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성 중심 사회를 만드는데 공범이었다. 여자는 암컷으로서 남자 코끝에 대고 스스로의 성을 흔들며 남자들의 경쟁을 부추겨 끝내 약자,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자를 아예 버릴 수 있게 한 사회 구조의 뿌리를 지탱해 왔다. - P36

예나 지금이나 수컷의 가격은 휴지조각이고, 
암컷의 가격은 그보다 더한 휴지조각이다. 휴지조각인 비참한 인생들이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를 말한 혀끝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이제는 다시 번영의 길로 가자고 충성 하나로 오로지 달린 결과가 이렇듯 빈 깡통 소리 요란한 약육강식의 문명대국인 것이다. 자국의 여자를 암컷으로 경멸하는 나라는 타국의 여자도 당연히 능욕한다. 메이지 백년간 일본의 수컷이 그 정액으로 더럽힌 조선의 여자들과 동남아시아 여자들의 하잘것없이 여겨져 쓰러진 그 생명을 생각해보라. "여자들이여, 편하게 살고 싶으면 무능한 척을 하라니, 이 따위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하지 못하는 게 마땅하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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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을 당하는 자는 나약함이나 어리석음과 같은 부정적인 면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약함이나 어리석음, 비참함 따위가 나 자신과 딱 들어맞을 때, 서로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가 싹튼다. 나 자신의 비참함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 자가 느끼는 짜증이 그 속에 있다. 여자들끼리 미워하고 갈등하면서 낳은 중오. 그것은 여자인 채 어떻게 ‘여자로 살기‘를 그만두면 좋을지 논의하지 못하고 여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 다니는 자가 느끼는 비참함, 바로 여자의 역사성에서 나온다. - P29

바보 역할은 진짜 배우에게도 어렵다는데, 스스로를 바보라고 믿도록 강요당한 자는 바보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라고는 하나,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한 부정의 부정은 전면적인 부정일뿐이다. 존재의 전면적인 부정이다. 그래서 결코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만이 ‘바보 여자‘인 척 연기할 수 있다. - P29

여자로 사는 어려움, 이것은 여자의 일상을 끊임없이 침식하는 가치가없는 나‘라는 협박 같은 관념과 함께 존재한다. "인류 및 여성 여러분"이라고 처음 말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는데, 그 말은 여자는 과학자든예술가든 음악가든 될 수가 없고, ‘암컷‘만 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역사의 진실을 묻어 버리지 않고 알려 주는 말이다. 물론남자를 제치고 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밝혀 온 여자들이 지금껏 무수히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여류 음악가‘, ‘여기자‘, ‘의사‘ 등 ‘여류‘로 그존재를 허락받았던 것에 불과하다.  - P33

 ‘남자인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에서 여자가 개인 주체로 어떻게 나 자신을 찾아야 할지, "여자인 주제에" 하고 매도당하며 암컷으로 살아온 역사성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집 문지방만 넘어서면 사방이 적인지라 엄혹한 세상에서 녹초가 되어 살아간다는데, ‘사회‘에서 자신을 찾고 구하려는 여자들에게는
‘사회‘ 자체가 적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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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전화해, 제발.
실수인지 안부용 서식으로 전송되었다.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진 편지와 분홍빛 장미 꽃봉오리로 장식된 전보를 함께 들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엘런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어도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 P222

엘런은 아이의 침실로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해치워 버릴 생각에 급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아이가 가지고 놀던 요새와 군인 장난감이 있었고 침대 위에는 다림질해 차곡차곡 개켜 둔 깨끗한 옷이 그대로였다. 엘런은 생각했다. ‘지금 눈물을 터뜨리면 절대 멈추지 못할 거야.‘ 엘런은 옷을 집어 서랍장에 넣어 두고는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바쁘게 집 안 곳곳을 살펴보며 전부 떠날 때모습 그대로인지 확인했다. 정원은 처참했다. 화분의 제라늄이 죽어 있었다. 엘런은 흙을 만져 보았다. 
시멘트 같았다. 호스를 꺼내 정원 여기저기로 다니며 화단, 돌, 심지어 죽은 제라늄에도 물을 뿌렸다. 정원이 다시금 살아 숨 쉬는 듯했고 흙에 물이 스며들며 촉촉하게 바스라졌다. - P222

그 즉시 엘런의 익숙한 상처가 다시금 욱신거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엘런의 머리도 허리까지 올 만큼 길었다. 그때 웬일인지 엘런의 감정에 변화가 생기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안도의 눈물이었다. 남편은 황량한 삶의 한복판에서 새로 시작할 힘을, 건강한 젖이 흐를
것만 같은 깨끗한 초원 같은 가슴에 머리를 누일 힘을 낸 것이다. 이상하게도 엘런은 고마웠다. 남편은 엘런이 느껴야 했을 영원한 죄책감의 압박을 없애 주고 그를 해방시켰다. 엘런은 무엇보다 그들이, 남편과 미지의 여자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여자가 남편을 찾아온 이유가 그저 집이 필요하거나 파손 위험이 있는 우편물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견딜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엘런 안의 호기심이 죽어 버렸다. 그토록 열렬한 무관심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죽음과 덧창 닫힌 집이 두 사람의 결혼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더 이상 고통은 없다.
때가 되면 남편이 우편물을 보내겠지만 절차 진행을 위한 연락일 테고 엘런의 답변 역시 사무적일 것이다. - P224

"결과가 나왔어요." 여자가 결과지를 들고 말했다. "이차 감염이 있었지만 임질은 아닌 것 같아요......."
"걱정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엘런이 말했다. 속은 듯한 기분이었으나 어쨌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손뼉을 치는 것 같은 불경한 짓을 저지를 뻔했다. 엘런은 처방전을 받아 알약과 제비꽃 빛깔 로션을 샀고, 약국을 떠나며 바지에 로션 얼룩이 묻어난다면 그 자체로 애도의 증명이 되리라 생각했다. 들쑥날쑥하고 추한 보랏빛 얼룩. - P235

엘런은 약 꾸러미를 꼭 붙든 채로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갔다. 자작나무는 잎사귀마다 자력을 발휘해 외양을 바꾸는 듯했다. 거친 풀의 밑동부터 흙빛이 피어났고, 땅에는 빛바랜 듯 희미한 노란색이 번졌으며, 공기는 녹녹했다. 엘런은 빠르게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제 서두를 필요가 없고,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이 없고, 그저 가만히 호흡할 뿐이고, 행복하지 않으나 불행하지도 않았다. 낮이 전처럼 찬란하고 밝지 않다면, 밤도 그렇게 새카맣지는 않으리라. - P235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좋았다. 
나뭇잎이 떨어졌고, 엘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너울너울 떨어져 낙엽 더미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잎이 사방에서 그렇게, 단순하고 무던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두 달쯤은 이렇듯 서늘하고 감미로운 가을이 이어질 것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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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든 변소든 여자는 남자의 이미지 속에 있다. 여자는 자신을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로 찾아 헤매며 살아갈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듣자 하니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끊임없이 "예쁘다"는 말을 해 주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 불안해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는 물론 남성이다. - P23

여자는 만들어진다. 암컷으로 만들어진다. 시집 못 가면 어쩌려고!" 협박하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한 남자의 품속에서 여자는 여성다움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여자의 삶에서 보람은 남자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데에 있다고 한다. 꼬리 흔들기 방식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부터 진한 화장을 한 것까지 다양한 암컷의 모양새로 나타난다. 
남한테서 찾으려는 자신이라는 건 어차피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자‘가 삶의 보람을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로 삼는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찢기고 마는 것이다. 
교태란 자신을 남의 가치관에 팔아넘기는 것을 말한다. 암컷으로서 꼬리를 흔들고 교태를 부리며 살아오게끔 된 여자의 인생이 끊임없이 존재의 상실감으로 위협받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 P23

"당신은 예쁘다"는 마약 같은 말이 끊기면 금세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 못하게 되는 금단 증상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여자를 남성에게 향하게끔 하는 원흉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자는 남자 눈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두려워한다. 암컷으로 살아온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는 먼로와 같은 여성으로만 존재한다. - P23

단지 암컷으로 잘할지 못할지, 억지로 팔 것인지 솜씨 좋게 비싸게 팔것인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한 화장을 하든 맨얼굴이든 남자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게 바로 여자의 역사성이다. - P24

그런데도 남자들은 ‘예쁘고 멍청해 보이는‘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를 찾는다. 주부와 창녀는 먼로 같은 여자의 양끝에 존재한다. 
거지가 주인인 것마냥 행세할 때는 누구를 살리건 죽이건 자기 마음대로니까 그런 남자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남자한테 ‘지금 여기에 있는 여자‘는 기껏해야 엄마 정도이다. 
남자는 자신에게 교태를 부려서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여자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라는 점을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하고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를 좇는다.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란 남자의 이미지 속에서 사는 모든 여자를 일컫는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가 되려고 스스로를 잃어가는 모든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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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여자 같으니." 엘런이 말했다.
"정말이야......." 데니스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교회에서 대화할 때처럼 낮은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외모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얼굴이 아이처럼 통통했다. 그 순간 엘런은 갸름하고 핼쑥한 얼굴로 데니스에게 달가운 미소를 보냈다.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한가. 간 보호제를 먹고. 돈을 따고. 하지만 그보다 더 단순한 행위, 포옹하고, 구애받고, 하룻밤 숨을 헐떡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대적인 세뇌가 시작된다. 여자는 정숙해야 한다는 교리의 가르침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은밀한 메시지, 남자와 남자의 몸이야말로 진정하고 절대적인 위로라는 것.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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