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의 인공자궁은 인큐베이터를 말한다.
한 세기 전의 코니 아일랜드와 만국박람회 등에서 자행되었던 일명 ‘아기쇼‘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아무런 법적 규제도 없이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던 엄마와 아기들의 사례를 보면서 미혼모와 그 아기들을 입양했던 미국이 떠올랐다. 마틴 쿠니는 아기 쇼를 완전히 다른 경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그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1901년 '버팔로 범미박람회',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놀이동산 전시를 거쳐 마침내 상설전시를 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1943년까지 계속해서 전시를 열었던 코니 아일랜드 루나 파크에서였다. 아기들은 입원비를 지불하지 못해서 대신 쿠니를 찾아온 엄마, 아빠에게 안겨 코니 아일랜드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기 쇼에 전시되고 제대로 돌봄과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방치한 인간 이하의 사실들을 읽느라 지친다.
1904년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에서는 백인 연구자들이 필리핀 토착민들을 전시했다. 토착민과 미숙아를 구경거리로 삼는 일은 제국주의 지배를 과시하는 행위였는데, 말하자면 정복을 당해 상품화된 사람들을 연구할 수 있고 그냥 놔두면 결국 죽게 될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백인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사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해서 예를 들어 말하는 것도 의미 없게 느껴진다.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 당시 경험이 없는 의사를 고용하여 자신을 보조하게 했던 사기꾼이자 기회주의자 에드워드 베일리스는 인큐베이터를 무덥고 불결하게 관리하였고, 미숙아들에게 우유와 시리얼, 달걀을 먹여 결국 장염으로 45명 중 39명의 아기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 아기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살았을지 알 수 없지만 이 아기들의 죽음은 티켓을 판매하기 위한 미끼로만 이용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마틴 쿠니도 의사 자격을 취득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기들의 안전을 뒤로 미루었던 베일리스와 달리, 자신의 아기 환자들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고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탁월한 수준의 치료에 전념했고 숙련된 간호사들을 고용했다. 두 사람 모두 공식적인 의사 자격증이 없었지만 한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는 미숙아들의 생명을 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본인에게 맡겨진 미숙아들을 소홀히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서 관리, 감독이 윤리적인 면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를 시사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마틴 쿠니의 만국박람회는 알량한 권력을 남용하고 행사하는 수단으로, 또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1900년대 초 의료계의 다른 사람들도 일찍 태어나거나 힘들게 태어난 아기들은 본래부터 튼튼하게 태어난 아이들만큼 가치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견해를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어 전시하는 일이 부수적인 여흥거리가 됐다며 몇몇 언론에서도 비판기사를 냈다. 하지만 이 아기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교대근무를 하며 그들의 수 많은 동료와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다. - P42
오늘날에는 조산아를 살리는 치료가 근본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여기며, 이런 의미에서 신생아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인공자궁은 널리 환영받아 왔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걸렸다. 다운 라펠Dawn Raffel이 자신의 책에서 쿠니에 대해 언급했듯이, 그가 조산아들을 데려간 많은 축제장에서는 우생학 전시도 함께 열렸다. - P43
그곳에서는 결혼에도 ‘적합‘한 결혼과 ‘부적합‘한결혼이 있고,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결혼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고취시켰다. 3장에서는 이런 우생학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불가피하게 인공자궁 기술에 대한 논의와 엮이는 양상을 살펴본다. 작고, 연약하며, 계속 돌봐주어야 하는 인큐베이터아기들은 부모들이 잘 맞지 않아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작다거나, 장애가 있는 아기로 태어난다는 선전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랐다. 코니아일랜드의 기적 《Miracle at Coney Island》을 쓴 클레어 프렌티스Claire Prentice에 따르면 쿠니와 그의 팀은 수년간 8천 명의 아기를 받아들여 6천5백 명을 살려냈다. - P43
이르게는 6주나 일찍 태어난 미숙아들을 맡아 생존율이 81퍼센트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영국의 수준 높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받는 27주의 신생아 생존율은 89퍼센트이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안고 달려가려면 전시장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겠지만, 쿠니는 모든 인종 및 사회계층과 무관하게 아기들을 받아들이고 부모들에게서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쿠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언제까지나 박람회의 소재로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1903년 루나 파크에 상설 전시장을 설치한 후에도 병원들에게 인큐베이터를 도입하라고 계속해서 촉구했다. 그럼에도 1930년대까지 갈 곳이 없던 뉴욕시의 미숙아 부모들은 쿠니를 찾아갈 수 있었다. - P43
한 세기가 지나 2020년대가 된 지금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관리하기 위한 책임 절차를 갖추고 있다. 부분적인 이유로는 절박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를적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동물실험에서 21주에서 22주 사이에 태어난 태아의 건강을 인공자궁이 유의미하게 개선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연구진들이 출산 직후 부모들에게 이 치료법을 제안하면서 다른 선택지와 위험성에 대해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여전히 비윤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쿠니는 아기들을 무료로 치료했지만, 아무런 규제가 없는 실험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행위를 저지하는 법이나 윤리위원회도 없었다. 하지만 1890년대 아기 쇼 전성기에도 이 전시에 기괴한 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의료계와 언론들은 있었다. 1911년 엄청난 화재가 쿠니의 전시장을 휩쓸고 지나갈 때 아기들은 겨우 구했지만, 그 이후에서야 뉴욕주의 아동학대방지협회는 쿠니가하던 일을 병원으로 이관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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