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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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 - 선총원 단편선집
선총원 지음, 이권홍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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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총원의 글을 읽게 된 동기는 출판사 첵세상에서 간행된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에 수록된 루쉰과 선총원의 니체 해석이라는 수원가오지안후이(高建惠)’교수의 논문 덕분이다, 중국 문예비평가 주광첸(朱光潛)’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루쉰과 선총원 밖에 없다.”며 중국 현대문학 최고의 작가라 칭송하기도 했다.

 

1, 선총원(沈從文)은 누구인가?

 

1988년 노벨문학상 최종 심사에 올랐으나 그의 사망으로 수상자가 되지 못했음을 밝힌 노벨문학상 심사위원 고란 말름크비스트의 발표는 뒤로하더라도 루쉰과 나란히 거론되는 대작가가 왜 대중에게 그토록 알려지지 않았던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 보자. 그는 문학의 정치와 상업의 종속에 반대함으로써 중국공산당 정권에 의해 기녀 작가로 매도되고, ‘반동 작가로 분류됨으로써 1978년 복권될 때 까지 그의 이름과 작품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한편 그의 생애 80여 편의 작품집을 남겼으나, 복권 이후 그는 필()을 꺾고 역사연구원으로 1988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이후인 1990년대 되어서 비로소 작품 평가가 새롭게 이뤄지고 잠깐의 열풍이 불긴 했으나 그의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업적과 영향, 나아가 그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채로 남게 된 실상이 안타깝게 전해지고 있다.

 

가오지안후이는 선총원을 “1920년대 후반 중국에서 1차 니체 붐이 퇴조하던 시기에 새로운 시각에서 니체에 진입한 현대 문학의 대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루쉰의 냉철한 문학 스타일과 판이한 시적 자연의 작가로서 니체의 초인(超人)을 고립주의와 개인 중심주의로 수용하였으며, 고독주의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유지했다고 해석한다. 실제 10년여에 이르는 대학(칭다오와 베이징)교수 생활을 제외하곤 체제 밖에서 살며, 고향 샹시(湘西) 지역을 비롯한 원시 자연의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가식 없이 원초적으로 유지하는 현대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변방지역을 심미적 예술의 근거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로부터의 도주와는 다른 것이었다. 선총원은  적당한 외로움을 유지해야만 독립적인 사고와 깊은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 고독주의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초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본질은 생명을 긍정하는 데 있으며, 생명의 본질은 강력한 의지이며 강력한 의지는 디오니소스 정신이 개조된 생명의지다.”라는 비극의 탄생에 기초한 그의 문장이나, 아침놀을 연상케 하는 말인(末人)들의 우매함에 대한 비판은 그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의 투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총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집으로 변성(邊城), 장하(長河)가 있다고 하지만 국내에는 이렇다 할 그의 작품이 소개된 것이 없다. 변성은 문명의 오물에 오염되지 않은 샹시(湘西) 땅에 사는 사람들의 얽매이지 않은 생명력을 말인(末人)과 대조적인 초인(超人)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고독한 캐릭터들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운명의 반복과 순환을 거듭 묘사함으로써 영원회귀를 반영하는 니체적 작품의 전형이라 얘기되고 있다. 아무튼 선총원은 루쉰의 니체 수용과는 달리 미적 예술의 문인으로 니체를 해석함으로써 중국화한 대표적 문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의 문학 세계를 폭넓게 대할 수 없는 내 언어능력이 아쉽기만 할 따름이다.


2.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 선총원 단편집으로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를 표제로 한글 번역된 이 책은 선총원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어머니 병문안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샹시(湘西)지역의 변화를 아내 장쟈오러(張兆和)’에게 그 변모를 알려주겠다는 약조에 따라 쓴 편지글을 모아 1936년에 출간한 샹시(湘西)행 잡기를 옮긴 것이라고 역자는 설명하고 있다.

 

기행문 같기도 하고 편지글 같기도 하며, 문학적 향취 짙은 에세이이기도 한, 그런가하면 단편 소설이자 비평적 르포기사이기도 한 1936년에 작품집으로 발간된 이 글들에는 향토색이 짙게 배어있으며, 칠 백리 뱃길을 따라 마주하는 자연과 마을의 풍광과 인간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미와 인간미,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표제작인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는 뱃길에 오르기 전 샹시 우링(武陵)의 오랜 옛 친구와의 만남, 그 변치 우정의 깊이를 들려준다. 17년만의 귀향에서 만남, 한적하고 정갈한 여관 주인이 되어 서예와 골동품을 애호하는 풍아한 사람이 된 친구가 선총원을 맞이하는 말은 그야말로 인간미란 무엇인지를 대변한다. , 정말로 네가 보고 싶었다고!”, 환하게 팔을 벌려 친구를 껴안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언어들은 격식과 모든 가식을 걷어낸 토속적 속어들로 정감이 물씬 묻어난다. 이런 개같은 경치, 그야말로 그림이군!”, 아취(雅趣)와 속취(俗趣)가 뒤섞인 감탄사를 내뱉는 허식 없이 친구를 맞이하는 친구의 말은 운치가 백출하고 유머와 진지함이 섞여 창강(長江)의 흐르는 물처럼 계속된다. 도시의 부패한 말인들과 달리 초인의 면모란 무엇인지로 글을 여는 작가의 뜻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어지는 타오위안((桃源)과 위안저우(沅州)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일컫는 바로 그곳이다. 신선이 사는 이상향, 그곳은 옛날 진()나라가 쇠락하고 변란을 피해 은거한 유민들이 일군 마을로서 우링(武陵)의 어부가 발견한 곳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깊은 환상을 준 그곳, 타오위안((桃源)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선이라 어느 누구도 생각지 않는다며 문장을 연다.

 

그곳에는 뒷강(後江)이란 불리는 기녀들이 줄줄이 늘어서 군정(軍政)각계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여행객을 사로잡아 번 돈에 꽃세를 받아 지역 행정과 보안에 보충한다며, 기녀들의 쓸쓸한 일생에 담아 삶의 곤궁함과 피로함에 대한 연민을 잔잔히 풀어 놓는다. 도화원기를 읽은 풍아한 상류 사람들은 아름답고 그윽한 정취를 찾아 타오위안에 찾아들지만, 신중하지 못한 이들은 병원을 찾아들게 된다며 은근히 지배계급의 위선을 슬며시 건네며 뒷강 기녀들이 그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무산계급의 신산한 삶을 옹호, 위무하기도 한다.


 

창강(長江) 뱃길 주변의 조각루(우측)



칠 백리 창강을 세 사람의 뱃사람이 젓는 작은 배를 타고 그 뱃길과 여울의 난폭함에 따라 정박하게 된 지역의 삶의 형상들을 묘사하며 그는 오물에 오염되지 않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얽매임 없는 생명력을 찬양한다. 아마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 그 활력을 강하게 묘사하는 글로서 야커웨이의 밤은 그 순수한 인간들에 대한 가장 멋진 관찰이며 깊은 애정의 시선을 가장 잘 녹여낸 글일 것이다.

 

강을 따라 줄지어 산 중턱에 지어진 조각루들, 이 조각루의 삶이 들려주는 격정적 신음 소리와 치밀어 오르는 뱃사람들의 억제하지 못하는 욕망과, 욕을 해대며 강기슭 조각루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는 자연 성욕의 자유로움으로 가식 없이 원초적 생명력의 활력이 시적 정취에 묻혀 어떤 추함도 없는 아름다움의 정경으로 마음에 깃든다. 젊은 청년 뱃사공과 조각루 여인과 하루 밤의 운우지정, 그리고 그네들의 사랑의 담화가 작가의 상상력에 기대 문학적 언어가 되어 들려진다. , 이 자연의 활력을 품은, 생명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10여 편의 글들을 읽는 것은 지금 도시적 삶의 메마름에 안절부절 하는 우리네에게 다시금 니체의 자유인, 그 초인의 세계로 안내한다.

 

현대 도시인의 노예적 병색에 깊게 물든 인간들의 구경꾼적 관점, 즉 타자에 대한 무감각과 자기편익에 골몰하는 중국인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던 그의 소설들, 목이 잘리는 혁명부부의 광경으로부터 동정심이란 인간적 공감은 오간데 없이 고작 망나니의 칼질이 멋져 그 직업의 장래가 유망하리라 생각하는 인물을 그린 신여구(新與舊), 변성(邊城)의 주인공 추이추이를 읽어 볼 수 없음이 계속 아쉽다. 그나마 이권홍 교수의 번역으로 선총원의 일면을 접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지금 어느 누가 익숙하지 않은 중국 문인의 책을 찾을 것인가라는 우리네 독서계에 대한 현실적 자조의 목소리에 십분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의 통속을 벗어나 앎을 확장하려는 독자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환경이겠지만 대표작 변성(邊城)만이라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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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2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몰랐던 작가인데, 좋은 작가 소개 감사합니다. 저도 구해서 읽독해 보겠습니다!!

필리아 2023-02-03 09: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yamoo님~,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1년 이상 책장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꽂혀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야릇한 제목을 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는 우연과 함께,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토 기와무라는 작가가 쓴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란 작품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홍보 문장, 그리고 주술 자본주의토대에  칠흑같은 저승에 잠든 욕망들이 벌이는 피의 전쟁이란 표현은 당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베르의 백과사전 98번 항목, 아스테카 사람들이 상상한 세상의 종말은 아즈텍 신화에서 다섯 번째 태양기인 현세에 앞선 네 번의 종말에 대한 간략한 신화를 담고 있다. 세계의 첫 번째 시기를 주관하는 신이 바로 테스카틀리포카. 연기나는 거울(Smoking Mirror)’이란 의미를 지닌 전능한 신이다. 그의 가슴에 달린 거울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일을 모두 알고 있는 신, 그래서 이 신은 주술(呪術)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전능한 신()답게 별칭을 무려 360가지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신의 속성을 지닌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신이며, 인간 창조자이며, 온갖 생명의 기원이다. 아즈텍인 들이 이 신을 경외한 것은 물론이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다가 단숨에 모든 것을 빼앗기도 하며, 불화와 적의, 전쟁을 부추기기도 하는 신.

 

사토 기와무의 소설이 마약밀매 조직의 잔혹한 전쟁을 소재로 하며, 이제까지는 없던 피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는,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 그 검은 비즈니스의 내막을 상상을 초월하는 디테일로 그려내는 모양이다. 가장 강력한 주술의 도형인 마약 자본주의라는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문장이 아주 적나라하고 자극적이다.

 

그런데 또한 우연인지, 의도된 맞춤인지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걸출한 역작,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좌파의 길이란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경제적 조건을 드러내며,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주술의 신, 거울의 신인 아즈텍의 전쟁신 테스카틀리포카는 신의 의지를 넘어서려는 이들 자본주의의 마법진을 펼치는 인간들에게 과연 어떤 응징을 내릴까? ‘마약자본주의’, 그야말로 식인자본주의의 그 폭력적 욕망의 전형일 것이다. 아마도 사토 기와무의 소설, 낸시 프레이저를 함께 읽으며, 자본주의, 그 탐욕과 무자비함과 잔혹함의 속성,  그 태생적인 윤리의 결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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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장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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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기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담론 빈곤의 시대로 여겨진다. 논쟁은 사라지고 자기와 다른 상대는 아예 존재치 않다는 듯이 퇴행적이고 독단적인 행태가 그 바보같은 얼굴로 모든 언로(言路)를 잠식하고 있다. 이 유아적 독재는 세계를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없기에 고작 얄팍한 전략과 기술적 술수의 말()아닌 자기만의 옹알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가 열리고, 바로 지금을 사는 인간들의 삶을 지탱하는 깊은 뿌리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실종되고 있다. 파쇼들의 발흥, 그리고 독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멜랑콜리를 말하는 이 책은 어쩌면 이 결여(缺如)의 뿌리를 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드러내고자하는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져 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느껴지는 슬픔이 멜랑콜리다.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다른 견해를 가진 존재들을 제거하여, 자기에 순종하는 인간들만 있는 세계를 파쇼 체제라 부른다.

 

파시즘이 일방통행하지 못했던 도시, 산업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투쟁, 그리고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겪으며 온갖 이데올로기의 상흔을 지니고 있는 토리노를 맴도는 멜랑콜리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휘감아 도는 멜랑콜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책은 이 멜랑콜리, 그 결여와 실패를 직시하여 현재를 인정하기 위한 애도 작업이다. 이 과정을 통과함으로서, 즉 결여의 뿌리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미래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의 정치권력 집단을 파쇼라 불렀다. 권력자의 의지와 다름은 곧 징벌의 대상이었으며, 사회 구성원은 권력에 순종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전체주의적 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강렬한 자기 집착의 권력, 이들은 타자를 품을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에 대한 그 어떤 상실도 참아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개인들의 소소한 자율적 행위조차 감시와 간섭, 체포와 감금, 고문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란 실체는 부인되는 사회였다. 이 비참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중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30여년의 오랜 고통스러운 저항의 과정을 통해 타자를 자신의 품에 안는 법을 권력에게 가르쳤으며, 상실감을 인내하고 인간의 한계에 의연해지는 법을 인식, 체화토록 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체감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성숙과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고양된 앎은 이렇듯 수많은 희생의 결과라는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지난 시절에 대한 복기(復碁)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갈등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 그래서 개인의 일상적 자유와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조건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어떤 개인의 소박한 자유는 엄청난 가시적 행위로 갑자기 억압받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여유의 점진적 축소, 일자리 질의 악화, 다가온 위기에 스스로 대처할 힘의 부족, 언어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의한 보이지 않는 규제 감시와 압박 등처럼 언제 내몰렸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은 개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삶의 불안정성이 급작스레 증가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경제적 부담의 가중은 정치적 순응의 강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갖는다. 20세기 초 근대성의 물결 최()일선 통로였던 이탈리아의 북부 변방도시 토리노를 주목하는 것은 무수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으로서 이를 수용하거나 갈등하며 그네들이 겪은 삶의 역사가 남기고 있는 실체들의 발견이 곧 우리의 현실 반성의 거울이 되어 줄 수 있는 까닭이다.

 

저자는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는 물론 '개인들의 소박한 사적 자유(liberty;작은 자유)'의 가치를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유의 전제, 작은 자유를 가능토록 하는 '큰 자유(freedom)'의 중대함을 또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리버티가 위험에 빠질 때 등장하는 추상적 자유, 진정한 자유, 권리로서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율성의 자유를,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자유를 가리키고 있다.

 

혁명적 자유에서 혁명이 자유를 넘쳐서는 안 되고,

혁명적 자유는 일상적 자유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 205

 

저자는 이러한 자유의 역사를 토리노라는 한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토대로 자본과 노동의 대립, 파시즘과 토리노 지식인들의 비타협적 비판의식을 역사적 맥락에 의한 이념적 계급적 관점을 넓혀 시선의 편협을 극복한 이해로서의 가치판단을 주장하고 있다. 이 역사적 과정에 등장하는 경제적 주체로서 피아트 자동차의 경영집단과 노동운동의 계급적 투쟁, 파시즘에 대한 양심적 거부의 지적 기반의 실체들의 실천적 행위에서 발견되는 자본의 내적 투쟁을 탐사함으로써 이들 무수한 갈등과 충돌 속에서 프리덤의 개념이 창출되고, 바로 토리노가 이 큰 자유의 요람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피아트의 창립자이자 경영주였던 아넬리를 이념 중립적 자본가로 내세움으로써 포드주의의 대량생산 체제의 도입으로 성취한 경제적 부흥, 파시즘에 대한 저항, 새로운 이념형 공장(링고토 공장)으로서 사회주의 문화 모델, 생산자 문명의 신질서 창출이라는 미화된 자본의 이상, 즉 작은 자유는 큰 자유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씌운다. 이러한 이해의 기반에서 피아트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동일하게 해석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는표상이라 주장한다. 여기에 20세기 반파시스트의 대표적 지식인 고베티근대자본주의의 고독한 영웅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자유주의자였음에도 고베티의 나쁜 부르주아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은 계급적 차원을 비롯한 민족적 차원의 승화된 투쟁이었다면서 그람시와 그의 긍정적 접근을 민족적-민중적 차원의 투쟁이었음을 부각하고, 이러한 토리노의 지적기반이 산업도시 토리노를 상징하는 피아트의 경영 이념의 뿌리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 이 민족적이라는 언어와 노동과 자본의 계급투쟁을 반파시즘이라는 시대적 산물의 출현에 대한 저항으로 희석시켜 민족적 민중적 투쟁으로 확대하는 논리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증이다. 특히 민족이라는 영토적 환상, 자신들만의 순수한 혈통적 공동체는 자신과 다른 것과의 섞임은 불순과 타락이라는 바보같은 통념으로 이어지고, 타자를 배제, 폭력의 대상자로 낙인 찍는 배타주의라 할 수 있다. 고베티, 더구나 그람시를 민족주의자와 엮어 노동계급의 저항을 민족주의를 저해하는 행위로 바라보게 하는 시각은 어쩌면 의도된 반노동적 관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저자가 예시하듯 피아트의 생산 확장에 따른 남부지역 노동자의 유입에서 그네들이 겪게 되는 차별과 배제는 이러한 민족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 그 위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지 노동자 계급 내의 위계적 차등이나 차별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곧 민족주의에 매몰된 당대 토리노 지식 엘리트들의 한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피아트가 이탈리아 국가경제의 30%를 차지할 만큼 국가 권력이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 저자가 말하는 권력과 기업자본의 틈새로서 독립성은 가능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 현실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것을 경영주체인 자본가의 리더십이나 이념적 자율성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1969년의 뜨거운 가을로 표현되는 노동자 파업을 노동자의 방임적 노동적 해태(懈怠)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를 관료화된 노동자와 남부에서 유입된 신진 노동자의 갈등과 충돌의 산물로 읽어내며, 이러한 노동계급의 갈등을 방치하고 경영집단의 새로운 질서 상상’, 즉 자동화 및 생산 분산화 등 노동 체제의 변혁 도모를 야기한 책임이 노동계급에 전가되고 있는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공장을 벗어난 시내 집회, 행진으로 나타난 1980년 토리노 4만인 시위는 노동계급에게 조종을 울린 검은 화요일로 기록되고 있는데, 노동자 투쟁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가세한 반 노동투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경영집단이 노동 권력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된 사태인데, 저자가 기록하고 있듯, “4만 인 행진이 피아트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음을 암시한 피아트 최고경영진 가루초의 말처럼 자본이 계급투쟁을 주도한다는 사실만 입증할 뿐이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노동계급의 문화적 패배와 권력 투쟁에서의 패배를 상징한다는 말처럼 대중적 자기 계급 인식에 대한 위기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사태로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부분적 시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자유주의적 관점과 사회주의적 입장의 동행 가능성에 대한 제의, 그 연구 노력에 공감한다. 특히 고베티의 도시라 불릴 만큼 토리노의 지성을 대표하는 고베티의 자율을 해독함으로써, 자유주의=중간계급(유산자), 사회주의=노동계급이라는 획일적이고 전통적인 통상적 인식, 다시 말해서 냉전적 진영 논리의 거부로서 지향의 발견은 오늘의 우리네에게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복종과 순응, 무기력과 절충성이 지배하는 온갖 기회주의에 대항해 진정 품위있는 이탈리아를 추구했던 비판적 용기, 기성 규범에 대한 수동적 순응적 수용을 벗어나 스스로의 법()을 세우는 자율적 노력의 주창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민중들에게 요구되는 가치일 것이다.

 

차이와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체계와 원칙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들을 아우르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217

 

작지만 강했던 토리노의 옛 사보이아의 귀족적 고귀한 전통이 파시즘의 반동적 보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거부가 가능토록 했음은 소위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 곧 내적 강인함, 탁월함의 고귀성을 읽도록 한다. 아마 저자의 견해에 대해 오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유주의자 고베티와 사회주의자 그람시의 계급 갈등에 대한 공감적 유대가 가능했듯, 서로 다름의 섞임, 배타성이라는 편협과 부정성의 극복은 동일자의 순수성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서로 밀고 들어가 뒤섞이면서 새로운 변화의 개체로 재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대상화, 사물화, 상처 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짙게 드리워진 멜랑콜리는 아마 저자가 말하는 대범성, 용기라는 애도의 과정이 필요한 것일 게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가 빠져있는 갈등과 충돌, 그 적대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사유로서 20세기 험난한 이데올로기 실험장이었던 토리노의 이 역사적 탐사는 귀중한 전범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본성상 인간의 세계는 멜랑콜리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적막한 정서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또한 본성일 것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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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아무튼 시리즈 55
장강명 지음 / 위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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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아니 삶을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는 동네에 대한 바람의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삶에 대한 시선이 물론 같을 수 없지만, 소설가 장강명이 함께 이루고 싶은 동네는 전망 좋고, 자전거 타기 좋으며, 산책로가 있고, 개들과 새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도서관이 있고, 역사와 설화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말하는 곳이다.

 

이에 이르기 위해 그는 추리고 추려 역사에서 인물, 전설, 상권과 도서관에 이르는 일곱 가지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현실 가능한 궁리를 펼쳐놓는다. 그것은 삶을 사랑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네라 정의 하는 듯하다. 제목에 표기된 현수동(玄水洞)’은 실제 행정 명칭에는 없는 곳이지만, 마포 광흥창역 일대라는 구체적 위치가 있는 동네의 가상 이름이다.

 

작가는 밤섬을 포함하여 마포구 현석, 신수, 구수, 서강, 하중, 창전동 일대를 가상동네인 현수동이라 부른다. 30대 중반 6년 동안 살며 그 일대를 사랑하게 된 사람의 지역 찬가일 수 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들 동네가 지닌 일곱 가지 궁리를 따라가다 보면, 광흥창역 일대가 아니어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기리며, 바로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나 현수동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들 궁리를 말하는 각각의 제목은 작가에게는 없는 것이거나 두려워하고, 가본 적 없고, 질색하며, 모르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들이란 사유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신을 질색하지만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고 그네들을 위무하는 마을 수호신을 모아놓은 부군당과 도당굿 전승의 가치를, 그 보존을 말하듯이.

 

또한 도시 서민과 빈민의 무참한 죽음을 야기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현장 어디에도 위령비가 없으며, 한국 사회가 이런 죽음들을 적극적으로 지워버리려 함을, 마치 일어나지 않은 척 하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발견하며, 동네의 역사, 동네를 이루었던 대장장이, 메주 말리는 여인, 양 치던 소년 등 보통 사람들의 동상과 목상이 보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있는 곳에 편하게 설치된 곳을 상상한다.


 


이름도 낯선 조선조 양반의 아호는 남아 지명이 되고, 정작 지배당하고 살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갑남을녀들의 삶의 현실은 지워버리는 그런 위계와 권력의 언어가 더 이상 주장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궁리이기도 할 것이다. 지명이나 동네 이름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은 그 완성도가 심히 떨어지거나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어설픔과 모순의 이야기 자체가 피지배민인 백성들의 신산한 삶의 비극성의 반영이며, 꿈같은 이야기로나마 타협하려 했던 그네들 심정의 표현이었기에 부득이한 불완전성, 미흡한 모방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폭력이 행사된 1968년 밤섬의 폭파 제거 행위는 여의도 개발을 통한 막대한 사익을 챙기기 위해 홍수 방지 명분으로 강행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이곳을 거주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쫓겨났다. 그렇게 사라졌던 밤섬의 남아있던 수면 아래 암석에 해마다 토사가 쌓여 이제는 폭파 전보다 큰 섬이 됐다. 그리곤 생태경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람사르 습지로 등재되기까지 하며 보호되는 장소가 되었다. 인간들의 몰염치에 의한 파괴는 자연의 힘, 시간의 힘에 의해 되돌려진다. 오만한 한 줌의 권력도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잖은가!

 

작가는 공공도서관을 동네의 커뮤니티 공간이자 자유롭게 타인의 사상과 마음을 읽고 나누는, 꿈꾸는 이상적 마을의 필수 시설로서 역설하기도 한다. 그리곤 부록인 초단편 소설인 현수동의 아침주인공인 강아지 새롱이의 산책에서 마주하는 평온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반려견과 함께 자유로운 산책이 가능한 지역을 꿈꾸기도 한다.

 

사실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는 항상 갈등이 따른다. 어찌 획일적으로 동일한 취향과 요구만 있겠는가.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며 정신의 교류를 하는 동네라면 슬기로운 협의가 가능할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가 전하는 현수동의 각 장소에 깃든 설화에 귀 기울이고, 도시의 미래에 대한 소견을 들어보며, 우리의 동네, 우리들의 세상은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시간이 된다. 아마 그의 궁리들은 보통사람들의 이해를 그리 벗어나지 않는 푸근하게 공감하며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런 희망의 이야기들일 것이다.

 

아 참, 작가는 그의 기 발표되었던 뤼미에르 피플의 속편으로 밤섬 새 당주가 등장하는 모험의 이야기로, 가제(假題) <시간의 언덕, 현수동>을 예고하고 있다. 발표된 많은 단편과 장편 소설에는 현수동이 직접 또는 간접적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새해 벽두를 연 이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인간미와 친근함 탓에 그의 소설로 다가가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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