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10월이 됐지만 완연하게 청명한 가을 하늘로는 바뀌지않고 장마철같이 찐득찐득한 무더운 나날이 계속됐다. 그리고 어머니의 열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 저녁이 되면 38, 39도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난 무시무시한 모습을 목격했다. 어머니의 손이 부어올라 있었다. 아침 식사가 가장 맛있다고 하시던 어머니도 요즘은 이부자리 위에 앉아 새 모이만큼만, 죽도 가볍게 한 숟가락 정도면 그만이고, 반찬도 향이 강한 것은 입에 못 대신다. - P122
그때 난 어머니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른손이 부어올라 두꺼운 엄지장갑이라도 낀 것처럼 뒤둥그러져 있었다. "어머니! 그 손, 손이 왜 그래요?" 어머니의 얼굴도 창백하게 부은 듯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야."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어머니는 눈이 부신 듯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잠자코 계셨다.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이런 손은, 우리 어머니의 손이 아니다. 옆집 아주머니의 손이지. 우리 어머니의 손은 아주 가늘고 자그마한 손이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손. 따뜻한 손. 귀여운 손. 그 손은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일까. 왼쪽 손은 아직 그렇게 부어오르지 않았지만 아무튼 가슴이 미어져 더는 볼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돌려 도코노마 위에 있는 꽃바구니로 시선을 보냈다. - P123
"어머니 왜 그러세요?" 어머니는 뭔가 말씀을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 하지 않으셨다. "물 드릴까요?" 하고 여쭤보았다. 살짝 고개를 저으신다. 목이 마른 것도 아니었나 보다. 잠시 후에 가녀린 목소리로 "꿈을 꿨어"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 무슨 꿈이었는데요?" "뱀꿈." 나는 숨이 탁 막혔다. "툇마루 앞섬돌 위에 빨간 무늬가 있는 암뱀이 있더라. 가서 한번보렴." 나는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툇마루로 나가서 유리문 너머로 밖을 보았더니, 섬돌 위에 뱀이 가을볕을 쬐며 길게 늘어져 있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 P128
"울고 싶어도 이젠 눈물이 다 말라버렸어." 나는 문득 어머니가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행복이란 비애의 강물 속 깊이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밑바닥을 뚫고 나와 어슴푸레 밝아오는 불가사의한 기분. 그게 행복감이라면 폐하도, 어머니도,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것이다. 조용한 가을날 오전. 햇살이 부드러운 가을날의 정원. 나는 뜨개질을 멈추고 내 가슴 높이에서 빛나고 있는 바다 물결을 내다보며 말을 꺼냈다. - P131
하지만 나는 살아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어머니처럼,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증오도 원망도 없이 아름답고 가련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잡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나는 알을 배고 구멍을 파는 뱀의 모습을 다다미 위에 앉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하지만 내겐 끝까지 단념할 수 없는 게 있다. 비열해도 좋다. 나는 살아남아서 내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과 맞서 나가리라. 앞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확실해지면 나의 로맨티시즘과 감상은 점차 그 빛을 잃고 뭔가 얕볼 수 없는 사악한 나로 변하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 P132
그로부터 세 시간 정도 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가을날 고요한 황혼 녘에, 간호사에게 손목을 맡기고 나오지와 나, 단 두 사람의 혈육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최후의 귀부인이었던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의 죽은 얼굴은 생시와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금세 안색이 변했는데 어머니의 얼굴빛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숨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숨이 끊어졌다는 것도 거의 모를 정도였다. 얼굴의 부기도 그 전날부터 빠져서 뺨이 밀랍처럼 매끈하고,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해 살아 있을 때의 어머니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해 보였다. 나는 ‘피에타‘의 마리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 P135
-6 전투, 개시. 언제까지나 슬픔 속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내겐 반드시 쟁취해야 할 것이 있었다. 새로운 윤리, 아니, 그런 표현도 위선이다. 사랑. 그래, 그것뿐이야. 로자 룩셈부르크가 새로운 경제학에 자신의정열을 다 바쳐야만 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사랑 그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1만 엔, 그만한 돈이 있으면 전구 따위, 얼마든지 살 수 있겠지. 나도 그만한 돈이 있으면 1 년 정도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야. 아아, 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됐어. 하지만 이 사람들도 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텨나갈 수 없을지 몰라.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살아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면, 이 사람들의 이런 삶의 모습도 원망만 할 건 아닐지도 몰라.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숨 쉰다는 것. 아아, 그건 무슨 고역을 감내하며 치러내야 할 대과제란 말인가. - P151
"당신, 몸이 많이 상한거 아니에요? 각혈했죠?" "어떻게 알았어? 사실 얼마 전에 된통 심하게 쏟았어. 아무한테도 말하진 않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냄새가 나요." "죽자고 마셔대는 거야. 살아 있다는 게 서글퍼 견딜 수가 없어. 외로움, 쓸쓸함, 그런 배부른 감정이 아니라 그저 슬퍼. 칙칙해, 나를 둘러싼 사방의 벽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오는데 나만의 행복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자신의 행복, 영광 따위, 살아 있는 동안에는결코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인간은 어떤 기분이 들까.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이가 될 뿐이야. 비참한 인간들이너무 많아. 재수 없지?" "아뇨." "사랑만 있으면 되나? 당신이 편지에 쓴 대로 말이야." "그래요." 나의 그 사랑은 꺼져가고 있었다. - P160
날이 밝았다. 방 안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그 사람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얼굴이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다. 희생자의 얼굴. 고귀한 희생자. 내 사람. 나의 무지개. 마이 차일드, 미운 사람. 야속한 사람. - P160
우에하라 씨는 눈을 감은 채 나를 껴안았다. "성질이 모났지, 난 촌부의 아들이니까." 이제 이 사람에게서 떨어질 수 없어. "난 지금 행복해요. 사방의 벽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와도 내가 느끼는 지금의 이 행복감은 극에 달했어. 재채기가 터질 정도로 행복해." 우에하라 씨는 후후후, 웃더니 말한다. "너무 늦었어. 이제 황혼이야." "아침이에요." 내 동생 나오지는, 그날 아침 자살했다. - P161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ㅇ니도 반드시 굳건히 살아남아야 하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 인간으로서 영예도 꼭 그런 사람에게 돌아가겠지만, 죽는 게 죄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아.
나는, 나란 잡초는 이 세상의 공기와 태양 빛 속에서 숨 쉬기가 힘들어. 살아가기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단 말이야. 모자란다구. 지금까지 버틴 것도, 최대한의 발악이었어. - P163
누나. 믿어줘. 난, 그렇게 굴러다녔어도 전혀 즐겁지 않았어. 쾌락 불감일지도 몰라. 나는 그저 귀족이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광하고 시시덕거리고 타락한 거야. - P166
난 죽는 게 나아. 내겐 남들이 말하는 생활 능력이란 게 없어 돈 때문에 남들과 겨룰 만한 힘이 없어. 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그들앞에 큰소리를 칠 수가 없어. 우에하라 씨하고 어울려 놀아도 내가 마신 것만큼은 언제나 내가 계산했어. 우에하라 씨는 그걸 귀족 출신들의 알량한 자존심이라며 아주 질색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런게 아니야. 우에하라 씨가 일해서 번돈으로 내가 흥청망청 마시고 배나 불리며 여자를 안는 일은 두려워서 도저히 할 수 없었어. 우에하라 씨의 일을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린다 해도 그건 사실이 아니고, 나도 사실 확실히는 모르겠어. 단지 남들이 베풀어주는 걸 받는 게 너무 두려워. 특히나 그 사람이 맨주먹으로 땀흘려 번 돈으로 대접받는다는 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막히는 일이라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서 돈과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엄마와 누나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고 나 자신도 전혀 즐겁지 않았어. 출판사업을 한다며 떠든 것도 그저 부끄러운 나 자신을 감추기 위한 구실이었지, 실제로는 조금도 그럴 맘이 없었어. 설사 내가 진심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한들, 남들이 사주는 술도 못 마시는 놈이 이리저리 돈을 얻으러 다닌다고?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야. 그건 아무리 내가 어리석은 놈이라도 알고도 남지 - P168
어느 순간 내 몸 위로 살며시 담요가 덮이는 느낌이 들어 언뜻 눈을 뜨고 봤더니, 도쿄의 겨울 하늘은 물빛으로 맑았고 부인은 딸을 안고 아파트 창가 옆 의자에 앉아 있었지. 그때 부인의 단정한 옆얼굴이 멀리 보이는 물빛 하늘을 배경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프로필화처럼 선명하게 도드라졌고, 내게 살짝 담요를 덮어주던 친절은 아무런 사심도 욕심도 없는 아아, 휴머니티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해야 비로소 의미가 사는 말이 아닐까. 인간이기에 또 한 인간에 내한 연민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담요를 덮어준 거겠지. 그러고 나선 그림과 똑 닮은 고요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
나는 다시 눈을 감았어. 그녀를 사랑해, 애가 타 미쳐버릴 것 같아서 눈물이 뿜어나왔어. 난 얼른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써버렸지. - P172
누나. 내겐 아무런 희망의 버팀목이 없어. 안녕. 생각해보면, 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야 인간은 사상만으로 죽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한 가지 말하기 뭣한 부탁이 있어. 엄마의 유품인 마로 짠옷 말이야. 그걸 누나가 내년 여름에 입으라며 내게 다시 만들어주었잖아. 그 옷 내 관에 함께 넣어줘. 나, 그 옷을 꼭 입고 싶었거든. 날이 밝아오네. 긴 얘기 읽느라 고생했지. 그럼, 안녕. 어젯밤의 술기운은 이제 싹 가셨네. 난 맨정신으로 죽어. 다시 한번 안녕히. 누나. 난 귀족이야. - P177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적어도 우리 주위에는 낡은 도덕이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다 수면은 일렁이고 있어도 그 속의 바닷물은 혁명은커녕 미동도 없이 못 들은 척 잠든 척,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치른 1회전에서는 낡은 도덕을 대단하지 않더라도 약간은 물리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엔 태어날 아이와 함께 2회전, 3회전을 힘껏 맞서 치를 각오입니다. - P180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적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날 잊으셔도, 또 당신이 술로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나는 내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의 보잘것없는 인격에 대해 난 얼마 전에도 누군가에게 여러 가지 들었습니다만, 내게 이런 강인함을 준 것은 당신입니다. 내 가슴에 혁명의 무지개를 걸쳐놓은 것은 당신입니다. 살아야 할 목표를 준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태어날 아이에게도같은 마음을 갖도록 할 겁니다. - P180
사생아와 그 어미.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워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아무쪼록 당신도 당신의 전투를 끝까지 해나가세요. 혁명은 아직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귀한 희생이 필요할 듯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희생자입니다.
작은 희생자가 또 한 명 있습니다. 우에하라 씨. 난 이제 당신께 아무것도 부탁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희생자를 위한 단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그건 나의 아기를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 부인께 안겨드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 제게 이런 말을 할 기회를주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는 나오지가 어떤 여자와 내연 관계에서 생긴 아입니다." 왜 제가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저 자신도 왜 그러고 싶은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해야만 합니다. 나오지라는 작은 희생자를 위해 무슨 일이있어도 그리해야만 하겠습니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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