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어제 저녁에 TV를 보니 누가 김광석 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가사가 많이 보고 듣던 것이었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였다. 저게 노래로도 나왔던가 의아한데, 노래를 부른 사람은 김현성이라하고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뮤지션이라고 한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도 그가 작사 작곡 했단다. 노래에 별 무관심인 나로서는 금시초문이다. 다만 옛날에 좋아했던 시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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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山島 夜吟 한산도 야음

이순신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



우리 공장에서 전개하는 독서운동의 5월달 선정도서는 김훈의 <칼의 노래>이다. 당근 읽어 보았고, 어줍잖은 서평도 올렸던 것 같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 앞에서 무효였다’라는 제목의(물론 소설중에 나오는 문구다). ‘닥쳐올’이라고 하니..‘닥쳐라’가 문득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읽어 볼 생각이다. 김훈이 한글 산문 미학의 한 경지에 올랐다는 말은 지당하다고 생각하거니와, 일부 그의 글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인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재독의 가치가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다.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은 광화문 앞에서 긴칼 옆구리에 차고 떡하니 서있는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의 위풍당당한 이순신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이순신은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허무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순신은 과연 누구인가.....이순신.........순신, 순신, 순신하고 불러보니 그 이름이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이름 같다는 전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그런 생각만 떠오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역시나 잘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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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5-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네시로 카즈키의 <레벌루션 No. 3> 등 더 좀비즈 시리즈에 재일교포 주인공 이름이 '순신'이지요. 일본어로 발음하기 어려울 텐데, 묘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붉은돼지 2006-05-0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설마 성도 이씨는 아니겠지요?
 

 

 行路難   - 李白 

金樽美酒斗十千 玉盤珍羞直萬錢

停盃投저不能食 拔劍四顧心茫然

欲渡黃河氷塞川 將登太行雪滿山

閒來垂釣碧溪上 忽復乘舟夢日邊

行路難行路難 多岐路今安在

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


인생살이 어려워라


황금술잔에 만 말의 맑은 술

구슬 쟁반에는 만금의 성찬

술잔 멈추고 젓가락 던져 채 먹지 못하고

칼 뽑아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음은 아득하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물을 막고

태행산 오르려니 눈이 산에 가득하다

한가로이 시냇물에 낚시 드리우고

홀연히 배를 타고 해로 가까이 가는 꿈을 꾸었다.

인생살이 어려워라 인생살이 어려워라

갈림길 하 많으니 지금 그 길 어드매뇨

거센 바람 파도 부술 때 기다려

구름높이 돛 달고 큰 바다 건너리

 

                                      -   김원중 평역 당시감상대관(까치동양학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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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중인 호금도 아저씨가 지난 19일 시애틀에서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유명한 시구를 인용하여 중미관계 발전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는 신문보도가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인용한 구절은 이백의 ‘행로란(行路難)’이라는 시 3수 가운데 첫수의 마지막 두 구절로 ‘長風破浪會有時(장풍파랑회유시), 直掛雲帆濟滄海(직괘운범제창해)’이다. 국내 주요 일간지들은 안병렬 안동대 명예교수의 ‘한역당시 300수’를 인용하여, “바람을 타고 물결을 깨트리는 그 큰 뜻 때가 오리니, 높은 돛 바로 달고 창해를 건너리라”는 뜻으로 소개했다. 내 보기에도 김원중 선생의 해석보다는 안병렬교수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행로난의 그 두 구절이 그렇게나 유명한 명구인지 미처 몰랐으니 글하는 선비(?)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어데 숨을 곳이 없다. 집구석에 있는 당시관련 서적을 뒤져 보았으나 임창순 선생의 ‘당시정해(소나무간)’나 ‘고문진보 시편(육문사간)’에는 이 시가 나와 있지 않았고 김원중의 ‘당시감상대관(까치간)’에는 소개되어 있어 간신히 그 내용을 훑어보며 부끄러운 마음을 잠시 숨겼던 것이다. 처음에 나오는 두 구절 金樽美酒(금준미주)....玉盤珍羞(옥반진수)... 운운은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어사출도 직전에 변사또 생일잔치에서 지은 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의 구절과 흡사하니 그 구절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음을 이제서야 알겠더라...(혹시 고딩 국어시간에 이미 배웠는데 뒷북치는 건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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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을 읽다가  p172~173에서



 

꽃씨와 도둑 - 피천득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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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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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8.자 중앙일보를 보니 <시가 있는 아침>이라는 코너에 이 시가 소개되어 있다. 누가 불렀는지 감감하지만 유행가로 더 유명한 이 시의 제목이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인줄로만 알았다. “저녁에”라는 제목이 왠지 낯설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의 희곡이 있었던 것 같고, 또 김환기 화백이 같은 제목으로 여러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안다.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앙일보에는 시인 이문재의 다음과 같은 감상이 소개되어 있다. “......별은 없고 스타만 있다. 사람들은 밤하늘을 잊어버렸다. 잃어버렸다. 도시는 우주의 미아다. 매일 밤 멋모르고 달려온 별빛들은 ‘밝음’속에 사라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대낮 같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어둠을 어둡게 해야한다. 그래야 ‘별하나 나 하나’가 다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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