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현실 편 : 역사 / 경제 / 정치 / 사회 / 윤리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1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현실편 -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  채사장 / 웨일북 (2020)[2014년 개정판]

[My Review MMXX / 웨일북 1번째 리뷰] 이미 많은 분들이 먼저 읽고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입증한 책이기에 하릴없는 찬사는 각설한다. 벌써 이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인 '무한편(2024)'이 출간되었기에 늦은 감이 있지만 서둘러서 리뷰를 올리고자 한다. 물론 어린이책으로 출간한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도 널리 읽히고 있으니 책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리뷰는 쓰지 않도록 하겠다. 다만 이 책의 근간인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데 평소에도 지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하고 싶다. 내가 끝없이 책을 읽고 부지런히 리뷰를 쓰는 까닭이 바로 '지적 대화'를 나누고 싶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런 사람을 매일 만나고 싶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경제'다. 무턱대고 '경제' 운운하니 어려운 내용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무릇 경제란 '먹고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가 아무리 어려운 말을 써놨어도 결국 '먹고 사는 일'을 써놓았을 뿐이다. 그러니 평소에 '먹고 사는 일'에 관심 좀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경제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적 대화'가 쉽지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그냥 수다 떠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데 반해서 '지적 대화'라고 하면 숨이 턱 막히고 말문이 닫혀서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기 때문이다. 당췌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 먹을 것 같은 '지적 대화'를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런 건 어려운 말도 척척 알아듣는 '전문가'들끼리 하면 되지 않나? 그런 다음에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던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해도 좋으니 '먹고 사는 데'에 문제만 생기지 않게 해주면 고마울 따름인데...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지적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평생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남들 좋은 일만 하는 '선행'을 일삼다 죽을 때가 되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그냥 이 세상과 작별할 것이다. 뭐, 대부분 그러고 사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슬슬 열받지 않는가? 조금 똑똑하다고 덜 똑똑한 사람을 무시하고, 가진 것 좀 많다고 없는 사람들 업신여기는 행태가 정말 꼴보기 싫지 않던가 말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덜 똑똑했고, 없이 살았나? 아니아니, 무식하고 가난해도 착하게 살면 사는데 지장이 없게끔 만들어주어야 할 것 아니냐고 따지기는 했었나? 그렇다면 정말 잘 했다. 맞다. 그렇게 따져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보아도 세상이 바뀐 적은 없었다고? 세상을 바꾸려면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아야 바뀔 것 아닌가? 안 그런가? 그렇다면 '지적 대화'를 나눌 정도의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지식을 유용하게 써먹길 바란다. 그럼 세상은 바뀌게 된다. 당신에게도 주어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권리를 유용하게 써먹으면 세상도 결국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지적 대화'의 첫 장을 펼쳐보자.

이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을 끝까지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딱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복잡한 세상을 딱 두 갈래로 갈라놓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극단적'으로 세상을 갈라놓았다는 점을 이해하면 아주 좋다. 절미하고 두 갈래의 세상은 바로 '지배자의 세계 vs 피지배자의 세계'다. 뭐라고?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정말 대단하다. 그럼 조금 더 내용을 첨가해서 두 개의 세상을 좀더 구체화 시켜보겠다. '(소수) 지배자의 세계 vs (다수) 피지배자의 세계'다. 뭔가 감이 오는가? 아직이라면 질문을 하나 던져 보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느 쪽의 세계에 속해 있는가? 99.99% '다수'쪽인 '피지배자의 세계'에 속해 있을 것이다. 상위 0.0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도 않고, 지금 내가 쓴 리뷰를 읽지도 않는다. 그러니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피지배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당신은 역사적 관점으로 '노예/농노/프롤레타리아'의 처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간 역사공부를 좀 해본 사람들은 왕의 관점으로, 영주의 관점으로, 부르주아의 관점으로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서 그런 '소수의 관점'에 올라서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었고/있고/있을 것이라면 그런 역사적 관점에 심취해도 좋다. 그러나 대다수의 99.99%의 사람들은 '노예의 처지/농노의 처지/프롤레타리아(노동자/빈자)의 처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적 관점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에 입각한 경제뉴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아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데, 왜 공산당(빨갱이?)도 아닌 우리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불온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 당신이 '노동자의 위치'에 서 있다면 [초기자본주의/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잘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체제는 역사적으로 왕이나 영주, 부르주아의 신분을 가졌고, 결정적으로 '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자본'을 많기 가지지 못한 '노동자 계급'이라면 노동자에게 유리한 [후기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인 당신에게 훨씬 더 유리한 경제체제를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초기자본주의/공산주의]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극단적으로 좌우 양쪽 끝단으로 치우친 체제이고, 두 체제 모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후기(수정)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경제체제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참고로 왼쪽의 체제로 갈수록 세금은 낮아지고, 복지도 낮아지며, 오른족의 경제체제로 갈수록 세금이 올라가지만 복지도 높아져서 '못 가진 사람'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유럽형)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상식으로 알고 있으면 좋을 것이다.

다음은 정치적 관점이다. 우리는 보수, 아니면 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빨간색'이고, 진보는 '파란색'이라는 것도 알아두면 좋다. 그런데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바로 '엘리트주의 vs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말이다. 여기에 앞서 배운 지식을 덧붙여 보자. '(소수의) 엘리트주의 vs (다수의) 민주주의'라고 써놓으면 조금 감이 오는가? 정치적 보수의 성향은 '소수의 엘리트'가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반대로 정치적 진보의 성향은 '다수의 국민들'이 서로의 의견을 모아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렇다.

그런데 '정치에 사회를' 덧붙이면 정치적 보수의 성향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소수의 엘리트가 자신들의 이권만을 챙기는 '독재'로 치닫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반대로 정치적 진보의 성향이 극단적이 되면 '집단주의'가 성행하고, 급기야 다수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전체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집단적 광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개인적인 독재'는 참 많이 경험했지만, 큰 문제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독재자'를 물리치는 방식으로 해결을 보여주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전체주의'는 달랐다. 집단적 광기가 '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이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그로 인한 피해도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 보수와 진보, 어느쪽이든 양쪽 끝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성향'까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정치든, 사회든 '균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너무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경계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중도'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다. 나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중도'라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없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나는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딱 중간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마초아빠도 문제고, 모든 남성은 '예비강간범이다'라면서 극단적 혐오심을 뿜뿜하는 꼴통엄마도 문제지만, 마초아빠와 꼴통엄마의 딱 중간이라고 선언하는 사람을 제정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보수와 진보, 둘 중 어느 한쪽의 성향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쪽을 번갈아가며 지지하는 줏대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잘 고려해서 한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지적인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의 마지막은 윤리적 관점을 선보였다. 어려운 건 다 뺐다. '의무론 vs 목적론'이다. 둘 중 하나만 딱 고르면 된다. 의무론을 간단히 정리하면, '결과'보다는 이미 주어진 의무와 도덕 법칙을 준수하는 것을 중시하는 윤리관이다. 그래서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무던히도 강조한다. 반면에 목적론은, '행위의 결과'가 행복과 쾌락이라는 이익을 발생시킨다면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으로, 궁극적으로 보면 '전체의 이익'을 강조하는 것이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적 관점'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노동자인 당신은 어느 쪽을 선호해야 바람직할까? 당신이 (다수의) 노동자 관점을 지니고 있다면, 경제적으로 '후기자본주의/사회주의'를, 정치적으로 '진보/민주주의'를, 사회적으로 '집단주의'를, 그리고 윤리적으로 '목적론(공리주의)'를 선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물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노동자인 당신이 '엘리트주의'와 '개인주의', '의무론'을 지지하며 다수의 이득보다 '개인의 이익'에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고 해도 그건 당신의 선택이니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당신은 '엄청난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성향이 아무리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쪽이라하더라도, 당신이 속한 세계가 '세금 많이 거둬서 복지혜택 많이 받아야' 겨우 먹고 살만한 쪽이라면, 어느 쪽을 지지하고 선호해야 바람직한지 앞에서 다뤄봤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이 알뜰살뜰 돈을 모아서 멀지 않은 미래에는 '엄청난 자산가'가 될 것이 틀림없다면, 그런 선택이 후회될 리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계층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로또를 연달아 10번쯤 당첨되면 가능해질까? 주식과 코인 투자에서 초대박에, '따상'을 거듭한다면 모를까? 절대로 가능해질 수가 없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속에서는 이미 한 발 앞서간 자본가를 따라잡을 '개미'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퍼개미'라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왜 불가능한지는 앞서 설명한 개념을 잘 파악해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속해 있는 세계가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어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노동자'인데 '왕과 영주와 부르주아의 역사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을 바꿀 수가 없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자. 노동자를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사회주의'만이 옳고, '진보 정치'만이 맞고, '다수의 이익'을 선호하고, '목적론적인 공리주의'만이 정답으로 삼아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선택에 '정답'은 없다. 어느 쪽이 내게 더 '유리한지/불리한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때로는 내게 불리한 선택이더라도 기꺼이 희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도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그럴 때도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지적 대화'를 나눌 정도의 지식을 쌓았다면, 이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첫단추를 스스로 꿸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답'을 찾았다면, 그건 이 책을 '잘못' 읽은게 분명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판단이 섰다면 정말 제대로 읽은 셈이다. 그런 당신과 '지적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짝 심리학 2 -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의 병 한빛비즈 교양툰 9
이한나 지음 / 한빛비즈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짝 심리학 2 :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의 병>  이한나 / 한빛비즈 (2020)

[My Review MMXIX / 한빛비즈 169번째 리뷰] 우리는 '마음의 병'에 대해서 조금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들이 많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몸(신체)'이 아플 경우에 아무 거리낌없이 병원에 들러서 치료도 받고, 상담도 받고, 심지어 별로 아프지도 않는데 '건강관광(?)'이라도 다녀오듯 동네병원부터 큰 대형병원까지 아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다녀온 것을 자랑하듯 떠벌린다. 그런데 유독 '정신병'에 대해서만큼은 쉬쉬하기 일쑤다. 자신의 정신질환을 감추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친척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고, 심지어 '가까운 지인'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감추기 일쑤다. 왜 그런 것일까? 몸이 아프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녀오는 병원인데, 정신(마음)이 아프면 감추기 급급하다.

그 까닭은 우리는 '정신질환'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혈압 환자'가 평생 혈압약을 복용하며 혈압을 조절하듯 '정신질환자'도 가벼운 약물치료로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죄(!) 사실에만 너무나 집중적인 관심과 뉴스가 이런 오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테면, 평소에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택에서 목을 메고 자살을 했다는 뉴스, 유명 연예인이 어느 날 갑자기 잘 나가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며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면서 너무 힘들다는 소식을 울먹이며 전하는 뉴스, 조현병을 앓고 있던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옆집에 살고 있던 이웃을 식칼로 온몸을 서른여덟 번 찌르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경찰이 빨리 출동해서 범인을 제압하고 구급대의 재빠른 응급조치로 다행히 피해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는 뉴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40대 남성 과외교사가 10대 여중생을 '가스라이팅'으로 꼬셔서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는데, 피해 여중생은 아직도 서로 사랑해서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냐며, 가해자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나, 가해자 남성을 체포한 경찰은 '미성년자 강제추행죄'를 적용해서 40대 가해자를 구속수사하고 있으며, 이 남성이 과거 '정신과 치료 경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현재 ㅇㅇ병원에서 '항정신성 검사'를 진행중에 있다고 밝혔다는 뉴스 등등, 이런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은 죄다 '이상한 사람들'일까? 일례로 '사이코패스 질환자'는 생각보다 수가 많은데, 전체 인구 가운데 무려 1%가 사이코패스 질환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흔하단다. 80억 인구 가운데 8000만 명이 '사이코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자면, 한 반에 35명의 학생이 있다면, 세 개의 반 학생들 가운데 1명 꼴로 '사이코패스'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학교에서 한 학년에 1명꼴로 '살인마'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흔하디 흔한 '고혈압 환자'라고 해서 모두 병원 침대에서 누워서 꼼짝말고 '집중치료'를 받아야하는 중증환자가 아닌 것처럼 실제로 '고혈압 증세'가 있더라도 약물치료도 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무리없이 해내는 것처럼 '사이코패스 증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 주변에 '평범한 1인'으로 살고 있다는 얘기다.

이게 더 무섭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사이코패스' 증세를 자기도 모르게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엘리트 집단'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교1등이 모두 '사이코패스'라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가 흔히 정신질환자들을 '천재, 아니면 바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 가운데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뭐, 그래서 '사회지도층'에 속한 엘리트들 가운데 패륜과 패악질을 일삼는 이들(?)이 참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암튼 우리 주변에 '사이코패스'와 같은 정신질환자들이 엄청 흔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 뿐이다. 지금 당신의 Boss가 이상한 행동(?)을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있다면? 그가 '사이코패스'일 수도 아닐 수도 그럴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정신질환자가 우리 주변에 정말 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 주변에는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도 맞다. 정신질환자라고 다 증상이 심각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정신질환자의 소견을 갖고 있더라도 '자가 증세'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다. 또한 있더라도 매우 약해서 자신이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해마다 '건강검진'을 할 때에 아무 진단도 받지 못하고 건강하다고 판정을 받은 이들도 '정밀검사'를 받았을 때 여기저기 의심소견이 발견되었다며 더 자세한 검사를 진행하자는 '건강의 적신호'가 켜지듯이, 정신질환도 평소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 싶다가 특정하고 심각하며 열악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닷없이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질환' 소견을 갖고 있더라도 '정상'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이다. 증세가 더 심해지지 않게 조심하면 된다.

하지만 '증세'가 나타났고 점점 심해진다고 느껴진다면 반드시 '정신질환' 검사와 치료를 병행하면 된다. 요즘엔 약물요법도 효과가 좋고, 주사를 맞으면 일정기간 동안은 별문제 없이 지낼 수 있는 치료법이 많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 때문에 불필요한 행동으로 심한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특히 '마음의 병'은 약해 빠진 마음상태 때문에 일어나는 병이니 빡센 정신단련이 필요하다는 둥, 미친놈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면서 가뜩이나 '마음의 병'으로 아파하는 환자를 막무가내로 대하는 어리석은 짓은 제발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심장병'에 걸린 환자에게 심장을 단련시킨다며 매일매일 10킬로 런닝을 강제로 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가뜩이나 심장기능이 약한 환자에게 무리한 운동을 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 마찬가지다. '정신질환'은 단순히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신체기능(특히, 호르몬)'이 다르게 작용해서 벌어지는 이상증세다. 이런 증세를 보이는 사람에게 정신수련이니 신체단련이라는 빌미를 내세워서 몽둥이를 들이댄다면 증세는 더욱 악화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신질환의 실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두어야만 한다. 먼저 '우울증'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대표적인 정신질환이다. 왜냐면 원래 인간은 활발한 '신체활동'을 하도록 진화되었는데,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일상을 '실내'에서 햇빛도 쬐지 못하고 보내지 않느냔 말이다. 정신병 걸리기 딱 좋은 환경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잠깐의 휴식시간이라도 좀 걷고 햇빛도 쬐고 대화도 나누면서 정신건강을 좋게 만들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공황장애는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동반한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반복되면 공황장애가 발생할 확률도 높아지는데, 주변 사람이 보기에는 별 문제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여버리니 문제다. 물론 약물치료법도 있지만,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스스로 별문제 아니야 라면서 다독이면 진정효과가 나타나는데, 제삼자가 보이게 별 것 아닌 것처럼 행동하지는 말자. 그게 공황장애를 더 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현병 환자가 100% '살인자'라는 오해부터 버리자. 조현병 환자의 주요 증상이 망상과 폭력이긴 하지만, 정작 조현병 환자를 심각한 망상과 끔찍한 폭력을 저지르게 만드는 원인은 주변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반응' 때문이다. 그래서 조현병 환자들은 자존감이 매우 낮다. 그래서 잘 치료가 되어서 퇴원을 했던 환자도 주변의 손가락질 때문에 다시 병원에 재입원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사이코패스는 너무 흔해서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정신질환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속담에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알아야 한다'가 정답이다. 몰라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대충 알고 있다가 잘못된 상식을 접할 경우에 더 큰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엘리트 집단'은 필히 정신질환 검사를 해야 한다고 본다. 너무나도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인데, 사람으로서 할짓, 못할짓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상계엄을 해놓고 계몽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꼭 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틀러의 성공시대 1 히틀러의 성공시대 1
김태권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틀러의 성공시대 1>  김태권 / 한겨레출판 (2012)

[My Review MMXVIII / 한겨레출판 9번째 리뷰]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경,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선포', 즉 '계엄령'이 떨어졌다. 전세계적으로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손꼽히던 대한민국이 한순간에 군대를 동원한 비상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군을 동원할 정도로 심각하고 위태로운 국가위기 상황이 펼쳐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전혀 아니었다. 아니, 위기를 맞이한 이들이 있긴 있었다. 바로 '윤석열 정권의 쿠데타'가 성공하길 간절히 바라던 내란세력이 줄줄이 탄핵을 당하고, 국정운영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결국 '계엄'이라는 사태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내란'으로 꽉 막힌 국정을 뚫어보려 했고, 필요하다면 '외환'까지 일으켜서, 나라야 망하든 말든 저들의 '정권유지'에만 성공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이 망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심보로,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한 셈이다. 그러나 최후의 발악치고는 꽤나 공을 들여 '내란계획'을 짰고, 최고의 엘리트라고 불리는 집단들을 총동원해서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등 아주 세심한 배려까지 했다. 그리고 최후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비장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법조인 카드'를 총동원해서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절대 지지 않는 싸움을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모양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윤 대통령 파면' 선고를 했는데도, 이에 불복하고, '재집권'을 통한 정권연장을 끝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다. 정말이지 파도 파도 또 나오는 '내란동조세력'들은 끝까지 '정적 죽이기'를 통해서 재기를 꿈꾸고 있다. 정말 바보들인지 천재들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재명 하나만 죽이면 대한민국을 '제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대단한 착각에 빠져 있다. 국민들이 정말 그렇게 바보들이고, 계속 속아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으니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바로 김태권의 <히틀러의 성공시대(전2권)>(2012)였다. 당시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정권교체'가 있던 시기였는데, 그 당시에 '극우세력'들이 가스통을 들고 나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지만 크게 이슈화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극우들을 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다면서 '파시즘(나치즘)'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아졌던 적이 있었더랬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는 '극우세력'들이 정말 크게 불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늘 '그 정도'였는데, 그런 극우들의 과격한 행동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많이 늘어난 요즘이 우려스러운 상황이 된 셈이다. 그런데 꼭 100여 년전 '독일사회'도 그랬다. 1920년대 독일사회는 정말이지 너무도 암울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을 하고 어마무시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만 했던 독일인들은 경제적으로 그야말로 밑바닥을 전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독일에 '미국발 경제대공황(1929)'이 덮치자 그야말로 경제, 민생 초토화가 되고 만다. 그러자 수많은 독일인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꿈꿨고, 마침맞게 등장한 '히틀러'가 딱이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는 독일사회를 더욱더 엉망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 홀로코스트'까지 자행하면서 온갖 악질적인 행패를 부리고서 끝내 자결했던 것이다. 나라가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패악질을 일삼던 히틀러를 독일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았다는 죄책감까지 온통 독일국민들의 짊어져야 할 불명예였던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어리석은 전철을 직접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히틀러'가 정당한 방식으로 집권을 한 것일까? 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김태권은 이 책에서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말이다. 왜냐면 독일사람들이 선거를 통해서 '나치당'을 뽑아준 것은 맞지만, 나치당이 '1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 득표수에서 18% 정도밖에 되지 않은 2위에 머물렀다. 오히려 독일인들은 '사회민주주의(사민당)' 정당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왜냐면 당장 먹고 사는데 힘겨운 마당에 기득권들을 옹호하는 '보수정당'을 뽑아주기보다는 있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둬서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골고루 나눠주려는 '진보정당(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더 많은 표를 주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정당득표율 1위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고, 3위는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뜬금없이 들어본 적도 없는 새로운 '나치당(보수주의 정당??)'을 지지한 것이다. 그 전의 선거 때에는 고작 2.8%의 낮은 득표를 얻어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했던 '듣보잡' 정당이었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나치당'이 약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난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의 전면에 나서서 인기몰이를 해나간 것이다. 그의 특기였던 '연설'을 거의 매일밤마다 전국순회공연하듯 했다고 한다. TV나 영화 같은 오락거리가 없다시피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밤마다 되풀이되는 '히틀러의 연설'은 꽤나 인기있는 공연을 대신하는 오락거리였던 것이다. 그 연설에서 히틀러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격정적인 연설을 이어간다. 그가 한 번 연설할 때마다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빠졌고, 연설 도중에 마신 물도 20병이 넘을 정도라고 한다. 물론 그의 연설이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출신이 매우 낮아서 '귀족'들이나 '지식인'들의 눈높이로 보면 더러운 협잡꾼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예절이나 예법조차 몰라서 그야말로 '촌뜨기 행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많은 군중들은 그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다. 만약 환호를 보내지 않거나 비판이나 비난을 한다면 '돌격대(SA)'로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폭력을 당하기 일쑤였단다. 거기다 유명한 선전선동꾼 '괴벨스'의 도움으로 히틀러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다.

이런 히틀러에게 접근한 세력이 바로 독일의 '보수진영'이다. 그들은 패전 이후 인기가 추락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해도 '절대적인 기득권층'으로 군림하면서 온갖 이권을 다 챙기고 일반 국민들을 수탈해갔었는데, 그 결과가 패전이었지 않았느냔 말이다. 인기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필요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얼굴마담(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히틀러도 보수진영이 필요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듣보잡'이었던 히틀러가 독일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폭력적인 선동을 일으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감옥에 수감된 경력까지 있었다. 이런 위험인물을 정상적인 독일국민들이 지지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수진영에서 히틀러는 좋은 '도구'였다. 보수진영이 집권할 때까지만 내세웠다가 '허수아비'나 '바지 사장'으로 써먹다가 필요없으면 내버리면 될 어리숙한(?)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수진영의 기득권층의 눈높이에서 히틀러는 그저 '만만한 상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 본인은 '야심가'였다. 히틀러도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높은 사회적 지위'나 '부유한 경제적 계층'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돈이 꽤나 많이 드는 일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히틀러는 보수진영을 철저히 이용하려 했다. 자신의 부족한 '인지도'를 끌어올리 수 있도록 '보수진영(특히, 언론기관)'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였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히틀러는 일약 '대스타'로 떠올랐고, 독일 전역에 '히틀러'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수진영의 덕을 보면서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반대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두들겨 부수었다. 특히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은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독일사회의)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흑색선전을 끊임없이 만들어 배포했다. 경제대공황으로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자 '돈 많은 유대인들'은 가장 공격 받기 좋은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들에게 그런 대우를 해도 괜찮다는 사상을 계속 주입시키고 널리 퍼뜨렸다. 가뜩이나 경제 혼란에 휩싸인 독일사회에서 '분풀이'를 할 수 있는 대상을 친절하게 정해주기까지 하는 '나치당'에 감사인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독일사회는 병들어 갔다.

윤석열 내란세력이 '음모론'에 심취해서 거짓선동을 한 것을 두고서 '히틀러와 나치부역자들'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심한 걸까? 하지만 헌재의 파면선고 이후에도 '윤석열 일당들'이 하는 행태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저들이 하는 행태는 모두 '정당한 행정적/사법적 절차'를 따르고 있어서 더욱 괘씸할 뿐이다. 절차상의 헛점을 파고들어서 저들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하고, 정적들 제거할 때에는 시시비비도 가리기 전에 신속하게 처리해버리는 꼼수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염치를 모르는 철면피들이다. 더욱 괘씸한 것은 이런 철면피 짓을 저지르는 일당들이 하나같이 대한민국 '엘리트'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똑똑한 사람들이 저런 짓거리를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되려 자신들을 따르지 않으면 멍청한 거라면서, 자신들의 행위 일체를 '계몽의 일환'이라고 일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을 깨우치라는 것인가? 정작 깨우치고 나면 '윤석열 일당'이 파렴치한 족속들이라는 것을 낱낱이 알게 될텐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제 웬만한 국민들은 진짜 나쁜놈이 누구인지 다 안다. 그런데 그런 나쁜놈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왜냐면 그런 나쁜놈들도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권을 누리도록 해줘야만 하고, 자유를 보장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저런 나쁜놈들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했더라도 말이다. 그런 행위조차 관대하게(?) 포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저런 똘끼 충만한 이들은 늘 있어왔고, 그들의 수가 10~20% 내외일 경우엔 크게 문제될 일도 없다. 그 옛날 여의도 한복판에 LPG 가스통을 어깨에 둘러매고 나왔을 때도 별문제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40~50%에 육박하니 크게 문제가 되고 만 것이다. 윤석열과 전광훈, 전한길 같은 애들이 선전선동을 하니 '서부지법 폭동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마터면 '민주주의'가 완전히 궤멸될 뻔했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제 윤석열은 끌어내렸고, 사태는 점점 진정되고 있다. 그렇게 판을 치던 극우세력들의 난동도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다. 대선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안정세는 더욱더 높아지는 추세인 것이 정말 다행이다. 이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대법원 파기환송'이라는 사법부의 만행만 저지 시키는데 힘을 모으면, 저들의 최후는 사필귀정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이제 국민들이 보여줘야 한다. 극우세력은 딱 10%가 적당하다. 그걸 어찌해보겠다고 '국민의힘 정당'에서는 끝까지 붙들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에 불과하다. 제발 정신 못 차렸으면 좋겠다. 이참에 싹 쓸어버리게 말이다.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지켜낼 마음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끄떡 없다. 이제 다시 전세계의 모범이 되는 나라로 거듭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후 네 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 김남주 / 열린책들 (2017) [원제 : Les Catilinaire (1997년) ]

[My Review MMXVI / 열린책들 22번째 리뷰] 노통브의 소설의 시작은 대동소이하다. 그 시작은 늘 '장광설'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의 나열', '대화의 연속'으로 독자들의 혼을 쏙 빼놓기 일쑤다. 그런데 그게 중반을 넘어가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직은 '전체'를 알 수 없지만 '부분'을 드러내놓고서는 독자들을 향해 '전체'를 짐작해보라는 일종의 '암시' 내지 '복선'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게 노통브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그런데 이것도 '세기말'에나 통할 법한 방식이지 요즘 독자들에게는 도통 먹히질 않을 낡은 방식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요즘 트랜드는 '결말'부터 다 보여주고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방식..이것도 조금은 철 지난 방식이라서, 쩝.. 암튼, 노통브의 소설이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는중'이라는 점만 밝힌다.

<오후 네 시>는 노통브의 소설중에서도 초창기 소설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네 번째 소설'로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읽는맛'이 살아있는 소설들 중에 하나인데, 2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읽으니, 조금은 식상한 패턴으로 전개되는 느낌만 받고 말았다. 처음 읽었을 땐, '공포소설'을 읽는 것 같은 서스펜스마저 생생하게 느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을 땐 '소설의 후반부'가 전혀 기억나질 않아서 '처음 읽는 느낌'이 날 정도였다. 그만큼 그 당시에도 인상적인 소설은 아니었다는 것이 언뜻 기억났을 정도였다. 요컨대 '반전'이 좀 약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줄거리도 좀 밋밋하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반부는 '자장가'를 낭독하는 것처럼 잔잔하다. 65세 동갑의 노부부가 바쁜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남은 여생을 호젓한 시골에서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이사를 간 곳의 첫인상은 너무도 좋았으나,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불쑥 찾아오는 이웃 때문에 점점 불쾌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불쾌한 방문객을 피해서 일부러 '오후 네 시'에 집을 비우고 산책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쌀쌀한 날씨에 무리하게 바깥 활동을 한 뒤에 아내가 감기에 걸리자 꼼짝하지 못하고 침실에 눕고, 남편은 간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오후 네 시가 되자 문짝이 떨어져나갈 듯이 심하게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나자 어쩔 수 없이 불쾌한 이웃의 방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남편은 꾀를 내었다. 차라리 불쾌한 방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저녁 초대'를 하자고 말이다. 그래서 하루의 어정쩡한 시간인 '오후 4시~6시'가 아닌 '저녁 8시 이후'의 시간에 초대를 하고서 면박을 주면 '불쾌한 방문'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게 된다. 물론 저녁초대에 걸맞게 '부부동반'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비이성적인 남편'과는 달리 '이성적인 아내'의 판단으로 더는 이웃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과 함께 말이다. 노부부는 불쾌한 이웃을 위해 정성껏 저녁 준비를 한다. '최후의 만찬'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노부부의 희망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불쾌한 방문을 일삼는 남자의 아내는 '혹'이라는 표현도 무색할 정도이고, '암덩어리'에 가까운 '낭종'같은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겉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은 노부부는 그럼에도 예의를 다해 저녁을 대접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초대해주셔서 고맙다'거나 '성찬을 준비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나 많이 쳐먹으면서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당신 부부가 퍽이나 대단하구려"라는 빈정거리는 말들 뿐이었다. 더구나 네 사람 분의 식사를 준비했는데, 저들 부부가 거의 다 쳐먹으면서도 '사치스런 생활이 부끄럽지 않냐'는 둥의 무례한 말도 서슴지 않고 말이다. 그나마 초대받은 부인이 말 한마디 없이 얌전했는데, 그토록 얌전했던 까닭은 살이 너무 쪄서 얼굴에서 눈코입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고,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이 "쿠웨엑~"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제 노부부는 더는 참을 수 없게 된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진 늙은 남편은 불면의 밤을 보내던 중, 어느 날 밤, 우연찮게 시끄럽고 불이 켜진 불쾌한 남자의 차고를 살펴보다가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데 그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고를 하고 구조를 하게 된다. 다행히 그 남자의 생명은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문뜩 그 소식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남편의 보살핌이 없으면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물(?) 같은 아내를 대신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노통브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해, 노통브의 본색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이 소설의 원제를 뒤치면 '카틸리나리우스 음모(기원전 63년 로마 집정관 카틸리나의 쿠데타)' 정도가 될 것이다. 이를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음모론' 정도로 뒤칠 수 있겠지만, 무턱대로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는 음모론을 거론하는 것이 어색하기에 '오후 네 시'쯤으로 제목을 정했을 거라 짐작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핵심인 '음모'에 대한 예상을 한국의 독자 대부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음모'에 관한 배경지식이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늙은 남편'이 보이는 말과 행동의 유일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연 늙은 남편이 아무도 모르게 감춰둔 음모란 무엇일까? 원제를 보고도 알 수 없는 독자들도 소설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늙은 남편의 말과 행동이 점점 바뀌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노통브는 이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게 또 묘한 느낌을 준다.

그 까닭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노부부의 남편이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인은 '불쾌한 이웃 남자' 때문이다. 그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불쾌함을 넘어 '불면증'에 시달리고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이며, 점점 심해지는 신경쇠약 증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을 유일하게 존경하는 '여제자의 방문'조차 완벽하게 망쳐놓아 다시는 방문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러서 좌절했기 때문이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스런 손녀딸처럼 예뻐했던 제자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노부부의 남편은 기꺼이 '하이드 씨'로 변신하길 원했다. 물론 '지킬 박사'로 되돌아오면 자책할 정도로 양심은 남아 있었지만, '하이드 씨'가 되어 저질러지는 일까지 막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고도 쾌감에 전율하며 웃을 수 있는 하이드 씨가 되는 것을 살포시 방치했던 것이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노부부의 아내에게는 물론, 그 불쾌한 이웃의 아내에게까지도 말이다. 다시 지킬 박사로 되돌아왔을 때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을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한걸까?

이 소설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가해자'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또한 여실히 나열하고 있다. 그러면서 독자들까지도 '공범'으로 만들고 만다. 소설속의 등장인물은 아무도 모르지만 '독자'인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말이다. 뭐, 이를 두고 노통브를 '천재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고 입방아를 떨곤 하지만, 나는 그런 '공범' 따윈 되고 싶지 않다. 왜 독자를 애꿎게 범죄자를 옹호하고 범죄에 동조하게 만드냔 말이다. 참으로 발칙하기 짝이 없다. 그런 발칙한 작가를 '천재' 운운하는 것도 웃기다.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분명히 밝힌다. 난 아니올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 열린책들 (2017) [원작 :  Le crime du comte Neville ]

[My Review MMXIV / 열린책들 21번째 리뷰] 역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해야 그나마 읽을 맛이 난다. 그럼에도 세기말에 몰아쳤던 그녀만의 '변태가학적인 기풍'은 새천년을 맞아 비에 흠뻑 젖은 아기고양이마냥 풀이 죽어버린 듯 싶다. 그나마 예쁜 작가가 '변태적'으로 썼다는 것, 하나만이 그녀의 책들에 남은 유일한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유일 게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책들이 앞으로도 읽힐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베르나르와 함께 아멜리의 소설도 점점 시들해져 가서 아쉽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비극으로 시작해서 희극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어 '희비극'으로 분류되는 소설이다. 근데 나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서 읽었기에 감히 말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희극이면 희극으로, 비극이면 비극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 '순수한 작품'을 선호하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하는 것은 '개그 콩트'로 족하기 때문이다. 하긴 이 소설의 분량이 딱 '콩트(단편소설)'에 어울릴 만큼 짧긴 하다. 그럼에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서 기대할 법한 그런 결말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좀 의외인 소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말이 궁금한 독자분들을 위해서 '결말'은 까발리지 않으련다. 최대한 내 리뷰를 읽고 나서도 결말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장담한다.

배경은 현대 느빌 백작가문의 성(城)이다. 아주 정직한(?) 귀족이었던 탓에 재정적 파탄을 맞아 가문대대로 물려받은 성을 팔아넘겨야 할 처지가 되고 만 '몰락 귀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사정을 가진 느빌 백작의 셋째딸이 한밤중에 성밖의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맞게 지나가던 점쟁이에게 들키는(?) 바람에 무사히 성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점쟁이가 셋째딸만 넘겨준 것이 아니라 '예언'까지 남겨 두었는데, "파티에서 당신은 초대 손님 중 한 명을 살해하게 될 겁니다"라는 예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느빌 백작은 매년 자신의 성에서 파티를 열었고, 이번에도 '팔게 된 그 성'에서 마지막으로 파티를 열 작정이었다. 그런데 점쟁이가 그 파티에서 느빌 백작, 자신이 초대 손님을 살해할 거라는 예언을 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는 말도 안 된다며 점쟁이의 예언을 일축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에 미치자, 느빌 백작은 파티 초대 손님 목록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귀족가문의 사람이 자신이 개최한 파티에서 초대한 손님을 살해한 '케이스'가 있는지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아주 없지도 않다고 한다. 오히려 너무 자주 있어서 탈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 사실을 간파하자 느빌 백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군.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야 겠군'..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다. 셋째 딸이 아버지의 그런 생각을 눈치 채고서 '살해한 사람'으로 자신을 지목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심한 정신병에 들렸으며,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 되어 '살 의욕'이 없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아버지와 딸 간의 옥신각신이 이 소설의 전부다.

분명 '기발한 발상'이긴 한데, 아멜리가 이런 유의 소설을 그동안 얼마나 우려먹었는지를 감안한다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늘 같은 패턴이지 않은가. 등장인물 두 명이 등장해서 서로 길고 긴 '말싸움(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노통브의 클리세'로 인식될 만큼 너무 많았다. 더구나 이번 말싸움은 '윤리 vs 비윤리'의 논쟁이었다. 어찌 아비의 손으로 직접 딸 자식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아무리 '사고사'로 우연을 가장한다고 한들 그것을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이 책은 굉장히 '부도덕한 소재'다.

그런데 이런 부도덕한 소재를 '그리스의 고전소설'에서 따왔다고 한다. 바로 <아가멤논>에서 말이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 배를 출정하려고 하는데 거센 풍랑이 그칠 줄 모르자 점술가에게 신탁을 받아오라 했더니, '친딸을 제물로 바쳐야 출정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받았다. 이에 아가멤논은 셋째 딸인 '이피제니'를 산 채로 죽여서 제사를 지냈더니 풍랑이 멈췄고 예정대로 출정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족 살해'는 오랜 옛날부터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의'를 위해서 '소의'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전설이 얼마 전까지도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칭송받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동양에서도 부모님이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아내(혹은 자식)'을 죽여서 받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종교적으로는 더 심각하다. '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말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어렵사리 얻은 자식 '이삭'을 신에게 기꺼이 받치려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인용하며 열변을 토하는 목사님들을 심심찮게 봤다.

하지만 난 싫다. 타인을 제물로 받치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친족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가 어떻게 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일이냔 말이다. 그걸 귀족적인 '전통'이나 종교적인 '숙명'으로 추켜세우는 일 따위는 정말이지 역겹다. 그야말로 '악당'이나 할 법한 궤변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악당의 발언 같은 일을 그토록 예쁜 작가가 썼다니 정말이지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로테스크(기괴한) 소설'은 정말 싫어진다. 말만 그럴 듯하게 해대는 '소피스트(궤변론자)'들도 정말 싫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소신을 말하는 것을 볼작시면 주둥이를 쌔려주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