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힘들고 어려운 필사가 취미가 되면 마술에 빠진 것처럼 재미있어진다. 이런 마술을 부리는 건 만년필이다. 부장님 취미에 끌려 나가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벼르고 별러 산 새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할 때처럼 말이다. 순백의 종이에 파란 잉크가 뾰족한 펜 끝으로 샘솟듯 흘러나와 힘들이지 않고 방향만 바꾸어 주면, 종이에 스며들어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가 한 줄, 두 줄 차곡차곡 쌓여 한 페이지가 되면, 한 폭의 그림 같다. - P156
"허허허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 비싼 만년필이 없단 말이지."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건 옛말이라고 전해 드리고 싶다. 시내의 큰 문구점에 가면 커피 한 잔 값에 잘 써지는 만년필을 구할 수 있고, ‘치맥‘을 한 번만 참으면 평생 함께할 수 있는 만년필도 살 수 있다. 잉크는 집구석 어딘가를 잘 찾아보면 한두 병쯤 있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잉크가 그리 비싼 물건이 아니니 금세 구매할 수 있다. 노트는 180도로 잘 펴지고 뒷면 비침이 없는 것을 고르면 된다. 사실 필사의 즐거움을 위해 굳이 비싼 만년필을 구할 필요는 없다. 어떤 만년필이든 1883년에 만들어진 워터맨의 방식을 따르고 있고, 쓰면 쓸수록 점점 좋아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오래 써서 자기 손에 길이 난 만년필이 가장 좋다는 이야기다. - P158
나는 주로 파커45를 사용했는데, 파커45는 가볍고 펜 끝은딱딱한 편이었다. 너무 저렴한 만년필 중에 뚜껑이 깨지거나 밀폐도가 떨어지는 것, 클럽이 끊어지거나 탄력이 떨어지는 제품들이 있는데, 요즘 문구점에서 이런 물건을 취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고를 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필사를 할 때누 가늘게 써지는 게 좋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 P159
만년필 펜촉 굵기는 EF, F, M, B, BB 등으로 구분하는데 필사를 한다면 가장 가는 EF 펜촉을 사면 된다. 펜촉의 굵기를 구분하는 알파벳은 그리 어려운 의미가 아니다. F는 ‘fine‘으로 가늘다는 의미다. M은 ‘medium‘으로 중간, B는 ‘broad‘로 넓다는 의미다. EF는 ‘extra fine‘으로 ‘아주 가늘다‘라는 말이다. BB는 넓은 것이 두 개이니 ‘매우 넓다‘는 뜻이다. 그런데 ‘fine‘은매우 적절하게 선택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좋다‘는 의미가 더 익숙할 텐데, 필기구는 종이라는 한정된 공간안에 많은 글을 정확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가늘고 뾰족한 것이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가늘고, 좋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fine‘은 필기구로서 만년필의 본질을 보여주는 절묘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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