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텅구리 - 한국 최초 신문 연재 네컷만화로 100년 전 날것의 식민지 조선을 보다
전봉관.장우리 편저, 이서준.김병준 딥러닝 기술 개발 / 더숲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MV / 더숲 10번째 리뷰] 신문 한 켠에 '네컷만화'부터 읽는 것이 내 어린 시절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시사만화'라는 것에 어릴 적부터 눈이 뜨였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것이 아니고, 그저 '만화'라는 것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80년대 이현세의 '까치' 시리즈,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을 접하면서 '한국만화'와 일본 만화의 차이점을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때만 해도 '만화책'을 읽으면 바보 취급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보곤 했지만, 만화를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참으로 오래 걸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시사/풍자'라는 것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남들이 읽다가 버리고 간 신문쪼가리를 형님들(재수생과 복학생)이 펼쳐 들고서 이런저런 '알은 채'를 하는 것을 귀동냥을 들으면서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세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사만화'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최초의 '네컷만화'인 <멍텅구리>(노수현)를 다시 복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꼭 읽고 싶었다. 물론 일부의 내용이 수록된 것으로 '존재감'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를 읽을 수 없었으니, '그 맛'을 꼭 맛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까무룩 잊고서 문득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뽑아 들고 읽었다. 무려 800여 쪽에 달하는 묵직한 느낌만으로도 뿌듯했을 정도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니 애초의 기대만큼 충족하진 못했다. 기대감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일단 '오늘의 유머 감각'과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나 어릴 적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1번지> 같은 기라성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안방극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주일, 남보원,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등의 원로 희극인들에게 '유머'를 배웠던 나인데도, 최멍텅과 윤바람, 그리고 신옥매가 펼치는 1920~30년대의 배꼽 빠지는 유머 감각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이면 찰리 채플린이 전성기를 지날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최멍텅의 '멍텅구리 짓(슬랩 스틱 코미디)'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가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 웃고 싶어도 맘껏 웃을 수 없는 시기, '일제의 문화통치시기'와 맞물려 있다보니 수많은 '인텔리(지식인)'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일제의 차별정책으로 인해 꿈을 펼쳐낼 수 없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싶어도 '날개를 활짝 펼 공간'이 없던 암울한 시기였던 것이다. 최멍텅도 그러했다. 만석꾼의 아들이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재벌 2세'에 버금가는 능력자였다. 그런 그조차 '날개'를 펼 수 없는 시절이었는데, 수탈과 억압으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했던 조선인들의 설움은 오죽하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웃을 수 없었다. 당시의 조선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설움'을 앞세우고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장면만이 상상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20년대를 지나 30년대로 접어든 <멍텅구리>의 연재 내용은 '시사풍자'라는 애초의 날카로움마저 사라져서 그야말로 '촌극(우스꽝스런 사건)'만을 쏟아낼 뿐이다. 최멍텅은 '늦깎이 학생'이 되고, 신옥매는 '꽃나라(화국)여왕'에 등극하는 꿈을 꾼다. 윤바람은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최멍텅에게 빌붙어 살고 말이다. 후반부에는 신옥매도 자취를 감추고, 최멍텅의 아들 똘똘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다 '모던 보이/걸'로 대변되는 신풍속을 보여주다. '낭만자살 열풍'을 소개하고서는 쓸쓸한 연재 마감을 하고 만다.

책을 덮고 나니, 꼭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이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1925년의 풍경을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단 말이다. 일제의 엄혹한 통치에 조선인들의 삶은 날로 핍박 받았고, 일상은 빠르게 무너지고,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네컷만화'조차 맘껏 펴내지 못하는 자유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자유의 소중함'을 그저 잊고 살고 있는 셈이다. 마치 '공기 없는 세상'에선 단 1분도 살지 못하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아주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인데 너무 낯설기만 했다.

더구나 '만화형식'인데도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복원상태'가 그리 양호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원본, 그대로' 되살리려 꽤나 노력했을 것인데, 그림체는 너무 번져보여서 '그림체'가 뭉게져 보이고, '활자'도 너무 작아(노안이 와서 그럴 수)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 옆에 '프린팅'된 글자를 읽고서 판독하려 했는데, 그 글자조차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800여 쪽이 넘는 책인데 돋보기를 쓰고 읽기에도 부담스러웠고 말이다. 여러 모로 읽기 불편해서 좀처럼 몰입하기에 힘겨웠다.

하지만 100년 전 우리의 '근대사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것만큼은 참 좋은 기회였다. 연재 시작부터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전편'을 싣고 있어서, '연재의 의도'도 함께 파악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애환'도 더불어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옛날의 '일상 생활'을 엿보는 일은 엄청 힘든 일이었는데, 친절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서 좋았다. 이런 특혜는 <멍텅구리> 만화만 읽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이었다. 이를 테면, 옥매가 최멍텅에게 결혼조건으로 '간장게장'과 '양담배' 등을 내건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에는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일제가 '우리의 전통'을 없앨 목적으로 '간장게장 담그기'를 불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민물생선'을 먹고 '디스토마 질병'에 감염되는 사례가 늘어나서 내린 조치라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날것'을 음식으로 먹기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왜 유독 조선의 풍속을 금하는 일에는 그토록 열성을 보였는지, 그 의도가 뻔하다. '양담배 수입금지' 조치도 마찬가지다. 일본산 담배를 강매하기 위해서 '더 질 좋은 서양담배의 수입'을 금하고, 세금 착취가 용이한 일본담배만을 유통시킨 것이다. 그러니 신옥매가 내건 결혼조건은 '완곡한(?) 거절 의사'였던 것인데, 최멍텅은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오로지 '직진'만 하면서 온갖 멍텅구리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머라는 것이 '부연설명'을 하게 되면 더는 웃기지 않은 속성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만화'가 아닌 '인문역사책'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읽고 즐기는 책이 아니라 읽으며 분석하고 해석해야 하는 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참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혼자만 레벨업 1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욕망이 어둠의 괴물에게 집어 삼켜지지 않게 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혼자만 레벨업 1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MIV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1번째 리뷰] 뒤늦게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하고서 바로 소설책을 질러버렸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6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니 깜짝 놀랐다. 이렇게나 재미난 책이 나왔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다. 정말 흥미만점이다. 스토리라인 전체가 'MMORPG의 전형'으로 짜여져 있어 게임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그야말로 '몰입감, 제대로'이기 때문이다. 나역시 소시적에는 '디아블로2 게임'을 하며 한밤을 지샜던 세대이기에 <나 혼자만 레벨업>이란 게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나 혼자만 레벨업>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인 성진우가 '레벨 1'부터 끝없이 성장하는 캐릭터가 된다는 줄거리를 이어나간다. 물론 '혼자'만 말이다. 소설의 세계관에 따르면 '10년 전' 어느날, 갑자기 '이세계(다른 차원)'와 이어지는 '게이트'라는 것이 전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단다. 그 게이트를 통해서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현실 세계의 무기체계로는 그 마수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게이트의 출현과 동시에 '헌터'라는 각성자도 등장하게 되었다. 이 헌터는 '마력'을 이용해서 마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게이트 안에 머물고 있는 '보스'를 해치워서 게이트를 폐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제때에 게이트를 닫지 못한다면, 그 안에만 있던 마수들이 게이트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해치고 모든 것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헌터들'은 게이트가 완전히 개방되기 전에 '보스'를 처지해서 게이트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주 목적이다.

이런 헌터들은 일단 '각성'하게 되면 대단한 능력을 부여받게 되는데, 가장 센 능력치부터 S급, A급, B급, C급, D급, 그리고 가장 약해서 일반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E급 각성자로 분류한다. 또한 '직업' 분류도 가능해서 '물리계 헌터'와 '마법계 헌터'로 구분되고, '근접 공격', '원거리 공격', '치유 능력'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탱커', '딜러', '힐러'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게임을 경험한 독자라면 그 세세한 분류방식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E급 헌터로 각성한 이 책 <나 혼자만 레벨업>의 주인공 성진우는 '최약 병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레이드(전투 사냥)에서 별로 쓸모가 없는 캐릭터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쓸모 없는 약체 헌터인데 유명한 것일까? 그건 바로 '헌터'가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마수들과 벌이는 싸움에서 상처를 입어도 헌터는 실제 상처를 입는 것과 똑같다. 절대 '가상현실'속 게임이 아닌 것이다. 헌터들의 싸움은 '현실'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등급보다 강한 마수들과 마주쳤다가는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헌터들이 '레이드'에 참가하는 까닭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마수들을 죽였을 때 얻을 수 있는 '마정석(아이템)'이나 '마나석(광물자원)'이 현실 세계의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정석'은 화석에너지보다 훨씬 강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데도 '온실가스' 같은 지구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청정에너지원'으로 태양에너지, 수력, 풍력 등의 무공해에너지보다 효율이 높아서 아주 높은 가격으로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터들은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전한 레이드에 참가하길 원하는 것인데, '헌터협회'에서 모집하는 게이트 레이드에서 '최약체'인 성진우를 불렀다는 건, E급 헌터조차 죽지 않을 수 있는 깨기 쉬운 던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던전 레이드에 별로 쓸모가 없는 캐릭터인데도, 함께 참여하는 다른 헌터들은 '성진우 급 마수들'이 등장할 거라는 생각에 안심을 하고, 성진우를 환영하는 것이다.

그치만 성진우에게는 완전 다른 이야기다. E급 헌터들 중에서도 '마력 10'밖에 되지 않는 하위급 헌터이다보니 'D급 던전게이트'조차 성진우에겐 너무 벅차다. 그래서 성진우는 가장 약한 몹(몬스터)에게도 치명상을 받고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많이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성진우를 목숨에서 구해준 것은 'B급 힐러, 주희 씨'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B급 던전'보다 상위인 A급 던전에 참가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고, '대형길드'나 '헌터협회'에서도 환영받는 헌터가 될 수도 있다. 왜냐면 헌터들 중에서도 '힐러'는 상당히 드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주희는 C급 던전레이드 이하만 참가할 뿐이다. 원체 싸우는 일을 싫어하고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장면을 보면 너무도 쉽게 공포에 휩싸여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마는 마음 약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소심한 성격이라 '최약체'인 성진우의 곁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연인'을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로맨스 따위는 잊어라. <나 혼자만 레벨업>에서는 알콩달콩 그런 거 일절 없다.

<나 혼자만 레벨업>이 매력적인 까닭은 '더 강해지고 싶다'는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진우는 '이중 던전레이드'에 참가했다가 '각성 후 각성(재각성)'이라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보통 '각성자'는 한 번 각성하게 되면 애초에 부여된 '등급'이 변하지를 않는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재각성자'가 되면 능력치가 확 높아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성진우는 그런 경우와도 달랐다. 분명 '죽음'을 경험할 정도로 끔찍한 치명상을 받았는데도 멀쩡히 살아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니 '멀쩡히'라는 말이 정확하지는 않다. 성진우에게만 보이는 '스탯창'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진우는 이를 일종의 '시스템'이라고 부르지만, 아직 정확하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차차 밝혀질 내용일 것이다. 암튼 성진우는 'E급 헌터'라는 등급이 무색하게 되었고, '레벨 1'으로 새롭게 헌터의 삶을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끝없이 '레벨업'을 하게 된다. 아니 끝이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저 '스탯창'에서 보여지는 [알림]에 따라 행동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레벨 1으로 재각성한 성진우는 매일 떠오르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받는 '보상' 덕분에 능력치가 점점 오르기 시작한다. [근력 10 / 체력 10 / 민첩 10 / 지능 10 / 감각 10] 게임을 해본 독자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메시지일 것이다. 거기에 특수한 '스킬창'까지 떠오르며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일일 퀘스트'를 수행하면 '스탯 3'만큼 자유롭게 올릴 수 있고, '레벨업'을 할 때마다 모든 스탯이 '+1'만큼 상승하게 된다. 그렇게 성진우의 '스탯'은 끝없이 올라갈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엄청난 능력치를 선보이며 웬만한 레이드에서 아주 큰 활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등급도 오르게 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강해진 성진우는 아주 교만한 캐릭터가 될 것인가?

아마도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성진우가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익면증'에 걸린 어머니를 치료할 비용을 마련하고, 동생의 대학 등록금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성한 등급이 하필 'E급'이라서 그동안에는 많은 액수를 벌 수 없었지만, 이제 꾸준히 레벨업을 해서 '상급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높은 등급의 마정석을 긁어모으면 어머님의 치료비와 똑똑한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넉넉히 마련하는데 부담이 덜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상의 돈'을 벌게 되면 어떻게 변할 것인가? 성진우는 착한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까? 하지만 세상이 성진우를 변하게 만든다.

왜냐면 '황동석 공격대' 같은 악당들과 마주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던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악용해서 하급 헌터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들은 수익을 챙기는 악당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던전 격파를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기 때문에 인면수심의 마음가짐으로 '성진우'를 끌여들여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은 몰랐다. 성진우가 어느새 'C급 헌터'보다 더 강한 '레벨'로 올라섰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동석은 성진우에게 돌아갈 몫까지 빼앗기 위해 속임수를 쓰려 했지만,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성진우가 도리어 '긴급 퀘스트'를 받고 황동석 일당 8명을 모두 죽여버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반대로 성진우도 '황동석 일당'을 모두 죽이지 않으면 '패널티'를 받아서 죽게 될 운명에 놓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진우가 '살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단지, 어머니의 치료비와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생계형 헌터'로 뛰어들었을 뿐인데, 그런 이유 때문에 '더 강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사람을 죽인 성진우가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레벨업을 통해서 강해졌을 뿐인데, 강한 힘을 갖게 되자 '두려움'이 없어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사람'을 죽였는데도 죄책감마저 들지 않는 것은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아직 성진우는 그런 자신의 변화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눈치다. 그 뒤에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성진우는 '살인'을 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고, 오히려 '긴급 퀘스트'가 뜨기 무섭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아무리 헌터의 세계가 '강자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곳'이라고 정당화하더라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뭐, 앞으로 성진우는 더욱더 높은 레벨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과연 그때에는 또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더욱더 살인 따위를 즐기는 '살인광'이 되고, '약자'가 죽는 것에 대해 미안함마저 들지 않는 비정한 능력자가 되고 말 것인가? 아님, 이런 잔인한 희생을 통해서 더 큰 위업을 남기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인가? 물론, 그 어떤 희생이라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비극이지만,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애니메이션과는 살짝 다른 소설만의 재미를 찾으러 떠나 보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못미, 정치! - 17세를 위한 교실 밖 정치 교과서
장기표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MIII / 시대의창 6번째 리뷰] 독서논술선생인 나는 '내 전공(공대출신)'과는 거리가 먼 학문을 공부해야겠다고 느낄 때, '어린이책'을 파고 든다. 아이들에게 균형잡힌 독서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논술쌤'은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 도중에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때때로 '정곡'을 찌르기 일쑤다. 그럴 때 논술쌤은 절대로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신뢰가 깨지게 되면 아이들은 '선생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둘째 문제고, '수업의 흐름' 자체가 깨져버리기 때문에 일단은 '아는 데까지'는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논술쌤의 '의무'인 것이다. 만약, 수업과는 상관 없는 질문이니 답을 하지 않거나, 잘 모른다고 우물쭈물하면 그조차 수업의 흥미가 떨어지기 일쑤다. 그런데도 정말 몰라서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내 경우엔, '숙제'로 내준다.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구나. 그런데 지금은 그걸 설명할 시간이 부족하니 '다음 시간까지' 너희들이 먼저 직접 조사해와라" 이렇게 '시간'을 번 다음에, 다음 시간에 '짧고 굵게, 그러나 임팩트 하고 간결하게' 답변을 해주고 수업을 진행하면, 아이들은 "역시 선생님은 대단해!"라면서,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곤 한다. 그렇기에 나는 늘상 책을 읽었다. 모자라고 부족한 '실력'을 쌓기 위해서 '문외한의 영역'을 마스터 할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럴 때 '어린이책'은 매우 유용했다.

17세는 '어린이'가 아니라 '청소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를 모르겠다. 영어권에서는 '틴에이지(teenage)'라고 해서, 13세부터 19세까지를 우리의 청소년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우리는 '중1부터 고3까지'를 청소년이라고 부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중1'이 되면 정말 '어린이'가 아닐까? 딱히, '청소년'으로 구분해서 부를 거라면 '미성숙하다'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성숙하지 못하기로는 어린이나 청소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뭔가 '단계적'으로 성장한 면은 없지 않으니, 달리 부를만한 이름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으로 구분하는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초등생도 중고등필독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중고딩이라도 초등필독서조차 어려워하는 친구들을 정말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국어책을 읽을 땐 '주제파악'을 해야 하고, 수학책을 읽을 땐 '분수'를 이해해야 하는 법인데,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논술수업을 진행하다보면, 주제나 분수는 고사하고 '문장해석(문해력)'조차 힘겨워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정말이지 그런 아이들에겐 '그림책'을 보여주면서 기초부터 다시 차근차근 가르쳐주기도 한다. '책 읽는 법' 말이다.

이런 경험을 많이 겪다보니 '어린이책'을 굳이 '단계별'로 구분 짓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실제로는 중2학년생인데, 초등5학년 필독서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책을 쥐어주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실력이 낮으니 '쉬운 책'부터 차근차근 읽고 실력을 쌓으면 되는데, [초등5학년 필독서]라고 적혀 있는 글귀 때문에 몹시 '자존심' 상해 하더라는 말이다. 차라리 그런 '구분'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초등필독서', '청소년 필독서' 등등 이런 표현은 안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어린이책'으로 묶어서 0~19세가 자기 수준에 맞게 골라서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뭐, 어른이자 선생인 나도 '어린이책'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고 있다. 실력이 부족하고 수준이 낮으면 읽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하는데 부끄러운 게 뭐란 말인가? 모르면 배우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각설하고, '정치'에 대한 책이다. 두 번째 '대통령탄핵'이 벌어졌기에 다시금 우리 정치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대통령탄핵'을 방조한 세력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불복하고, '전 대통령'을 감싸고 똘똘 뭉쳐 내란을 획책하고 있다. 물론 이런 몰염치한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사법(법학)'에 대한 공부를 더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법 문제를 포함해서 가장 절실하게 다시 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 정치'다. 이것이 무너지고 나니 대한민국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전세계적으로 '극우 정치'가 판을 치고, '독재자' 뺨칠 정도로 야비하고 폭력적이며 파렴치한 세력이 '권력'을 쥐고서 판을 흔들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일본의 시게루, 북한의 김정은, 그리고 유럽 각국의 '극우정당' 소속 집권자들, 남미와 아프리카의 '쿠데타' 정권 탈취자들, 그리고 아시아 곳곳의 '독재정권자'들까지 전 세계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기에 '윤석열 씨'도 가담하려다 얼마 전에 파면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참으로 '몰염치'하고 '파렴치'하다는 점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과연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전세계가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위에 언급한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을 손에 쥐고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이 똑같다. 겉으로는 '국가의 이익'을 내세우지만, 그 어느 나라도 제대로 '국익'을 챙기는데 성공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 물론 잠시동안 영토가 늘어나는 듯 싶고, 자국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들곤 하지만, 긴급한 사태가 벌어졌던 원인은 '권력자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덮기 위해서였고, 결국 '진실'이 밝혀지면서 '국익'은 고스란히 사라져버려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은 무너져버려서 생활고는 더욱더 심각해지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가 지금 그렇지 않은가. 그나마 '자국산 무기'를 생산하면서 전쟁을 치루고 있다면 '경제상황'은 일시적이나마 좋아질 텐데, 그마저 생산라인이 무너져버렸기에 '북한산 무기'를 수입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전쟁을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 덕분에 북한만 '무기수출'로 돈을 벌어서 경제회생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무기 대금을 돈으로 지출할 형편이 못되어서 '무기 만드는 기술력'을 대금 대신 치르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트럼프도 '관세정책'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구상을 실현하고 있지만, 미국이 그동안 '적자'를 면치 못한 까닭은 '제조업'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값싼 중국산을 '수입'하는 바람에 '미국 제조업'은 폭망했고, 이런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금융)서비스업'과 '(수준 높은)기술력'으로 근근히 버텨왔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후발주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에 '관세카드'를 들고서, 폭망한 '미국 제조업'을 되살리겠다고 전세계를 상대로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한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장기적'으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미국 경제를 파탄내고 말 것이다. 그때에는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나라조차도 미국을 외면할 것이다. 어차피 '관세폭탄'으로 미국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찾은 나라들부터 미국에 보복조치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미국시장을 잃고 싶지 않아서 서로들 눈치를 보겠지만, 미국시장을 되살리는 투자비용보다 자국경제를 되살리는 비용이 훨씬 덜 들겠다는 '손익계산서'가 나오는 즉시, 미국과 손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틀'이 확 바뀌게 될 것이다. 러시아는 영토확장에 성공적일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러시아는 '영토확장'에 실패할 것이다. 만약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로 결론을 내버리면, 강대국이 무력으로 영토를 빼앗으면 인정하겠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트럼프는 '강대국' 운운하며 러시아의 승리로 전쟁을 종지부 찍으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하루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휴전' 협정을 서두르고, 현재의 점령지를 새로운 국경선으로 인정하자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지만, 그렇게 종전을 했을 때, 러시아 인접국가들은 전쟁 불안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 협상은 난항을 거듭할 것이다. 그러다 결국 '러시아'가 두손 두발 들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왜냐면 애초에 러시아의 침공에는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딴에는 '과거의 영토 회복'을 주장할 순 있겠지만,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 '줬다 뺐는 거'다. 더욱 해서는 안 될 일은 '힘으로 뺐는 거'다. 그런데 러시아는 '크름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줬다가 뺐으려 들었고, 그것도 '침공'이라는 방식으로 빼앗으려 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필패로 결론 날 것이다. 승리를 했다하더라도 '러시아 경제'는 지금도, 나중도 폭망이다. 어느 나라가 '침략국가'와 자유로운 무역, 정치 관계를 유지하려 들겠는가 말이다.

윤석열 씨도 철지난 '전두환 타령'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설마설마 '비상계엄'까지 따라할 줄은 몰랐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게 통할 거라고 보는가 말이다. 법무부 장관에, 검찰 총장 출신이라서 '검찰' 장악하고, 몇몇 엘리트 집단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고, 애국시민을 선동하려 '종교계 출신'들 총동원하고, 군 수뇌부 몇몇 자기편으로 심어 놓으면, '영구집권'이 가능하리라 보았단 말인가? 뭐, 경찰총장에, 언론까지 장악했고, 독재시나리오는 '극우유투버'들이 짜놓은대로 하면 가능할 거라고 보았단 말인가? 이건 뭐, 국민들을 개돼지로 보는 '국민의힘' 정당이 도와주면 얼마든지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렇게 국민을 호구로 본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형 판결을 받았더랬다. 결국 당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기다려라. 지금은 '법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엔 깨어난 국민들, 윤석열 씨가 그렇게나 외쳐댔던 '계몽령'에 의해 깨어난 민주시민들이 '내란 세력들'을 하나하나 잘근잘근 잘라내서 차례차례 '감방동기'로 차곡차곡 넣어줄 것이다.

서론은 이쯤하고, 책의 내용은 '정치 교과서'답게 우리 정치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두루두루 담아 놓았다. 그렇기에 이 책을 '정치 입문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출간시기가 2008년이라서 철지난 정치판을 예로 들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정치의 기본'에 충실한 설명이기에,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알찬 내용이다. 물론 '민족통일문제'를 다룰 때에는 '북한 문제'에 대한 접근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찬반을 논할 시기에 출간되어서, 현재의 남북 상황과는 맞지 않는 내용이 있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은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극심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늘 진전이 없는 답보 상태였으며, 북한의 대남정책 또한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그에 따라서 수시로 통일정책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통일'을 지향하고 있고, 반드시 해야 할 '과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저자는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성급하게 추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아주 핵심을 콕 찍은 정답이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통일'을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고, 그럼에도 차근차근 꾸준하게 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들어서는 정권은 '통일정책'을 절대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양보도 하지 말고, 당당히 나서길 바라고 있었다. 맞다. 그래야 한다. 결국 통일은 '흡수통일'을 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북한의 침공으로 남한이 점령된 상태가 된다해도 결국엔 '남한 정권'으로 재흡수되어 버리는 우려가 크기 때문에 북한은 절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래서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그토록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남북 갈등을 첨예하게 끌고 나가서 긴장을 높여야만 '김정은 체제' 유지가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맞는 얘기다. 그러니 우리는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대응하면 된다. 저들의 핵무기가 위협적이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어차피 다 죽는 일만 남았다. 한반도 전쟁은 이제 '우리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가 휘청거리는 어마무시한 전쟁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전세계 경제적 위치'에서 대한민국이 전쟁으로 사라지면 세계경제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느 나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나라는 없다. 물론, 일본만 빼고 말이다.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이득을 본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40년, 50년이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책 이야기는 별로 하지 못했다. 2008년이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의 '정치 참여'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촛불혁명'을 통해서 박근혜 씨를 파면시키고, 문재인 촛불혁명 정부를 탄생시킨 경험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이번 12·3 비상계엄을 막아선 것도 국민들이었고, 헌재의 윤석열 파면 결정이 나기까지 수많은 국민들의 '정치 참여'가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정치 참여'는 이미 충실히 잘하고 있기에 그리 많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치 참여'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제대로' 참여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볼 시점이 되었다. 이번 '윤석열 파면 결정'까지 정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로 '국론 분열', '정파 갈등', '사법판결 불복', '검경 무능', '사법 폭동' 등등.. 우리의 정치가 정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온국민이 생생히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불감증'은 너무나 심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값은 치르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법적판단'을 먼저 받아보자며 너도나도 '심판대'에 오르길 원했고, 심지어 '판결'이 났음에도 '승복'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분명 낯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법적판결'이 명확히 나지 않았으니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법이 너무 관대(?)해서 문제가 된 것인가? 싱가포르처럼 '태형'이라도 제정해서 엉덩이를 홀딱 까고 피가 철철 나도록 맞아봐야 부끄러운 줄 알 것인가? 이건 정말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죽어버렸으니 다시 되살려야 하기에 그렇다. 전세계가 '반민주적인 세력'이 득세하는 경향으로 흘러간다고해서 대한민국도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이 살려내어서 아주 바람직한 선도국가로 거듭날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허튼 소리가 절대 아니다. 전세계가 지금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관심있게 지켜보는 까닭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그 힘든 일을 해낸다면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이, 유럽이, 남미가, 중동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을 주시하고 있다. 이웃나라인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도 주시하고 있다. 2024년에 때아닌 '비상계엄'이 선언되었을 때, 전세계는 대한민국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국민들이 앞장 서서 '계엄군'을 막아서고 비상계엄을 무효화시키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 탄핵 시위'를 지켜보았다. 끝내 '대통령 파면 임용'이 되는 것도 보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대 사건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내란세력은 아직도 건재하고 활개를 치고 있다. 이들의 '썩은 동아줄'을 발본색원해서 싹 끊어내고 난 뒤에야,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겨우 '시험대'를 통과한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민주정치는 결국 '국민참여'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정치에 참여한 국민들은 '제대로 정치'를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정치를 제대로 깨우쳐야만 할 것이다. 어리석은 선동질에 속아넘어가는 어설픈 정치실력 가지고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 모두가 제대로 된 정치 공부를 시작해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박철화 옮김 / 문학세계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MII / 문학세계사 3번째 리뷰] 역시나 세월이 흐르니 달라지는 것들이 참 많다. 정말 오랜만에 '노통브의 책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래도 최근에 <머큐리>와 <푸른 수염>을 읽었기에 완전 오랜만은 아니지만서도 <적의 화장법>은 정말 오랜만이다. 독서모임을 하던 때였으니까 2003년즈음으로 기억을 한다. <살인자의 건강법>을 필두로해서 줄기차게 읽어댔었는데,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꺼내든 <적의 화장법>을 손에 들고서 한참을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책의 줄거리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력이 꽤나 준수한 편인 내가 이렇게 기억이 가물가물한 까닭은 딱 두 가지다. '재미'가 없었거나 '유쾌'하지 않았거나 말이다. 그래서 둘 중 어느 이유 때문이었는지 파악해보기 위해서 다시 읽었다. 오랜만에 읽으니 '뒤친이(옮긴이)'가 바뀌었다는 것도 눈치 챘다. 2001년 판에는 '성귀수'였는데, 2022년 판은 '박철화'다. 둘의 큰 차이는 없는데, 20년의 세월 간극 때문인지, '박철화'의 뒤침책(번역본)이 좀더 편하게 읽힌다. '성귀수'는 시인이고, '박철화'는 평론가다. 취향대로 편하게 읽으신 되겠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므로 '스포일러'라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리뷰를 쓰는 것임을 밝힌다. 노통브 소설의 결말은 굳이 스포를 하지 않아도 뻔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머큐리>가 신기할 정도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을 뿐, 거의 대부분 '죽음'으로 끝맺기 때문이다. 암튼 이 책 <적의 화장법>도 죽기는 죽는데, 그게 포인트가 아니다. 이 소설은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제롬 앙귀스트 vs 텍스토르 텍셀, 단 둘의 '대화'만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별다른 서사나 묘사도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대화'만이 가득하다. 단지 두 사람이 '공항'에서 비행기가 연착되어 기다리고 있는 그 잠깐동안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정도만 서술하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 정황이나 배경 따위도 모두 '대화'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의 대화는 들어줄 만한가? 이게 이 책 <적의 화장법>의 핵심이다. 대화의 주제는 여러 가지인데, 대개는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내 취향에 딱 맞다. 특히나 파스칼, 스피노자, 괴테 등을 운운할 때는 귀를 쫑긋하고 귀담아 들으려고 노력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요상하다. 분명 처음 본 사이인데 '강간', '살인'..이런 끔찍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엔 '상상(?) 살인' 따위를 언급하고 있어서 짖꿎은 농담을 하고 있나 싶더니, 공동 묘지에서 첫 눈에 반한 여자를 쫓아가서 강간했다는...더 기괴한 것은 그 짓을 하고서도 '남자의 첫 경험'이었기에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괴상망측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어서, 정말이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 내가 이 소설의 기억이 별로 없었던 까닭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이 거의 대부분 이런 식이다. 그녀의 첫 소설이 <살인자의 건강법>이지 않았던가. 그런 살인자를 앞에 두고서 천연덕스럽게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서, '이 여성작가는 미친 게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렇게 <오후 네 시>, <로베르 인명사전>, <공격>을 내리 읽어재꼈는데...죄다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노통브의 소설은 '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건 뭐..등장인물들이 전부 다 괴상망측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적의 화장법>으로 되돌아 간다. 그래도 중반을 넘어가면 그나마 좀 읽을만 해진다. 대화의 주제가 '철학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앞서서 나누던 '강간', '살인' 따위의 연장선이긴 하지만, 살인자가 자신은 왜 강간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꽤나 '철학적'이다. 이는 노통브가 '라틴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웬만한 '수사학(修辭學, 미적으로 언어구사법을 연구하는 학문)'은 그녀에게는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미친 전개를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괴상망측한 궤변조차 청산유수처럼 나불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또 아멜리 노통브만의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적의 화장법>만큼은 덜 유쾌했던 모양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말할 것에서 한술 더 떠서 '나 자신이 지옥이다'라면서 '자기 내부에 있는 적'을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식'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적으로 삼지, '나 자신'을 적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있다면 자기반성의 끝판왕인 '성인군자'이거나 '사이코 미치광이'일 것이다. 하지만 노통브의 경우라면 100% '미치광이'를 가리키는 것일테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은 '한 사람의 미치광이가 내뱉는 독백'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저런 미치광이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제롬 앙귀스트'는 '텍스토르 텍셀'이 떠벌리는 악몽같은 넋두리를 잠자코 들어주고 있다. 물론 강간, 살인 따위를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할 수도 있는 일이지 않소?'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질색팔색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제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도망가지 않는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라면서 떠나야 정상일텐데 말이다. 물론 '떠나지 못하고' 듣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 있긴 하다. 바로 '공항'이라는 제한된 공간 때문이었고, 예약한 비행기가 '연착'으로 인해 뜨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도망가도 쫓아와서 망측한 이야기를 지껄릴 거라는 것을 능히 짐작했기에,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가만히 듣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화가 좀 더 진행되면 '그 자리'에서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게 된다. 이 미치광이가 강간하고 살해한 여자가 다름 아닌 '자신의 죽은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놈은 '살인자'였고, 사랑하는 '내 아내'를 죽였고, 그로 인해 아주 끔찍한 10년을 보냈으며, 사랑하는 아내는 그로부터 10년 전에 미치광이에게 강간까지 당했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미친놈이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지금 이 '공항'에서 마주친 것이다. '우연'일까?

이제부턴 '스릴러'다. 귀찮음과 짜증, 그리고 당혹감을 지나자 마주한 것이 바로 '공포'였던 것이다. 처음엔 웬 '날파리' 한 마리가 귀찮게 달라붙었다 싶었지만, 이제는 지금 당장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을 '가해자'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 미치광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범행을 고백했으니 이제 '당신의 손'으로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살인자'가 '피해자'가 되고, 반대로 '피해자'는 '살인자'가 되는 최종적인 완성을 완수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자신을 화장실 같은 으슥한 곳을 끌고가서 죽이라고 부추긴다.

당연히 '정상'인 제롬은 그런 부추김에 넘어가지 않는다. 미치광이의 광란의 춤사위에 합류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인자'로 망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 '합법적인 판결'로써 응당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미치광이의 대답이 가관이다. 그런 방법은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니, 자신은 경찰 앞에서 범행을 부인할 거라고 대꾸한다. 강간한 지 20년이 지났고, 살인한 지는 10년이 지났다.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당신의 손'으로 직접 자신을 살해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테니, 어서 빨리 죽이라고, 서둘러서 '살인자'가 되어 보라고 말한다. 당신이 '제롬'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결론이 궁금하면 소설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평소에 그로테스크(기괴)한 것을 즐기는 취향이라면 적극 추천한다. 하지만 나처럼 소녀소녀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피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나마 '철학적 사유'를 즐길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소설 내용은 정말이지 '불쾌'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적이 '화장(코스메틱)'을 하고서 뛰쳐나올 법한 '사이코틱'한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