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 중 한 분은 깜짝놀랄 스케치 솜씨를 지니고 계신다.

어찌나 똑같이 그리시는지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내게 말을 걸어 올 것만 같다.

미술을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그냥 첨엔 재미삼아 그리셨다고 하는데

군에 계실 때 제대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한 장씩 그려주셨고 지금은 경비하시는 틈틈이

취미생활로 즐기신단다.

혼자 보기 아까운 솜씨라 이렇게 올려 본다.

출처 : Tong - 내사랑윤대위님님의 강원도이야기통

http://tong.nate.com/sunghansua/39603068



스케치하고 계시는 아저씨.

4B연필과 HB연필 그리고 지우개, 이렇게 세가지가 전부다.



출처 : Tong - 내사랑윤대위님님의 강원도이야기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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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쩝니다 특히 윤은혜 강수연 안성기 권상우 이요원 오드리 햅번 ㅠㅠ




출처 : 비공개 카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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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포기하지 마라!

골목길을 돌아서면

어떤 기회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이란 네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짧지 않다.

먼훗날 그 골목길에서 울던 일이 추억이 될 것이다.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때론 길을 잃고 당황하고

때론 너무 힘들어 주저 앉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흘리는 눈물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마른 목에 침도 넘기지 못 할 정도로

절박하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이 목이 탈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이 또 다른 인연을 만들기 위한 쉼표이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색깔이라고 생각하라.

인생이란 고역과 기쁨과 방황과 쉼을 녹여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다.

치열한 색깔이 아름답게 수놓인 그림을 바라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자.

마치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색깔에 가슴이 베일 것 같은 그런 그림을 그리자.

 

지나가다 원두막에서 막걸리 한 잔 얻어 먹은 기억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고뇌에 몸부림 치더라도 멋진 까페에서

독한 양주를 마시는 그런 주인공같은 삶을 살자.

하루를 살더라도 세상 한가운데서 한판 붙어 보고 가자.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기웃거리며 남의 싸움을 구경만 하지말고

내가 피범벅이 되고 뼈가 살을 뚫고 나오더라도 한판 붙어보자.

그러다 죽어도 그렇게 살기 간절히 간절히 소망해 본다...

 

 

 

.

.

.

.

.

.

.

.

.

.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이 드는 훌륭한 글이다.

어느 곳에서 이 글을 발견하는 순간 전율이 일 정도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많은 분들이 공감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같이 나누기로 한다.  같이 나누면 좋고 따뜻해지는 것이 말과 글이다...

 

 

 

 

 

인생이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짧지가 않다. 먼훗날 그 골목에서 울던 일이 추억이 될 것이다.

 

맞다. 

인생이란 엄청나게 긴 것이다.  사람들은 자고 나면 몇날,몇달이 금새가고 나이를 들어  세월이 간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시간을 헛되이 보낸 이들이 하는 말이다.

이루어 놓은 일들이 없는 사람,  시간을 헛되이 보낸사람, 과거 1년이 지금 1년과 같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아주 간교한 변명이다.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하루를 1년처럼, 1년을 평생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짧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가장 공평한 시간.   이 시간을 주도하고 소중히 관리한 자만이 분명히 이룰 것이다.  그 먼훗날에 웃는 추억을 말이다.

먼훗날 그 골목뿐 아니라 곳곳에서 눈물나게 시린 기억들이 훈장이 될 것이다.

그 훈장을 기억하고 열어보고 싶다면 일기를 쓰는 습관, 기록하는 습관, 메모를 하는 습관을 길러야한다.

피같이 시간을 아끼면서 맹렬히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후회가 없다.

 

마른 목에 침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절박하고 숨이 끊어 질 것 같이 목이 탈때도 있으리라..

 

살다보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도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 할  때가 있다.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될 때나,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안되는 불가항력의 아픔이 엄습할 때 교만을 버리고 무릎을 끓는다.  꼭 절대절명의 순간에는 말한다.

" 하느님 도와 주세요! 꼭 도와 주세요!  제발 "   꼭 제발이라는 말을 쓰고는 한다.

마른 목에 침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을 안 겪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몇번 겪어보아서 그 절박한 심정을 알고 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이 목이 타는 심정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그리 될 수가 있으니 준비를 하라는 말 일 것이다.

삶의 여유와 긴장은 내려놓지만  자기를 절제하고 생각의 자기관리속에서 세상의 유혹들을 물리치라는 말이다. 

 

치열한 색깔이 아름답게 수놓인 그림을 바라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사람이 되자.

마치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색상에 가슴이 베일 것 같은 그런 그림을 그리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께서 평생을 가슴에 두고 사셨던 그 한마디다.

 머나먼 고국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그 한마디다.

" 담담하라...  담담하라...  때로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담담하라! " 는 그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누구나 세상의 유혹에,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흔들리고 상처받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자신의 주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태산같은 자신만의 힘을 가지라는 말이다.  때로는 우직하고 미련할 정도로 자신이 가는 길에서 미쳐보라는 말이다.

다른 보통사람들과의 삶에서 보통의 생각으로, 보통의 일로, 보통의 열정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치열하게 살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색상에 베일 것 같은 그런 그림을 그리자. 

열정의 불꽃이 피어오르면 대체 안 될 일이 무엇이냐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천재물리학자나 대통령,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전문산악인 같은 특별한 삶이 아닌한 대체 못할 것이 무어냐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보통사람들이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피눈물나는 노력에 의해 그런 경지를 도달한 사람들이다.  타고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자.

 

 

지나가다 원두막에서 막걸리나 얻어 먹은 기억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고뇌에 몸부림 치더라도 멋진 카페에서 독한 양주를 마시는 그런 인생을 살자.

 

허세와 위장이 아닌 진솔한 삶을 살자는 말이다.

삶에 힘겨워 사람들의 비좁은 시간에 끼어서 이리 저리 방황하고 주관을 잃은 채 살자는 말이 아니다.

너무 안전한 삶에서 때로는 벗어나 보는 것이다. 누군가 다 필요한 사람들이다.

회사원도 청소부도 경비원 아저씨도 서점의 책 딜러들 심지어 식당에서 주차관리하시는 분들 까지도 다 소중하고 필요한 사회의 귀중한 분들이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한, 가족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처자식을 핑계로 생활의 수단으로써 살자는 말이 아닌 것이다.

내 인생에 주인공으로써 진정 가고픈 삶의 이정표가 저기 보인다면 어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준비하고 기회를 언제든지 얻어낼 수 있는 실력을 기르자는 말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으며 쉬운 일이 있는가?

막걸리는 누구나 마시는 것이다. 막걸리만 매일 먹는 사람은 항상 막걸리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줄 안다.

아니 왜 다른 술을 마셔보려고 생각도 안 해보는 것인가.

남이 채워주지 않으면 내가 채워 마시고 남이 먹는 자리에 가서 나도 한잔주시오 하는 똥 베짱과 용기도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기웃거리고 남의 싸움을 구경만 하지말고 내가 피범벅이 되고 살이 뼈를 뚫고 나오더라도 한판 붙어보자. 

 

 

더이상 말이 필요가 없는 대목이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남의 인생을 살아 줄 수는 없다.

어차피 한번 왔다가 가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연습도 재도전도 없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히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갖자는 말이다.

후회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

이 순간 지금 있는 현실이 중요할 뿐이다.

나도 내가 이렇듯 30대 후반에 들어설 줄은 꿈에서라도 알았는가?

나에게도 푸른 빛을 내 뿜은 중고교 시절이 있었다.  방황이라는 시간속에 거리를 배회하는 20대 초반과 군대에서의 추운 겨울과 20대 중반의 당당함도 있었다.

아이를 낳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살아온 날들과 아이를 기르면서 철부지 애 아버지 노릇도 했었다. 세상을알아가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30대 초반의 앞만 보고 가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게 된 줄은 나도 몰랐다. 30대 후반이면 분명 나도 아저씨가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나쁠 수 만은 없다.

다 그 나이에 맞는 놀이와 사람, 즐거운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고 또한 재미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내 자신이 이루어놓은 시간과 일 들이다.

 

이 글을 읽노라면 그 어떤 강렬한 기같은 것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차력사의 힘이 느껴지도 한다. 불을 뿜어내고 쇠를 휘며, 날카로운 창끝이 목을 겨누고 있어도 도리어 그것을 부러뜨리는 기염...   언젠가 들었다. 차력사들에게 그 순간은 마지막처럼 온몸의 힘과 기를 정신력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일종의 초능력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나 그런 능력이 있다. 다만 있다고 믿지도 않을 뿐이고 자신에게서 밖으로 표출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집중하고 내가 가는 그 길에서 최선의 몇배를 가하는 것이다.

 

가슴이 베일 것 같은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색깔로 제대로 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매순간 삶은 멈추었던 순간이 한번도 없었다.

삶을 이겨내고 이끌어나가는 나의 삶 또한 도전이다.

때로는 악착같은 악바리 정신도 있어야한다.  객기 비슷한 엉뚱한 생각도 있어야한다.  남이 다 가는 길이지만 나는 이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반대로 가는 삶을 살아도 보아야 한다.

올 한해 한가지만 약속하기로 한다.

한가지 목표를 위하여 미쳐보기로 한다. 미쳐서 끝장을 본다는 마음으로 열정의 칼을 휘둘러 보기로 한다.

그리한다면 분명 가슴이 베일 것 같은 그런 그림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질 것이라고 분명 자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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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내 나이  27살 이었다.

 

사는 인생에서  소중하고 한순간 이라도 귀하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살아가는 순간에서는 최선 만으로는 가끔 내 의지 와는 다르게 되지 않는 많은 것도 있었고,  열심 히 산다하는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세상은 나를 점점 더 힘들게 한 시간 들이었다.    

지쳐가는 막노동 같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하는 생각은 이게 아닌데,  내가 살고 픈 삶은 이것이 아닌데...  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불꽃같은 일을 하고 싶은데...

 

항상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면 정열을 바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린 나의 희망이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나의 한가지는 영업 이었다.

내게 맞는일이라고 생각햇었다.

내가 내 모든것을 바쳐서 절실한 마음으로 하고 픈 나의 바램 이었다.

영업 !    세일즈맨 ...

나의 온 마음을 두근거리게 자극하는 두 글자 이다.

실전!   나는 실전의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 한몸과 마음으로 나를 치열한 세계로 나를 내 놓고 싶었다.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하는 마라톤 같은 게임에서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똑같이 주어진 두 주먹으로  나는 내안의 무형의 자산을 드러내고 싶었다...

 

 

모음료회사.

회사명 을 밝히고 싶지는않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언가 다른이에게 조금이라도 반감을 사고픈 마음은 없다.

하지만 워낙 재계서열 손가락 안 이기에 얼마안가서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생각 해본다.

어느 곳을 근무 했다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  어떻게 내가 깨닫고 배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  생각 해본다. 

내가 모음료회사를  일부러 입사를 하려고 준비 했다가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다니던 근무지에서 일거리가 떨어져 몇일 쉬고 있는데  아는 형님이

" 야 ! 어디어디 에서 만나자..  "   형이 지정된 장소에서 만난후  걸어가는데  형이 그러는 것이었다.    어느 회사 앞에서 잠깐 멈추더니 하는 말이

 

" 야 !  내가 이곳 음료회사 에서 일 했던 지가 언제냐?   한 3년은 넘은 것 같은데  여기 말도 마라 ... 노가다 중에서도 상 노가다 이다.   여기 다니다가 내가 한 여름에 죽는줄 알았다.

영업 하면서 음료납품 하는 회사인데 장난이 아니다. "

잠깐   영업 이라고...    눈이 반짝 뜨였다. 

"  형 !  영업 이라고 했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에게 물으니 

"  야  !   여기 다닐 생각 꿈도 꾸지 마라 .  여기 장난이 아니야.

너 다니다가 나를 원망하게 된다.  여름철에는 아예 옷이 아니라 걸레가 된다. "

나는 혹시 모르니 한번 가보자고 했다. 

 

당시 술을 좋아한 형은 대낮인데도 술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몇사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과  눈이 마주쳤던 한 사람...   몇년이 지났지만 아는 사람이 한분이 계셨던 것이다.

웬일이냐는 안부의 말들이 오갔고  형이 나를 굉장히 친한 동생인데 혹 사람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마침  정사원은 아니고 단 한사람 아르바이트 할 살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왔노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 일 이라는 것이 이렇듯  소중한 우연으로도 오는 것이구나!

이렇 듯 내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 다가오는것은,  만나야 할  귀중한 사람처럼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간절하게 다가 오는 것이구나...   나는 인연의 소중함에 다시금 감사한 마음과  꼭 가야할 길을 찿음에 작은 희열을 느꼈다...

 

 

 

 

입사첫날 .

군대에 다시온줄 알았다.

소개를 하려고하는데 팽팽한 긴장감이  사무실에서 흐르고 30-40명의 눈들이 나를 집중하여 쳐다 보는데 나는 긴장의 끈이 나를 팽팽하게 감싸는것을 느꼈다.

나를 집중하며 쳐다보는데 일순 내마음속에 느껴지는한마디.

이거 대충 하면 안 되겠구나....

어리버리 했다간  죽도 밥도 안되고 도루묵 되기 딱 맞겠구나... 하는 자극이 들었다.

문득 신병훈련마치고 자대 배치받아 신고식 하는 그때가 생각났었다.

그래 이곳은 영업하는곳이다.

내 특유의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다시 한번 살려보자.

 

일단목소리가 우렁차게컸다.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고향 ,나이, 사는곳,결혼유무,앞으로의 포부, 이곳 회사생활 에서의

계획까지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개를 끝냈다.

그러자 선임계장 이라는 분이 노래 일발장전 하란다.

그래 노래라 ...아침부터 노래라...

좋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노래다.

까짓거  까라면 깐다.

 

" 쥴리아..   "  맹인가수 이용복님 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구슬프면서 애절한 이 노래를 군 생활하는 중 아내를 생각하면서 부른 나의

18번지 노래이다.

군생활하면서 나를 부각 시킬 수 있었었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해준 나에겐 소중한 노래이다.  어차피 피해서 된것 같지도 않았고 꼭 해야하는 자리 라면 제대로 해야 한다.

열심히불렀다....

정말로 목이 쉬도록 감정을 다해 간절하게  열심히 불렀다.

온 힘을 다해 부르고나니 긴장으로 가득  찼던  그 사무실의 무거운 침묵을 가르면서

박수소리와 함께 함성이 들려왔다.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고 ... 내가 데려 가겟노 라고 여기 저기서 말 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게 좋은게아니엇다.

목소리크고 우렁차다고  노래 잘 한다고

한달에 3-4번 정도 아침이면 목이 터져라 부르는 쥴리아에 목이 항상 쉬고,

1주일에 몇번씩 하는 영업  구 호제창조교로 일주일에 여러번하는 목의 통증은 ,  내마음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점장이 고생한다고 언젠가 금강제화상품권 7만원권을 한번 준 적이 있다.

누군가가 아닌 내 자신이 남들 앞에 드러내고, 앞장을 서여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하지만 어차피 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하고 싶었다...

 

모음료회사 에서 하는 일은 이렇다.

5톤차  하나 가득 음료수를 가득싣고 음료수를 납품하며(나는배달이라는말을싫어한다)

거래처를 신규개척하고,  영업하면서 한달에 주어진 목표를 꼭 달성 해야하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5톤차가 17대.

그곳에 한대당 배당된 사수, 부사수 이 두 사람이  주어진 지역 내에서 한마음이 되어 일해야하는 땀으로 목욕을 해야하는 힘겨운 일 인 것이다.

하지만 이 사수와 부사수 라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 어려우면서도 쉽지않은 관계 이다.



나이가 같아도 나이가 한살어려도 일종의 군대처럼 고참 또는 선배라 하여 가까우면서도

웬지 먼 듯한 느낌을 주는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당시 연령층이  23-27 살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처음엔 몇 살어려도 말을 쉽게 놓지못했고  군대처럼 나는 이등병 인 것같은 느낌을 한참받았었다.그게 그 당시는 일 하는 것보다 힘들때가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 소속이되어 사수,부사수가 되어  한차를 이루어 일을 해야하는데

그당시는 티오가 없어서 항상 바쁜 차에만 동승하게 되어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소속이 되어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짬을 내 잠시 쉴수도 있고 조금의 여유 라도 생기는데

이것은 소속이 없으니 너나나나 바쁜곳으로 서로 데려 가려고 난리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낯선 곳 에서, 낯선 일을 하면서 사람이 그리웠다,  그 것은 학교 다닐적 짝꿍 보다 몇배가 그리웠다...    내 몸은 하나 이다...

 

 

음료수 한박스가 펫트병은 20kg  이 넘고  캔 10kg,   중간 펫트 15kg  들인데

큰 물건은 3,4박스는 기본 어떤 것은 7,8 박스 ..

무게로 치면 70kg 인데도 얼마나 일들을 잘 하는지  정말 보기만 해도 겁이 났다.

 

 

대단했다.

정말 보기만 해도 아 !  소리가 나도록 신기에 가까운 것 같다.

5톤차 위에서 캔을 밑으로 집어 던지는데 귀신같이 떨어뜨리지 않고 정말 잘받는다.

한판(110 박스)두판 세판네판 ....

땀 식기 전에해야 한다고 정말 쉬지않고 잘도한다.

( 정말 땀 식기 전에 해야 한다는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나름데로 한다고, 막 노동으로 단련된 몸이라고 , 힘이라면 자신이 있다고 생각도 했었는데  이것은 힘과 기술이 짬뽕이 안되면 되지 않는 기술이었다. 

이를 꽉 깨물고 하는데 정말 마음하고 몸하고 따로 논다.

 

몇 번을 넘어 졌는지 모르고, 몇 박스를 깨 먹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으로 깡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어쩌면 버텨 나간다는 말은 거짓일지도 모른다.  버틴다는 것 보다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나는 이제 더이상 추락할 것도 없으려니와  이제 이곳 아니면 끝이다.

그래 ....  이곳에서 정말로 끝장을 보자.    정말 절실한 마음 뿐이었다.

보름 정도하니 내 손은 내손이 아니었고, 손톱이 빠질 것 같은 고통과  화장실 에서 생리현상도 해결하지 못할정도로 고통이 나를 업습했다.

당시 밥 숟가락을 들면 가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현상 까지 있었다.

이겨내자...   정말 여기서 한번 죽어보자!   언젠가 끝이 있겠지...

아침7시에 나와 밤10시 11시까지 하는 이 일을 하는동안 다른것 하나 부러운것이 없었다.다

한차가 되어 더 아예 목숨 걸고 할터이니  사수부사수로 배치만되게 해 달라고 얼마나 홀로이 자위를 해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던  입사한달이 되어가기전 날 밤에

당시 10루트로 가란다.

너도 이제는 바쁜 곳 에만가지 말고 고정으로 가서 사수를 도와 음료수를 판매하는 일을 하라는 정말 반갑고도 내가 그 순간만을 기다린 감사한 말이 드디어 나왔다.

당시 얼마나 기뻤던지 눈물이 나 올것만 같았다...

 

그날밤....

일을 마치고 홀로이 포장마차에 들러본다.

 

포장마차...

이 얼마나 오랜만에 와보는  정겨운 곳 인가...?

몸이 힘들어,  마음이 지쳐서 엄두도 내어보지못한  귀한 곳 아닌가...

오돌뼈에 소주한병을 시키고 생각해본다.

한달간의 땀과 내가 지내온 시간들을 .....

소주한잔을 털어넣으며 다짐해본다.

달빛에 가리어 구름사이로 떠다니는 저 달을 보면서 내 자신에게 각인을 시켜본다.

진정  커다란 내 자신과의 약속을 해본다. 

나는 지금 시작이다,  정말 부족하게 시작해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한다...  잘 들어라  분명히 내 자신에게 말한다...

내가 이 지점 최고가 되리라 !   

지금은 부족하고 힘이 없는 애송이지만 바닥 부터 자근자근 밟고 올라가 분명히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리라...

기다려라  . . . !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소주잔을 마시며 굳게 저 달빛에 굳게 약속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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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군대 라는 말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아픈 추억들이 있다.

이 아픈 추억 이라는 것 또한 절실하게 , 간절하게 배움 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 이다.

하지만 얻고 배우는 인생의 크나큰 차이는 사뭇 개개인 다를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그 자체가 힘들다  생각한다.

해병대, 특수부대를 나오고 힘들게 군 생활을 하여야만 군대 생활을 잘한 것은 아니다.

군대라는 그 안의 사회와 격리된 생활이 힘든것이다.

방위 생활도 나름데로 힘들고 취사병, 서무병도  다 나름 데로의 그 고충이 크리라.

군대는  군대 라는 그 자체가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들을 이겨냈다는 자체 만으로도, 몸건강히 잘 세월을 이겨 냈다는 자체만으로도 휼륭히 군생활을 잘 해낸 것이다.

 

추운 겨울 12월의  어느날 군대를 입대했다.

하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눈이 펑펑 밤새도록 내렸다.

첫날 그 어설픈 군인의 군복을 입고 내리는 창밖의 눈을 보노라니 과연 내가

제대 라른 것을 할날이 있을까?   정말 갑갑 하고도 보이지도 않는 그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퇴소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아내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훈련소 따라 오면 고무신 거꾸러 신는 다기에 전주터미널에서 군대가는 것도 아닌것 같이 가까운 곳에 가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버스에 올라 오지 않았던가?  같이 훈련소 까지 올것을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그 밤에 나는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못할것 같은  두려움에 밤을 지세워야만 했다.

과연 내가 이 훈련소를 나가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 것이 두려웠다.

 

시간이 지독하게도 흘러 훈련소를 퇴소하고 후반기 교육을 광주에서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3개월 시간동안도 두려운 것은 어느곳으로 자대배치를 받는 다는 것인가?

아내가 면회오기 쉬운 곳으로 제발, 가까운 곳으로 자대배치를 받게금  해달라는 기도가

나의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두려웠다.

내 소원이  다해 원하는 곳으로 배치를 받아 자대 배치 받던 그 날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자대를 배치받아 신고식을 하려 하는데 날 쳐다보는 그 많은 고참들의 시선...

그 눈빛들이  비슷한 나이의 사람에게서 나는 그 눈동자가 참으로 두려웠다.

 

나는 기갑부대,  전차 조종수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를 그 때처럼만 했으면 아마 고시라도 합격했을 것이다.

배워야할 것도 많았지만 외워야할 것도 많았고 연이은 훈련과 밤의 근무, 나의 신병생활은 그저 냄새나는 그 구막사 화장실에서 아내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받을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은 군대를 갔다온 사람만이 알아줄 것이다.

구타 근절이라는  목표아래, 구타가 사라지고 가혹행위가 점차 없어진다 고는 하는 그 시절이었지만 구타는 음성적으로 윗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판치고 있었다.

맞는 다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윗 고참들 부터 맞는 그 소리, 그 소리가 무섭다.  내 차례가 다가오는 순간이 두렵다.

 

 정말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앞도 볼틈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군생활을 해나갔다.

그리고 내가 일병 2호봉 때쯤 어느 토요일 부대원들이 한 내무반에 모여 비디오를 보는 시간이 왔다.  그러던중 누군지 정중앙에 의자를 놓고 앉아 많은 병사들이 볼수가 없었다.

누군지 보니 하사관 출신인  나와 입대가 비슷한 하사였다.

기갑부대 특성상 하사관이 부대원 40%를 차지 하고 있었고,이 정중앙에 앉아있는 하사는 우리 고참들과 후임들이 가장 싫어하는 눈에 가시같은 하사였다.

고참들에게 교육을 당시 그렇게 받았다.  절대 하사관들에게 경어도 쓰지 말것이며 깡다구로 절대 지지도 말라고...

내 바로 앞에 않아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입에서는 쌍소리가 나오고 비디오 전세냈나..  들릴듯 하게 내가 내밷고 말았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리였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 순간이 정말 싫었다.

그말을 듣고 말싸움이 붙었고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가는 것은 오랜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당직사관에게 보고가되고 부대원전체가 군장을 싸고 연병장을 돌았다.

고참들은 잘 했다며 격려를 받았지만 나는 무언가 깊숙한 깊은 곳으로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결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기분이...

 

적중했다.

중대장에게 보고가 되어  진술서를 시작으로 사고경위에 대한 내용증명과 여러 정황이 담긴 수십장의 종이를 쓰고 또 쓰고 밤을 거의 새우듯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징계위원회와 사실처럼 하는 상황재연, 내가 배우가 된듯하다.

그렇게 일주일 가까이 가는 그 순간이 너무도 길었다.

어떻게든 정확한 말이 없고 군기교육대를 갈것이냐, 영창를 갈것이냐,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앞을 알수 없는 그 시간이 고통의 두려움 이었다.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것은 몸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통받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10일간의 완전군장에 연병장을 도는 것으로 매듭 지어졌다.

내 안에서 나온 나의 말한디의 위력은 이처럼 나를 힘들게 15일의 댓가를 치루게 만들었다.

 

군인은 군인 다워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주관이었고 고참들에게는 책임있는 후임,

후임에게는 솔선수범이지만 강하고 자기위치를 아는, 그리고 후임답게 하는 후임이 되게금 가르쳤고 어쩌면 강요를 많이 하였는듯 하다.

웬지 나약해지고 군인 답지 않은 느낌을 그 즈음 후임들에게서 느꼈다.

보상심리는 아니 었지만 저게 군인 맞나 하는 후임도 여럿이 보였다.

그때가 상병 6호봉 때이다.

이제 병장도 채 2달이 남지 않았다.

그러던중  내 인생의  관점과 군생활을 확 두바꾼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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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2007-11-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lrutkdtkd

이쁜매미 2007-11-1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입니다. 항상 이렇게 좋은 글 살아있는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마시고 자신에게 일기를 쓰듯이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솔직하고 담백한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6의 동갑 나이에 우리는 맞벌이 부부로 연애 결혼을 했다.내 나이 56 이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이다.

우리집은 농촌에서 몇마지기의 논농사를 지으며 6남매가 얽혀 살은지라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집 뿐만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리고개를 넘기기 힘든 때였으니까 그래도 2년제 대학이라도 나온 나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공장을 찾아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부러운 존재이기는 했다.
처갓집도 교육자 집안이라 원래 재산이 없었던데다 장모님이 사업(라디오 소매점)에 실패하자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형편이였다.

우리는 양가 부모님에게 전혀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상황, 아니 내가23살 때
취업을 했으니까 3년 동안 가계를 맡아 오다가 분가하게 되니 자기들 살 것을 걱정해야만 했다. 아내 집도 마찬가지고......

내가 직장 선배에게 24만원(쌀 한가마에 7천원 정도 했음)을 월2%(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고리지만) 빚을 얻어 12만원씩 아내와 나누어 예물이랑 혼수를 장만했다.

분가는 다행히 시골 농촌이라 공짜로 문간방에서 살게 해주었는데 얼마나 작은 방이었는지 아내가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마련한 농(옷장)이 들어가지 못해 주인집 헛간에 넣어서 비닐로 싸두고는 그렇게 울었다.

우리는 10년 10억모으기가 아니라 30년 10억 모으기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 때의 화폐가치로는 참으로 큰 돈이다.
우선 아내의 결혼 반지만 남겨두고 돈이 되는 패물들은 모두 처분하기로 했다. 내 반지, 시계, 팔찌 등을 모두 팔아서 몇푼 안되지만 빚을 갚고, 버스비도 아끼는 피나는 내핍생활을 했다.
소도 키우고, 꿀벌도 치고, 퇴근 후에는 알바도 하고.......

고생하면서 노력했던, 그리고 재테크에서의 성공과 실패 등의 자세한 사연은 다음 기회가 있으리라. 다만 부동산 투자의 성공이 꿈을 이루게 했다는 것만 밝혀둔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아들은 치과의사로 내년이면 개업을 하거나 교수로, 딸은 교사로 직업을 갖게 되어 아빠 노릇도 그런대로 끝나간다.
꿈을 이루었으니 마냥 좋은 것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나누어 본다

1. 얻은 것

넓은 공간의 집에서 살 수 있어 참 좋다. 부모님과 6남매 8식구가 한방 한 이불속에서 자고 생활하면서 내 방과 내 책상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차가 있어 좋다. 우리 4식구 모두가 차를 갖고 있어서 젊었을 때 부러웠던 자가용을 마이카까지 갖게 되었다.

내 자식들이 실력이 되는데 까지는 돈 걱정없이 보낼 수 있어서 좋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를 못가서 얼마나 울었는가 말이다.

여행, 아내가 갖고 싶은 가구와 옷, 가전제품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어 남편으로서 떳떳하다.

고등학교 때 군침을 흘리며 먹고 앂어 했던 찐빵(팥빵)을 싫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러 "올드 보이" "


내일 나머지 쓸께요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둘째 글


 


 


번호:50369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805 날짜:2004/06/17 00:09  
 

 
..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 돌이켜 보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었다.
이 카페 회원들에게 미리 살아 본 인생 선배로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진솔하게 더듬거리며 독수리 타법으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1. 얻은 것

넓은 공간의 집에서 살 수 있어 참 좋다. 부모님과 6남매 8식구가 한방 한 이불속에서 자고 생활하면서 내 방과 내 책상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차가 있어 좋다. 우리 4식구 모두가 차를 갖고 있어서 젊었을 때 부러웠던 자가용을 마이카까지 갖게 되었다.

내 자식들이 실력이 되는데 까지는 돈 걱정없이 보낼 수 있어서 좋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를 못가서 얼마나 울었는가 말이다.

여행, 아내가 갖고 싶은 가구와 옷, 가전제품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어 남편으로서 떳떳하다.

고등학교 때 군침을 흘리며 먹고 앂어 했던 찐빵(팥빵)을 싫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러 "올드 보이" "살인의 추억""태극기 휘날리며""트로이"등의 영화를 아내와 함께 심야프로 시간대에 팝콘도 먹으면서 보는 즐거움도 있다.
영화이야기가 나왔으니 에피소드 하나 적고 가겠다.

2~3년 전 쯤 아내와 몇 십년만에 처음으로 "살인의 추억"을 보기 위해 극장엘 갔다.
딸이 인터넷으로 예매를 해 주어서 딸이 메모해준 용지를 가지고 긴 줄 끝에 제법
인내를 가지고 젊은 연인들처럼 팝콘을 먹으며 우리 차례를 기다렸다. 족히 30분은
기다렸을 것이다. 우리차례가 되어 메모용지를 보이니 저쪽 줄에 서서 입장권으로
바꿔서 이쪽 줄로 서란다.
별 수 없이 또 그 줄 끝에 서서 입장권을 끊어야 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내 아내는 전부 아들 딸 같은 애 들만 있는데 창피하다며
벽쪽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애들이 힐긋 힐긋 쳐다보는 것이 너무 나이 든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불륜처럼
보여서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에이 이런 말은 잃은 것에 적어야 하는 건데.....

자판기의 커피만을 고집하지 않고 나는 8천원 짜리 "카프치노"를, 아내는 만원짜리
"도마도 쥬스"를 마시며 강가의 야경을 보면서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좋다.

주말에는 이삼십만원의 경비를 마다 않고, 그 동안 계획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방콕"을 안쓰러하며 골프가방을 싣고 푸른 잔듸를 그리며 떠나는 경쾌한 자동차
소리가 좋다.
돌아오는 길에 "백골당을 면했느니......
버디를 잡았느니.......이런 대화도 즐겁다.
아들 놈과 내년에 내기하자는 약속도 즐겁다,

휴가철이면 제주도로 갈까 설악산으로 갈까 콘도회원권이 있어 숙박 걱정이 없어
좋다.

#이 글을 치는데 2시간이 소요되었네요 잠이 오니 내일 쓸께요
글을 정리하지 못하고 등록하니 미안해요 양해 바랍니다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셋째 글


 


 


번호:50446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746 날짜:2004/06/17 12:50  
 

 
..

어떤 30대 중반의 주부께서 멜 주셨다. 현대인은 존경할 만한 위인이 없다고......
특히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보면 더욱그런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존경이나 비난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축하를 못하면 이해라도 해 주었으면 한다. "존경""비난" 등의 관점에서 이 글을 읽는다면 "닫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유스러워지면서(지금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만족하기로 했다)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쓰고 싶을 뿐이다. 사실 나는 불우이웃돕기를 안한다. 의무적으로 직장에서 성금을 갹출할 때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낼려고 한다.
우리 자식들에게도 재산은 물려주지 않기로 했고, 다행히 우리애들이 기꺼히 동의해
주었다.
나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자 한다. 내가 죽은 뒤 남은 재산은 없거나 많지 않을 것이다. 구두 한컬레라도 남으면 두 남매가 한짝씩 똑같이 나누어 가지도록했다.
재산 모으기 과정에서 힘들었던 "만족의 지연" "욕구의 자제" "갈등의 스트레스"
"혹독한 내핍생활" 등이 나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일까?
이 카페 회원들이 대부분 젊어, 돈 모으기에 관심이 많고 나 같은 나이의 회원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
오늘도 "얻은 것"에 대하여 쓰고자 한다. 그 것이 "잃은 것"을 말하는 것보다 좀 더 즐거운 일이니까


1.얻은 것-두번째

술집에 가면 여자들이 내 옆에 앉을려고 다투고 나는 그 순간 왕이된다.
날씬하고 예쁜 젊은 여자들이 태초에 인간으로 돌아가 나를 즐겁게 해 준다.
이런 세상도 있었구마이.....!11
우리나라 봉급쟁이 평균 한달분의 돈을 지불하면서도 즐겁다
(비난하지 말라. 나는 결코 졸부가 아니다. 30년 전 부터 준비했던 일이니까.....
31살 때 서울 친구가 데려가서 가보고 내 돈으로 술마신 것은 최근 다섯 손 가락 안이다. 그 때는 여자들이 내 옆에 안앉을려고 해서 즐겁지도 않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들켜서 몇 달 동안 혼났다. 당신은 이렇려고 그 고생했냐고......)


친구가 많아지고 각종 모임에서 회장으로 추천되는 일이 많다. 모임이라야 계모임 또는 열명 안팍의 친목모임이지만......
아뭏든 모임이 즐겁고 차쯤 대화의 축이 나에게 쏠리는 것이 좋다. 약간의 찬조금
을 내야 하고 행사 때는 타올이라도 돌려야 하지만 받고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듣는 것이 기분 좋다.


재래시장을 가지 않고 백화점 맨 위층으로 갈 수 있어 좋다. 명품 코너에서 이것 저것 구경만 해도 판매원의 태도가 공손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명품을 가지지 못했다. 영국제 버버리 목도리가 명품인가? 그것은 하나 가지고 있다.


하루 스케줄을 나 위주로 짤 수 있는 것이 좋다. 옛날에는 남의 스케줄에 꿰 맞추어야 했는데......


날씨의 변화에 신경을 안써서 좋다. 더우면 에어컨을, 추우면 스팁을 전기세 걱정없이 쓸수 있어 좋다.

아내의 생일에 노란 장미 한송이가 아니고 56송이를 생일 축하쏭이 나오는 카드와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좋다. 그 동안에는 아끼느라 늘 한송이로 떼웠다.


혼자 연립주택에서 89세인 어머니께 용돈을 형제들 중 제일 많이 드릴 수 있어서
좋다. 그 동안 부모님께 불효한다고 형제들로 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참 가슴이 아팠다.나 보다 내 아내가 더 챙긴다. 나 몰래 용돈을 드리고서 둘이 짝짝꿍이 되어
내 흉을 보며 다정하게 외식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좋다.

연말에 계산해 보면 재산이 줄지 안해서 좋다. 그렇게 절약해도 모아진 것은
별로였는데.....

이제 "얻은 것"은 이것으로 마칠까 한다. 아마 우리 카페회원님들이 꿈꾸고 있는
미래의 일부분일련지도 모른다.

"잃은 것"은 몇일 후가 될 것 같다. 주말이 가까워져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넷째 글


 


 


번호:50710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675 날짜:2004/06/19 05:58  
 

 
..

나에게 오는 멜 중에서 사업하는 사람이냐?
10억으로 그렇게 살 수 있냐? 등의 질문이 많이 온다. "잃은 것"을 쓰기전에 그에 대한 대답을 먼저해야 겠다.

우리는 동갑으로 26살 때 사내 커플로 결혼한 맞벌이부부였다. 월급이 3만원(쌀 1가마에 7천원 정도) 이였고 아내는 34살 때 퇴직(8년간 맞벌이 부부였음)을 했다.
나는 지금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10억은 사실 시작에 불과하다.
생각해 보라. 10억의 목표가 이루어졌으니 이제 좀 쓰고 살자 하고 써 보자 그 때부터 재산은 줄어들게 되고, 쓰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우리가 그 고생하면서 이룬 재산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특히 고생하면서 번 돈을 쓰는 것은 무지 아깝다.
왜 내가 불우이웃돕기를 안하는지 아는가? 그들도 나 만큼 고생하면서 노력했다면 그리 되지는 안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10억은 주택값, 자동차,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 등을 제외한 금액이여야 한다.
주택의 값이 올랐다고 팔고 텐트치고 살건가?
골프회원권이 올랐다고 팔고 골프안칠건가?

또한 10억이 제 역할을 해 줘야 한다.
부동산으로 있으면 거기에서 임대소득이 있거나 그것을 이용한 사업소득이 있어야 한다.

현금이 있으면 그것도 이용해서 이익이 나오도록 해야한다. 주식이든, 펀드든.....
다시 말하면 재테크 능력을 가져라는 이야기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10년 후에는 대부분이 복권에 당첨되기 전보다 더 못한 생활(미국의 어느 연구가가 추적하여 연구한 결과임)을 하게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돈을 버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영업을 하든, 주식을 하든 망한다. 잘 할 수있다면 그들은 이미 복권에 당첨되지 안했더라도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커다란 집을 살거고, 멋진 자동차를 살거고, 도박을 할거고, 젊고 예쁜 여자를 얻어 쏙 빠져 돈을 물 쓰듯할거고, 위자료 주고 조강지처와 이혼할거고, 젊은 여자에게 돈 빨리고 배신당해서 홧병으로 누어 복권에 당첨된 것을 후회하면서 불행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

그럼 10억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줘야 할까?
정기예금 이율인 연 3.5% ?
그 정도의 능력밖에 없다면 10억도 모을 수 없다.
연 6 ~7% 정도의 이윤은 나와야 한다.

또한 직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관리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맨날 놀기만 하면 노는 것이 노동이 된다.
열심히 일하고 난 후 휴식은 얼마나 달콤한가?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관철하면서 다른 사람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삶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또 관리자가 되어야 시간으로 부터도 자유로워진다.

10억은 경제로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시간으로 부터의 자유도 의미한다.

또한 건강해야 한다. 나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건강해야 한다.
늘 가족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고 희망을 줘야한다.

10억 모으기의 완성은 위 조건을 충족하고, 재산이 줄어들지 않으면서 10억의 1%인
매월 1000만원 정도를 가족 3인이하가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10억을 이용한 소득 월 500만원~600만원 + 근로소득 400만원 ~ 500만원)

소득이 많아도 소비자가 많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 가족은 우리부부와 아직 미혼인 2남매 모두 4명이다.
아들은 보건소에서 군복무 중이며 금요일에 왔다가 월요일에 간다. 자기 월급으로 살고 있고 가끔 우리 내외에게 맛있는 외식과 감동주는 선물을 하기도 한다.

딸은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교육대학 3학년으로
편입하여 그 동안 자기가 모은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내가 하숙비 달라고 하면 아빠 기쁨조하니까 면해 달란다. 하숙비는 면해 주기로 했다. 우리의 소비자는 우리부부 두사람이 되는 셈이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보내 주신 질문에 대답이 되었는지 모른다.


#독수리 타법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제 글을 읽으시고 솔직한 의견 많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독자들의 생각과 느낌이 궁금하거든요. 리플 많이 올려주셈.....(애교)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다섯째 글


 


 


번호:50847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920


날짜:2004/06/2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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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이 있다.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아픈 상처가 있겠지만 특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오직 그 일에만 매달린 사람은 더욱 깊고 아픈 것 같다.
오늘은 비까지 오고 잃은 것을 쓰자니 더욱 우울해진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쓸까 한다

2.잃은 것-첫번째 글

*우리 자식들의 키를 잃었다.

요즘애들은 대개 부모보다 키가 크다.
그런데 아들(166센티미터)은 나(171)보다 작고, 딸(157)은 엄마(159)보다 작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면서 빈곤에서 탈출하자고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아이도 늦게 낳자고 했는데 임신이 되었다. 아이가 있으면 아내가 직장생활하기가 곤란하니까...
우리는 고민 끝에 유산을 시켰다. 그런데 한달 안에 또 임신이 되었다.
별수 없이 애를 낳았는데 보통아이보다 작았다.

임신중에 결혼 때 진 빚은 갚기 위해서 반찬을 통제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정부 혼합미(매우 가격이 싸고 그 때도 빈곤층에서만 먹었음)에 식물성 반찬 두어가지만 먹고 살아서 영양실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산모의 젖이 부족했다.
그 때 우리둘의 월급을 합하면 6만원이고 그 중 5만원은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고
1만원(지금 돈으로 계산해 보면 30마원 정도)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유로 키워야 했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와 보니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배가 아프다고 딩굴고 있었다.
젖이 적어 아기가 우니까 막걸리를 사다 먹었단다. ....나 원 참!!!
막걸리 빛깔이 젖 빛이니 그것이 젖으로 되어 나올 줄 알았나?
미역에다 쇠고기를 넣어 먹거나 돼지 족발를 푹 삶아서 먹어야지.....에그
그러나 고기국을 먹이지 못했다.......독한 나
아뭏든 아내는 모유로만 큰애를 길렀다.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고생은 애 기르기일 것이다. 그 때는 여자들이 직장생활하기가 지금보다 어려웠고 더우기 모유로 길렀다면 그 고생을 이 카페회원은 조금은 이해할런지..........

둘째 딸도 큰애와 별로 다르게 키우지 못했다. 어려웠던 20대였으니까......
그 결과 우리 애들은 키가 작아 결혼이나 제대로 할려나? ^^;;
걱정마라!!!... 나풀레옹, 한신 장군, 박정희 대통령도 키가 작았지 않느냐!!!
곧 예쁜 공주와 왕자가 나타날걸

*하나 뿐인 형님을 잃었다.

내 형제는 4남 2녀로 누나가 위로 둘이고 10살 위인 형님이 한분 계신다.
형님과 형수씨도 맞벌이 부부이고 형수씨는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하셨다.
내가 결혼 할 때가 26살이였으니까 형님은 그때 36살, 30대의 왕성한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을 하던 때다.
형님은 기관장이였고 형수씨는 재테크의 귀재다.

형님은 다혈질이고 안하무인이다. 리더십이 강하고..........
학교 다닐 때는 주먹으로 대장이였다. 그 때는 자유당 시절이라 깡패가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형님보다 세살위인 누님도 얻어터지고 울기만 하지 꼼짝을 못한다.....매형이 얼나나 안 좋았을까?....

집안 식구 모아 놓고 2~3시간씩 자기가 집안을 일으켰다는 둥...동생들을 자기가 얼마나 보살피고 있는지 아느냐는 둥...듣는 태도가 딴 생각하면서 듣는다는 둥....
자기만 싫껏 말하고 나서 우리가족은 이런 대화가 있어서 좋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더 괴로운 것은 지난번에 한 이야기를 또 한다는 것이다.
하도 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첫머리 말만 들어도 다음의 이야기는 알 수 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등록금을 형수씨가 2년 동안 대 주셨는데 만날 때 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한번은 200번 까지는 그 이야기를 듣겠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고 대들었다가 되게 혼났다.
나도 형님을 위해서 그 이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은 생각지도 안는다.

더우기 어머니는 항상 형님편에서 형님 형수씨가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있겠느냐...
형님 말을 들어야 한다. 하시면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셨다.
무기력한 아버지를 어머니는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큰아들을 의지하면서 사셨기 때문에 더욱 형님은 기고만장하였다.

우리 결혼 때도 축의금은 자기 손님이 대부분이다며 식사값만 내고는 자기가 모두 가져갔다. 내 모임에서도 얼마정도는 들어왔는데 그거라도 달라니까 네 처가 손님 것까지 식사비를 주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혼만 났다.

형님은 내가 직장을 갖게 되자 부모님과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두 동생을 나에게 맡기고 4킬로 밖 이웃동네로 분가해 나가고 그 때 부터 내가 가족을 부양하게 되었다.

23살 때 부터 결혼할 때 까지 3년 동안 월급 3만원 중 500원만 용돈으로 쓰고 나머지는 어머니를 모두 드렸다.

그러던 어느 때 부터인가 이러다가는 가난이 대 물림되어 나도 빈곤에서 벗어 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고, 또한 형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를 찾고 싶었다.
그 때 부터 나는 "NO"를 말 하기 시작했다.

힘든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도 우리는 형님 형수씨의 끊임없는 간섭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부모님 부양문제, 형수씨가 하고 있는 계(몇 사람이 짜고 하는 적금의 일종)에 들어야 하는 문제 등등.......
내 의견을 분명히 말하고 "노"도 자주하게 되자 자연 다툼이 많아지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 땅을 담보하고 대출을 받겠다는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부터
나는 형님의 미움을 사고 결국은 서로 내왕을 않게 되어 형님을 잃게 되었다.

언젠가는 화해를 해야지......





#"잃은 것"을 쓰다 보니 재미가 없네요 계속할까요?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여섯째 글


 


 


번호:51149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463 날짜:2004/06/25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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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굳이 “잃은 것”을 쓰는 이유는 우리 카페 회원님들이 나와 같은 “무지”“어리석음” “조급함” 등에서 왔던 후회와 회한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란 시에서 80 이 넘은 노인이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쓴 그 시인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10억은 큰 돈일 수도 있고 작은 돈일 수도 있다. 몇 백억원 몇 천억원을 가진 진짜 부자들은 내 이런 글을 보면 뭐라 할까?
요금을 못내 전기, 상수도가 끊겨 고생하는 사람이 이 글을 보면 그들은 또한 뭐라 할까?
그러나 우리는 맞벌이 부부로서 텐인텐이다.
우리가 남의 도움 없이도 노력하면 모을 수 있는 금액이다.
그것이면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부자다!!

이 글은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한다.

“동물의 왕국”은 내가 좋아하는 프로다.
사자는 얼룩말의 여러 무리 중에서 한 마리만을 선택하여 공격한다. 다른 얼룩말이 옆에 있어도 거들떠 보지 않고 그 놈에게 집중한다. 그래야 성공률이 높으니까......

비난이 두려운가?
사람 좋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후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소리들어가며 적당히 즐기면서 살고 싶은가?

그럼 테인텐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라. 부모님의 유산이 많으면, 고소득자면, 가난도 조금 불편할 따름이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나 같이 살 필요는 없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그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이고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일부분은 밝혔지만, 결혼비용을 내 힘으로 했으며, 농촌의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으로 1년 동안 공짜로 살기 위해서 다섯 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당신 미안!

아버지는 무능하셨고(도박.........등등 ....유산 모두 탕진), 딸 하나 보시고 6.25 때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의 유산이고, 우리집의 마지막 보루인, 논 7마지기(1400평)를 형수님이 나 대학 가르치는 비용으로 쌀 84가마에 팔아 갔다.(작은 아버지가 내 양부고 그 논은 내 명의로 되어 있으며 지금 제사는 우리가 지내고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형수님은 가난하고 어린 시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시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형수님의 현명한 판단
형님의 사회적 배경과 형수님의 탁월한 재테크로 형님네는 그 당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미혼으로 23살 때 취직을 했으니 형수님 입장에서는 나에게 맡기고 분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니겠는가? (형님은 한 핏줄인데 그렇게 까지 모질게 생각하지는 안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고서도 앞뒤 가리지도 못한 형님은 만났다 하면 우리가 너를 가르쳤다는 말로 순종하도록 했다.................지금 생각하면 형님이 고맙다

우리 텐인텐은 남의 도움을 받지 말라. 복종과 굴욕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도왔다면 그것을 말하지 말라. 자랑했다면 상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아무튼 나는 결혼하여 분가하게 되고 무기력한 부모님과 동생은 힘든 생활을 해야했다.
아버지가 다행히 벌을 치셨는데 그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와 같은 동기에서 나는 경제로부터의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에이!! 또 심각해질려고 하네
“제가 굉장히 딱딱하고 이마에 바늘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죠?”
나, 생각보다 아주 부드러운 남잔데 .........이거 정말!

2. 잃은 것 - 두 번째 글

*신혼여행의 추억을 잃었다.

신혼 여행은 우리 고장에서 가까운 내장산에서 1박하고 대전 유성 온천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 없다.
아니, 딱 두 장 있다. 다리 위에서 안고 찍은 사진......
이 사진만 보면 아내는
“이 때가 제일 예뻤는데..... ”
하면서 자꾸 본다.........그나마 두장 뿐인 사진 닳아 없어지겠네!
필름, 현상값을 아끼자고 사진 찍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이것은 무지였어!

내 아내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얼굴표정만 보고도 내가 뭘 생각하는지, 원하는 것이 뭔지 금방 알고 내가 말하기 어려워 하는 것을 먼저 말해서 나를 편하게 해준다.
아내의 제의로 우리는 대전 유성가는 것을 생략하고 꽃병을 기념으로 하나 사 가지고 처갓집으로 직행했다. 절약한 돈으로 선풍기 사자고 하면서 .....

우리 집에는 30년이 넘은 골동품이 3가지가 있다.
신혼 여행에서 그 당시 800원 주고 산 꽃병, 내가 아내에게 연애할 때 생일 선물로 준 목도리, 지금도 아내는 겨울이면 꼭 한번씩 착용 하고 외출한다.
촌 스럽기는 하지만 멋있다. 색깔도 하나 변하지 않았다.(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한 변하지 않을 거야! 회사내 총각 7명의 경쟁을 뚫고 하나밖에 없는 여자직원를 겨우 차지했는데.....)
또 하나, 우리 아들 서너 대여섯살 때, 꿰매고 꿰매어 입힌 내복 한벌 .................에그! 맞벌이 하면서 피곤했을 텐데......

“만족의 지연”은 더 큰 만족을 얻기 위한 인내일 것이다.
그 인내의 댓가로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 보다 더 큰걸로 금년 봄에 김천 직지사에 가서 그 것도 왕과 왕비가 되어 6만원이나 주고 2장 찍었다.
신혼여행 때 찍은 것 보다 훨씬 좋다. ..................... 우리는 역시 왕과 왕비가 어울려!!


#가볍게 쓸려고 노력은 했지만 아프네여.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일곱째 글


 


 


번호:51465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1302 날짜:2004/06/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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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잃은 것 -세번째 글

*신혼생활, 그 달콤함을 잃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애기가 없는 동안은 공짜로 살기 위해서 빈집을 찾아 다니느라 이사를 다섯 번이나 하다보니 신혼의 달콤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덕분에 이삿짐을 싸는 데는 이골이 났다.

1년 후 곧 바로 아기가 태어나자 우리는 아기에게 매달려야만 했다.
모유로 키워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가정부가 회사 근방에서 놀다가 수유할 때가 되면 상사 모르게 살짝 나와서 젖을 주고 들어가야 했다.........모유가 애기에게 좋은 거야!!

아기를 돌봐주는 가정부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5~6세의 어린아이가 대부분이다, 애기가 애기를 보게 된 셈이다. 그런 나이는 대개 사춘기 때고, 또한 산업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때라 화려한 도시로 가는 것이 꿈인지라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있다가도 금방 나간다.
미리 예고도 하지 않고 나가는 날 아침에야 말하는 때도 있다.

한번은 수유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안해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전화를 해봐도 받지 않고....... ....... 핸드폰이라도 빨리 만들지
다급하게 집으로 달려 가보니 아이 혼자서 똥과 오줌에 뒤범벅이 되어 울다가 지쳐서 자고 있고 그 얼굴 위로는 파리 떼들이 새까맣게 들어붙어 있었다.
아이보는 애가 친구따라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이다.
아내는 물로 씻기어 업고 다시 직장으로 달려갔다...........얼마나 가슴아팠을 꼬
그 날은 조퇴를 하든, 해야했을 텐데 그 시절에는 직장 근무환경이 지금처럼 썩 좋지 못했다.
그럴 때의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은 말할 수 없다. 우리 텐인텐 회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번 쯤은 했으리라.
그 때의 아내 심정은 어쨀을까?.............나를 원망했겠지.....잘할께! 여보!

회사에서 해야할 일들, 직장 상사의 무서운 얼굴.........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 때 일을 생각하고 나는 여직원에게 육아시간을 충분히 준다. 직원이 미안해서 사양해도 내가 챙긴다. 아기를 안아보기라도 해라고...... )

직업을 갖는 것이 자기 일을 갖고 싶고, 성취욕과 자아실현을 위한 사치스러운 것이였다면덜 괴로웠을 것이고, 나 또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빚을 갚아야 하는 형편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였다면 참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그 때 앞산을 바라보며 높이 솟은 중바위에서 떨어져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단다.............친정어머니가 이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아파할까?

6킬로미터 쯤 떨어져 농사지으면서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모셔다가 부탁을 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농사일로 바쁘셔서(밭 몇평 가지고 뭐하셨는지....) 첫아이를 산부인과도 아닌 집에서 출산했는데도 그 날만 계시고 바삐 집으로 가셔서 너무 원망스러웠는데 그런 부탁을 들어 주실 것 같지도 않아서 그만 두었다...............................그런 시어머니를 뭐가 좋아서 그렇게 잘하는지......당신 천사
철없는 남편, 어린 가정부가 산후조리를 했으니 젖인들 잘 나왔겠는가?........그래서 먹걸리 먹을 생각했나?

이녀석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우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우리도 밤을 새우고 출근을 해야했으니 아내의 고통은 더 컸을 것이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말았다.


 


꿈 같던 10억의 꿈을 이룬 뒤(얻은 것과 잃은 것)-여덟째 글


 


 


번호:51731


글쓴이: 돌아온 용 메일 무선메시지 | 친구 추가

조회:964 날짜:2004/06/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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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잃은 것-세번째의 글

*역동적인 청년기, 그 화려함을 잃었다.

내가 생각하는 청년기는 20대부터 30대 까지라고 생각한다.
일생 중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이때 한 인간의 삶이 결정되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기간을 농촌의 시골에서 생활했고 이 기간에 내 삶의 밑그림이 그려져가는 기간이기도 했다.

나의 청년기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
라는 구호속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바뀌는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의 청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농촌의 청소년들이 도시로 몰려가고 명절 때 내려온 그들에 의해서 도시의 화려함과 신비로운 생활이 소개되고 막연한 동경과 감탄, 그리고 신비로움으로 젊은 우리를 유혹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미국 생활을 하고 온 청년들이 돌아와서 미국 생활상을 말하면서 폼을 재면, 여자들이 그들의 말에 혹하여 따르는 것에 비유하면 될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20대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들의 우상이 되고 싶어 한다.
오늘 날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한번 보기 위해 몇시간씩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유명 연예인의 리싸이틀에 몰려가서 열광과 환호하는 것을 보면 그 때 성공하여 고향에 내려온 친구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내 친구 중에 아버지가 운수업 사장을 하면서 꽤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의 아들이 있다.
이 친구는 서울의 명문 대학을 나오고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20대 후반에 벌써 부자가 된 친구이다. 물론 부모의 도움을 많이 받았겠지만..............

이 친구는 나에게 꽤나 잘해주었다.
“시골 촌놈 서울 맛 좀 봐야지”
그러고서는 라이트 클럽, 락카페((?)아뭏든 술먹고 춤추는 곳), 룸싸롱,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술집 등으로 데려갔다.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아가씨들을 웃기기도 하고 그들을 능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나는 춤도 노래도 여자를 다루는 방법도 팁을 줄지도 몰랐다. 자연 그 친구의 독무대였고 내옆에 앉은 아가씨도 그에 말에 웃고 기대고 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너는 저 친구와 놀아”
하고 밀어내도 그 때 뿐, 어느 새 나 혼자가 된다.
즐겁지가 않고 즐기지도 못했다.
그려고서는 내 한달 월급 보다도 더 많은 돈을 대수럽지도 않게 주기도 했다.

그 친구와 숙박을 할 때도 호텔이고(나는 여인숙이나 겨우 여관), 커피도 호텔 커피솝에서 마시고 자가용으로 다녔다.( 80년대 초, 내 나이 30대 초, 이무렵에 지방에서는 30대 젊은 사람이 마이카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했다.)

사업 얘기도 몇억에 상가를 사서 분양을 하면 얼마의 이익이 남는다는 둥, 어느 땅을 사서 누구와 만나 이야기가 잘되어 건축을 하면 얼마가 남는다는 둥, 주식이 어떻다는 둥..........
십몇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사는 나에게는 숫자개념 조차 서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
나와 동떨어진 외계인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이때 절약하고 저축만 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 연탄 땔 때, 퇴근하여 낙엽을 긁어서 밥을 짓는 일은 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탄부엌으로 개조했다.

이렇게 나의 청년기를 화려하지 못하게 보내고 말았다.
화려하지는 못했어도 이기간에 빚을 갚고 종자돈을 모으는 등, 지금이 있기 까지의 준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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