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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 - 만화로 배우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한빛비즈 교양툰 6
로랑 셰페르 지음, 이정은 옮김, 과포화된 과학드립 물리학 연구회 감수 / 한빛비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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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야기는 안 하련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아는 척'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저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지나 리차드 파인만과 스티븐 호킹이 뭔가 조금 더 밝혀낸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아는 만큼만 이야기하려 한다. 혹시라도 미흡한 점이 있다면 '내 탓'이 절대 아님을 밝히는 바다. 그건 '양자물리학'이 그만큼 애매하고 모호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그럼 시작한다.

 

  먼저 '양자(퀀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앞서도 이야기했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원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원자'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로 이루어졌다. 물론 오늘날에는 원자보다 더 작은 '쿼크입자'까지 다루고 있지만, 일단 헷갈리니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말해, '양자의 세계'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세계란 말이다. 너무나도 작은 입자를 다루기 때문에 '미립자' 또는 '소립자'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작은 입자의 세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전물리학이나 상대성원리 따위가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좀더 쉬울 수 있다.

 

  이게 뭔소리냐면, 고전물리학은 뉴턴이 밝혔듯이 '만유인력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면서 밝혀낸 '중력'이 통용되는 물리학이란 말이다. 반면에 상대성원리는 'E=mC X C'라는 유명한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시공간'을 다룬 원리다. 쉽게 말하면,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춘다'는 사실을 밝혀낸 물리학이다. 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뉴턴법칙은 '지구'에서 널리 쓰이고 오차도 별로 없지만, '우주'로 나가면 오차가 커진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원리'를 밝히면서 우주에서도 '오차'가 거의 없는 원리를 밝혀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구와 우주에서 통용이 되는 '물리학'을 밝혀내고 나니 더는 어려운 일이 안 생길 것만 같았는데, 1920년대 이후에 '눈에 보이지 않던 원자'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볼 수 없었던 '원자'를 관측하고 관찰하고 측정까지 할 수 있는 기기들이 발명되면서 본격적인 '양자물리학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 셈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장 처음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빛은 과연 입자인가? 파동인가?'라는 문제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건너뛰고 결론만 말하자면, 빛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중슬릿 실험'이 등장했는데, 이로써 빛에 대한 논란은 잠잠해지는 듯 싶었다. 헌데 같은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자를 튕겨보았더니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분명 '하나의 입자'를 발사했는데, 하나의 입자가 두 개로 분리되어 '동시'에 슬릿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마치 빛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입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하나의 입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지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과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일이 다시 재현된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측장비'가 좋아졌다. 그래서 입자를 촬영할 수 있는 '광자검출기'를 이중슬릿 앞에 설치해놓고 입자 하나를 튕겨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분명 관측하기 전에는 '하나의 입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지나가는 것'처럼 관측이 되었는데, '검출기'를 켜고 관측을 하니 '하나의 입자가 한 개의 슬릿만을 지나갈 뿐'이었다. 어찌된 것일까? 그래서 '검출기'를 끄니 다시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할 때의 현상이 펼쳐졌다. 다시 켜니, 하나의 슬릿만 지나간다. 끄니, 두 개의 슬릿, 켜니, 한 개의 슬릿...마치 '입자'가 관측자의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하는 듯이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상을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입자가 오른쪽과 왼쪽의 슬릿을 통과할 '확률'이 각각 몇 %라고 말이다. 분명한 것은 '입자'가 슬릿을 통과한다는 것이지만, 그 '입자'가 어느 슬릿을 지나갔는지는 오직 '확률'로만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를 두고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과학에서 '확률'을 부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도 이러한 '관측결과'를 두고서 반박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입자(퀀텀, 광자)의 세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알려고 노력했지만 '빌어먹을 입자'라는 말만 내뱉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입자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입자의 세계'에서는 '연속적'인 것이 거의 없다. '불연속'이 더 자연스러운 곳이다. 하나의 입자는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 있을 수도 있다. '확률'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관측'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관측장비'로 입자를 사진 찍듯 찍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입자'는 찍힌 순간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기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기'에 입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나의 입자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을까? 바로 '시간'이 멈춘 곳이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로 달리는 물체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쌍둥이의 역설'이 등장한다. 쌍둥이가 한 명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우주여행을 떠나고, 다른 한 명은 지구에 남게 되었을 때, 우주여행을 떠난 지 3년 뒤에 지구에 도착하니, 지구에 남은 쌍둥이는 30년이나 흘렀다는 이야기 말이다. 바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인 쌍둥이는 고작 3년의 시간이었지만, '지구의 시간'은 30년이나 지나 버린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움직이는 물체마다 다르게 흐른다.

 

  그런데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현상이 일어난다. 태양광 한줄기를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가시광선이 '연속적'인 무지개처럼 펼쳐져 보이지만, 수소 입자 하나가 내뿜는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불연속적'인 선이 보일 뿐이다. 이것을 '수소의 고유한 스펙트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수소 입장에서 보면 '4개의 불연속선' 모두에 존재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작 헷갈리는 것은 '시간'도 일정하게 흐르고, '공간'도 차지하고 있는 일상의 우리들이다. '시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는 어느 위치든지 '한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만,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여기든, 저기든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다. 그것도 '확률적'으로만 위치를 나타낼 수 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는 세계다. 마치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는 없는...그런 세계라고나 할까?

 

  그런 까닭에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양자물리학'에 대해서 이렇다 할 정리는 잘 안 될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양자물리학'에 대해 어렵게 썼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까지 '양자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사실 이 책은 그나마 '양자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쉽게 도와주는 고마운 책이다. 그런데도 살짝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확률적으로 말하자면 7:3 정도일까? 어느 숫자가 더 쉽다는 확률인지는 직접 읽어보고 결론을 내리길 바란다.

 

  그렇다면 '양자물리학'은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 등은 '양자물리학의 결정체'다. 양자물리학의 이해가 부족했다면 '오차투성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상용화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양자물리학'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것이 '양자물리학'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이 없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지구에 갇혀 지내야만 할 것이다. 그나마 지구 안에서는 '시간의 오차'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를 관측하거나 원자의 세계를 탐구할 때에는 '양자물리학'이 없다면 불가능한 영역이 되어버리고 만다. 모르고 살아도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르고 살면 당장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이 바로 양자물리학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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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망국,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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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빠르게 개화의 물결을 맞이한다. 고종이 끌어들인 청국군과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며 들어온 일본군이 조선에 잠시 주둔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했지만, '텐진조약'을 맺고 일단 물러난다. 하지만 청은 '위안스카이'를 앞세워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고, 일본은 '일본유학생과 급진개화파'를 끌어안으며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하며 새롭게 등장하는데, 조선은 청과 일본을 견제해줄 '구세주'처럼 보았으나 러시아로서는 조선을 청과 일본의 견제를 막아줄 '완충지대'로 이용할 속셈 뿐이었다. 또 하나 있다면 '부동항'을 얻을 수도 있으니 러시아도 조선을 호시탐탐 넘보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형국이 되어서야 조선은 '국제관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민중들은 아직 세상물정에 어두워 귀만 쫑긋 내민 채 듣기만 하고 있었을 뿐이고, 나라밖을 다녀온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서 '왕실'도 개화정책을 쏟아내곤 했지만, 중요한 것은 '개화의 중심'이 되어줄 세력이 없다는 점과 '내정고갈'로 인해 개혁을 지속할 힘마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조선에게 있어서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은 서구열강의 힘이 조선에 크게 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허송세월하고만 있었다는 점이 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위'로부터 시작하는 개혁은 시들시들하기만 했고, 이젠 '아래'로부터 불어닥칠 천지개벽의 폭풍우가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 교주 최제우는 고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처형 당했다. 흥선대원군 치하에서도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천주교 탄압'은 이어졌고, '동학'도 같은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학의 교세는 꺾이지 않았고 탐관오리의 학정이 심해지면 질수록 백성들이 의지할 곳은 '동학'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 고종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수용하는 입장을 밝히자 '동학'도 교조의 신원회복을 요청하였다. 허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충남 보은에 대거 집결하며 교세를 떨쳤고, 고종은 '해산명령'과 함께 청에 파병을 요청할 거라는 액션을 취하자, 2대 교주 최시형은 자발적 해산을 약속하며 교도들을 다시 돌려보냈다. 허나 전라도 쪽에서는 별도의 집회를 열였던 '전봉준'이 강경한 모양새를 보였고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든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전봉준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를 더는 좌시히지 않고 동학농민군을 움직였다. 일차적으로 전봉준이 '고부관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전주감영'으로 진격하는 와중에 멈칫하고 만다. 인근 고을에서 아무도 호응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손화중을 찾아간 전봉준은 설득에 성공하고, 김개남도 뒤이어 봉기를 하니 동학농민군은 '전주감영'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고종은 '전주감영'이 점령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청군 파병'을 요청한다. 리홍장과 위안스카이는 농민군 정도는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파병 요청에 응했고, '아산만'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 일본군이 '인천항'에 등장한다. '공관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우며 말이다. 이는 '텐진조약'에 담긴 내용이었으므로 겉으로 보여진 모양새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일본의 야심은 단순하지 않았기에 오래도록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경복궁'으로 향한다.

 

  이에 '전주감염'에서 대치중이던 '청, 관군 연합군'과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서둘러 합의하고 농민해산에 주력하였다. 왜냐면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군 철수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그래서 청군에게 부탁하며 청군은 받아들여 일본군에게 '공동철수'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제서야 조정은 서구열강들에게 중재를 요청하며 철수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도리어 청에게 "두 나라가 함께 조선의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개혁에 착수하자"고 뻔뻔스런 주장을 했다. 청은 당황하며 "조선의 내전은 이미 평정되었고, 조선의 개혁은 스스로 할 것이니 내정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분명히 했는데도, 일본은 억척스럽게 "청국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증명하라. 3일 안에!!"라는 최후통섭을 날리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고 궁궐을 포위했다. 약속대로(?) 일본은 3일 뒤에 경복궁을 습격한 뒤, 고종을 협박해서 '청과의 조약 파기'와 '청군 철수'를 문서로 받아내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기습공격을 받은 청군은 대패를 하고 만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 내각'을 조정해 '갑오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킨다. '갑오개혁(갑오경장)'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며 '갑신정변'과 '폐정개혁안'까지 일부 수용하는 '근대화'를 표방하는 중요한 사안이건만, 일본의 간섭(군국기무처)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유리(?)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민중에서는 '반일'과 '항일'에 뜻을 굳혀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러한 일본의 '안하무인'격 태도는 농민군의 재봉기를 불렀다. 비슷한 시기 평양성에 집결한 청군도 '2차전'을 준비했다. 흥선대원군도 일본의 들러리만 설 수는 없다며 남으로 내려와 평양의 청군과 손잡고 일본군과 싸우자고 농민군에게 제안했다. 그 와중에 1차전에서 패배한 청군이 평양에 있는 청군과 합류하기 위해 '평택 부근'을 지날 즈음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섬멸 당한다.

 

  암튼, 평양에는 청군이 몰려들고 남쪽에선 농민군들이 재집결을 하였다. 허나 전봉준은 망설였다. 농민군의 수가 20만이라는 '수적 우세'는 갖고 있었으나 대부분 군사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라는 점과 무기라고는 '죽창과 사냥총(화승총)'이 전부인데 그마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화력면'에서 일본군과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농민군들이 '자신(전봉준)'만을 믿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몰려든 수많은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금치'에서 한판 붙었지만, 말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앞에서 죽창과 화승총, 그리고 의로운 기치는 그저 스러지고 말뿐이었다. 뒤이어 평양에서 맞붙은 '2차 청일전쟁'도 거짓말처럼 일본의 압승이었다. 후퇴를 거듭한 농민군은 '해산'을 결정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황해도'에서 소년장수로 용맹하게 싸웠다는 '김구'의 일화만 남긴 채,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이었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 차례로 잡혀 청형을 당하면서 끝맺고 말았다. 2대 교주 최시형도 처형을 당했기에 3대 교주인 손병희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통을 이어갔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였을까? 아니다. 무엇보다 [반봉건, 반외세]를 주목해야 한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동학교도'와 '농민군'의 공동목표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 시작한 개혁이었다. 조선민중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이처럼 펼쳐진 적이 없었다. 이전에도 '민란'과 '농민봉기'가 있었지만 동학농민혁명처럼 '조직적'인 움직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조선의 민중들이 함께 일을 도모했다는 '경험'이 조선 민중을 일깨운 것이다. 이에 우리는 '독립운동사'를 지식인들 중심으로 펼쳐보이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수많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던 '의병'이었고, '독립군'이었다. 문제는 성원과 염원에 비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욱 아쉬운 점은 '양반과 유생 계층들'은 '동학교도'와 '농민군'을 벌레 보듯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사회통념을 깨뜨리려 했다며 '천한 신분'에 '위험한 인물들'이라면서 '의병합류'에도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침략적인 외세 앞에서도 '양반'임을 앞세우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보는 훗날 '친일매국노'보다 더 악랄한 '부역자'가 되었을 것이고, 오늘날의 '적폐들'이 틀림없다. 구수한 된장국 없이는 아침밥을 먹지도 않으면서 '전통된장 담그는 날'에는 냄새가 난다며 집밖으로 도망갈 위인들이다.

 

  이런 와중에도 '조선왕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청에 의지하다 마땅치 않으니 일본에 붙었다가 불에 데이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러시아에 기대려 하는 행보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은 또 하나의 만행을 준비한다. '을미사변'이다. 일본은 야만의 극치를 선보이며 '극우지식인들'을 앞세워 경복궁을 쳐들어가 '명성왕후(훗날 명성황후)'를 욕보이고 시신을 칼로 낭자한 뒤 궁궐 담밖에 버린 뒤에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흔히 '일본 낭인(깡패)들'이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일본은 주장하지만, '미우라 공사'와 '흥선대원군'까지 들먹일 정도였으면 감히 낭인 따위가 저지를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닌 것을 스스로 자백한 셈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에 한껏 취해서 저지르지 못한 짓이 없을 것처럼 여기저기 만행을 일삼았다. 조선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골칫거리로 등장한 '일본'에 대한 경고로 '삼국간섭'이 발생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확장까지 성공하자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끼고서 일본에 한방 먹이는 사건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고서 '만주'까지 영향력을 뻗치려고 하고 있었기에 일본이 '청일전쟁'의 이득으로 '만주'까지 차지하는 것에 딴죽을 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열강에 비해서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기에 '절치부심'하는 격(재수없어!!)으로 만주를 토해냈다. 그리고 러시아와 한판 대결을 예고하게 된다.

 

  이렇게 러시아가 일본에 비해 '강하다'는 느낌을 받은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하겠다는 행보를 펼쳤고,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해서 '아관파천'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임금이 자국에서 외국공사관에 머물며 목숨을 부지하는 상황이라니... 허나 그로 인해 '일본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비록 '러시아의 간섭'을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에 고종은 환궁을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다른 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국'으로 승부를 보려는 멋진 한방이었다. 내친 김에 '황제국'을 표방하며 만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뉘앙스도 선보였다. 그리고 '서재필'을 인재로 발탁하며, 옛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하는 등 '입헌군주국'에 걸맞는 의회정치의 씨앗을 심어보았다.

 

  그 씨앗이 움트는 것은 '대성공'이었다. '만민공동회'는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하는 장이 되었다. 그래서 '만민공동회'가 개최될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며 백성들은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했다. 허나 '만민공동회'의 인기가 고종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민공동회에서 백성들이 하는 주장들이 고종의 정책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황제'인 자신의 명령까지도 백성이 뒤바꾸려는 시도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입헌군주국'이 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시기였고 바람직한 현상이었으나 고종은 불편하다고만 느꼈다. 결정타는 '한러은행' 반대와 '절영도 조차' 반대를 하며 일본을 견제할 러시아 세력까지도 배척하는 백성들의 입김에 의해 거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불편을 넘어 '러시아'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정책까지 막아서는 백성들에게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독립협회 활동'을 막아서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황국협회'를 만들어 사사건건 해방을 놓기 시작했고, 만민공동회가 치뤄지지 못하도록 조치를 행했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만민공동회'도 끝났다.

 

  그리고 대한제국도 더불어서 끝났다. 자주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고종은 스스로 발로 차버린 어리석은 군주가 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겠다는 시도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고, 뒤늦게 미국의 힘을 빌려보려 했으나 미국은 이미 조선편이 아니었다.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결정이 이미 나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만약, 고종이 '독립협회'에 힘을 실어주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민중의 힘으로 외세를 극복하려는 방법을 깨우쳤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만약'은 의미가 없겠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선 '원초적인 힘'이 시민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면, 고종의 판단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스무편의 리뷰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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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의 세계사 산책
이원복 글.그림, 그림떼 그림 진행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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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이 책의 머릿글에도 풀이했듯이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발 닿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여기저기 한가롭게 걷는 발걸음'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 하였다. <세계사>란 다소 무거운 주제인데도.

 그러나 이런 기대는 서문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매우 불쾌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각설) 이 책의 의도는 이러한(이념적 시각이 너무 달라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수 없는 한반도의 특수상황이기에 비수를 품고 살기마저 풍기는 지독한 싸움을 한다고 본다)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추해보자는 것이다. (책머리에)

 지극히 옳은 말이다. 작금의 우리 현실은 이념과 성향, 파벌로 인한 <다툼의 장>만이 펼쳐졌을 뿐, 서로를 이해하고 상생을 넘어 화합의 길을 모색해야하는 데도 그렇지 못해 답답한 시기이니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은 저자의 말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입이 백 개라도 국민을 굶기는 정권은 바른 정권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정권은 옹호하면서 반세기 만에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경제 기적과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을 정의가 패배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안목은 이념적 성향이 아닌 그릇되고 비뚤어진 역사관이다. 이 책은 이러한 사시적(斜視的) 역사관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책머리에)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고서는 지극히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국민을 굶기는 정권은 북한을 지칭하는 듯한데, 그럼 우리 국민들은 굶지 않고 있는가?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떤가 말이다. 이들은 국민이 아닌가? 아니면 <국민>이라 지칭함은 <부자>들만을 지칭하는 말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들거나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의 그늘까지 왜곡하고 덮어서 <대한민국사>를 드높여야 한단 말인가?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은 부끄러운대로 우리의 역사요, 자랑스러운 부분은 자랑스러운대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곧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 보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길이 남겨 후세에게 본을 삼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본질이란 말이다.

 그런 객관적인 역사관을 가진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부분을 강조한다는 둥, 대만민국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의 <자학사관>이라는 둥 대한민국 역사를 진짜로 훼손하고 폄훼하는 분들은 바로 [이원복], 저자와 같은 분들에게 드려야 할 말일 것이다.

 이원복. 한국 만화계의 지성이며, 학습만화의 새 장을 연 동시에 만화에 대한 위상을 드높인 분임에 틀림없다. 어릴 적부터 이런 분의 책을 읽었고, 어른이 되어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이 분이 저술한 책을 수없이 인용한 사람으로서 이 책이 주는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모를 따름이다.

 만화 장르가 어른과 아이를 가르지 않고 고르게 영향을 주며, 손쉽게 읽을 수 있다는 등 장점이 정말 많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향적이고 오독할 우려가 큰 책을, 특히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의 어린 학생들에게 읽힐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은 [객관적이지 않은 책]이다.

 기분 좋은 산책길에 불쾌한 광고판이나 경관을 해치는 몰지각한 건축물을 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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