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르와 이폴리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10
장 바티스트 라신 지음, 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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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움이 내 시선을 동요케 하는구나, (...) 내가 정신을 잃었구나, (...).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내 마음이 내 손처럼 결백하면 좋으련만! (...)

내 손은 순진무결하나, 내 영혼은 오점이 있다!” - 13에서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희곡작품인 장 라신의 비극을 읽게 된 이유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정치, 사회철학서인 수치심에 대한 비평적 저술을 통해서다. 아무튼 이 책은 내게 무진장한 정치적, 윤리적 영감을 주었으며, 그 진술을 위해 이용된 저작들은 마치 읽어두어야 할 것 같다는 어떤 의무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라신서문에서  여주인공(페드르;파이드라)의 충동은 자기 의지의 발로가 아니기에 죄의식의 순교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듯,  죄의식과 수치심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우리들은 자신이 했거나 방치한 행동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데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안에서 낯선 기괴함으로 끓어오르는 충동에 휩싸일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 작품은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다.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은폐되어야만 하는 욕망의 이야기다.   페드르(Phaedra*파이드라)는 사랑의 정념에 빠지기 쉬운 동시에 그 정념을 고백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이를 절대적인 도덕적 자질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럼으로써 이 끔찍한 정념을 자신이 지녔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과 맞바꿀 만큼 침묵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내적 혼란을 겪는 여인이다.

 

때문에 불온한 사랑의 정념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행위로 옮긴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욕망을 가혹할 만큼 억압하며, 박해한다. 그녀에게 이 엄청난 정념의 고통은  너무 생생한 나의 상처에는 곧 피가 흘렀어.”라고 말할 정도이며, 황폐해지고 약탈당한 자아의 고통으로 죽음의 충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극심한 절망에 붙들려있다. 이러한 수치심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한데, 16세기 데카르트 이후, 수치심을 의례화되고 억압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에서 개인적 비극 속에 자리잡게 한, 즉  개인의 과도하게 예민한 감수성으로서 내면적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축소된 왜소한 감정을 반영한 작품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내면의 법정인 자신을 지켜보는 엄격한 눈의 감시를 두려워한다 나의 죄는 이제 도를 넘었다. 나는 숨 쉴 때마다 근친상간을 뿜어내는구나. (...) 불쌍한 것! 그런데도 살아있어? 그러고도 살아서 나를 낳아준 신성한 태양을 보고 있다고?” 처럼, 지엄한 신의 눈에 포획되어 있다. 물론 페드로의 근친상간이라는 욕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녀의 수치심이 지나치게 과도한 도덕성에 붙들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대는 그 윤리적 잣대의 불온함은 재()사유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페드르는 타자를 장악하려는 가해자로서 근친상간의 폭력적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내면에 지닌 수치스러운 침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식의 완벽한 내적 판관이 될 수 없다.

 

내 의식과 분리되어 외재적으로 투사된 완벽하게 독립된 법정을 자기 안에 설립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아마 불가능할 것이고, 설혹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엄격한 검열에 메인다는 것은 수치심을 개인의 심리로 위축시킨 까닭이 아닐까?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배제함으로써 온전히 개인의 정서적 책임으로 몰아 댄 법과 죄의식의 확장 때문에 말이다. 근대 이후로 수치심을 치유해야 할 상처이고 청산해야 할 독성이자 뿌리 뽑아야 할 것으로 말하는데 익숙해진 오늘의 우리들은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무시하려한다.

 

사실 페드르가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아파하는 것은 발설하는 순간 자신으로부터 세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리라는 총체적 재앙의 두려움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해체, 세상을 더럽힌 존재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공포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동을 배척하고 사유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테제가 사망했다는 전언이 전해짐으로써 페드르의 은폐된 정념이 사건화 된다. 남편의 사망 소식은 페드르의 유모이자 심복인 외논의 자극에 의해 그녀의 입을 통해 이폴리트가 발설됨으로써 급격히 전환되고, 급기야 아버지 테제의 죽음 이후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테네로 출항하려는 이폴리트를 붙잡고 오랜 침묵 속에 잠겨있던 수치를 고백한다.

 

그녀의 이폴리트를 향한 사랑의 정념은 그야말로 밖으로 흘러넘치고 만다. 결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   내 수치를 고백했어, 희망이 나도 모르게 맘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었다.”며 도주하는 자신의 정숙함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이 말을 당사자에게 발설함으로써 정숙함의 의무를 벗어 던진 것이다. 작가의 치밀함은 총 1654행으로 짜인 희곡의 딱 절반인 827행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온다. 테제가 살아서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 테제가 페드르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잠시 화제를 돌려서 이 욕망의 통제와 관련하여 상극에 있는 루크레티아의 신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이 욕망이 수치심과 죄의 경계를 어떻게 분리하는 가의 하나의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동료 전우인 콜라티누스의 고결하고 완벽한 아내 루크레티아에게 느낀 시기어린 노여움으로 타르퀴니우스는 전장에서 이탈하여 늦은 밤 그녀가 홀로 있는 집에 찾아들어 여자의 정절이란 모두 허튼소리라며 미래의 보상과 편의로 유혹하지만 거절당한다. 루크레티아는 버티고, 함께 쾌락에 빠져들길 완강히 거부한다. 이때 타르퀴니우스는 치명적 협박을 가한다. 계속 거절하면 그대를 죽이고 남자 노예 한 명을 죽여 침대에 발가벗겨 나란히 눕혀 놓고 부정한 여인을 친구를 대신해 복수했음을 알리겠다고 죽음보다 더 최악의 일처럼 보이는 수치심 앞에 굴복하게 하곤 강간한다.

 


사실 욕망이란 언제나 우리 인간 안에서 끓어오르고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타자다. 툭하면 우리를 넘어서고, 벗어나며, 초과하고 규정하는 괴물성이다. 억누를 길 없는, 우리 안에서 절대적으로 불복종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충동을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억제한다. 그런데 이 욕망을 소유했다는 것이 수치심을 갖게 하지만 단지 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져야하거나 죄가 되지 않는다. 경계는 그 통제의 문턱을 넘는 순간 혼란에 빠뜨려 난폭해지는 욕망이다. 통제에 불복종해 문턱을 넘어 행해질 때 그것은 죄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답변은 석연치 않다. 수치는 발설됨으로써 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법의 설정이 있음으로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수치심이 법의 지대로 나아감으로써 죄가 된다는 얘기인데, 그럼 수치심이라는 정념의 효용은 무엇인가?

 

페드르는 오직 너를 사랑해라고, 물론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언어이지만 그 발설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이것을 돌아온 테제에게 감추는 것은 그녀의 충성스러운 유모 외논의 비열한 계략, 페드르의 언어로  불행한 왕자들의 약점을 살찌우고, 그들의 마음이 이끌리는 비탈길로 몰고 가서, 감히 그들 앞에서 범죄의 길을 평평하게 닦아 놓는 자의 간언으로 인해 비극을 고조시킨다.  외논이 테제에게 이폴리트가 페드르의 침실을 넘봤다고 간음의 죄가 있었다고 거짓 간언하는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드르는 외논에게 분노를 쏟아 놓는다.  가증스러운 아첨꾼, 하늘의 분노가 왕들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 선물을. (...) 귀가 솔깃한 간언들이야말로 잘 다스려진 도시와 인간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외논은 바다의 파도 한 가운데로 들어가 자결한다. 그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자기 죄에 대한 죗값을 지불한 것이다. 사실 아첨꾼들, 간신배들과 관련하여 권력의 나르시시즘 행태 등 할 말이 무진장 있을 수 있지만 후일의 기회로 미룬다. 수치심의 효용은 조심성과 신중성 등 행위에 앞서 도덕성을 검열케 하여 자신과 타인의 세계에 위협의 요소를 제거하는 윤리적 성격이다. 페드르는 의붓아들인 이폴리트에 대한 사랑의 정념을 가졌다는 자신의 수치심을 테제에게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논의 거짓된 누명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폴리트는 아버지 테제의 분노에 의해 추방되고, 마차를 달리다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수치심으로 시작된 이 비극작품은 자신이 방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인 죄와 그 응분의 댓가로 맺는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에서 페드르는 목을 매고, 세네카의 페드르는 검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한다. 라신의 페드르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끝낸다. 수치심은 죄가 되어 소멸한다. 그런데  그토록 음험한 행동의 기억마저 그녀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없는가!”라는 테제의 마지막 방백은 기묘한 모순의 언어가 되어 소멸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수치심의 성분은 결코 죄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끈질기고 집요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세계를 맴돈다. 여기서 루크레티아의 자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루크레티아는 자신이 강간당했음을 남편과 모든 시민에게 알리고 자신의 수치심을 소멸시키기 위해 자살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당사자의 죽음(루크레티아의 자살)은 수치를 죽이는 유일 방법이라 말하면서, 이것이 민중적 저항의 불씨가 되었고, 공화국의 수립, 즉 정치의 성적 계보로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라신의 페드르 또한 페드르의 죽음으로써 테제는 왕권의 재정립과 후계의 적통성 확립을 이룸을 마지막 문장에 담음으로써 성의 정치적 계보를 잇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이 정념 비극의 최고봉이라는 당대 비평계의 칭송이나, 이보다 더 미덕이 더 많은 조명을 받은 작품을 결코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모든 이들이 필경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라 애착과 자부심을 보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의 성적 계보라는 의미는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 자리를 틀 지우는 젠더의 고착화이고, 정숙한 여성의 성이 정치적 안정을 담보한다는 논리를 확대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애매한 경계에 서있다. 사랑의 정념의 대상을 근친상간을 전제하는 대상으로 세움으로써 금기를 방어막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 페드르의 수치심은 작가의 죄의식과 분리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죄의 개념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는 한계를 느끼게도 한다. 이 작품은 수치심과 죄라는 주제 말고도 악의 이행과 자기 행위의 정당화라는 관점에서 논의할 중요한 주제도 있다.

 

이는 이폴리트의 관점에 스며있는 폭풍우 이는 바다의 해안에서 폭풍 속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는 방관자의 논리가 이해 당사자의 논리로 변화할 때의 인간의 비열한 자기 합리화와 그에 내재된 괴물성이다. 별도의 지면에서 다시 논의할 일이 있을 것 같아 후일의 사유로 미루어둔다. 어쩌면 이 작품은 페드르의 유모가 자신의 수치심을 자책하는 페드르를 향해, 사랑에 패한 사람이 어찌 마마 뿐일까요? 인간이라면 약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인간인 이상 마마도 인간의 운명을 따르세요.” 라는 말이 독자이자 관객인 우리 유약한 인간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소할 수 없는 정념의 내적 명령에 마주했을 때 과연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내겐 떠오르는 방안이 없다. 아마 페드르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참조: 페드르(그리스 신화이름;파이드라,Phaedra)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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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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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화재, 부패의 맛이 나는 이름을 계속 입에 올리려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 91쪽에서

 

그래, 너무 더럽고 추잡하며 역겨운 것들을 입에 계속 올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무례함과 무도함을 처단하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입을 더럽혀야 하는 것은 고통이요, 인내를 요구한다. 트로이의 예언자, 고대 신화 속 여인을 호출하여 그로부터 오늘의 불쾌한 현실에 은폐된 의미들을 해독하는 일은 결코 헛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카산드라는 예언자이자 진실의 증언자로서의 인류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끊임없이 계승되어 온 하나의 개념이 된 존재이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의 딸이자, 사제로서 예언자의 길을 걸었던 여성이다. 크리스타 볼프는 이 신화 속 인물을 통해 모호하게 감지되지만 그 실체와 동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먹고 자라는 모든 차별 의식에 은닉된 강압하는 불의(不義)의 힘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도록 실재를 드러냄으로써 눈멀고 귀먹은 민중의 잠자는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소설은 스스로 자멸, 패망의 길로 내닫는 트로이 정치권력의 인식 부패와 민중의 우매함을, 권력이 저지르는 날조와 기만, 그 징후들에 저항하는 카산드라를 통해 자신들의 죽음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이 올 때까지 진실을 회피하는 인간군상의 어리석음에 슬퍼하며, 그 전환되지 않으려는 인식에 분노케 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트로이 사회는 적을 만들어내고 그 적에 대항하기 위해 언어조작과 역사왜곡, 여론조작 등 다양한 사전 조처를 취한다.”

 

트로이가 한 문명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리기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와 용기들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권력 스스로가 미쳐 날뛰며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지 그 점진적 부패의 양상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이 작품을 여성주의적 시선을 넘어 정치사회적 삶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독해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네 정치적 현실에서 빈번하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외교의 실패, 그 천박성이 어떻게 감추어지는지를 이제는 민중 대부분이 잘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소설은 패망해 그리스군에 의해 포박되어 미케네 항구에 도달한 죽음을 앞 둔 카산드라의 10여 년간의 트로이에 대한 정치사회적 정황에 대한 회고로 시작된다.

 

아마 트로이 자멸의 징후를 보인 시발점일 것이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오가는 해상 권리의 협상을 위한 그리스로 출항한 첫 번째 배로 상징되는 외교적 실패를 가리기 위해 조잡하게 꾸민 이야기를 통해 실정을 감추려한 행위이다. 극비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왕의 사촌 람포스는 협상에 실패하고 그리스인 사제 판타오스와 함께 귀항한다. 사제 하나를 끌고 오고자 델포스로 간 것이 아님에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폐쇄 집단인 그들이, 절반은 실패한 사업에서 뒤늦게 허풍을 떨며 첫 번째 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왕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실패를 감추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낸다.

 

왕의 누이인 헤시오네가 스파르타인 텔라몬에게 납치당했다는 날조된 명분을 내세워 왕이 누이를 찾지 않는다면 트로이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두 번째 배를 띄운다. 민중들은 깃발을 흔들고 환호한다. 헤시오네가 아니면 죽음을!”, 두 번째 배가 돌아왔다. 헤시오네는 보이지 않았으며, 배에 동승했던 예언가 칼카스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헤시오네의 귀환 문제는 뒷전이 되고, 당장 칼카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국가기밀을 속속들이 아는 트로이의 존경하는 예언가가 돌아오지 않은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리스인들에게 인질로 잡혔을까? 트로이를 배신하고 그리스에 투항했다고 할까?, 민중이 원한다면 그렇게 믿게 하면 된다. 그리스인에게 나쁜 평판을 뒤집어씌우면 된다. 사회에는 거짓과 기만이 점령하고 민중에게는 침묵이 강요된다. 이제 파괴된 정의와 진실, 그리고 거짓과 기만은 반복 될 터이다. 낙관적 예언을 강요한 왕실 권력의 문책이 두려워 칼카스는 그리스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소설은 이 불의한 정치적 결정에 저항할 때마다 카산드라의 통제 불능의 착란과 발작으로 그 부당함의 상징적 기표를 반복한다. 카산드라는 사람들이 너무도 명료한 사건의 적나라하고 무의미한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어떻게 내가 본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없는지, 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바로 자기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그 천박한 본성을 카산드라는 후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크리스타 볼프가 본 1980년 침몰을 향해 돌진하던 동독사회건, 2024년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 날조하는 한국의 정치권력이건 카산드라가 회고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지나칠 만큼 닮아있다는 것에 있다. 아직 그리스군이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기 전이다.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에 우정의 손님으로 찾아 왔다. 왕실은 성대하게 그를 맞이하지만, 곧 트로이의 왕실 권력은 자기 거짓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의 이 사절에게 적대감으로 전환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메넬라오스를 우정의 손님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단어의 사용조차 불가능함을 을러댄다. 사람들은 갑자기 의심의 대상이 되고, 궁정 경비대 배지를 단 인간들은 안하무인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경비대장 에우멜로스와 그에 붙은 무리는 갈수록 소란스럽고 무례해진다.

 

에우멜로스와 결탁한 파리스는 뻔뻔스러움이 극에 달하고 방자함을 거침없이 행한다. 왕의 누이를 적의 손에서 구할 사람은 바로 나, 파리스라 주장하며, “그들이 누이를 못 내주겠다면 다른 여자, 더 예쁜 여자가 있다, 세 번째 배를 출항시켜야 한다고 패망의 길로 향한다. 부패한 권력의 거짓을 덮기 위한 또 하나의 거짓말이 보태지는 순간이다. 카산드라는 그르렁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고 배를 보내지 마라!”, 부당함을 직언하지만 감금당하고 만다. 이제 카산드라는 진실의 말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에 무력한 항의를 하는 자신의 가식을 끝내기 위해 광기를 선택한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오직 광기에 매달리는 것뿐이었음을.

 


이제 소설을 예측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그대로 대입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에우멜로스의 부하들이 일했다. 추종자를 만들고 (...) 핵심은 적을 비방하고, 이적 행위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적을 자신들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전쟁을 준비한다.” 그들에게 왜 적이 필요했을까? 조작과 기만, 거듭되는 거짓이 드러나 공적(公敵)이 되는 것을 회피하는 절대적 수단인 까닭이다. 세 번째 배가 출항하고 돌아오지만 역시 헤시오네는 없으며, 유괴했다는 헬레네는 파리스의 방탕한 여정에서 이집트의 왕에게 빼앗겼다. 다시 거짓말이 선전된다. 스파르타 왕의 아내 헬레네를 유괴했으며, 그래서 왕 프리아모스가 누이의 납치로 당한 굴욕을 갚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입에는 족쇄가 채워지고, 밀고의 눈초리가 에워싼다. 진실의 목소리는 위협과 억압으로 사라지고 거짓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전쟁은 헬레네를 돌려달라는 스파르타 왕의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러나 헬레네는 트로이에 없다. 멍청한 놈! 파리스가 이집트 왕에 빼앗겼으니. 허깨비 때문에 하는 전쟁은 질 수밖에 없어요. (...) 왕이 심각하게 물었다. 왜지? 우리가 할 일은 병사들이 계속 허깨비를 믿게 만드는 거야.“,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두고 벌여야 하는 전쟁, 누적된 거짓, 그 추악함으로 인해 자신들이 절멸할 때에 이르기까지 십 년간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제 전쟁 권력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적을 돕는 이적 행위자로 간주되는 것으로 둔갑한다.

 

거짓과 왜곡, 날조로 무능과 부패를 가려야 하는 권력은 바로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수없이 거듭되는 동일한 기만의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이것을 더 이상 거듭할 거짓 수단이 바닥을 보일 때 그들은 전쟁을 야기하고 그를 통해 되돌아 올 처벌을 회피하려한다. 정말 끔찍한 수순이다. 이때 우매한 민중들은 전쟁에 끌려들어가 바로 그 우매함의 죄 때문에 공멸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 후대에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이어가는 소설 속 문장은 이렇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점점 믿는 것을 보았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치켜세웠다. (...) 인간의 본성을 경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카산드라는 뒤통수가 비겁한 민족이라고 자기모멸, 수치심에 잠긴다. 보이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만질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명확한 구분 사이에 짓눌린 다른 것은 존재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구함이며, 안다고 믿는 해악이다. 민중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한 구토나는 권력을 토대로 한 삶의 형식은 한 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구함의 반대말은 통찰력이라 했다. 카산드라는 자멸의 길을 걷는 트로이의 실상을 냉철하게 통찰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속하여 진리를 말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육신을 감금하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격리 추방했다.

 

카산드라가 인간을 향해 고통스럽게 외치는 이 문장은 오늘의 우리네 실체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만행은 끝이 없으며, 우리는 고통의 최고점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의 내장을 헤치고 그의 머리통을 깨뜨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나는 우리라고 말한다. 우리를 말할 때가 가장 힘들다. ‘짐승 아킬레우스를 말하는 것이 우리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볼프는 카산드라를 통해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혐오스러운 짐승으로 명명한다. 어떤 숭고한 목적도 없는, 단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님을 전시하기 위해 극악하게 싸우고. 동성애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여성들을 능욕하는 추악한 인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이 또한 아킬레우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역겨운 집단이다. 서로를 닮은 존재들. 카산드라는 사랑하는 사람 아이네이아스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동행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거절한다. 그녀는 그 이유를 언어로 드러내지 않지만, 그 하나는 영웅이라는 남성적 조건을 세우기 위한 여성의 희생, 노예화의 세상에 반대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증인이 되리라, 내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을지라도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그녀는 그리스 미케네까지 끌려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트로이의 운명을 마지막까지 증언하는 증인으로 남기 위함이다. 그녀는 희망한다. 미래에는 승리를 삶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 나올지 모른다고.

 

2024, 오늘의 세계에도 도처에서 수많은 카산드라(낸시 프레이저, 에바 폰 레데커, 목수정, 정희진, 가야트리 스피박, 도나 해러웨이, 주디스 버틀러...)들의 목소리가 깨어나라고, 삶의 형식을 바꾸라고, 새로운 세계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울려 퍼진다. 그러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거나 사욕에 가득 차 기만적 반박을 가한다. 어쩌면 볼프가 새롭게 재탄생시킨 카산드라는 바로 이러한 각성을 촉구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일 것이다. 문학이 하는 가장 위대한 기능으로서. 민중의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환점에 섰다고 느낄 때, 이 소설은 우리들이 행할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로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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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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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수치심의 위기를 지나가고 있다. 무례함이 부상하고, 천박함이 번성하고, 뻔뻔함이 늘어나며, 조심성, 수줍음, 절제, 거리낌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 이 세계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치심의 위기다.”

- G. Hanus, A.Finkielkraut <레비나시아 학습 노트>에서


책은 수치심에 대한 구체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그러기위해 수치심의 역사 궤적을 통과하고, 그 변화하는 개념 아래에서 사회적 모멸이며 사회적 사실로서 개인과 집단을 감금하는 악으로 작동하는 수치심의 유형을 탐사한다. 그리고 그 수치심을 도치, 전복, 파괴, 정화함으로써 윤리적 힘, 혁명적 힘의 동력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처럼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여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가하면 국제외교무대에서 이것들의 천박함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 수치심을 이중으로 겪어야하는 고통까지 안긴다. 이것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할뿐더러 그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것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수치심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수치심은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기 이전의 것과 그 성분이나 형식이 다르다. 개인과 가족,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상처입고 훼손되는 명예의 실추에 따르는 전통적 수치심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16세기 데카르트는 수치심은 자기애에 토대를 둔 슬픔으로 비난받으리라는 생각에서 온다.”정념론에 썼다. 자본주의 발흥과 시기를 함께하며 수치심은 이렇게 소심한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그 개념이 축소되어, 죄의 문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수치심에 내재되어있던 정의가 몰수되고, 개인화되었으며, 자본주의 상품화논리에 수치심 본질의 한 축이었던 가족적 윤리를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 곱세크의 주인공인 고리대금업자 곱세크 집 문턱을 넘으려면 읽게 되는 문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 들어서는 그대, 모든 수치심을 버려라!”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현대성은 명예없는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의 이등항해사 로드 짐이 자신의 이미지와 이름의 손상이라는 수치심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홀로 재판정에 서 죽음을 수용하는 이야기 속 명예있는 존재로서의 수치심과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공공법률+상거래+개인적 자유의 역할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이다. 영리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심리적 얼굴로 수치심의 얼굴이 바뀌었다. 명예는 변모하여 체면과 정상성(正常性)’, 표준이라는 미묘한 사회적 행동모델로 변했다. 명예없는 현대세계에 정상성이라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새로운 명예가 된 것이다.

 

정상성이란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괴물같은 언어다. 오늘 이 정상성의 기준지표는 지극히 단순화되어 돈과 안락함이 지배한다. 비정상성의 기호는 가난이라는 추상적 판단에 의해 사회적 멸시가 되었다. , 말하고 먹고, 걷는 방식, 이빨 빠진 사람들, 작고 어둡고 계급없는 사람은 정상성을 구분하는 기호이다. 타인들의 말과 눈길 속에 작동하는 비교, 우리를 억압하는 멸시는 이렇게 출현한다. 오염, 얼룩, 불투명성이고 들러붙은 끈끈한 부정성, 내밀한 감정으로 축소되지 않는 실체, 자신의 좌표에 대한 수치심, 문화적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수치심이 상징적으로 배제하는 폭력으로, 수모와 수치의 반복된 경험으로서 작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사회철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나로서는 사회적 수치심보다 성적 수치심에 대해 쓴 것이 한결 쉬웠다.”, 세계의 분리와 경계, 문턱과 문을 발견하게 하여 자리의 박탈을 의미하는 사회적 출신이라는 멸시 기호의 끔찍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난은 선험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 될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는 몇 십 년(40여년)에 걸쳐 가난을 패배로, 개인의 실패(의지결핍, 게으름, 비겁함 etc.)라고 윤리적 얼굴이라 내면화시키는 학습화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가난의 수치라는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가 인간 행복의 열쇠를 엄청난 소득에 두고 그것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세상은 당연히 이런 것이라고,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고, 사욕의 뿌리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빅토르 위고는  잠에서 깨시오, 수치심은 이제 그만!”라고 1850년에 이미 자본주의 물질성에서 깨어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정치적 분노를 할 줄 모르는 나태한 상상력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유명한 글이 있다. 카뮈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에는 작가의 분신인 어린 자크의 분노하는 수치심이 있다.  내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건 어머니가 멸시당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용감하게 쉬지도 않고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데, 그러자 곧 나의 수치심에 대해 수치심이 든다.”,  수치심을 느끼는 자체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불공정한 가치 체계를 그렇게 쉽게 지지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서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멸시와 고결한 분노의 두 가지 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복할 수 없는 혐오로서 우울의 수치심이 있다. 졸라의 목로주점에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자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수치심에 잠겨 거리에 자신의 매력을 팔기위해 서있는 제르베즈의 마지막 쇠락 장면이 있다.  끈끈하게 들러붙는 지상 조건의 낙인인 몸 자체에 대한 수치심이다. 수치심에는 세 가지 큰 영역이 있다. 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 몸은 영혼에 수치심을 안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가 감수해야하는 타인의 무심한 눈길로부터의 외면, 무리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질적 두려움의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고통. 비곗덩어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인 소위 사회적 품위를 지녔다는 인간들의 품위가 얼마나 비겁하게 주어지는 지를, 타자의 사회적 멸시를 통한 배척을 토대로 구축되는 그 더러운 품위를 소설은 말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라!”, 원통함과 엄청난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이렇게 수치심에는 혁명의 씨앗이 움튼다.

 

사회적 모멸은 사회적 사실로서 외상성 수치심이라는 깊은 상처를 개인들에게, 집단에게 각인시키기도 하는데, 강간, 근친상간과 같은 윤곽도 분명한 오욕적 장면의 기억이 지닌 치명적 수치심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 권위주의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축된 합의 결과로 생겨난 이 수치심은 수줍음의 도덕적 가설을 여성성의 특징으로 내세움으로써 희생자를 겨냥한 가해자들의 폭력성을 가라앉히는데 주력한다. 더는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업자득이지 않습니까?”와 같은 악의적이고 비뚤어진 희생자 여성을 향한 심문은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원했다는 의미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강간 희생자에 대한 가해자 중심의 공적 판단 논리는 권위적 국가를 마주한 시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해진다.

 


2009년 용산 재개발을 강행하려는 상가철거에 맞선 상인 6명을 죽음으로 몰고 23명을 중경상에 빠뜨린 당시 폭력사태를 지휘하던 서울시장(오세훈)과 서울경찰청장(김석기)은 시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자업자득의 논리, 저항의 극렬함만을 강조하고 시민 안전, 인권 보호와 같은 자신들의 책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간이건 국가폭력이건 다들 가해자는 항시 희생자가 순수한 희생자가 아님을 입증하려 든다. 저항을 진정으로 입증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는 이 구토나는 혐오스러움이 이 사회를 짙게 덮고 있다.

 

저자는 사회적 모멸과 사회적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설명하며 영원한 굴종자의 역할을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불의한 이 세계의 체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폭력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내모는 체제는 폭력 자체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타자들의 소유를 점유하면서 커지는 이 부당한 점유가 발가벗은 힘’, 타자들을 장악하고 함부로 하려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발가벗은 힘의 상징적 제도화임을 입증한다. 강간, 학대, 근친상간 폭력에 대한 사법과 공권력의 시선은 이 세계의 추잡한 정치 체계를 요약한다.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체계, 이 역전된 수치심을 가해자의 진영으로 전환시켜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정의 아닌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계가 수치심에서 정의를 제거해버렸지만 우리는 이를 회복시켜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익숙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남편 콜라티누스의 동료인 에투루리아의 왕자 타르퀴니우스에게 강간당한 루크레티아의 자결 신화는 정치적 성적 토대를 제시한다. 동침을 거절하는 루크레티아를 그녀의 노예와 동침한 부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겠다는 협박에 그녀는 자포자기한다. 루크레티아는 이 수치를 남편에게 알리고 자살하는데 그녀의 시신을 마주한 로마인들의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로마 공화국 수립을 초래한다. 이 신화의 정치적 의미는 보완성의 약속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 수치심에는 교묘한 이중의 얼굴이 숨어있다. 여성의 다소곳함, 여성의 정절을 찬양하는 불순한 젠더화가 있으며, 사회적 사실로서의 폭력에 대한 수치심, 윤리적 수치심이라는 두 얼굴이다. 공화국이란 이처럼 남성과 여성을 고정된 자리와 보완적 의무를 맡김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이다. 공화국을 보장하기 위하 라틴식 질문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충실한가? 여성의 성생활이 남편의 정치적 완성을 보장한다. 남성에게는 정의를, 여성에게는 수치심을 안겨라.”, 이 세계를 지탱하는 정치쳬라는 것의 불온성과 불모성을 엿보게 하는, 오늘에도 무심히 읽히는 신화다. 우리들은 무의식중에 이러한 태도를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이 불온성과 불모성의 실체인 파렴치함이란 조심성의 부재로 알아본다고 한다. 반면에 수치심은 어떤 일을 행하기에 앞서 그 도덕적 성질에 따라 정지시키고 한계 짓는 능력이다. 다시말해 파렴치는 수치심의 부재라는 의미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는 이처럼 악을, 불의를, 멈출 수 있는 생각으로서 윤리적 수치심을 뜻하는 아이도스(Aidos)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수치심을 영혼의 독으로, 중대한 장애물로, 행복을 가로막는 최악의 적으로 규탄한다.” 그렇기에 수치심을 윤리의 기둥을 표상하는 정서로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향연에서 언급하듯 수치심은 선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허영심, 착각, 말과 행동사이의 괴리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으로 본성을 과장으로 왜곡되지 않게 막는 하나의 원칙이기도 하다. “만약 ...라면 난 너무 수치스러울거야라는 우리네 일상 속 문장처럼 윤리적 수치심은 상상력으로 지지되는 생각의 경험을 먹고 자라는 자가-정서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철학이란 바로 앎에 대한 오만, 사회적 안락에 대한 확신을 모욕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들에게 수치심을 지속적으로 안겨 영혼을 발가벗기고 관통하며 박탈하고 화나게 노출시킨다. 그럼으로써 억견(臆見) 직전에 어리석음과 영적 저속성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무지보다 훨씬 위험하고 해로운 것은 바로 안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안다고 믿고서 타인들에게 그 알량한 지식을 강요하길 즐기고 뻐기면서 경멸의 이유를 찾는 악의 평범성이기도 하다.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망, 철학은 이러한 진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소크라테스가 왜 아테네에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상기해보라. 대중 앞에서 영혼이 발가벗겨진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 거만한 법관들, 건방진 예술가들은 드러난 천박성으로 인한 자신들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불의한 힘에 의해 죽어야만 했음을 오늘 우리들에게 상기토록 한다. 지금 벌어지는 70~80년대 이 땅에 민주주의 토대를 만들어낸 민주투사들을 폄훼, 평가절하하려 총공세를 가하는 기득권의 추한 토끼몰이식 저열함을 보라,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에 부하뇌동하는 우매한 대중들을 보라.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혐오논리의 복귀, 폭력의 두려운 반복을 예방해준다. 고통을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기만적 무구(無垢)함이 죄를 구성한다. 무구함의 반대말이 죄의식이 아니라 통찰력인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 불의와 불공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주의깊게 바라본다. 계통적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류로서 공감할 줄 아는 자의 수치심,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이르는 말이다.

 

계통적 사회 멸시, 계통적 권위주의, 계통적 (인종) 차별주의, 계통적 가부장주의, 큰 행운을 누렸음을 인정하는 진지한 목소리, 객관적 지배자의 수치심이다. 우리는 모두 권리 승계자로서 태어난 마땅히 치러야 할 수치심을 지녀야 한다. 인간이라는 수치심은 밑바닥에 떨어진 인류를 마주하고 보이는 일종의 저항이고 넌덜머리 난 초탈이며, 다른 되기에 휩쓸리려는 욕망이라 한다. M.쿠체는 추락에서 백인으로 고통스러운 상속자의 수치심을 말한다. 아파르헤이트로 유색인종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한 모멸과 가학의 가해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주인공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계통적 수치심이요, 윤리적 수치심이다.

 

이제 우리는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어내야 한다. 수치심이 피해자, 희생자의 몫이 아니라 바로 가해자의 것이 되어야 함을. 로스탕의 극작품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의 코가 기형적으로 커 조롱의 대상이 된 주인공이나, 장 주네의 소설 도둑 일기에서 감화원의 그 극한의 치욕의 현장에서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고, 치욕의 장소를 점유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입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치심은 반전 시킬 수 있으며, 그 속성은 이미 도치와 투사, 전복, 정화를 통해 변화시키는 에너지, 실존의 연료로 삼을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수치심은 윤리의 기둥이며, 연대의 표식기다. 세상의 어리석음, 운 좋은 자들의 잔인한 악의에 대한 분노이자 증오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은밀한 분노이기에, 또한 부당한 멸시에 대한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이며, 정의에 대한 부정을 강요하는 멸시에 대한 분노, 이 구속에 맞서는 생명의 힘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치심은 혁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사회체제와 대중문화가 비록 우리들의 상상력을 좌절시키도록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자리에 서보거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기도 하다.

 

책은 이처럼 수치심 작동의 메커니즘에서부터 수치심의 다양한 형태들, 야기된 수치심들이 개인과 집단에게 기대하는 불온한 효과들, 그리고 사회적 모멸과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비처럼 쏟아부어 무시의 눈길이 축적되고 딱딱한 껍질이 되어 영혼을 옥죄어 인간을 수동화시키는 광범위한 악의 파렴치가 점령한 세계의 현상을 마주하게도 한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처럼 오늘 우리들은 산다는 수치심을 살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성이나 계층과 인종적 차별이라는 상투성의 항구적 재()할당으로 벗을 수 없는 공식 속에 인간을 가두려는 본질주의가 판을 치고, 작은 차이나 격차를 포착하여 배척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낙인찍기가 이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다.

 

우리들은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의 관계의 투명성에 빼내져 힘과 특권을 누리는 타인들의 광기 속에 구속되기 일쑤인 세상에 살고 있다. 정말 불온한 세계이다. 아마 이 화려하고 박학한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진심과 노고를 절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고 철학과 신화, 문학(소설,희극,)작품들의 이야기를 예시하며 수치심의 잎맥을 재구성하여 그 구체적 메커니즘을 신랄하고 극적이고 섬세하며 진지하게 다루어 내고 있는 명 저술이다. 책을 읽고나면 수치심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주된 정서임을 숙지하게 되고, 한편으론 새로운 삶의 세계를 향한 투쟁의 기표임을 발견하게 된다. 갈수록 무례함과 무람없음이 늘어만 가는 이 세계가 너무 불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세상에 대해 수치심을 품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인이 모욕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우리들은 함께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정치 사회는 급격하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이 장악한 세계에 체념해서는 안 된다.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라 프리모 레비가 말했다. 이 책은 이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수치심의 정체를 거의 완벽하다시피 할 정도로 파헤쳐내고 있다. 이제 이것을 가공, 구상, 다듬어서 순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우리들의 태도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발가벗는 순간을 안간힘을 다하여 모면하려는 마음 속 두려움은 윤리적이고 혁명적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악한 폭력의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후자가 난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전자로 전환할 수 있다. ~, 이 저술은 수치심이라는 정서에 대한 고전적 지위의 명저로 남을 것 같다. 아니 인간 세계에 오랫동안 읽힐 위대한 명저로 손색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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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 문학적 우정을 찾아서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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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통찰로서의 우정, 스승과 제자의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서의 우정, 그리고 교육적 우정, 학문적 성장의 동반자로서의 우정, 거절함으로써 주어지는 우정, 삶의 평화와 균형을 가져다주는 관계로서의 우정, 애정과 증오가 반복되는 삶의 동행자로서의 우정, 존경과 견고한 동맹자로서의 우정 등, 책은 이러한 특별한 우정의 주체들인 여자들의 삶의 관계를 문학적 글쓰기에 실어 삶을 견고하게, 때로는 위안과 생의 의욕을 고취하는 근원으로서의 동력을 탐색 발굴해내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며 그네들의 삶의 지탱과 그 투영으로서의 성취들인 사상과 예술, 혹은 문화사적 하나의 중추적 뿌리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아울러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우정의 관계를 통해 30여 인물이 발굴된다. 메리 매카시와 한나 아렌트, 다이앤 아버스와 리젯 모델, 미시아 세르와 코코 샤넬, 루스 베네딕트와 마거릿 미드, 캐서린 매콜리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시몬 베유와 시몬 드 보부아르, 에설 스미스와 버지니아 울프에 이르기까지 우정을 거절할 때 우정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시몬 베유의 말처럼 우정은 철저하게 행하는 것임을 또한 확인하게도 된다.

 

행동하는 실천가인 시몬 베유와 사유하는 이론가인 보부아르의 냉랭한 만남의 일화는 아주 강렬한 장면으로 인상에 새겨지는데, 1920년대 후반 이미 유명인사에 가까웠던 베유와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 보부아르는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인데, 베유의 행동 요구에 보부아르는 실존적 의미부여를 위한 이론적 사유의 중요성을 말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베유는 싸늘한 표정으로  보아하니 굶어 본적이 없었군요.”라는 날카로운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이후 보부아르는 시몬 베유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후일 보부아르는 이 차가운 거절로부터 진정한 우정을 받을 자격이 주어짐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우정이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하는 것임을. 보부아르가 후일 동료 인간들에 대해 실천한 반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배려와 후원의 행위로 실행 된 것은 우정을 한 차원 다른 지대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여성 참정 운동권자이자 음악 작곡가인 피아니스트 에설 스미스라는 칠순를 넘긴 선배 예술가를 향한 존경심으로 비롯된 마흔여덟 살 버지니아 울프 우정의 시작은 견고한 기성질서에 대한 거친 저항자로서의 모습, ‘암석 폭파자에 대한 경외심이었던 것 같다. 이에 화답하며, 울프의 작품들을 자기 생의 위기를 위무하고 돌파하는 것으로 삼으며,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글을 통한 교감으로서의 우정을 또한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내가 화답하고 싶은 저자를 꼽아본다.

 

사실 가장 인상 깊은 우정의 이야기는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라헬 파른하겐과 한나 아렌트의 우정이다. 도덕적 열정을 환기시키며 인류의 스승 역할을 수행했던 위엄 넘치는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친구 안네 멘델스존이 적극 추천한 파른하겐 전집을 읽으면서 그 독창적이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지성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 독특한 유형의 우정이다. 아렌트는 우정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우정은 상대방의 의견에 내재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 수준의 정치적 통찰이다.”라고. 때문에 책을 통해 세계를 읽는다는 믿음은 세계를 독서 가능성의 대상으로 두는 것과 같다는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진단처럼, 아렌트는 100년 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성찰했던 파른하겐과의 지속적 논쟁의 대상으로 함께한다. 아마 파른하겐은 아렌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 정직한 우정의 상대자였을 것이다.

 


아렌트의 우정은 공동의 세계에서 동등한 파트너가 되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가 나치를 피해 미국 망명자가 되어 살아가야 했을 때 후일 우정의 정당’, ‘2인 정당으로 불리는 파트너로서 1970년 이후 아렌트의 보호자가 되었던 소설가 메리 매카시와의 정직한 우정은 정말 진하게 마음을 울린다. 아렌트가 1975년 친구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다가 돌연 사망하게 됨으로써 집필 중이던 미완에 그친 정신의 삶3년에 걸쳐 세심하게 편집하여 완성시켜 출간하는 매카시의 우정은 한 위대한 지성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이었던 것 같다. 콧날이 시큰해진다.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의 학문적 무교감의 천박성으로 잠식된 오늘의 한국 대학의 현실을 생각게 하는 사진 예술가 다이앤 아버스와 스승인 리제 모델의 사제 관계에 형성된 우정은 존경할 만한 스승과 제자 관계의 고결한 모델로 읽힌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제자는 깨치고 성장한다. 뛰어난 제자를 둔 스승은 환호하며 공부한다.”는 교학상장으로서 우정, 끝까지 듣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응원하고 지지하며 함께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우정, 우리네 학문의 장에 진정 요구되는 인간관계일 것이다. 다이앤 아버스와 리젯 모델의 사진 작품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특권을 누린다는 기분을 없애고, 편안히 지낸다는 것에 불만을 떠뜨리고 싶은 욕망을 지녔던 다이앤 아버스의 작품들은 지금의 내게 무언가 중대한 메시지를 전해 줄 것만 같다.

 

샤넬은 미시아의 임종을 지켰다.”는 미시아 세르와 코코 샤넬의 우정 이야기는 이미 예술계 왕족이나 다름없었던 문화적 자산으로 풍부했던 예술가가 뿌리를 알 수 없는 옷 재봉으로 돈을 거머쥔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문화적 자산과 인맥을 남김없이 베풀어주고, 한 세기의 모더니스트 예술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변화에 필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지 그 신비로움에 코를 빠뜨리고 읽었던 글 중 하나이다. 사실 독일점령기간 중 샤넬의 독일 부역 행위는 민족 배신행위로서 극형에 처벌되어야 했을 것이지만 윈스턴 처칠과의 인연으로 스위스 망명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재빠른 감각적 이해를 지닌 이 패션 상인은 소위 지식이라는 구역질나는 단어를 쓴 프랑스 인사들의 우상화 결과인 것이 아닐까? 롤랑 바르트의 샤넬은 옷감과 형태와 색깔로 고전을 쓴다.”, 문학사에 기입해야하는 인물이라는 주장이 왜 내 낯을 뜨겁게 하는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재산권 보장, 여성의 이혼 청구권 인정을 비롯한 인권신장을 위한 여성 운동가로서의 삶과 여성이 저자가 되고 전업 작가가 되는 미래를 상상했던, 생각할 줄 아는 여성이 지닌 사고력을 드러내는 작품의 저자로서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우정의 근대적 원천을 보게 된다. 훗날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되는 메리 셸리를 둘 째 딸로 낳게 되기까지의 여성의 고난과 삶의 곡절들이 여권 신장의 투사로서의 삶과 병행하며 한 여인의 삶을 주목하게 한다. 치열하게 읽고 쓰면서 특별한 우정을 일궈낸 여성들의 문학적 향기 그득한 이야기가 전하는 고결하고 신성한 삶의 역사에 한동안 취하다보면 파리의 영문학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실비아 비치의 서점 개업과 운영의 일화에 이른다.

 

책이 있는 곳에 피어나는 우정”, 말만으로도 기분 좋은 구절이다. 20세기 사상과 예술의 굵직한 한 축을 점유하는 여자들의 특별한 우정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아한 20세기 문화사로 읽어도 될 것 같다. 사진, 미술, 음악예술은 물론 문학, 철학, 인류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주의 여성 참여의 고된 운동사이기도 하며, 현재 진행형인 그 성취사이기도 하다. 오늘의 여성들에게 어떤 창발의 불씨가 되어줄 책이기도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우정의 기반이 되었던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 울프나, 삶의 공허로부터 안정감을 지탱하게 해주었던 아렌트의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가 있었듯 남성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예술적 영감과 함께 파트너로서 여성에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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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의 오리무중 트리플 23
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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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세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정형화된 형식(포맷)을 지닌 소설집이다. 아마 박지영 작가의 이번 작품집은 이 일정한 형식성에 소설의 내용이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수록된 소설들이 바로 인간 조건, 다시 말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토대, 내면화된 삶의 형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양식 그 자체이기에 당연시하고 의문시 되지 않는 인식들 말이다. 임시직, 계약직, 단기직, 영업직 그 무엇으로 불리든 극도로 불안한 고용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이 사회의 계급적 안전 담보물처럼 보전시키면서 멸시와 깔봄,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며 우월감과 존재감을 지탱하는 양상 말이다. 우리들이 내면화시킨 불공정의 공정성에 대해서.

 

우리들 삶의 태도에는 너무도 무심히 이러한 터무니없는 환상이 깊숙이 체화되어있다. 이런 사회, 정상이란 것이 존재해서 그 정상을 향한 열망같은 것이 조성되면 그 사회가 병들고 있는 것이라고 프랑스의 행동하는 철학자 시몬 베이유는 그의 책 뿌리 내림에 썼다. 사회적 굴종이 이미 위험한 정도에 이르렀음의 지표라는 것이다. 단편 올드 레이디 버드에 등장하는 박물관 계약직 사원 영우란 인물은 이러한 계층적 경계가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어 학예사 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정상성을 갈망하고 신비화하기까지 한다. 그의 언행은 정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심초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의 무심한 일상적 행위조차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반응으로 여긴다.

 

그런가하면 표제작인 테레사의 오리무중바른 먹거리 센터에서 포장 일을 하는 단기직 노동자 테레사는 작업반 임시직에서 어부지리로 중간관리자가 된 주경으로부터 여사님은, 마스크를 쓰시는 게 좋겠어요라며 모든 작업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음에도 당신은 드러난 자아를 감추지 못하니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감추라고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맹목적 차별과 지배 의식 때문이다. 하라면 좀, 그냥 하라는 대로 하세요함부로 하대해도 될 존재가 항상 거기에 있다는 듯이, 지배에 통제되는 것이 당연한 존재란 듯이, 당신과 같은 부류들은 얼굴에 마음을 드러내는 표정을 가려야만 된다고, 절대 태도란 것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그게 사회생활의 정상성이라고 암묵적 압박을 가한다.

 

테레사는 이러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그래서 손상되는 자존감, 모멸감으로 부르르 떠는 자아를 분리하여 집에 두고 출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일터에 나온 테레사에게는 자아가 없다. 자아가 없는 존재니 내면이 표정에 드러나는 법이 없고 마스크를 벗어도 더 이상 무어라는 시비가 없어진다. 제목에 있는 오리무중은 이 분리된 자아, 특히 아홉 번째, 아니 일곱 번째로 밝혀지지만 그 자아의 행방이 묘연해졌음을 뜻한다. 사라진 테레사의 자아인 성 테레사의 행방을 주경과 함께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떠도는 영혼들의 외로움과 불온하게 변질된 위계의 심리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단편 올드 레이디 버드는 고양이 양육 집단이 하나의 신분과 계층적 상징물로 등장하는데, 계약직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영우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의 귀여움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악의 문제였다.”, 그가 떠돌았던 직장들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양이의 귀여움을 입이 닳도록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그런 세계에서 영우는 자신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동조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 귀여움에 섞여들지 않는다면 곧 이질적 존재, 외부자로 배제되는, 즉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는 통제에 대한 욕구”, “안전에 대한 감각이라는 문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현대적 삶의 형식에 내재된 타자를 향한 환상 소유라는 지배 감각의 전형적 양식들이기에 아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굴절된 사물화와 소유 의식이 일상적으로 점유된 양상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한편 박물관의 학예사인 이란 인물은 계약직인 영우에게 솔직하고 소소하게 직원들의 험담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정에게 동일한 형태의 말을 할 수 없다. 정이 자신의 취약성을 영우에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강자였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허락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을 영우가 발설하는 순간 외면당하고 만다. 하나의 단편적 장면인데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화가 있다. 영우가 박물관 경비인 염씨가 건네주는 박카스를 받아 마신 것에 대해 정은 염의 친절이 지나치고, 그 음료에 무엇이 들었는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경비라는 직업의 인물에 대한 혐오와 불신의 신호를 보내며 은근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때 영우는 자신의 표정에 신경쓰며 무언의 공감을 소극적으로 표시하고 만다. 자기 표정에 신경을 쓴 것은 염의 친절에 대해 정의 말처럼 경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수동적인 공감을 표시하는 것은 상급자인 정의 견해에 대해 계약직으로서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계약이 만료되고 퇴직 인사를 위해 정을 찾아 간 날, 정은 연차로 출근하지 않아 텅 빈 책상에 먹지 않고 버려지듯 쌓인 음료병들을 보게 된다. 염이 주었으나 마시지 않고 방치된 것들이다, 염의 앞에서는 차별없음과 친절을 가장하지만 정은 의심스럽고 변변찮은 불쾌한 사물로 취급하는 것이다. 영우가 이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정이 치어죽인 박물관 영내 삼색고양이 사건과 관련하여 계층 경계에 선 그의 열망이 고양이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양상은 지독하게 내면화된 예속의 성질을 생각게 한다.

 


고양이는 장례 세일에 앞선 두 편의 작품 모두에 등장하는 주경이란 인물과 함께 다시 등장하는데, 생각해 본적 없는 선의(善意)”의 매개체인 불공정한 선의로 작중 인물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듯하다. 내겐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세 편의 작품 모두 검정색 해학이 문장들에 스며있어 뒤틀린 가벼움으로 절로 비판적 목소리가 울려퍼지게 하지만, 단연 유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유혹이었다고 할까? 죽음을 앞에 두고 벌이는 오락성의 발칙함, 그 무례함 뒤에서 울먹이는 존재를 보았기에 죽음의 상업적 놀음에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을 인식의 무능력 지대와 직면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조금은 못되고 무례한 언어로 시작한다. 아버지 독고씨의 묘비명으로 토사구팽(兔死狗烹)’을 생각하는 병원 장례식장 3교대 계약직 경비원인 현수란 인물이 직면한 삶의 실상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정서적 무능력을 실감하게 된다. 토사구팽이란 필요할 때면 쓰이고 쓸모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버려진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우리들에 내면화된 삶의 형식인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표현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토사구팽은 은유가 아니라 독고씨와 현수의 삶속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한데, 토끼를 산 채로 잡아 영업사원인 아버지 독고씨가 회사 상사들과 함께 집에 돌아 온 날의 기억이다. 굽실거리며 산 토끼를 잡아 탕으로 끓여 술안주로 내오고 순종적인 아버지를 닮으라는 어린 현수에게 주절거리는 회사 상사의 무례한 언어는 독고씨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수가 토사구팽을 떠올린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독고씨의 묘비명이 그래도 싼것이기에 불공정하지만 일견 정당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독고씨의 죽음 값이 그래도 싼 것인지, 아니면 불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고뇌가 소설의 한 줄기이고, 한 생명의 가치를 가늠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가치를 가늠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이기라도 하다는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사유가 또 하나의 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례 세일이 제목이 되었을까? 현수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으며, 직원에게 할인혜택을 주는 장례비용 30퍼센트 할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 독고씨는 의식이란 이미 사라진 채 연명줄로 버티며 요양병원에서 죽을 시점만이 남아있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죽음 역시 타이밍이 중요했다. 존엄사라는 건 그런 거였다.” -143

 

가진 것 없는 현수나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 없는, 의식없이 누워있는 독고씨의 보잘 것 없는 생은 독고씨의 죽음에 드는 비용으로 고민하는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지극히 죽음의 타이밍이 중요한 사안이다. 현수는 텅 빈 장례식장의 그 공허를 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독고씨의 죽음 비용은 현수가 고려중인 그래도 싼수준조차도 언감생심이거나 지나치게 고평가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식인 자신조차 싼 인생으로 취급받는 것은 피해야하지 않겠나? 그래서 흥행계획을 진행시킨다. 흥행성을 결정할 오락적 면을 효과적으로 부과하기 위한 일명 마감 임박 세일을 위한 기본 포맷을 수립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해서 세상에 이런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의 감사함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자식을 통해 꼭 전하고 싶어 한 삶이란..”라고 자신이 감사한 사랑이었음을 일깨우는 감사 편지를 독고씨가 스쳐지나간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것이다. 감사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현수에게 독고씨가 운명하면 꼭 상()에 불러달라고 회신한다. 흥행계획은 일단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 같다. 그런데 독고씨가 숨 쉬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살아서도 맞추지 못했던 타이밍을 죽을 때조차 맞추지 못한다. 계약기간이 끝나서 더는 직원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죽는다. 이제 관계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에게 누가 조문을 오겠는가? 아무리 플러스를 만들려고 해봐도 어떨 수 없는 마이너스 인생이었던 독고씨는 할인된 죽음, 세일 된 맨의 죽음을 완료한다. 이 풍자적 언어의 해학에도 불구하고 우울함이 이 뒤틀린 언어의 감각을 뒤덮는다. 세일 된 죽음! 그나마 현수의 흥행 작업이 소기의 성과를 낳아 조문객들이 들어차서 너도나도 고인이 자신들에게 사소한 행위에 감사했음을 자랑스레 떠들며 죽음을 품위있게 만들어 낸다.

 

소설의 후반부는 싼 인생을, 마이너스 인생을 살다간 아버지 독고씨의 장례를 품위있고 고결하게, 그리고 가성비에 맞추어 치러냈으나 공정하지 못했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고 장례비용과 화장비용, 장지비용, (,..) 조의금의 최종 액수 따위를 계산해보는 자신 또한 그래도 싼 인생을 벗어날 수 없음에 사로잡힌다. 사실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위풍당당한 죽음과 의기소침한 죽음이란 이 대비의 말이 얼마나 천박한 말인가. 그렇다고 애도에 가성비를 따져야 하는 세상도 우리들이 오늘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당연시하고 있는지 일깨운다.

 

우리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삶의 형식이 된 내면화된 믿음들,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들인가? 등급을 나누고, 차별하고, 굴종을 강요하고, 모욕으로 외로움과 고립으로 몰아넣고, 어쩔 수 없음의 윤리와 신념로 침윤(浸潤)되게 하는 세상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인간 존엄과 공정성, 삶의 형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다. 엄숙한,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사유케 하는 이야기가 지극히 경쾌하고 재미있는 서사로 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그러면서 재미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들의 무능력지대를 지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촘촘히 게으른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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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인상 깊은 하나를 말하지 못한 것 같다. 세 편의 소설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책을 읽는다. 자신이 접하고 있는 당면 현안을 돌파하기 위한 소소한 책들을, 물론 작가가 읽었던 책들일 것이다. 그 책들을 찾아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록된 에세이는 각 작품들의 장면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씌어 있다. 작가가 의도했던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줄 텍스트로 읽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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