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토마스 아 켐피스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서문에서 재인용. - P301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면 경이로움에 휩싸인다.
그토록 하찮은 인물들이 중얼대고 외쳐 대다니.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D. H. 로렌스, When I Read Shakespeare」 부분 - P234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는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 P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 몇년 사이 지구촌 곳곳에서 빈발하고 있는 산불의 원인이 지구온난화라고 한다. 산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우리 지구는 어떻게 되는걸까!




그 애 옆에 웅크려 앉았다. 내가 쫓아온 걸 알고 있다는 듯덤덤하게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는 그 애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 쓰여 있어?
자료 열람실을 관리하는 경비원이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탄소를 줄이기 위해 숲을 전부 벌목해 새 나무를 심었어. 오래된 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율이 낮다고 생각했거든. 나무를 심는 거니까 무조건 좋을 거라 생각한 거야. 종말 직전이 행성에서 산림이 차지하는 면적이 사십 퍼센트였는데, 삼십팔 퍼센트를 새 나무로 교체했어. 광합성이 잘 일어나는 품종으로, 십삼 년 동안‘ - P180

대화를 엿듣던 경비원은 내용이 시시하게 느껴졌던 것인지 곧 걸음을 옮겼고, 나는 경비원이 허리에 차고 있는 봉을 노려보다 그 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를 보고 있는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조금 전까지 책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 나무 한그루가 병에 걸렸고, 그 병이 순식간에 산림 전체에 퍼졌어. 나무에 벌레가 들끓고, 썩고, 곪았어. 다 똑같은 품종이라 그 어떤 나무도 피해 갈 수 없었대.‘
끔찍한걸… 그래서 어떻게 했어?

‘더 퍼지는 걸 막으려고 불을 질렀대. 그런데 지구는 계속 말라가고 있었잖아. 건조한 바람이 불씨와 병을 함께 퍼뜨린거야. 전 세계에 검은 재가 끊임없이 휘몰아쳤대.‘
네가 악몽을 꾼 이유구나. 너는 꿈에서 나무였던 거야.
‘나무는 병든 게 아니야.‘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 애가 말했다. 그 애가 나무였었기에 할 수 있는 말 같았다.
‘나무는 복수하기 위해 자살한 거야, 인간들을 몰아낸 거지. 이 행성에서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던 거야. 자신을 찾아오던 새와 다람쥐, 뱀, 그리고 나비와 벌이 더는 오지 않음에 분노를 느낀 거야.‘ - P181

그 애가 악몽을 꾸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무의 치열한 복수극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 인간은 그렇게 지하로 쫓겨난 거야. - P181

‘온실을 확인하면 되겠다.‘
한참 뒤, 유오가 입을 열었다.
‘온실?‘
내가 물었다.
‘응, 온실에 식물이 가득한 걸 확인하는 거야. 그럼 숲이 있다는 거니까‘
‘숲이랑 별이랑 무슨 상관이야?‘
유오의 대답에 치유키가 물었다.
‘그렇게 다양한 개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지되는 숲이 있는데, 별이 없겠어?‘ - P189

톨가는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입을 연다.
"씨앗 저장고에 온실로 가는 승강기가 있어."
바지 뒷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내민다.
"비상용 키인데, 오기 전에 혹시나 해서"
그렇게 말했다가 곧바로 말을 정정한다.
"아니, 사실 너희가 그럴 것 같았거든. 근데 나는, 나는...."
고개 숙여 말을 잇지 못하는 톨가를 끌어안아준다.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도록. 그리고 톨가가 착각하지 않도록 말해준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애초에 우리의 약속은 흥미진진한 삶을 살자는 것이었다. - P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모든 열정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2
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정소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

비타의 소설은 <사라진 모든 열정>이 '흄세 시즌 5: 할머니라는 세계'로 출간이 되었고, 민음사에서는 <모든 열정이 다하고>라는 제목으로 한 권이 나와 있다. 제목으로만 보면 <모든 열정이 다하고>가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남는다.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면 절대 비타를 피해갈 수 없다.~~^^ 요즘 말로 재혼 가정에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버지니아 울프와 대단한 귀족 가문, 가정 교사에게서 교육을 받고 자란 비타는 태생부터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서로 너무 달랐기 때문에, 거기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겠지! "나처럼 고상한 체하는 사람에게는 500년 전의 세계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따라가는 일이 무척 낭만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마치 오래된 황금빛 와인처럼~~~."이라고 고백한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 레너드와 바네사 언니를 제외하고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비타가 유일했다고 했고, 두 사람의 인연은 열렬했던 짦은 사랑이 지나고 난 후 버지니아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비타 색빌웨스트는 우리에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의 모델로 알려져 있지만, 난 아직 <올랜도>를 읽지 않았고 읽어보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사실 자신은 없고... 그런데 비타의 책은 그에 비해 너무 너무 잘 읽힐 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 멋지고 또 재밌었다. 역시 울프보다 더 인정받는 작가였다는 것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 <사라진 모든 열정>에는 비타와 울프의 그림자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작품의 주인공인 데버라 슬레인 백작 부인은 인도의 총독이었고 수상까지 역임한 정계의 거물이었던 슬레인 백작이 94 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뜨고, 자식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견을 일거에 물리치고!!! 88 세라는 어마어마한 나이에 혼자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을 이루게 된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미 살고 싶은 집도 무려 30년 전에 봐 둔 상태이고 집 주인의 특이한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들에게 헌신한 조용한 내조의 주인공이었던 백작 부인은, 처녀 시절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 본 적은 없고, 그 시절 누구나 그러하듯 떠밀리듯 청혼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고 남편을 사랑하게 되고 여러 자식들이 태어나 돌보고, 또 백작이자 인도 총독이었고 수상까지 역임한 남편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내조에 임하였다. 자신의 열정은 가슴 속에 묻어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남편 헨리의 세속적인 열정은 백작 부인을 가시밭길로 몰아댔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녀의 희망을 조용한 어조로 뭉개버렸다.





   세상을 바라보는 헨리의 관점은 모든 면에서 그녀의 관점과 상반되었다.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두 사람의 관점은 그렇게 표현될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헨리는 자신의 신조를 전혀 숨길 필요가 없는 반면 그녀는 조롱과 수치에서 자신의 신조를 지켜야 했다는 것뿐. (본문 중에서)



   그녀가 사색하는 삶을 갈망하듯이 헨리는 행동하는 삶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정말이지 하나의 세계가 두 쪽으로 분할되었다고 하겠다. (본문 중에서)



그러자 그녀는 진정 덫에 걸린 기분이었고 혼비백산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았다. 신처럼 초연한 그의 우월감, 애정이 담겼지만 어쨌든 우쭐대는 나름의 가정, 그의 손쉬운 친절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비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가 정말 미웠다. 비난할 수가 없었다. 당연시해도 되는 것들을 당연시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런 식으로 여자들과 동조하여 그녀를 속이고 그녀가 선택한 삶을 빼앗는 전반적인 공모에 동참한 것이니까. (본문)



   그녀는 페미니스트도 아니었다. 상상의 순교 같은 사치에 빠지기엔 지혜로운 여자였다. 자신의 삶 사이의 균열은 남자와 여자의 균열이 아니라 일하는 자와 꿈꾸는 자의 균열이었다. 그녀는 여자고 헨리는 남자라는 사실은 정말이지 우연적인 문제였다. 자신이 여자라서 상황이 조금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본문 중에서)



   부자연스럽고 망측한 생각이 머릿 속에서 떠다녔다.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아이만 낳지 않았다면.' 하지만 비통할 만큼 헨리를 사랑했고, 감상에 빠질 만큼 아이들을 사랑했다. (본문 중에서)





사실 비타는 외교관 해럴드 니컬슨과 결혼하였지만 각자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개방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결혼을 했지만 버지니아 울프와 연인 관계이기도 하는 등의 양성애자였고, 그 전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남성복을 입고 남편 행세를 하고 운전도 직접 하는 등의 파격적인 연애로 세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존재였다.  그래서 작품에서 보여주는 슬레인 백작 부인의 삶은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1931 년 발표하였는데(물론 울프와 레너드가 운영하던 호가스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그 해는 비타가 4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엄격히 분리가 되어 있는 사회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아간 주체적인 여성이었던 비타가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이라는 휘장을 두르고 있는 88 세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리고 그 여성의 삶은 여성으로서 강요당하는 삶의 부당함을 인정하지만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이.  그러나 한 편으론 마냥 관습적이지는 않다.  결국 슬레인 백작 부인은 '자기만의 집'을 이루어내니까! 여자가  순수하게 자신만의 의지로 '자기만의 집'을 갖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어야 하는 것일까? 여자가 '자기만의 집'을 가질 자격은 88 세쯤이나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일까?

슬레인 백작 부인은 88 세라는 나이이지만 비로서 '자신만의 집'(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에서 먼 시간 속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생각한다. 헨리와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놓인 부당한 상황들에 어떻게 대처했었는지... 어떻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부당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타개하기보다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지혜로운 여인이었다는 것을...

비타의 정신을 내려받았지만 실제로는 비타와 너무도 다른, 그 시절 여타의 여성들의 삶과 비슷한 길을 걸어간 인물로 그려져 있다. 가슴 속에 열정은 묻어둔 채로... 두 여인이 서로 상반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타가 그린 책의 주인공으로 부족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자식들의 제안 아닌 제안을 물리치고  런던 북부의 햄프스테드에 '자기만의 집'을 갖게 된 슬레인 백작 부인.  모든 회환과 혼돈을 뒤로 하고 백작 부인은 이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저 편안하고 조용하게 마무리를 하고 싶을 뿐이다. 주위에는 예의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집 주인을 비롯한 나이 많은 친구 몇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란 것이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던가!  단순하고 평온함을 찾아 떠나왔건만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허락되지 않는 단순함이라니... 인생의 복잡함이란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인도 총독으로 재임하던 때, 잠시 공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피츠 조지 씨 - 그는 현재 부유한 은둔자로 불리며 엄청난 자산가이고 누구나 탐낼만한 아름다운 유물을 어마어마하게 수집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옛날 백작 부인의 열정을 간파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 로 인하여 그녀의 남은 시간은 원치 않는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숙제를 떠안기고 떠난 피츠 조지 씨로 인하여 독자는 마지막 순간 다시 비타가 마련한 자리에 원치 않는 초대를 받은 듯 백작 부인의 황망하고 황당하기만한 상황에 깊이 동화된다.  지극히 헨리의 표본과도 같은, 그러나 그녀와는 닮지 않은 자식들과의 관계에도 회오리 바람이 몰아친다. 마지막에 증손녀와의 대화도 이미 너무 늙어버린 백작 부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시련이다.





천천히 읽어 나가노라면 아름답고 가슴을 적시는 문장들이 자꾸 와서 콕콕 박힌다. 그 바람에 어느 새 보랏빛 밑줄이 쫙쫙~~ 하이라이트가 늘어나고 그럼에도 백작 부인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자식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행하는 일들로 속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비타 색빌웨스트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인데... 그녀의 다른 소설들은 언제나 만날 수 있으려나! 다른 작품으로 또 만나고 싶다. 그리고 흄세 소장 욕구도 뿜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우리 애들 어릴 때 같이 읽었는데...
20 년은 됐나봐.
집 책꽂이 어디 있을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불꽃... 


이것이 진정 현실에서 가능한 일일까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의 "불꽃"이란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려 40 년이라는 시간 동안 간직한 사랑이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간간이 접할 때가 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전쟁으로 헤어진 연인을 만나고 싶어,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몇 십 년을 간직한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현실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나는?

전 생애를 관통하는 불꽃을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아가고, 그 불꽃이 꺼지지 않고 살아남아서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어서 여전히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섣불리 입 밖에 내어 말해 버릴 수 없었던 비밀을 잠잠히 끌어안고 있다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그 비밀을 그냥 말해버리고 싶어지게 될까?



**줄거리 + 결정적인 순간들

여기, 60번째 생일과 교수로서의 빛나는 업적을 이룬 롤란트에게 그의 업적을 기려 여러 제자들이 그의 글을 모아 양장본으로 엮은 문집을 선물받은 즈음에, 그의 인생이 문집에서 보여지듯 상승 곡선만을 타고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것, 세심하게 기록된 문집의 목차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단 한 분, 그의 '모든 창조적 충동의 원천인 그 사람의 이름'은 그곳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비겁하게 침묵해온  것에 대해 새삼 죄책감을 느끼면서 비밀로 남겨진 한 페이지를 그 분을 다시 불러와 자신의 곁에 세우고픈 마음에 이제라도 그 간의 비밀을 고백 하려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문집에서 서술하는 그에 대한 접근 방법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그들의 활동을 통해 서술하고 세계의 정신적 구조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는데 삶을 바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장의 원천인 핵심 세포를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 Stendhal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들인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순간, 오직 한 번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처럼 마술적이며, 체험된 비밀로 삶의 따뜻한 내면에 꼭꼭 숨어있기에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정신의 대수학도 그 한순간을 계산할 수 없고, 어떤 예감의 연금술을 가지고도 추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 독자적인 감정을 통해서도 그 순간을 붙잡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겠지요." (17쪽)  



결정적 한 순간, 언제나, 단 한 순간, 오직 한 번뿐인, 생명이 탄생하는 듯 결정적인 한 순간은 단 한 번뿐이어서 그 순간을 붙잡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결정적 순간이 그가 그다지도 잊지 못하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는 그분과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인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결정적인 순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츠바이크의 문장들에 심취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사실, 그의 문장들을 읽는 기쁨을 말로 하자면 입만 아프다. 결정적 순간을 대할 때마다 그의 문장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나야말로 이런 심미적 체험과 그의 책을 읽으며 츠바이크를 알게 된 것이 나의 독서 생활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롤란트의 고백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아버지가 시골 소읍에 위치한 대학의 학장이어서 어릴 때부터 인문학적인 정신의 고양에 대한 억압이 있었기에 베를린에서의 대학 생활의 초창기는 그러한 억압에 대한 반항의 심리가 있었고, 잘난 체 떠벌이는 대학 강단에 지독한 권태로움을 느낀 그는 이후 기세등등한 탐욕 속에서 남성성의 흥분과 순응적인 문화와 제약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알게 된 방탕에 탐닉하게 된다.  "어떤 우연이 순식간에  정신적인 몰락을 진정시켜 주지 않았다면(27쪽)" 신세를 망치거나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지경에 이른 그 순간!!!  학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상치 못하게 들이닥친 아버지로 인하여 "어떤 우연"의 순간이 그에게 미치게 되었다.  교수 신분의 교육자로서 아버지께서 찾아오신다는 연락도 없이 아들의 행실에 대해 알아보려고 불시에 찾아오시게 되었고 이 기습을 전혀 몰랐던 나는 그 날도 내 방을 찾아온 애인과 침대에서 뒹굴뒹굴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고 문을 열어 젖힌 그 순간... 그 순간....  듁은 듁은.. ㅠ.ㅠ



   "그러자 바로 그 순간,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현관의 어두컴컴한 속에서 아버지의 그림자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반사되어 반짝이는 안경유리로 그림자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림자의 윤곽만으로도 미리 준비했던 무례한 말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목에 꽂혀 있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순간, 난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께 - 얼마나 무서운 순간이었는지! - 방 정리를 할 때까지 잠깐 부엌에서 기다려 달라고 공손하게 요청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내 요청을 승락하신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꾹 참으시는 태도로 보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지요. 그는 내게 악수도 건네지 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커튼 뒤쪽 부엌으로 물러나 계셨습니다. 뜨거운 커피와 무를 삶는 철제 냄비가 놓여 있는 곳 앞에서 그는 10분이나 선 채로 기다려야 했습니다."(29쪽)



하.... ..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창피한 적은 없었"다고 ... 그 불쾌한 순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던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나는 아버지의 결정에 순종하며 베를린을 떠나 작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로 하였고, 자신을 학업에 바치기로 결심하는데, 열 아홉 인생에서 최초로 느낀 감동의 대상이 아버지였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하는 문장들도 정말 압권!  다시 읽어봐도 감동적이다.  "학문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고귀한 열정도 알지 못하고, 정신의 드높은 세계 속에서 열정적인 사람에게는 모험과 위험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도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34) 수강 신청을 하러 찾아간 지방의 대학에서 다시 마주한 결정적인 한 순간. 



   "갑자기 교수가 책상 위로 올라서자 학생들도 따라서 일어섰고, 그가 높은 곳에서 마치 올가미로 사로 잡듯, 말로서 학생들을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서 있도록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그의 강의에서 나오는 매혹적이고 강렬한 이야기에 자석처럼 이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까지는 불과 몇 분이면 충분했지요!... (중략) 목소리가 당당하게 터져 나올 때마다 그는 마치 날개를 활짝 펴듯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가, 지휘자가 선율에 따르듯 안정된 제스처로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 놓았습니다....(중략) 그때까지 나는 그 사람 이외에 그토록 감격에 빠져 진실하게 마음을 끌며 강의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라틴어로 '랍투스'(Raptus,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황홀한 심리적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 - 옮긴이)라고 부르는 것, 즉 한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초월해 이끌려가는 상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37 ~ 38쪽)



단 한번도 겪지 못했던 황홀한 강의를 처음 접한 그 날로부터 롤란트는 교수의 강의에 빠져들게 되었고,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황홀한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접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교수님과 같은 건물 위층에 세를 들어 살면서 거의 매일 저녁 교수의 집을 방문하여 교수와 교류하고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 이루지 못한 저작에의 꿈을 위하여 그의 글을 받아 적어주면서 그에게 헌신한다. 하지만 그 분은 롤란트가  과도한 열정으로 그의 맘에 들고자 하는 행동들을 비난하고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번번이 그를 실망시키면서 완강하게 밀어내기만 한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젊은 청년의 영혼은 실망과 절망감 속에서 몸부림치지만 불쑥불쑥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 분으로 인하여 상처 받은 정신은 그 분의 부인에게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롤란트가 보기에 일반적이지 않다. 부부 사이에 대화라곤 없다. 보통의 부부와는 다르게 서로 냉랭하고(물론 그런 부부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특히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냉소적이면서도 믿기 어려운 비난의 말을 입에 담는 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보여주지만, 소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젊은 롤란트는 그 부부에게서 보여지는 이상야릇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분은 왜 그가 학문적인 열정과 동경으로 다가가려 하면 밀어내기만 하는 것인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와 함께 이루어낸 책의 1부가 완성이 되었고 그 기쁨을 나누는 날, 뜻밖에도 선생님의 서재 밖에서 적대적인 호기심과 질투심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부인을 발견하고 그들의 축제는 유감스러운 결말을 고하고 만다. 또 다시 사라진 선생님에게 실망한 롤란트는 짐을 싸서 하숙집을 떠나려 하고 그 순간 그 앞에 나타나신 교수님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 번은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분의 입으로 듣는 고백은 어린 그에겐 충격으로 다가오고, 불시에 습격을 당한 듯한 젊은 롤란트로서는 그의 정열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 자네는 젊고 밝고... 미남이지... 그리고 자네는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았는가? 어떻게 내 아내가 자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자네같이 잘생기고 젊은 친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나는..."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몸을 바싹 숙이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다시 그의 눈빛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이상한 빛... 그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기이하고 특별한 순간, 그는 내게 더 바짝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습니다.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175쪽)



   "나는 두 번 다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편지도, 소식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저술은 출판되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잊혀졌습니다. 오직 나를 제외하고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아무 것도 몰랐던 소년으로서 느꼈던 그때의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를 알기 전의 내 부모님과 그를 알고 난 후의 내 아내와 아이들,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보다 더 고마워하지도, 더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198~199쪽)



아무리 가슴 절절하게 사무치도록 사랑했던 사람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하게 희석이 되기도 하고 아예 잊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 롤란트는 선생님이 갑자기 깊이 추락하듯 고통스러운 절규로 그를 떠나보낸 그 시간으로부터 떠나오지 못한 거 같다. 

가장 존경하는 그 분이 딱딱한 조개 같은 자신의 운명을 털어놓던 그날 저녁 이후로, 40 년 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불꽃은 꺼지지 않은 것이겠지! 



츠바이크는 <감정의 혼란>이 껄끄러운 문제들 때문에 출간이 원활히 진행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힌 적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도 문학의 주제로 터부시되는 '동성애'가 외적 소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깊게 보면  <감정의 혼란>을 관통하는 핵심은 심미적 체험이다. 이 소설은 이렇듯 순간순간이 한 청춘을 강렬함으로  소환한 다양한 색채의 첫 감정들 그리고 그것과의 충돌로 충만하다. "순간은 우리를 훨씬 더 변하게 만든다"는 그의 표현처럼 말이다. (역자후기 중에서, 205쪽)



나에게는 '동성애'라는 소재도 괜찮고 한 청춘의 강렬한 심미적 체험을 보여주는 많은 문장들에 빠져들어서 흠뻑 젖어 있었지만....  하지만 나는 이 작품에 별 다섯개를 줄 수가 없어...ㅠ.ㅠ

왜냐하면... 너무 금방 끝나버려서 너무 아쉽기 때문이지.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들과 아름다운 문장들은 좀 더 계속 되어야 하는데... 머리로는 이대로 완전한 결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어쩔 수 없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23-08-08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나는 게 아쉽다라...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

은하수 2023-08-08 13:38   좋아요 2 | URL
네... 넘 짧아서 아까웠어요~~ 책이 너무 얇아요 ㅠ
그래도 역시 츠바이크로군! 생각하게 됩니다^^

은오 2023-08-09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금방 끝나버려서 아쉬운거 공감이요 ㅠ 저도 진짜 앉은자리에서 다읽었어요!!
그래서 초조한 마음을 샀습니다.. 이건 좀 두껍더라고요 ㅋㅋㅋ

은하수 2023-08-09 10:35   좋아요 0 | URL
은오님도 사셨네요
저도 샀는데.. 두꺼워서 또 헉했네요
언젠간 읽겠죠???~~ㅎㅎ

잠자냥 2023-08-09 23:20   좋아요 2 | URL
초조한 마음도 초초하게 책장 넘어갈 걸요?! 근데 은오님, 누운자리에서 다 읽은 거 아닙니까?

은오 2023-08-11 08:19   좋아요 0 | URL
제가 몇달전에 독서용으로 흔들의자를 샀거든욬ㅋㅋㅋㅋ 그래서 요즘은 주로 거기 앉아서 봅니다..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은하수 2023-08-11 13:37   좋아요 2 | URL
흔들의자라구욧!
저도 급 관심~~~ 거기 앉아서 책 읽으면 편해요?
저 그게 너무 궁금^^
흔들거리면 책 읽기 불편할까 싶어 몇번을 망설이다 포기했거든요~~
그나저나 잠자냥 님이 초조한마음 도 책장 잘 넘어간다니 일단 시작할 용기가 생기네요!

은오 2023-08-11 21:34   좋아요 0 | URL
진짜 짱 편해요!!! 흔들의자가 사실 의도적으로 몸을 흔들지 않는 이상은 안흔들려서 ㅋㅋㅋ 그냥 눕듯이 기대고 다리 올리고 배랑 다리 사이에 쿠션 놓고 거기 책 올려서 읽으면 완벽.. 허리에는 안좋을 듯합니다 ㅠㅠ

잠자냥 2023-08-11 23:08   좋아요 0 | URL
은하수 님 흔들의자에서 초초한 마음 읽으면 너무 초조하게 책장 넘기느라 의자가 마구 흔들릴 것입니다. ㅋㅋㅋㅋ

은하수 2023-08-11 23:44   좋아요 0 | URL
이러다 조만간 살거 같아요~~
초조한 마음도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