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맨 부커상'(50th, The Golden Man Booker Prize)공개투표에 즈음해서

 

 

2018년 올해는 맨부커상 50주년 기념의 해로서 '황금 맨부커상(The Golden Man Booker Prize)'을 시상한다고 발표되었다.  526일 심사위원단은 지난 50년 동안의 수상 작품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매 10년 기간 중 최고의 한 작품을 선정한 다섯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선정된 다섯 작품은 조지 손더스의 Lincoln in the Bardo와 힐러리 맨틀의 Wolf Hall, V. S. 나이폴의 In a Free State, 페넬로페 라이블리의 Moon Tiger, 마이클 온다체의 The English Patient로 몇몇 작품은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으나 현재는 품절, 절판 된 상태이며, 마이클 온다체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만 유일하게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다섯 작품 중 최종 수상작은 맨부커상 재단 홈페이지인   http://themanbookerprize.com/vote  에서 공개 투표를 통해 선정된다. 공개투표는 누구나 해당 사이트에서 투표할 수 있다. 투표 기간은 526일부터 625일까지(Saturday 26 May to Monday 25 June)로 되어있으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직접 참가해서 수상작 선정에 일조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수상작은 오는 78,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발표될 예정인데, 76일에서 8일까지 맨부커 재단은 50주년 기념의 국제적이고 대대적인 페스티발을 17에이커의 규모에서 화려하게 펼쳐질 것이라 예고하고 있다. 국제 도서 페스티발의 성격을 가지고, 수상 후보 작가들의 인터뷰는 물론 토론회, 영화 상영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도 이들 작가와 작품들이 다시금 독자들의 시선을 받을 것 같다. 어느 작품이 수상작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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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6-1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부커 상 받은 작품은 아마 9월 안으로 출간되지 않겠어요? 전 잉글리시 페이션트밖에 모르겠어요^^;;

필리아 2018-06-14 10:19   좋아요 0 | URL
50년에 한 번 나오는 상(Prize)이니 만큼 대대적인 홍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황금‘이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힐러리 맨틀‘에게 한 표...
 

   

"많은 소설의 경우, 육체에 도달하려는 의도는 성공, 혹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성취, 혹은 환멸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중심 플롯이 된다.

이것은 바로 인생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는 욕망의 구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 피터 브룩스, 육체와 예술(2013, 문학과지성사) 에서

 

 

소설 작품을 읽을 때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가 어떤 이면의 이야기, 즉 표면이 품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독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홀로 내밀히 맛보는 즐거움, 뭔가 은밀한 것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달성하려 했던 앎의 욕망의 성취. 그럼에도 이 욕구는 만족할지 모르고 다른 소설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는 앎의 세계,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 소유에의 충동, 그 본질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파우스트적 시도를 지속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에로틱(Erotic)'이란 말과 유별나게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육체를 욕망의 주체 및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 욕망과 관련하여 의미를 띠게 되는 육체에 대한 고찰, 그 본질인 성적이며 호기심 가득한 지식욕이 얼마나 육체적인 것인지 말이다.

 

롤랑 바르트상징적인 장()은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 ....다름아닌 인간의 육체다.”라고 썼다. 또한 테리 이글턴육체는 정신의 전제 조건이며, 형이상학적 탐색이 궁극적으로 회귀하는 실체라고 했으며, ‘피터 브룩스육체는 의미생성의 장소이며, 이야기가 각인되는 장소가 되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 서술적 플롯과 의미산출의 일차적 요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즉 육체는 모든 상징의 근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종착점이란 뜻으로 읽힌다. 결국 인간의 지식애적 욕구란 육체를 알기 위해,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 서술되는 이야기들의 알레고리, 바로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1. 지식애() = 내밀한 삶으로서의 육체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에는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듯 장 자크 루소고백록에 대한 문학사적 성격의 설명이 있는데 꽤나 흥미롭다. 고백록1권 첫 머리에 소개되는 자기 육체에 대한 고백인데, 열한 살 시절 자신의 교육을 담당하던 랑베르시 양이 벌로써 그의 엉덩이를 때린 사건이다. 그때 루소는 고통 중에, 심지어는 수치감 속에서도 일종의 관능적 쾌락을 느꼈으며 .... 두려움 보다는 차라리 욕망을 느꼈다.”는 고백이다. 이때부터 그의 육체에 에로틱한 기표가 새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진술한다. 그 벌이 나의 전 생애에 걸쳐 내 취향과 욕망과 열정,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결국 그의 생의 이야기는 초기에 그의 육체에 새겨진 자국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에 새겨진 자국이라는 알레고리는 신 엘로이즈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알레고리로 꾸준히 등장한다고 한다. 이 자국은 욕망의 자국이 새겨진 육체다. 재현되지 못하던 육체가 자국을 통해서 언어의 영역, 글쓰기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브룩스는 주장한다. “글쓰기는 욕망과 그 대상의 재현 관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고백록은 인간 삶의 모든 문제는 육체가 자리 잡은 곳과 그 의미로 귀결된다는 점을 간파한,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에 주목하고, 육체는 육체 이외의 장소에서 생성되지 못하는 의미 생성의 장소로서 파악한 인간 의식의 역사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저작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고려가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되는 서사물들이 육체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야릇한 즐거움을 준다. 책을 읽는 것,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르는 길을 열어주는 여정이 마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다른 표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2. 글쓰기 작업: 치명적 죄의 극복

 

육체에 글을 쓰는 문제의 이야기로서 1916년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유형지에서는 문자 그대로 육체가 글을 새기는 공간이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한다. 루소의 작품이 가부장적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것이었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육체에 메시지를 쓰려는 것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반()육체적이고, 남성적 시선의 전복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상관에 복종하지 않은 한 군인의 처형에 초대된 탐험가의 이야기다. 아마 이야기의 핵심은 일벌백계의 관습을 항구적으로 존속시키려는 사형 집행기계에 관한 설명일 것이다. 기계가 작동되면 사형수의 몸에 내려진 선고의 문장(“상관들에게 경의를 표하라!”)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늘로 사형수의 몸에 12시간에 걸쳐 새겨지는 것이다. 탐험가는 사형 집행자인 장교에게 묻는다.

 

죄수가 자기 몸에 새겨지는 문장을 압니까?” , 장교의 대답은 그야말로 잔인한 무지로 가득 차 있다. “모릅니다. 죄수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죄수는 몸으로 그 문장을 배울 겁니다.” 즉 죄수의 몸에 법률을 새기는 벌이 죄수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기대하는 것으로, 장교는 부언한다.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얼마나 조용해졌습니까? 죄수의 눈 주위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죠.” 죄수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의미를 해독하는 데 여섯 시간이 필요하며, 그때 쯤 죄수는 피와 물이 흥건한 구덩이에 던져진다.

 

과연 죄수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에 대해 탐험가가 회의를 보이자, 장교는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기계에 정당해라!’라고 선고를 써 넣고 기계위에 서자 그 기계는 저절로 파괴되며 12시간이 아니라 바로 장교의 몸에 바늘이 꿰어지고 장교의 몸은 꼬챙이에 매달려 죽고 만다. 장교가 설명했듯이 새겨진 문자를 깨닫기는커녕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그저 죽었을 뿐이다. 결코 정당하라!’는 문장은 써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육체가 법과 의미를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는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작가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우화이리라.

 

즉 고통당하는 육체는 고문하는 권력을 만족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며, 도덕적 타락의 상징일 것이다. 단지 육체를 문화의 산물로 만들려는,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육체의 의미화에 대한 이런 냉혹하고 부정적인 시선처럼 아무런 깨달음도 주는 것이 없는 것일까?

 

육체에 대한 자국내기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일련의 욕망들이다.  그것이 긍정성을 지니든, 부정적이든. 권력이 개인의 육체를 좌우하려 하는 것이든, 연인의 육체에 다가가려는 것이든, 육체를 소유하거나 합일하려는 갈망의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타자를 알려는 충동이다. 비록 오늘의 세계가 육체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고 신비를 거의 벗겨내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체를 알지 못한다. 어찌 앎이 달성 될 수 있겠는가. 어찌 타자의 육체를 소유 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반복적으로 글쓰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탈육체화가 이루어지는 어느 날 의미를 상실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육체에 대한 욕망의 이야기는 인간의 앎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지속되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내 무의식의 유혹은 이렇듯 앎을 향한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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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선인장
싸하르 칼리파 지음, 송경숙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의 문학시장에서 아랍이나 아프리카, 동남아등지의 문학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런 기회의 결핍은 해당 지역의 국가와 국민들의 실상을 그네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타인의 시선 특히 서구와 이들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우월한 언어를 통해서 일방적이고 왜곡된 허상에 익숙하게 되어버려 소외된 이들과의 소통 자체를 어렵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국내에 소개된 팔레스타인 문학작품 중 처음 소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국내에 2005년도에 번역 출간되었으니 벌써 햇수로 14년이 되었. 팔레스타인 문학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잔인한 이스라엘(原題;The hidden history of Zionism), 쇼크 독트린(原題; The shock doctrine)이란 두 저술을 읽고 나서 취한 동작이고, 어렵사리 이 작품을 찾아내게 되었다.

 

작품의 서문에 소개되고 있듯이 작가싸하르 칼리파는  나는 여기 오늘의 이야기를 쓴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유태민족주의자들, 다시말해 시오니스트들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에 점령지로 변한 자신들의 땅 한가운데 유배 아닌 유배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들의 절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설의 배경 시간과 공간이 1967‘6일 전쟁에서 아랍 측의 패전으로 이스라엘 점령지가 된 1970년대 초의 요르단 강 서안(西岸) 나블루쓰 이지만 그 사정은 2018년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 정치주도 세력인 시오니스트들은 오늘도 공공연히 이런 선언을 한다.

 

우리는 갈릴리 지역의 아랍주민들을 제거하기 위해

테러와 암살, 협박, 토지강탈, 사회적 서비스의 중단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서 노예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 모두를 죽여야 한다.”

 

소설은 팔레스타인 상류층 가문인우싸마27세의 청년이 고향인 이스라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의 나블루쓰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국경검문소에서 이스라엘군이 이들에 가하는 비인간적이고 무참한 심문의 과정을 순화된 문학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적(史的)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그 끔직한 이스라엘군의 야비하고 잔인한 행태를 떠 올리는데 무리가 없다.

    

 [ 이스라엘 공군의 가자지구 폭격 : 이 사진에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자발적 공범자들'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

 

유전(油田)까지 갔다가 이리로 돌아온다? 여기가 뭐가 좋아서? 당신들은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어, 우리야 다르지, 이제 몇 해만 있으면 거기도 우리 땅이 될 것이고,..”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비아냥에서 핍박받는 그네들 고향의 현실을 이내 그려 낼 수 있다. 파괴된 가옥들, 타버린 나무들과 황량하게 드러난 대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만성적 실업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 배운 자들은 고향을 떠나고 힘없는 노동자들만 남아있는 곳, 요르단강 서안 나블루쓰!

 

작품은 이 지역 상류계층이었던알카미르가문의 장남 아딜그리고 동생바씰과 사촌인 우싸마’,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공장 노동자 동료인주흐디를 중심으로 그네들 내부의 갈등과 번뇌를 통해 오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과 분노, 증오를 이야기한다. 만성신장병을 앓는 아버지 알카미르를 포함한 9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딜은 적()인 이스라엘의 공장 노동이란 수단을 취하지만 귀향한 사촌 우싸마로부터 적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주구노릇을 한다는 지속되는 추궁을 받는다. 자신들의 땅을 등지고 떠나는 팔레스타인들은 그나마 외지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는 계층들이다. 이런 외부의 세력들이 고향을 지키며 이스라엘군의 감시 아래 고립과 억압된 세계에 놓인 자들의 무력함을 호통한다. 배고픔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지역으로 새벽부터 이동하는 그네들의 고통과 민족적 자존심을 버렸다는 힐난에는 중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점령! 그것은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다.

유배! 제 땅 한가운데서 우리는 유배를 당하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스라엘에 아니 유태인에게 작은 실수라도 하면 고문과 구속, 그리고 죽음만이 기다린다. 저항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인간이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거나 이미 죽었다. 온통 총부리가 겨누고 있는 지역에서 누가 더 이상 저항이란 언어를 뱉어낸다는 말인가? 나의 가족에게 누가 한 톨의 밀알을 주겠는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언젠가는 해방되리라 믿고있는 이 무지한 사람들의 생존 그 자체가 의도적으로 자행되는 폭압과 잔혹성, 경제적 핍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이리라.

 

작품은 무력저항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의 분출만이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싸마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의 노동자로서 생계를 지켜나가는 동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네들 삶의 방편에선 아딜의 대립, 그리고 소위매판자본까지 들먹이며 서로 손가락질 해대는 동족들 간의 반목, 알카미르와 그의 자식들 바씰누와르를 통해 보여지는 세대간의 가치인식의 괴리와 갈등, ‘주흐디의 이스라엘 노동자와의 싸움에서 적의 대상이란 바로 그들 내부인 자신, 자신들 스스로의 몰락이 아닌가하는 회의와 반성까지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오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울분과 증오의 요소들을 빼곡히 담아내고 있다.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시장에서는 만족이라는 물건은 팔지 않아.”라는행복이란 사치스럽기조차 한 언어의 상실과 좌절의 외침은 그네들을 외면하는 세계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른다.명확한 관점을 위하여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경험과는 달리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족 대봉기)는 당장 기록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소설적 작품성을 떠나 이스라엘 부르주아들의 탐욕, 국제 자본주의의 착취,...”라는 외피와 광신적 유태민족주의의 패권주의 망령에 대한 세계민을 향한 고발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문학작품이 이렇듯 이념적 잣대를 깊이 들이대는 것이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네들의 문학은 당분간 이러한 현실을 외면 할 수 없을 것이다....

 

P.S.

2018529, 팔레스타인 박격포 공격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공습했다는 뉴스는 사흘 전 이스라엘군 탱크의 공격으로 무장대원 3명이 숨진 것에 대한이슬라믹 지하드의 보복 일환이라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를 동원해 즉각 공습에 나섰습니다.”패배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절대적 강자가 벌이는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 지금도 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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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계에 이름이 같은 시인과 소설가 두 분이 계시다보니 독자들의 혼동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한 분은 2006현대시로 등단한 1975년생의 '시인 정한아' 이고, 또 한 분은 1982년생이신 '소설가 정한아' 이다.

또한 두 분 모두 여성이신데, 이제 혼란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시인 정한아 ]

 

시인 정한아 :

 1975년생 울산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현대시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어른스런 입맞춤, 울프 노트가 있다. ‘작란동인이다.

    

 

    

 

 

 

 

 

 

 

 

 

 

 

 

 

 

 

[ 소설가 정한아 ]

 

 

소설가 정한아 :

1982년생,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4회 대산대학문학상, 12회 문학동네작가상, 2016년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친밀한 이방인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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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초록빛 숲 사이로 지나가느뇨.

봄 물결로 그녀를 온통 치장하고?

누가 경쾌하게 초록빛 숲 사이로 지나가느뇨.

그걸 한층 즐겁게 하려고?

 

누가 햇빛 속으로 지나가느뇨.

가벼운 발걸음 알아채는 길로?

누가 경쾌한 햇빛 속으로 지나가느뇨.

그토록 순결한 용모를 하고?

 

수풀의 길들이

포근하고 금빛 불로 온통 번쩍이니...

(이하 생략)

<실내악> 제 VIII수 中에서

 

 

, 하나 재밌는 얘기로 시작해야겠다. 그의 시집 실내악의 제목이 정해진 에피소드인데, 제임스 조이스는 한 여인에게 실내악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읊어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인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방의 칸막이 뒤에 있던 요기(尿器)에서 소리가 나더란다. 아이쿠! 시집 제목을 실내악이라하자. 라고 했다나?....ㅋㅋ

 

 

 

제임스 조이스피네간의 경야를 읽기에 앞서 일종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그의 시집인 실내악 (Chamber Music)부터 중편 시()지아코모 조이스, 그리고 '꼼꼼한 비속성의 문체라 불리는 더블린 사람들, ’스티븐 데덜러스라는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을 낳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거쳐 율리시즈의 몇 장()을 읽는 사전 학습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상호 문체와 주제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독서 행위에서 이렇게 사전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사실 내 딴에는 야심찬 도전인데, 수많은 외래어들의 중첩과 언어유희, 텍스트의 복잡성 등 피네간의 경야를 읽어 내겠다는 소심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영문학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전혀 지니지 않은 내겐 올 한 해를 꼬박 넘기는 지리한 독서 행위가 될 것 같다.

 

이렇게 사전적 독서 중,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는데, 1914년 쓰여진 조이스의 자전적 경험이 배어있는 지아코모 조이스(Giacomo Joyce)라는 산문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편역한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조이스의 여느 소설들과는 달리 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 친근하게 읽어 낼 수 있다는 반가움이랄 수 있다.

 

자신에게 영어과외를 받던 학생에 대한 연정을 그리려 했던 듯 한 작품이다. 영문학사에 있어서도 산문시의 새로운 창조로 문학적 혁신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받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탈고하고 율리시즈를 쓰기 시작할 무렵인 그의 성숙기 산물이어서 아주 잘 익은 과일을 먹는 느낌을 준다.

 

미지의 여학생을 향한 조이스의 에로틱한 감정의 관찰과 표현이 단연 압권이다. 아래의 시는 전체의 극히 일부분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누구? 짙고 향기 어린 모피에 둘러싸인 창백한 얼굴, 그녀의 동작이 수줍고 신경질 적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까지 미세한 관찰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랑에 빠진 누군가의...., 그러니 외국어가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유식함으로 여겨지고, 작은 깜빡임조차 그의 시선을 장악하곤 떨림으로 어쩔 줄 모르게 한다.

 

맥 빠진 비엔나식 이태리어로 가르랑 거린다: 정말 유식하지! 긴 눈꺼풀이 깜박이며 치뜬다: 따끔한 바늘 끝이 벨벳 홍채 속을 찌르며 전율한다.”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자책하는, 대상의 순결과 무심한 아름다움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그렇게 그녀는 단테 곁에 순진한 자만심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와 폭력에 결백한 채, 첸치의 딸, 비아트리체는 그녀의 죽음을 향해:”

 

나의 수치가 그 위에 영원히 이글거릴, 불결하고 아름다운, 책장들을 매만졌다. 부드럽고, 차갑고, 순결한 손가락들, 저들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결구: 나를 사랑하라. 나의 우산을 사랑하라.”

-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김종건 편역(어문학사, 2012.10) 에서

  

이제 나의 조국의 도덕사이자 나의 사랑하는 불결한 더블린(Dear Dirty Dublin)"15작품의 독서로 생각을 옮겨야겠다. 가끔은 예기치 않은 문학적 수확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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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oo 2018-05-09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를 잘 모르지만 사놓고 미루던 ‘더블린 사람들‘을 어제야 다시 읽었어요. 사람들을 포착한 모양이 보통 아니라고 느꼈어요. 촘촘하고 예리한 풍속화를 보는 듯. 일단 첫인상이 그랬는데요. 제겐 아직 낯설어요.

필리아 2018-05-09 19:44   좋아요 0 | URL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을 이렇게 말했다네요. 중하위 계층(아마 서민층을 말한 듯 해요) 더블린 사람들의 생활에 가해지는 정치,문화,경제적 힘의 압박으로 인한 고통의 객관적, 심리적 사실의 스케치라고요. 풍속화를 본듯한 인상이란 말씀은 이러한 이유일거예요. 댓글 고맙습니다. YoonSoo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