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 카이사르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 제국의 운명을 바꾼 리더들 서가명강 시리즈 20
김덕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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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XI / 21세기북스 35번째 리뷰] 서양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고들 한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로마사'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할 것이다. 왜냐면 로마사에는 '정치'를 비롯해서, '경제', '종교', '철학', 그리고 '전쟁사'까지 서양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은 통틀어서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로마사에서 '리더(황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였다. 단 한 명의 통치자일 뿐이지만, 단 한 명의 통치자로 인해서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로마사'를 통해서 너무나도 잘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이 책에선 네 명의 황제를 주축으로 다루고 있다. 순서대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디오틀레티아누스',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누스'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공화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즉, 다수의 '원로원'이 두 명의 '집정관(임기 1년)'의 통치행위를 쥐락펴락하면서 로마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데 주력한 덕분이다. 나중에 '호민관'이 더해지면서 '평민들의 요구'도 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제시하는데 역점을 두어 점점 강대해지는 모습을 갖춰나갔다. 물론 '독재관'이 등장해서 로마가 뒤흔들리는 때도 있었다. '포에니 전쟁' 때에는 한니발의 공격에 의해 로마의 '동맹시'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며 최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때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으로 위기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했으며, 오히려 그런 위기를 계기로 삼아서 더욱더 나은 제도를 보완하는 기회로 삼을 정도로 건전했다.

허나, 로마의 영토가 점점 커지게 되자 '임기 1년'의 짧은 집정관 제도만으로는 팽배해진 로마를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로마에게 가장 먼 지역인 '히스페니아(오늘날 스페인(에스파냐)) 영지'로 왕복은 고사하고 편도로만 가는데에도 1년이 소요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먼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집정관'이 직접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도착하자마자 승리하고 돌아올 즈음에는 로마에서는 '새로운 집정관'이 임기를 시작하고 있고, '옛 집정관'은 승전보를 알리기도 전에 퇴임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더는 짧은 임기를 가진 '공화정 체제'로는 거대해진 로마를 통치하기에 힘에 부쳤던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권력욕'을 뿜뿜했던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다. 그도 '갈리아 평정'을 하고 되돌아오는 과정에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오래 전장을 누비도 로마로 되돌아가면 그저 '승리한 장군'에 불과할 뿐, 로마는 원로원을 차지한 의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던 실정이다. 고생은 자기가 했는데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원로원 의원들었던 것이다. 이에 참지 못한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며 자신과 동거동락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깜짝 놀랐지만 누구도 카이사르와 대놓고 대적할 이는 없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꼬드겨서 '삼두정치'를 시작했고, 원로원을 단숨에 제압하고 로마를 '분할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곧 '1인 체제'를 구축하며 '종신독재관'에 취임하게 된다. 크라수스는 동방으로 전쟁을 나섰다가 전사했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서 이집트까지 쫓겨난 뒤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남아 '로마의 공화정'을 대신해 '황제정의 서막'을 열려고 했으나 '공화정파의 암살 실행'에 의해서 카이사르는 그만 죽고 만다. 카이사르가 '왕'에 오를 것을 우려한 '공화정파'가 카이사르를 죽이고 로마 공화정을 유지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살을 시행했고, 성공했지만 로마는 '공화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미 로마시민들은 '강력한 통치자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시민은 '강력한 통치자'를 잃은 슬픔을 원로원과 공화정파에게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서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던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차가 그러했듯 2차 삼두정치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카이사르가 남긴 유서가 공개되면서 '10대 소년'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군단을 이끌고 옥타비아누스와 대결을 벌인다. 허나 이집트 왕조의 클레오파트라까지 동원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를 하면서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최종승리를 거두었다. 실력 차이도 있긴 했으나 '외국군(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군대)'까지 끌여들여 '로마군단'과 맞서 싸우는 것에서 명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는 대승을 거두고 로마로 개선을 하였고,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아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고 '첫 번째 황제(프린켑스)'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 아우구스투스가 집권을 하던 시기가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그만큼 제국은 평온했고, 영토확장을 위해 싸우는 족족 승전을 거두는 등 로마는 거칠 것이 없을 정도였다. 허나 '최고의 정점'을 찍었을 때 내리막을 타는 것은 진리다. 팍스 로마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제국 곳곳에서 삐거덕거리는 일이 비일비재로 터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실패는 '안정적인 제국'을 물려줄 만한 뛰어난 자질을 갖춘 휴계자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10대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77살까지 살며 장수했지만, 정작 '아들'을 낳지는 못했다. 그래서 '양자'를 들이게 되는데, 하필 그 양자들마저 요절하더니, 결국 가장 망나니여서 절대로 '황위'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내쳤던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후계'는 네로 황제를 마지막으로 끝나고, 그 뒤에는 '속주(이탈리아 반도 밖) 출신'의 황제들이 뒤를 잇게 된다. 그나마 속주 출신이더라도 능력과 자질이 뛰어난 '오현제 시대'에는 팍스 로마나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현제 가운데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겐 콤모두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릴 때에는 로마군단의 귀염을 한 몸에 받았던 모양이지만, 커가면서 애물단지로 변했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로마를 '개판 5분전'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제국 통치는 나몰라라하고 '암살' 당할 뻔한 위기 뒤에 아주 그냥 미쳐버려서 온갖 악행이란 악행은 다 저지르다 근위대장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이를 영화화한 것이 <글래디에이터>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도 '검투사'를 즐기다가 죽임을 당하는 줄거리인데, 실제 삶도 꼭 그랬다고 한다.

그 뒤로 50년간의 군인황제 시대가 펼쳐지면서 제국은 더욱더 엉망이 된다. 무려 18명의 황제가 바뀌었고, 임기가 2년도 안 되는 황제로 여럿이었다. 제국은 늘 '군인들의 쿠데타'의 연속이었고, 막강한 군대의 개입으로 정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여기에 북쪽에선 게르만족이,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의 '이민족 침입'이 잦아지니 제국은 더욱더 약해지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하층민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태어났다. 그는 어릴 시절 '군인들이 실력을 키워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그 자신도 '군인'이 되길 희망했다. 그러다 283년, 40살이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많은 전공을 세워 '콘술(공화정 시대의 최고 정무관)'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데, 근위기병대장 시절부터 병사들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인기를 모은 탓에 전폭적인 지지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동방의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방의 황제, 카리누스'와 내전을 일으켰고, 끝내 최종적으로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황제권을 휘두르며 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나투스(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다), 전제정'를 창시하며, 자신을 신격화하고 원로원을 무시하며 '절대적 전제군주의 통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군대를 키워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정부의 행정기구도 마찬가지로 강화시켜 '황제권 체제'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1인 통치'를 하기에 너무 광대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4제 통치체제'다. 먼저 막시미아누스를 양자 겸 '부황제'로 임명해 서방 황제로 임명하고, 자신은 동방 황제를 자처했다. 그리고도 부족해서 두 황제 밑에 '부황제'를 한 명씩 두기로 한다. 그렇게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부황제는 '카이사르'로 칭하며, 동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와 '갈레리우스 카이사르'가 통치했고, 서로마는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가 통치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버지다. 암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의 '구원투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의 통치기간 동안만큼은 국정이 안정되는 모양새를 취하긴 했다.

그러나 '경제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그의 치세 동안 '군사력'은 강력했고, 그로 인해 '정치력'도 막강해서 제국은 안정화시켰지만, 그의 통치시기에 물가가 급속도로 올라가면서(인플레이션) 경제위기가 심각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써보지만 효과가 미미하자 '그리스도교 탄압'을 자행하는데, 이로 인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가들의 빌미를 제공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강력한 황제권을 구사하기 위해서 자신을 '신성화(최고신 유피테르(주피터)의 현신)'시켰는데, 제국내에 10%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문제였다. 경제를 부양시키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황제가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데 '그리스도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이유로 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황제는 그리스도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데, 이 당시에 순교한 이들도 많았지만 '배교'한 이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잔혹하게 박해를 가했다.

그렇게 20년간 통치를 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서 '퇴임 선언'을 한다. 4제 통치의 원칙에 따라 '아우구스투스'가 퇴임을 하면, 그 자리를 '카이사르(부황제)'가 이어받는다고 했으니, 동로마는 '갈레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서로마는 '콘스탄티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이어받는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황제의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서로마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서로마 황제로 등극하자 '군사훈련'을 빌미로 아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순순히 응한 갈레리우스 아우구스투스는 33살의 콘스탄티누스를 서로마로 보내줬고, 1년 뒤에 콘스탄티우스가 갑작스럽게 전사하자, 콘스탄티누스가 군대를 발판 삼아 빈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을리 없다. 군대의 힘으로 서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억울하게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왜냐면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서로마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어서 내려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퇴임 선언'으로 강제로 퇴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빈 황제자리를 콘스탄티누스가 날름 차지하는 것에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에서 충돌했고, 콘스탄티누스 군대가 승리했다. 이 전투는 '그리스도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기도 하는데, 이 전투에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군대에 '십자가를 그리라'는 계시를 받고 전투에 임했더니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하느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리를 설파하기 위해서다. 암튼, 이를 계기로 콘스탄티누스는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고, 이는 그리스도교가 성장하는데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후에 '밀리노 칙령'과 '니케아 공의회'로 삼위일체론 이외의 모든 교파는 '이단'으로 삼고, 로마의 국교는 명실상부하게 '그리스도교'로 공인 된다.

그렇지만 이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심했고, 이 과정에서 '순교'하길 거부하고 '배교(교리를 배신함, 즉, 오직 단 한 분만이 유일한 신임을 부정하고 그리스로마의 신들께 올리는 제사에 참석하여 목숨을 구한 사람들)를 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처럼 제국의 안정이 찾아왔는데, 이를 한순간에 허물어뜨릴 수 있는 숙청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하지 않고서 '관용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1천년 가까이 '황제'가 신격화되었고, 그런 신들을 모셔왔던 로마시민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살아있는 신'으로 존재하기도 했으며, 로마는 '종교의 자유화'를 누리며 더이상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없었던 것이다.

자, 여기까지 카이사르부터 콘스탄티누스까지의 로마사를 간추렸다. 그리고 어떤 '리더'가 로마라는 '대제국'을 흥하게 하고, 또 망하게 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 흥하게 하기 위해서 '정치의 힘', '군대의 힘', '종교의 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를 안정시키는 모습을 엿볼 수도 있었고, 공통적으로 '경제의 힘'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아무리 막강한 제국일지라도 한순간에 파멸로 귀결할 수 있음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모습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이 '경제 무능력'을 보이는 순간,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결국엔 '정국 불안정'이 되자 여러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강대한 로마제국도 한순간에 망가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경제위기는 왜 찾아오는가? 이걸 잘 짐작하면 얼마든지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역사공부를 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 눈여겨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속에서 '오늘날에도 써먹을 수 있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배우고 또 익히는 것이다.

이 책에선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건 '그리스도교의 승리'라는 좁은 시선에서 바라본 결과여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넓혀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고심하면 '단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니 리더를 잘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가 엉망진창일 때 바로 대체할 수 있는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점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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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고 있습니다 - 수짱의 인생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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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X / 이봄 10번째 리뷰] 수짱 시리즈의 마지막편이다. 하지만 마스다 미리의 여러 작품속에서 '수짱'은 간헐적으로 등장하곤 하니 앞으로도 꾸준히 등장할 것이 틀림없다. 수짱의 팬이라면 여전히 기뻐할 일이 틀림없다. 1편은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이다. 제목대로 '삼십대 독신여성'으로 접어든 수짱의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2편에 해당하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가 먼저 출간되면서 열혈독자들을 빠르게 끌어모았다고 한다. '삼십대 여성들의 모든 고민'을 담았기에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3편인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함께 일하는 동료 때문에 하게되는 걱정과 분노, 아니면 그 사이의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만나는 수짱의 고민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4편 <수짱의 연애>에서는 뒤늦게 만난 것 같은 '운명적인 사랑'에 설레이는 수짱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뭔가가 아쉽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빈곳을 채우는 것 같은 '꽉 찬 느낌'을 느끼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잘 안 되는 수짱이 일상을 이제 5편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에서 만날 수 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직장을 가진 여성으로서 '일과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완벽함일까? 아니면 흔히 남들이 말하는 '성공적인 삶'을 달성해서 남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걸 완수할 수 있는 나이는 서른 살일까? 마흔 살일까? 혹시 마흔다섯 살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만족스럽고 '나답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쉽지 않다. 어느 것 하나 맘에 쏙 드는 '정답'이 없으니 말이다.

수짱도 그렇다. 마흔 살이 되었는데 여전히 혼자 살고 있고, 어린이집 급식담당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서른 살에 시작한 '결혼', '연애', '임신' 같은 것은 10년이 지나도록 점점 더 '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카페 점장으로 승진했을 땐 살짝 기쁘기도 했고, 일에 대한 성취감도 얻을 수 있었지만, 카페 주인의 딸 '무카이'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사직서'를 내고 다른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짱이 좋아하는 '요리'를 더욱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요리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전화위복'을 맞이한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살고 있고, 연애는 가물가물하고, 결혼은 점점 가능성을 잃어간다.

여자의 일생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서, 분명 남자의 일생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남녀의 차이를 '차별적 요소'로 보려는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찾게 된다.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는 '사회'가 그런 차이점을 악용해서, 여자에게 불리하고 남자에겐 유리하게끔 '운영체제'를 마련해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시발점이다. 다시 말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아무리 공평한 경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사하게 편파적인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니 치사해서 '아이'를 더는 낳아주지 않고, '섹스'도 해주지 않는 방법 따위로 '남자에게만 유리한 사회'를 만드는 운영체제에 빅엿을 먹이려 하지만, 더 괘씸한 것은 그런 못된 남자들이 '기득권'을 이용해서 수천 년 전서부터 '전통이 어쩌구저쩌구하면서~' 여자들을 농락하고, 서로 이간질하게 만들어서 '저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서 마음 약한 여자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여자의 행복'을 운운하며 남성들이 구축해놓은 시스템으로 쌓아놓은 엄청난 부를 이용해서 '여자들의 속물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여자의 삶'을 이용해먹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여자들은 팔자 고치는 쉬운(?) 방법으로 '돈 많은 남자'를 선택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만다. 값비싼 사치품으로 온몸을 두르게 하고, 의식주를 부티나게 꾸밀 수 있게 풍족하고 여유 있는 삶으로 도취시켜버린 것이다. 그렇게 속아넘어간 여자들은 날마다 백화점 쇼핑을 하고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서 '만족'을 외치게 하고, 다음날에 또 부족해진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 남자들이 벌어오는 돈을 펑펑 쓸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여자의 행복'은 없다. 그저 남들의 '부러움'만 사고 있을 뿐, 정작 자신의 가슴을 충만하게 채워줄 행복감은 백화점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수짱은 어떻게 해서 '나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수짱은 그렇게 돈다발을 들고서 백화점을 털러 갈 여유도, 남자도 없는데 말이다.

진실한 행복은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부자로 살면 매우 편리하긴 하다.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볼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 힘들이지도 않고 '내것'으로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쉽게 얻어진 것으로는 찐하고 오래가는 '참행복'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쉽게 얻었으니 쉽게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부자들은 대개 '싸가지'가 없다. 3편에서 만난 '주인의 딸, 무카이'가 딱 그런 경우다. 도쿄 시내에만 몇 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무카이는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뭐든 다 쉽다. 그리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힘들게 일해서 '카페 점장'에 오른 수짱은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데 반해, 어느날 갑자기 덜컥 '정직원'으로 들어온 무카이는 전혀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짤릴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일을 잘하라는 목적에서라도 '듣기 싫고, 하기 싫은' 것들은 조금도 참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멋대로 일을 하다간 '사업'을 말아먹기 딱 좋지만, 그래도 짤릴 리가 없다. 아니 짤려도 '주인의 딸'이라는 위치는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절대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무카이에게 '행복'은 찾아가게 될까? 남한테 피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반면에 수짱은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인생이다. 왜냐면 전혀 '부러워 할 대목'이 없기 때문이다. 예쁘지도 않고, 번듯한 직장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쪼들리고, 결혼도 못했고, 연애도 하지 않고, 결국엔 그렇게 살다가 홀로 늙어서 '빈곤한 노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수짱은 '나답게 산다'고 말한다. 남들 기준으로 봤을 때 '부러워할 것'이 전혀 없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맛있다'며 먹어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맛있는 요리를 남편과 자신의 아이들에게 먹여주는 기쁨이 더해진다면 더욱더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짱은 그런 과분한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럴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짱은 행복할 수 있다. 수짱답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이미 행복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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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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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IX / 문학동네 20번째 리뷰] 제주 4·3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요원하다. 짙은 안갯속을 헤매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 앞에서 '근거'를 내놓으라며 다그치는 사람들이 맞서는 형국이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이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법적 정의'에 기대어 합법적인 판결로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의 횡포와 초강대국 미국의 압박 아래 어쩔 수 없이 희생된 사건이니,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다짐을 받겠다는 국민들의 열의를 그동안의 정부는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나마 '진보정권'이라 불리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는 미약하나마 진상조사를 진행하고서 국가차원의 사과를 받긴 했지만, 이로써 모든 원한이 해소 되었을까?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학살한 사건을 그 어떤 명분으로 일거에 해소할 수 있겠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45분경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선포'를 느닷없이 발표하였다. '포고령'에는 정치인들의 일체 정치행위를 금지하며, 국회를 봉쇄하고, 선거관리원을 점거하고, 전공의 파업을 전면 금지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이에 국민들은 국회로 달려갔고 계엄군과 맞서 민주주의 질서를 지켜냈다. 그사이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고 경찰의 제지를 뚫고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비상계엄 무효'를 이끌어냈고, 새벽 5시즈음 윤석열은 '무효 선언'을 발표했다. 한밤의 헤프닝으로 끝나야 마땅하고, 윤석열은 '내란우두머리'로 즉각 파면되어 국정 안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이 모든 과정을 법적인 판결로 심판을 받겠다며 '헌법재판소'에 모든 공을 돌려버렸다. 국회는 연이은 특검과 탄핵소추로 국정은 마비가 되었고, 행정부는 '거부권 남발'과 '적법절차'를 따지며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심각성은 망각한채 그저 '위법'이냐 아니냐, '위헌'이냐 아니냐만을 따지겠다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제 모든 공은 '사법부의 판결'만으로 해결하겠다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그 사이에 정부와 국회는 각각 '여론전'에 돌입했고, 국민들은 여당과 야당 편으로 갈라져서 첨예한 갈등만 양산하게 되었다. 흡사 '대선경쟁'처럼 말이다. 외신들은 이런 혼란속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평화적이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했지만, 이런 평가가 무색하게 '서부지법 폭동사건'이 벌어지면서 단 한 방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급락하고, 그동안의 평가는 버블이었으며 다시금 '저평가'할 수밖에 없으며, 성급한 평가였다며 조심스런 관망 모드로 후퇴하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다. 트럼프발 관세정책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수장 공백사태'는 해결기미도 없이 국론은 분열되었고, 이대로라면 윤석열이 복귀하든, 새 대통령이 당선되든 불신과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다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원하는 형국은 또다시 대한민국에 '독재자'가 등장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제주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도 '이승만 독재정권'이 국론분열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고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경제지원을 이끌어내는 문제까지 일거에 해소하려는 '극약처방'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러한 '과거사'를 알게 된 전세계 선진국들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문제를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소하려는 것인지 지켜보겠다며 물러선 셈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선택만 남은 셈이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윤석열 복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는 자신과 마누라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또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설령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도 국정운영에 대한 '무능력'으로 일관한 탓에 결국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국정파탄을 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그럼 윤석열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으로 현 지지율 1위인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까? 지금의 '국론분열'된 상황에서 반이재명 측에서 벌이고 있는 '사법리스크'로 계속 국정을 흔들고 폭동도 불사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 결론으로 나더라도 대한민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결말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사법부의 판단'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로 정의를 세울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았다.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승복한 뒤에' 벌어질 민주주의 질서 회복이다. 폭력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 어차피 정치인은 다 그놈이 그놈이다. 정치인 한 명 바뀐다고 대한민국이 바뀌지는 않는다. 허나 국민이 바뀌면 대한민국은 바뀐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는 '원칙'만 지켜진다면 법은 어떤 법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제는 국민들이 질서회복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정치인 한 명의 독단으로 온나라가 흔들리고 말 거라면 차라리 그런 국민들은 학살 당해도 싸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응원봉을 들고 단합된 '한 목소리'를 낸다면 독재자라도 물리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엄령이 떨어지자 '계엄군'이 총 한 방도 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들은 온몸으로 계엄군을 막고 총부리조차 겁내지 않고 맞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계엄령이 해제된 것이다. 이게 '한 목소리의 힘'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진 '정부여당'과 '사법부', 심지어 '헌재'까지 어땠나? 대한민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최적의 판결'을 내린 것이 있던가? 정부여당은 헛소리로 일관하며 국정마비의 원인을 '야당탓'으로 돌리고, 사법부는 '적법절차'를 따지며 판례에도 없는 괴상망측한 논리로 내란우두머리를 수사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헌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헌법해석'에 골머리를 썩고 있느냔 말이다. 당신들의 오판 하나로 대한민국에 '지옥문'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정녕 국민들을 '제주 4·3 사건 당시'로 되돌리고자 한단 말인가?

서론이 길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위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줄거리가 담겨 있다. '죽은자'가 '산자'에게 들려주는 간절한 소망만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소망은 '살아달라'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었더라도 죽고 난 다음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살아서 하고픈 말을 다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때를 기다리라고 전하고 있다. 손가락이 잘리는 고통보다 '손가락의 신경을 되살리는 과정'이 더욱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은 '신경세포'를 일깨우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다친 부위를 찌르고, 바늘을 꽂았던 곳의 상처가 아물면 또다시 찔러 피를 내서 계속 '상처인 채'로 남겨두어야 신경이 완전히 되살아나는 혹독하고 끔찍한 과정이다. 그 극심한 고통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할 수 없으니 '간병인'이 주기적으로 찌르고 또 찌르면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도록 관리해야만 한다. 언제까지인지는 분명하다. '신경'이 제자리를 찾고 다시 원래의 '감각'을 되찾을 때까지 반복할 것이다.

인선이 목공일을 하다가 전기톱날에 손가락이 짤리는 사고를 당한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이었을 것이다. 산간마을 속에서 홀로 깊숙히 숨어들어 살고 있었으니 병원에 실려가 응급조치를 받고 수술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을 것이다. 까딱했으면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허나 손가락이 잘린 뒤에 치료과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평생 불구로 살며 '손가락'을 포기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온전한 '손가락'으로 되돌리려 끔찍한 고통을 참고 또 참아내는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는 삶이다. 이쯤하면 '손가락 절단 사고'가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한밤중에 '앵무새 한 마리'를 살리려 제주도로 날아간다. 그리고 무릎까지 쌓은 눈을 헤치고 인선의 외딴집으로 들어가 '인선의 과거'와 마주한다. 그곳에서 경하는 인선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하지만, 끝내 성냥불 하나에 온 희망을 다 거는 간절한 소망을 말한다. '살아 달라'고 말이다.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간절히 소망한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행불자'가 되었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을 추적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말이다. 분명 '여기'서 '저기'로 보냈다는데, '저기'에서는 '온 적'도 없다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국민이 사라졌는데도 이 나라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는 논리로 그냥 밀어붙인 것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고, '산 사람'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엄혹한 시절을 보냈다. 이제 대한민국도 갈림길에 선 것이다. 살았든 죽었든 '할 말'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듣기 싫은 말'을 할라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도 족치고서는 '법치주의'의 뒤에 숨어서 '사법정의' 수호에 매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환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 환부에 '제 신경'이 되돌아 올 수 있게 찔러서 피를 흘리는 일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게 싫으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만 한다. 그조차 싫다면 우리의 아픈 부위를 찌르고 또 찔러서 피를 흘리게 만들어야 한다. 피의 복수, 정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폭력을 행사하자는 말이 아니다. 99.9% 사기꾼이 틀림없는 정치꾼에게 일침을 가하고,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라고 계속 찔러줘야 한다. 무뢰한 저들에게 '계몽령' 소리를 듣고도 참고 아무런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는 셈이다.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국민들이 참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 폭력이 아닌 '한 목소리'로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일궈온 대한민국인데 이렇게 한 순간에 병신꼴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라! 자랑스런 대한민국과 영원히 작별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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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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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III / 이봄 9번째 리뷰] 직장에 다니다보면 '좋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죄다 '싫은 사람' 투성이다. 내가 가장 싫어 하는 유형은 '무능력'한 사람도 아니고 '사고 많이 치는' 사람도 아니고 바로 '얌체 같은' 사람이다. 하는 일마다 얌생이처럼 해야 할 일은 '하는척'만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말고, 같은 팀 안에서 팀원들을 '갈라치기'해서 이간질 시키고, 그런 짓만 저지르다가 책임져야 할 경우가 생기면 '발뺌'을 하고서는 나몰라라하는 얌체 같은 놈팡이는 정말이지 딱 질색이다. 여기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도 그런 얌생이가 한마리 있다. 바로 카페 주인의 딸, '무카이'다.

무카이는 늘 뒷담화를 달고 산다. 막말도 함부러 지껄여서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처까지 주고야 만다. 그러고도 '농담~'이라면서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듯 그깟일로 화를 내거나 상처 받는다면 '그건 니탓'이라는 듯 재수없게 말을 하는 상종 못할 계집애다. 그런데 더 고까운 것은 '주인의 딸'임을 내세워 '카페 점장'의 정당한 지시사항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처리를 하기 일쑤라는 점이다. '주말근무표'를 정하는 것도, '신메뉴'를 정하는 것도, '정사원 건의 권한'도 모두 점장에게 있는데, 점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주인의 딸'인 자신이 다 결정을 했으니 점장은 알고 있으라는 식으로 통보(?)만 하고 만다는 점이다. 이런 '부하직원'이 있으면 일이 될 턱이 없다. 직원간 '불화'는 더욱 커지게 되고, '팀워크'는 깨져서,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지점'은 결국 운영마비가 되고 말게 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답은 딱 두 가지다. '점장'의 손을 들어주던가? 아니면 '주인의 딸'이 새로운 점장이 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래야 '주인'으로서는 손해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의 입장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이로울까? '수익'만 따진다면 수짱의 능력을 인정해서 점장으로 직급을 올려준 자신의 결정을 믿고 수짱을 지지해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자면 매장 불화의 원인인 '자신의 딸, 무카이'를 다른 지점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팔은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딸'을 새로운 점장자리에 올리기 십상이다. 그게 다행히 '수짱'이 점장으로 있는 지점이 아니라 '다른 지점'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수짱을 내쫓거나 '공동 점장'이라는 묘안을 내놓는다면, 일은 더욱더 하기 싫어질게다. 사사건건 부딪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수짱이 '완벽하게 꼬리를 내리는 방법'이다. 어차피 '주인의 딸'이 점장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일이 되든지 말든지 '주인의 딸'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냥 맡겨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수짱이야 일만하고 월급만 따박따박 받으면 그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지점 매출이 하락하고, 매장 직원들간 불화가 심각해져서 퇴사자가 속출하든지 말든지 그건 '카페 주인의 몫'이 될테니 말이다. 그때서야 '주인의 딸'에게 책임을 돌리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하라고 하고, 수짱은 그저 묵묵히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하며 '월급만' 따박따박 챙기며 지내면 될 일이다.

물론 그래도 짤릴 가능성은 있다. '주인의 딸'이 벌이는 횡포(?)는 어차피 카페 주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리스크'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여러 지점을 가지고 있는 주인의 경우에는 몇 개의 지점이 망하더라도 큰 손실은 아니다. 이익이 큰 쪽에서 메꾸면 그만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짤릴 경우에 우리 나라에서는 '재취업의 기회'와 더불어서 '실업급여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마냥 손해만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수짱의 나이가 좀 많은 것이 살짝 불리하게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일본에도 그런 제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수짱의 선택은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어차피 수짱이 없어도 돌아가는 카페였다. 도심지의 전문점들은 '맛'으로 승부하는 곳이 아니라 '브랜드'로 이미 찾아올 손님은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정적인 수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매장 직원이 '특별히 더 잘해서' 매장의 이익을 눈에 띄게 올려주는 그런 기적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뭐 매장 직원의 외모가 '아이돌급'이어서 매출이 확 늘어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또라이'가 점장을 하든, '싸가지'가 써빙을 하든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매장에서 알바하는 젊은 사람들만 '일할 맛'을 잃어버리고 말 뿐이다.

그래서 '주인의 딸, 무카이'가 저지르고 있는 얌체짓이 더욱 괘씸한 것이다. 저 얌체는 지가 저딴 식으로 행동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맘껏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는 개나 줘버리고, 매장에서 '일할 맛'이 나게,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일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해버리는 셈이다.

한편, 사와코가 일하는 직장에도 그런 '싫은 사람'이 있다. 기본적인 업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부하직원에게 의지하는 무능한 상사', 응접실 뒷정리나 사소한 심부름 같은 것은 한가한(?) 여자 직원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꼰대 상사' 따위다. 물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며 "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당당히 선언을 하고 각자 제 몫을 제대로 하라고, 자신은 더는 그런 '부당한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당당히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쎈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1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회사일에 충성을 다했지만, 그래도 '착한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한번 두번 해주다보니 어느새 그런 일까지 '자신의 업무'가 되어버리는 억울한 사연을 갖게 된 것이다. 적당한 때가 되면 다른 신입직원이 그런 일을 '당번'처럼 도맡게 배려(?)해준다면 억울할 일도 없겠구만, 한 번 만만하게 보이면 계속 만만하게 보이고 만다는 절대불변의 법칙이 생겨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사와코는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급속도로 '결혼이야기'를 꺼내고서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때려치겠다는 야망(?)을 갖는다. 그래서 남자가 맘에 들지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결혼은 추진하고 있다. 맘에 들지 않는 점이란 '식당종업원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버릇'이라거나, '사와코에게 임신이 가능한지 건강증명서를 요구한다'거나, 결혼을 하자면서 막상 '결혼준비'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무심한 남자라는 점 등이다. 그러다 남자가 '전근'을 가게 되니 사와코와 함께 가자며 결혼을 서두르자 사와코도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왜냐면 직장에 '싫은 사람'을 더는 보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행복감에 승낙을 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게 마냥 행복해할 일이 아니었다. 남자를 따라서 직장을 그만 둘 경우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맞벌이'를 하길 남자쪽에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전근'을 아주 가는 것이 아니라 2년이면 다시 도쿄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남자는 원래 직장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지만, 사와코는 잘 다니던 '정사원'직을 포기하고, '프리랜서'나 '프리타(시간알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결혼을 2년 뒤로 미루고 자신은 계속 이 직장을 다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결혼을 하거나 퇴사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수짱의 경우는 아예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결심했으니 상황이 다르다. 참고 버티는 것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결론이 나자, 쓰지도 않고 아껴둔 '월차'도 맘껏 쓰고, 새직장에 면접을 보러다니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인 셈이다. 그렇게 수짱은 떠났다. 바로 옆 가게 서점에서 일하는 '남자'와 인연이 남았다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그런 다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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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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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II / 이봄 8번째 리뷰] '수짱 시리즈' 2번째 책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3명이다. 지난 편에서 '카페 점장'으로 승진한 서른다섯 살의 수짱, 13년 동안 섹스는커녕 데이트도 하지 못한 사랑꾼 커리어우먼 사와코, 그리고 지난 편에서 갑자기(?) 결혼에 성공하고 지금은 예비엄마가 된 마이코가 주인공들이다. 세 여성의 공통점은 모두 '고민'이 많다는 것이다. 삼십대 중반의 독신여성이 할 법한 고민들을 토로하고 있어서 작가인 '마스다 미리'를 일본 2,30대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25년인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은 그 위상이 하락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면 현재의 2,30대 여성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바뀐 듯 싶어서 말이다. 정작 나는 '여성'이 아니라서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이 불가하지만 말이다. 최대한 그 고민에 '공감'하려 노력하는 노총각이라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30대 중반 독신 여성을 대변하는 '수짱의 최대 고민'은 결혼이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가임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초조하지만, 딱히 결혼상대로 꼽을만한 '적당한 남자'가 없다는 점이 수짱이 결혼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유다. 남자를 만나야 연애를 하든, 섹스를 하든, 결혼을 하든 '선택'이라도 할텐데,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서는 100% 여성 근무자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자연스런 만남'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딱히 '맞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받는 노력(?)도 하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다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그렇다보니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그리 불평불만 따위는 없다. 하지만 녹초가 되어 퇴근을 할 때에는 '고민'이 밀려 온다. 과연 이대로 늙어가도 괜찮은 걸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고 돈도 풍족하지 않은 상태로 노후를 맞이하는 것도 괜찮을까? 등등으로 점점 불안이 엄습해오고 있음을 느낄 때인 것이다.

한편, 사와코는 남자를 원한다. 직장여성(오피스레이디)으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대단한 경력'은 아니고 회사에서 중역을 맞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13년 동안 섹스..아니 '데이트'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와코는 '사랑'이 고픈 상태다. 하지만 결혼만이 능사도 아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고 엄마가 할머니를 홀로 돌보고 있기 때문에 사와코가 결혼을 해서 떠나면 그 힘든 일을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결혼을 더 미루고 나이만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정도다.

마이코도 지난 편에서는 '사와코'와 비슷한 고민을 했더랬다. 그러다 유부남과의 불륜을 정리하고 연상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서 '전업주부'가 되어 현재는 '임신중'이다. 이제 아이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제까지의 나'와 이별해야 하는 것에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끼며 우울해하는 마이코, 예비엄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2013년에 개봉했다던데, 일본여성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세계 삼십대 독신여성들의 공통적인 고민이기에 화제가 되었을 법하던데, 아직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여러 평론을 읽어보니 '영화'보다는 '원작 만화'가 더 호평일색이다. 아무래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원작에, '기대감'이 증폭되다보니 영화에서는 이를 극복해낸 '한방'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연기가 부족했던, 연출이 부족했던, 원작에서는 '다양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대목을 연기자와 연출자의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만으론 아마도 부족했을 것이다.

암튼, 여성에게 '결혼'은 자신의 일상이 싹 바뀌는 변화를 감수해야만 한다. 또한 '임신과 출산, 육아'도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소중한 새생명의 탄생이라는 기쁨을 주는 일이지만, '산모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고, 또한 기쁨을 물색하게 만들 정도로 고된 '육아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철없는 20대에 덜컥하게 되는 '결혼과 임신'이 아니라 뭘 좀 알 나이인 '30대'가 되면 여성에게 결혼은 해도 걱정, 안 하면 더 걱정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마스다 미리의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고민을 '대신'해서 해주니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막상 읽어보니 답답하다. 결코 쉽지 않은 고민이라 쉬이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뭔가 답을 내주기 바라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리가 아닐까?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읽다보면 '문제제기'만 실컷하고서는 '대안제시'나 '해결방법'을 내놓지 않고 여전히 '고민중'이라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고 있어서 좀 답답하다. 하나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 같아도, '또 다른 고민'이 계속 튀어나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알겠는데, 그런 식의 고민만 잔뜩하고 있으면 '독자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고, 그저 '공감'만하고서 끝을 내는 것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원래 여자들의 수다에 '목적'도 없고, '결론'도 없다지만, 결국 '나이'는 먹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마스다 미리씨~ 도대체 결혼은 하는게 좋다는 거예요? 하지 않는게 좋다는 거예요? 고민만 '대신'해주지 마시고, 답도 좀 '대신' 내려보시라고요~ 그래야 이 책이 좋다 싫다 결론을 내릴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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