아나서 바다 풍경을 가리기도 했다. 야자수가 담장보다 높이 솟아 있었음에도 가지가 풍성하지 않아서 그늘은 없었다. 무화과나무 몇 그루만이 익숙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담벼락에서 피어난 양귀비는 크레이프로 만든 종이꽃 같았다. 엘런은 이따금 한 송이씩 뽑아서 향기를 맡고는 손가락으로 꽃송이를 찢어 버렸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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