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홍수 속으로

나는 안달복달하는 바람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흩어지는 구름을 한동안 보았다. 강의 변형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나와 같은 종의 비뚤어진 탐욕이 실감나서였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세상을 멋대로 바꾸는 그 탐욕이 거북했다. 우리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홍수와 가뭄의 대참사로 돌아올 만한 행동이다. 오염된 하구를 베번으로 조금씩 홀러들게 하는 하수처리 방식이나, 다운스의 비밀 저장고에서 지하수를 야금야금 훔치는 생수회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 P250

그러다 앞으로 일이백 년 후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러다강이 완전히 말라붙는 건 아닐까? 계곡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던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쩍쩍 갈라진 땅바닥만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바다가 서서히 밀려오다 끝내는 이 도시를 집어삼키며 소금기 풍기는 늪지대로 되돌려 놓으면서 소들의 시체와 우리 인간이 세상에 그득그득 채워놓고 있는 플라스틱으로 오염되는 게 아닐까? 미래의 어느 날 이곳에 서서 지켜볼 누군가의 눈앞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사막 같은 세상일까, 유독물로 오염된 바다일까? - P250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루이스의 홍수는 하나하나 축적된 행동이 결국엔 화를 자초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범람원에 건물을 짓는 일은 아무리 많은 하수관을 설계해 넣는다 해도 여전히 위험한 모험이다. 물론 비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방법을 찾는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P250

특정 씨앗의 발아를 위해서꼭 필요한 산불처럼 홍수가 파괴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집이 하수 오물로 가득 차고 책마다 주글주글 주름이 잡히고 옷이 물에 쓸리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런 긍정적인 영향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환경청조차 수긍했다시피,
우즈강의 개간은 점차 적정 수준을 넘어섰고 루이스가 기후변화의 진통을 잘 버텨내기 위해서는 일부 땅은 강에게 내주어야한다. - P251

나는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우연히 우즈강의 둑에 천변저류지washland 를 복원하려는 프로젝트에 대해 보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변저류지란 범람한 물이 배수구와 하수구로 들어가 상점과 주택으로 흘러드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넘쳐난 물의 대기 공간 역할을 하면서 단기적으로 범람을 버텨주는 목초지를 말한다. 
농업이 점점 집약화되면서 주민들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지만 한때는 작물이 아주 풍성하게 자라서 1년에 세 차례나 활용할 수 있었다. 즉, 한여름에 건초 수확을 한 후 두 번째 자라난 풀로는 소가 가을까지 뜯어 먹고 또 그 뒤에는 양이 겨울 폭풍이 닥칠 때까지 뜯어 먹을 수 있었다. - P251

어쨌든 서식스 대학의 생태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짜낸 이 복원 프로젝트는 이곳의 야생 목초지를 복원하여 강 하류의 범람 위험성을 낮추는 동시에 내가 셰필드 파크 인근에서 봤던 수레국화, 칵풋, 왕바랭이, 김의털, 요크셔포그 등의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풀들이 다시 강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려는 구상이었다. - P251

 소소하지만 어딘지 기분을 아주 좋게 해주는 계획이었다. 경제적인 동시에, 넉넉한 마음이 배어 있어 다시금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인간이 어쩌면 이 세상에 잘 적응해볼 수도 있겠다고. 여기저기 깎아내다 결국엔 그 기반이 내려앉아 전부 다 무너지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 P252

갑자기 활기가 넘치면서 허기가 몰려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돌아 내려왔다. 창가에 빵과 자전거 한 대, 제라늄화분, 물레를 쌓아둔 별난 식료품점에서 피자 한 조각과 딱총나무 꽃의 향이 나는 달달한 청량음료를 점심거리로 사 들고 철로 변으로 내려가 햇볕을 쬐며 피크닉 분위기를 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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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의 피가 수은 중독을 넘어 아예 수은으로 변하기라도 한듯 극심한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갑자기 지난 몇 달이 버겁게 느껴져 눈물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전엔 내가 도망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해봤지만 지금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P196

 다시 숲으로, 그 마법 세계 같은 울창한 안드레데슬레지로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고, 내 이름도 모르는 그곳으로. 왜 과거는 늘 이런 식일까. 왜 기억은 흐려지지 않고 자꾸만 맴도는 걸까. 왜 가끔씩 이렇게 무턱대고 떠올라서 지금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을, 내 육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 공간을 그저 신기루처럼 느껴지게 하는 걸까. 과거는 붙잡을 수가 없다. 되돌아갈 수도,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을 수도, 그렇다고 무심하게 툭툭 떨쳐버릴수도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것인지.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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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 ㅡ 머리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책이라도 막상 읽어 보면 재미있고, 흥분되고, 심지어 감동까지 줄 수 있다는 사실 ㅡ 은 예술이 대뇌 활동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 P44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문명이 지속되는 한 우리에게는 가끔씩 여가가 필요할 것이므로 가벼운 문학이 놓일 지정석은 언제나 있을 테고 박학다식함이나 지적 능력보다 훨씬 생존력이 뛰어난 순수한 기능이나 타고난 은총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P45

 같은 취지로, 작품의 수준을 판단하는 문학적 잣대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면 버지니아 울프나 조지무어의 전집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데 기꺼이 한 표를 던질 것이다. - P46

-책방의 추억

하지만 우리 책방 제2의 수입원은 뭐니 뭐니 해도 대여 문고였다. 오로지 소설책 500~600권으로만 구성된 대여 문고는 여느 대여 문고처럼 "예치금 없이 2페니"만 받고 책을 대여했다. 책 도둑들이 이 같은 대여 문고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책방 한 곳에서 2페니를 내고 책 한권을 빌리고 나서 식별표를 떼버린 후 다른 책방에 1실링을 받고 팔아먹는 짓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범죄다. 그럼에도 책방 주인들은예치금을 요구해서 대여 문고 이용자 수를 떨어뜨리느니 차라리 어느 정도의 책은 도둑맞는 게 (우리 가게에서는 한 달에 열두 권 정도를 잃어버렸다.)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았다. - P50

 그리고 한가지 놀라운 점은 영국의 고전 소설가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디킨스, 새커리, 제인 오스틴, 트롤럽 등을 대여 문고 도서 목록에 넣는 일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들을 대여해 갈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세기 소설을 힐끗 쳐다보고는 "흠, 엄청 옛날 거네!"라며 외면한다. 

하지만 디킨스 작품을 파는 일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파는것만큼 언제나 무척 쉽다. 디킨스는 사람들이 항상 읽을 의향이 있는 작가의 한 명인지라, 헌책방에서는 성경과 마찬가지로 꽤나 유명하다.  - P50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 책의 인기가 점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출판사들은 이삼 년마다 이런 문제로 마음을 졸인다. 단편 소설이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읽을 책 한권 추천해달라고 대여 문고 담당자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우리 문고의 한 독일 고객이 즐겨 하는 표현처럼 한결같이 "단편 소설은 말고요."나 "짧은 이야기는 빼 주세요."다. 이유를 물어보면 종종 단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에 익숙해져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 싫기 때문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그들은 첫 장 이후부터는 많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장편 소설에 몰입하기를 더 좋아한다. - P50

그럼에도 나는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단편 소설 대부분에는 생기와 가치가 철저히 결여돼 있다. 그 정도가 대부분의 장편 소설들보다 훨씬 더하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단편 소설은 충분히 인기가 많다.
D. H. 로렌스의 단편 소설은 그의 장편 소설만큼 인기가 많다. - P53

 진정으로 책을 사랑했던 때가 있긴 했다. 최소 오십 년은 된 책의 모습과 냄새와 감촉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시골의 경매장에서 단돈 1실링을 주고 책 한 무더기를 살 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예상치 못하게 구입한 책에는 독특한 운치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18세기 시인들, 고지명 사전들, 지금은 거의 잊힌 소설 희귀본들, 1860년대 여성지 제본판들이 그러하다.  - P52

하지만 책방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책을 더 이상 사지않게 됐다. 한 번에 5000 혹은 1만 권 정도의 책이 쌓여 있는 장면을 보다 보니 책이 별볼 일 없어졌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물론 요즘에도 이따금씩 책을 사긴 하지만 빌려 볼 수 없을 때뿐이다. 
그럼에도 쓰레기 같은 책은 결코 사지 않는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나는 더 이상 끌리지 않는다. 오래된 책을 보면 편집증 환자 같은 손님들과 죽은 금파리들이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금방 연상되기 때문이다. - P52

-작가와 리바이어던

물론 정신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것이 사회주의자들과 좌파들 전반의 특수한 현상이라거나 그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퍼져 있는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어떤 특정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문학적 진실성이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 투쟁의 영역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와 개성주의 같은 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실 주의로 끝나는 단어는 그 단어만 들어도 선전의 냄새가 풍긴다. 집단에 대한 충성은 필요하지만 문학이 개인의 산물인 한, 문학에는 독이 된다. 집단에 대한 충성이 문학 창작에 영향을,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것이 허용되는 순간 창의성은 왜곡되고 사실상 고사한다.
- P84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이" 모든 작가들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이미 앞에서 말했듯 오늘과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와 거리를 둘 수도 없고 두어서도 안 된다. 

나는 정치적 충성과 문학적 충성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지금의 방식보다 더 선명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리고 마음에는 안 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을 기꺼이 한다고 해서 대체적으로 그런 일에 따르는 신념까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 P85

 작가가 정치에 참여할 때는 한 명의 시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참여해야지 한 명의 작가로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 예민한 작가라는 이유로 보통 정치의 지저분한 현실을 회피할 권리가 작가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작가도 바람이 새는 강연장에서 강연을 하고, 길바닥에 분필로 무엇인가를 쓰고, 유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선거 운동도 해 보고, 전단지를 나눠 줘보기고 하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내전에라도 참전해 싸울 각오도 돼 있어야 한다.  - P85

자신이 속한 당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하든 상관없지만, 자기 당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만큼은 절대 해서 안 된다. 자신의 글이 자신이 속한 당과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고자 한다면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당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일련의 사고 과정이 자신의 생각을 혹시 이단으로 이끌지 모를까 하는 걱정으로 포기해서도 안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비정통 사고를 감지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이십 년 전에는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작가로 의심받는 것이 작가에게는 나쁜 신호였듯, 요즘에는 반동적인 성향이 있는 작가로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나쁜 신호일 수 있다.
- P85

갈등의 시기를 살아가는 창작 작가라면 자신의 삶을 두 영역으로 분리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패배주의적이거나 경솔한 짓처럼 비칠지 모르지만 이것 말고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상아탑에 스스로를 가둬 둔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작가가 주체적으로 당의 기구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은 작가라는 자아의 파괴를 부른다. 우리는 이 딜레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정치가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품격을 낮추는 일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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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버지의 발자취

나의 여행 기질은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가 집에서 사는 삶에 만족해 보이는 기간은 1년에 고작 두세 달 정도였다. 여름이면 우리는 미시건 교외의 호수 건너편에아버지가 지은 작은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호수 부두에 댄스홀을 만들어 운영했다.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에 바다라곤 없었지만 댄스홀 이름을 ‘오션 비치 부두‘라 짓고는 ‘물 위에서 별 아래서 춤을‘이라는 거창한 광고 문구를 내걸었다. - P35

나는 규칙을 준수하기를 매우 간절히 원했기에 우리가 어느 날 저런 마을들처럼 버려지면 어쩌나, 규칙을 어기는 아버지 때문에 끔찍한 벌을 받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질문하게 된다. 사람들이 살던 곳보다 더 오래도록 내 상상 속에서 살아남은 그 유령 마을들이 없었다면, 확실성이 아닌 수수께끼야말로 우리에게 어떤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을 내가 알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규칙을 따르고 살았더라면 내가 커서 규칙에 저항하려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 P42

출발하기 며칠 전, 의사가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내장출혈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고 전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첫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안내방송에서 내 이름이 들려왔다. 언니였다. 의사가 다시 전화했다고 했다. 내장과다출혈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 P56

병원에 도착하여 발견한 것이라고는 아버지의 얼마 안 되는 유품이 담긴 두꺼운 마닐라지 봉투 하나뿐이었다. 의사는 그동안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 대한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의사는 아버지가 사고로 인한 상처보다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과다출혈에 더 치명적으로 굴복했다고 했다. 내가 딸의 귀로 경청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사실로만 듣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치명적인 출혈은 사고 자체가 아니라 정신적 외상, 스트레스, 절망으로 야기됐다고 의사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차마 언니한테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마 내가 잊지 못할일이었다. - P56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지 못하는 데 대한 나의 불평에 아버지는 전부 귀 기울여주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에, 학교에서 여자 아이들에게 부과하는 소년 소녀의 규칙들로부터 내가 손상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랑을 쏟아 키워준 아버지를 가진 것이 인생의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내가 마침내 이해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곁에 없었다. 냉담하고 잘난 체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남성들에게 끌리는 여성들을 보고 나서야, 냉담하고 잘난 체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아버지를 가진 것이 이 특질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고 심지어 집처럼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 덕분에 오로지 친절함을 집처럼 느꼈다. - P63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결정요인은 세상을 환영하는 것으로 보느냐 적대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인생은 자기충족적 예언, 즉 자신의 예언대로 성취된다. 
어머니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랐지만, 언니와 내게 환영하는 세상을 창조하는 기적을 성취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은 어쩌지 못한 채 어둠속에 버려졌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지낸 긴 시간 동안 그것을 흡수했다. 
아버지와 같이 산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았지만, 우호적인 우주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은 위협적인 우주에 대한 어머니의 공포로부터 완충 역할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 선물을 주었다.

아버지는 빛이 들어오게 했다. - P65

여행하는 유년 시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현명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평범하며,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결정이 최선임을 알게되었다. 또 인간이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 거의 무궁무진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좋은 소식이기도 하고 나쁜소식이기도 하다. - P86

결국, 아버지에게서 흡수한 독립심과 가능성에 대한 사랑이 이제 하나의 목적을 갖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운동은 끝까지 고갈되지 않을 두세 사람이 필요하다. 당신이 의존적이라면, 당신이 의존하는 사람이나 대상의 승인에 대해 걱정을 버리기가 무척 어렵다. 나는 자유와 불안정의 혼합을 집처럼 느꼈고 그 덕에 여행하는 조직가가 될 수 있었다. - P86

링컨 기념관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연단에 앉아 있는 유일한 여성이 도로시 하이트 
Dorothy Height 라고 가리켰다. 
도로시는 1930년대부터 인종간 정의구현을 위해 일해온 단체, 전국 흑인여성 위원회 National Council of Negro Women 의 수장임에도 여태껏 연설 요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 미시즈 그린은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엘라 베이커 Ella Baker는 어디 있지? 저기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 SNCC 젊은이들을 전부 교육시킨 사람인데, 패니 루해이머 FannieLou Hamer는? 감옥에서 매를 맞았고, 완전히 다른 일로 미시시피 병원에 갔다가 불임 수술을 당했어. 저들이 필요하다면 일손을 낳아야 했고, 필요하지 않으면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우리 할머니는 지지리 가난했는데 아기를 정상적으로 출산할 때마다 이상 예전만큼 일손이 필요하지 않게 된거지. 이게 흑인 여자들의 이야기야. 누가 저들에게 이 이야기를 할 거냐고?" - P89

나 자신조차 여성 연설가의 부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데 인종차별적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기어가 찰칵 맞아 들어간 기분이었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상층 카스트 여성들은 성적으로 구속받았고 하층 여성들은 성적으로 착취당했다. 이 행진은 자석과 같았다. 인도에서 생활한 경험이 내 나라에서 벌어진 차별 문제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종과 카스트 사이의 유사점을 이해하게 된 것은 오로지 미시즈 그린 덕이었다. 그녀 덕분에 여성의 몸이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영속화하는 데 사용되는지도 이해하게되었다. 서로 다른 감옥. 그러나 같은 열쇠. - P89

미시즈 그린의 딸은 자기 어머니가 주 대표단 리더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고 내게 말하며 눈동자를 커다랗게 굴렸다. 리더는 머핼리아 잭슨 Mahalia Jackson 과 메리언 앤더슨 Marian Anderson 이 노래한다고 반박했지만, 미시즈 그린은 "노래는 연설이 아니죠"라고 단호히 일축했다고 했다.

나는 감동받았다. 나는 그런 불만을 터뜨려본 적도 없었고, 정치모임에서도 만일 남성이 제안하면 사람들이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면서 그저 누구든 옆에 앉은 남성에게 내 제안을 건네기만 했었다. 

미시즈 그린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백인 여자들, 당신들이 자기 자신을 옹호하지않으면 어떻게 다른 누구를 옹호할 수 있나요?" - P90

링컨기념관과 연단을 향해 밀려든 인파 속에서 우리 셋은 갈라졌다. 나는 기자증을 보이고 계단을 올라 두 사람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몸을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연단 위를 바라보는 얼굴들의 대양이 전부였다. 

평생 잊지 못할 한 장면이었다. 드넓은 푸른 잔디를 채우고, 빛을 반사하는 물가를 지나고, 워싱턴 기념탑을지나, 국회의사당까지 가는 그 길에, 25만명이 있었다. 인간들의 바다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으며, 누구도 연사들 가까이로 가기 위해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마치 폭력과 무질서에 대한 공포가 틀렸음을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이 입증할 책임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는 국가 안의 국가와 같았다. 불쑥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 지구상에서 다른 데 아닌 여기에 있겠다.
- P90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다들 예견하고 있던 연설문을 깊고 친숙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나는 언제나, 역사가 탄생하는 자리에 설사 내가 있다 하더라도 한참 시간이 지나야만 그것이 역사였음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 순간 역사였다. - P91

더 보수적인 이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레즈비언, 생활보조금 수급 여성들, 성과 인종 문제가 뒤얽힌 유색인종 여성 등 모든 여성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데 끝내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양한 인종과 계층으로 이루어진 더 급진적인 여성들은 시스템의 외부와 내부에서 모두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점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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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여성학 서가 갔다 발견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책! 처음 몇 장 서서 읽어보다 미련없이 대출해왔다. 처음부터 문장이 마음에 와서 박혀서 두고 올 수가 없었다.
˝또 우리 각자의 가슴속에는 보라색 모터사이클 하나씩 있다.˝

또 우리 각자의 가슴속에는 보라색 모터사이클이 하나씩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걸 찾아내서 타고 달리기만 하면 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길 위의 인생(19)

지금 나의 보라색 모터사이클은 뭐지?
일단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길 위의 인생부터 따라가 봐야겠어.

여행하면서, 말하자면 길이 나를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현실의 삶이 복잡하게 얽혀 있듯 길도 그렇게 얽혀 있다. 길은 우리를 부정에서 현실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주의에서 행동으로, 통계에서 이야기로 인도한다. 요컨대 머리에서 가슴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길은 삶을 위협하는 위급상황들과 진정한 교감의 섹스가 있는 바로 그 곳이며, 현재에 온전히 살아 있게 하는 방식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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