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날들》 조 앤 비어드 지음
지난달부터 책이 안읽히고 집중이 안된다.
왜 그런건지 명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런 상태다.
생각해보면 하나의 이유는 아닌, 복합적인 이유이지만 일단은..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매일 운동을 다녔더니 체력의 한계가 오기도 해서 평소라면 책을 읽었을 시간에 졸고 있는 날이 많아져서이기도 하고...
튀르키예 여행 직전에 감기에 걸렸었는데 여행최적기라는 5~6월에 비바람 몰아치고 강풍에 기온도 오르락내리락 널을 뛰고 그래서 감기는 나을 줄 모르고 악화된 상태로 귀국해 일주일을 골골대며 앓았다. 지독한 감기의 여파로 몸무게도 쑤욱 빠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걱정스런 인사를 들었다.
그럼에도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도 하고 얼마 전 책도 구입했다. 물론 잘 읽히진 않는다. 책읽기도 체력이 필요하단걸 깨달았다. 이제 내몸은 젊지 않다. 잘 챙기자!
조 앤 비어드의 《축제의 날들》에 수록된 단편 <워너>를 읽고 있다. 주인공 이름이 ‘워너‘이다.
한밤중,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잠든 다세대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워너는 이 건물 5층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시끄럽게 소리치는 사람들의 외침에 잠에서 깨어난다. 워너가 사는 집 세 개 층 아래에서 불이 난 것이다.
˝캔털루프 멜론색의 일출, 줄무늬 소들, 데어리 퀸(아이스크림가게), 검은 플라스틱 산을 이루는 엄청난 쓰레기와 개 오줌 냄새를 제외한 모든 것들. 하지만 그날 밤은 그렇지 않았다. 어두운 거리는 춥고 상쾌했다. 모퉁이를 돌아 워너가 사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991년 12월 19일 자정이 되기 직전, 바로 그 세기말적인 주택에서 또 다른 뉴욕다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벽 속 아주 깊은 곳, 워너가 사는 집 세 개 층 아래에서, 천으로 감싼 전선의 잔가지가 지글거리더니 마치 꽃망울 터지듯 피어나버린 것이다.˝(22쪽)
색다르고 새롭게 읽히는 문장들에 마음이 간다. 긴박한 상황 속에 놓여있는게 분명한데도 문장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슬로우로 보여주는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빠르게 읽을 수 없었다.
˝비명소리와 연기 냄새˝ 목숨을 걸고 불과 연기를 피해 탈출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지금 여기에 이 순간들이 왜 필요한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기억‘들이 파고든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천천히 읽으면서 문장에도 집중하라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마침내,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9 년을 함께 산 고양이 ‘투‘를 왼팔에 끼운 후 반대편 건물의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날 밤 마침내 잠든 워너는 마치 심해 바닥까지 1패덤씩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선이 마침내 점화되어 건물 위로 화염을 올려 보내기 시작했을 때, 워너는 아마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향해 손을 뻗기엔 그를 짓누르는 물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 P23
아주 희미하지만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릴 적 오리건 숲속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때 맡았던 냄새였다. 따뜻한 커피, 축축한 양말, 무릎 위에 활을 놓고 그루터기에 앉은 채로 얼어붙은 워너. "사슴은 말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적어도 두 가지 감각을 이용해 확실한 위험 상황인지 판단한다. 시각, 청각, 후각 중 두 가지를 함께 쓴다는 거지. 그래서 확신이 없으면 그냥 거기 그대로 서있는다더라." - P25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워너의 방은 코딱지만 했고 비좁았다. 천장에 달린 전구 때문에 고문실처럼 값싸고 선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창가로 가는 길에 전구의 줄을 당겨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창틀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여닫이창 위쪽에 달린 환풍기 때문에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환풍기 창살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잡아당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화염처럼 그를 집어삼키려 하는 공황 속에서 끄떡 않는 환풍기를 뜯어내려 하는 자기 모습이 잠시나마 짐승같이느껴졌다. 그는 손을 놨다.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 P26
이제 입자들 사이에 산소는 전혀 없는 듯했다. 아무것도 나올게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산소가 생명이라면 무산소는 죽음일 테고, 연기는 독이 섞인 무산소였다. 멈춘 채로 숨이 막혀오는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불현듯 터져 나와 소용돌이치는 검은 기둥에 창백하게 걸렸다. 뛰어내려야 했다. - P36
워너는 어떻게 할 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솟구친 상태였다. 워너는 투를 왼팔에 끼운 후 상체를 최대한 바짝 붙여 안전하게 고정하고는, 오른손 관절을 아래로 향하게 한다음 열린 창문의 나무 창틀 위에 놓았다. 워너는 투에게 말했다.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그러고는 한 번에 올라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발가락이 창틀을 휘감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창틀 위에 발가락이 올라오긴 했지만 제대로 휘감지는 못한 상태였다. 발가락이 창틀을 완전히 휘감은 후, 워너는 도약했다. 워너의 두개골은 나무를 부러뜨렸고, 창문 유리는 기다란 단검 모양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무릎 높이까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워너의 무릎은 돌로 된 창틀에 착지했고, 몸은 낯선 이의 아파트 안 침대까지 통과해 들어갔다. 모든 방에 불이 켜져 있었던 만큼 환하게 빛났다.
놀랍게도 이제 모든 것은 삽시간에 지나가는 영화 장면처럼 빨리 감기 됐다. 이쪽에서 보니 오렌지빛의 붉은 블라인드는 조잡하게 짜여 있었고, 바닥으로 떨어진 램프는 하얀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올록볼록한 이불은 끈적하게 워너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두려움과 난처함이 섞인 워너의 외침이 울렸다. "아무도 안 계세요?" - P38
새벽 5시의 응급실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뚜렷한 침묵이 지나간 후, 여덟 명의 사람들이 워너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를 찔러대고 만져대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구급대원은 워너가 불타고 있던 건물에서 불이 나지 않은 다른 건물로 뛰어 들어간 덕분에 스스로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동요했다. "뉴스에 제보해야겠네요. 의사가 말했다. "아뇨." 워너는 그중의 누군가를 쳐다보는 대신 그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처나 치료해주세요." 젊은 레지던트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일한지 꽤 오래됐다. 극한의 상황들을 겪어봤다. 안 좋은 상태의 환자들을 봤다. 머리에 총을 맞은 환자도 봤다, 기타 등등. 응급실에실려 온 환자에게 무슨 얘기까지 들어봤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하지만 당신 얘기가 가장 놀라워요." 레지던트는 감탄했다. 프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사람 좀 여기서 내보내주세요." 워너가 말했다. 의료진은 차가운 소독제로 워너의 얼굴을 닦아줬지만, 얼굴을 뺀 나머지 몸은 여전히 그을음과 흙과 말라붙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 P44
워너는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진 듯 실체가 없고 거미줄처럼 얇고 가볍게 느껴졌다. 여전히 약에 취해 있었지만 충분치 않았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잇몸까지 아팠다. 고통이 사라지려면 오래 걸릴 터였다. 중환자실과 중간 치료실 복도의 길이보다, 소리를 잔뜩 키운 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수염 난 남자들로 가득한 병동 복도의 길이보다 더 긴 시간일 터였다. - P56
본질적으로 구조적인 듯한 통증과 잔류 통증은 일종의 날것 그대로의 강제적인 행복처럼 수개월 동안 워너를 괴롭힐 터였다. 그가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될 수 있을 때까지. 두개골 위쪽에 가해진 타격으로 인한 이명은 오래도록 워너 안에서 덜커덩거리며 잠시라도 워너가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혼동하게 두지 않을 터였다. - P57
2주 후, 건물 관리인 프랭크는 워너를 데리고 건물 뒤쪽으로 가서 화재의 잔해를 헤치고 건물 사이 틈으로 들어갔다. 워너는 무릎을 꿇고 프랭크가 발견한 고양이를 살펴보았다. 폐쇄된 출입구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고양이는 몇 미터나 되는 자갈과 잔해를 뚫고 안전한 장소까지 자기 몸을 끌고 가 그곳에서 죽었다. 워너는 회색과 갈색 띠를 이룬 꼬리를 알아보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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