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토록 원하는 부사수가 되었다. 

 

부사수,, 라는 것이  그 회사의 직원이면 누구나 하는일이 었을 뿐인데도 나는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것 이었다.

그렇구나 !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때는 쉽게 얻으려 하면 안되는 것 이구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진작 부터 알고 있었지만  남들과 똑 같은 조건을 얻는다는 것부터, 동등해진다는 자체가 이렇 듯 힘든 것 이구나.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  무슨 사소한 일 하나에도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쉽게 어떤 것이든 얻으려 절대로 하지 말자....    감사한 마음으로 배운것이다...

 

부사수가 되었으니  의욕이 솟고 힘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남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남들보다 먼저 일을 깨우치려  많이 노력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정신 바짝차리고 배우려 무던이도  노력했다.

일이 끝나야 집을 갈수있기에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고개를 많이도 숙였다.

창피 하지않았다. 

 나이가 나보다 몇살씩 어리고 결혼도 안한 동생들 이었지만 창피 하지 않았다.  내안에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배우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한달 동안에 배웠다.

그래 ... 집에는 나만을 바라보는 아내와 세살난 아들이 있다.

가족을 위한  책임감과,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아빠로서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우선 이었으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배움 이었다.  나는 영업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진정으로 원하면 자존심과  내안의 허세를 쉽게 잠재울 수 있으리라...

 

쪽이 팔려?

그런게 어데있는데..

세번을 물어 볼 것을 열번 넘게 물어보았다.

일을 끝내야 집에 갈 수있기에 내일 한다는게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을 갈려면 나는 오늘 할 일을 해야만했다.  해야 한다면 얼굴을 찡그릴 시간이 없어야 한다.

누구 보다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들을 처리 해야만 한다.

 

그당시 하루일을 마치고 나면 꼭 해야 하는 나의 일은 많았다.

하루내 사수를 도와 거래처에 납품하고 영업하고, 5톤차 한차 분량을 다 팔게된다.

거래처라는게 쉬운 거래처도 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4,5층 건물은 정말 이를 악 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등에 60kg  가 넘는 분량의 음료수를 지고 올라간다는 것은 한번 정도는 어쩌면 할수도 있다.

하지만 두번, 세번 하고 나면 정말 발이 후들후들 거린다.

손이 끊어 질 것 같은 고통도 참아야 한다.  놓치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것을 10회 가까이 한다는 것은 계단이 나중에는 원수 같고 무서워 보인다.

하지만 해야한다.  누가 대신 해줄 수가 없기에 사수와 함께 이를 악물고 어깨에 힘을 더욱 싣고 깡으로 악으로 해야만 한다... 

 어느새 땀에 젖은 옷은 소금이 하얗게 서려 사우나에 갔다 온 듯 하다 ,  그래도 해야만 한다.

 

하루내내 5톤차에 실린 물건들을 사수와 함께  거의 다 팔았다.

하루 내내 팔린 차는 거의가 텅 비게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사수는 사무실로 에어콘이 딸린곳으로 가서 하루의 결산도 해야하고 장부정리및

수금정리및  하루 업무의  영업을 마감 지어야한다.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에어콘 바람밑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게 참 부러워 보이며 신선놀음이라 생각했다.

 

나는 간단하다.

거의 빈차에 내일 또 하루내 팔아야할 물건을 적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사수 인 것이다.  사수는 책임자인 것이다.  회사로 말하면 사수는  사장이고 나는  종업원 인 것이다.

하루내 하는 일만도 힘들었는데  지친몸을 끌고 다시 회사에 들어와 하는 일은 어려웠다.

 

쉬운게 아니었다.

일단  취급하는 음료수가 참으로 많았다.  품종수도 많았지만  각각 캔이며 중간 팻트 이며,

1.5 펫트  등등 ..   그 많은 음료수들을 종류 데로,  있어야할 적재요소에  채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은 물건 정리하는데 걸리는 시간 1시간여...

어떻게 구색을 맞추는가, 생각하고 연구하는데 30분여...

창고에 가서 그 물건들 만드느랴  1시간여...

컴퓨터로 그 제품 번호 찾고 기입하는데 30분여...

확인맞고  내 차례 기다리는데 30분여...

지게차가 올려주면 그 물건들  하나하나 실으면서 뒷 정리를 하는데 1시간여...

4시간이 넘도록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었다.

모든것을 정리 하고 나면 밤 열시가 다되어 간다.  시간이 가는 것보다도 더욱 마음을 힘들게하는 것은 어떤일이 있어도 비가 오고, 눈이 오더라도 꼭 해야 하는 부사수의 일이기에  부사수의 임무를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또한 힘들게 했다.

 

저녁 7시에  들어와서 대체나는 집에 가지말라는 이야기 인가?

나도 집에 가서 아들하고도 놀고 싶고 쉬고 싶은데...

다른 부사수은  들어온지 1시간 넘어서 일을 마치고, 힘들게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금방들어가는데 나는 이렇게 항상 늦게 별보고 나와서 별이 지도록 밤 10시, 11시를 넘기니...

연구 해야한다,   공부 해야한다 ,  어떤 분야 에서든 이렇듯 노하우 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남보다 내자신이  뛰어나지 않다면, 내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보다 더욱 빨리 출근할 수밖에 없었고 자존심을 죽여 야만 했다.

자존심 이라는 것 또한 지킬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지만, 버릴때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  현명 해지는 것 또한 이렇듯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게  헤메고 공부하던 어느날...

토요일 저녁, 그날은 예사날이 아닌데 중요한 날인데...

왜 그리도 일이 안 풀리고 나가야 할 물건은 그리도 많은지...

헤메고 마음이 집중이 안되어서  참으로 힘든 날이었다.

 

가야하는데

나는 시골로 가야하는데 일이  잘 풀리지는 아니하고 꼬여만간다.

답답하다.  달리기 라면 뛰고, 심장이 터지도록 어떻든 달리텐대,   마음하고 제품을 싣는 실력 하고는 하늘과 땅이다.

 

 

당시는 항상 바쁜 생활들 이었기에 부사수들 사이에도 서로 일들에 바빠서 얼굴은 알지만 친한동료는 없었다. 

하지만  그 동료들 중에서도 한명 친한 동료가 있었으니 그 동생이  민군 이었다.

형 무슨일 있어요?  안색도 안좋고 내가 일이 끝났으니 도와 드릴까요...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구세주 같은 사람인가...

민군이 도와주니 일이 일사천리 이다.    몇시간이 걸려서 끝날일이 한시간이 넘으니 끝나는 것이었다.

 

 

민군!    이렇게 도와 주어 너무 감사한데  도와준 길에 나 한번만 더 도와 주시오. 

내 급하고 꼭 시골에 가야할일이 있어서 그런데 지금 막차가 다된 시간인데 나 한번만

안양역에 태워다 주실 수 있을련지요?

민군의 차가 속도를 내어 안양역에 도착했다.( 당시는 차가 없었다. )

막차가 바로 앞에 있는데 민군이 물어보았다.

"  형!  대체 무슨일인데  이렇듯 서두르고 가실려고 하는지요 ? "

나는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민군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말했다.

"  사실은  사실은  오늘이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 이라서  내 시골에 꼭 가봐야 해요 . "

 

 

민군은 아무말없이 내가 차에 타는 순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차창가에 앉은 나는 민군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사람의 인연 이라는 것 또한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할 수있고  같이 따뜻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렇게 나는 부사수로써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몸과  배움의 시간속에서 익혀 나가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이 가득 했다.

그리고 나에게 올 시간들에 대하여 항상 준비하는 마음또한 잊지 않았다....

 

 

두서 없는 글이 계속 이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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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난 월급이 28만원이었다.
취사도 되지 않아 주인 몰래 부루스타에 해먹어야하는
단칸방..
100만원 보증금에 월세 13만원 지출하니
달랑 남은 돈 15만원으로
저축, 생활비 아무것도 할수가 없어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다.

1년후엔 500만원 짜리 옥탑 전세로 꼭 올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퇴근후 돈벌기.
첫 알바자리는
과외였으나 성격상 실패^^;;;(무쟈게 급해요)
두번째..
일산에
원 할머니 족발집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30만원을 받고 일하기로 했다.
배달은 가만히 보니
하루 5-6개 정도 들어왔다.
제안을 하였다.
사장님!!! "하루 10개 이상 들어오면 한개에 2,000원 주실래요?"
그리고 홀 매상이 2배로 늘어나면 제 월급도 두배로 주실껀가요?
사장님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 사무실은 50년 전부터 주 5일 근무에
하절기엔 5시에 퇴근이다.
그래서 퇴근과 동시에..그리고 토요일 일요일마다..

스티커를 들고 주변에 아파트는 다 돌았다,
그 덕분에 운동도 되어 지금 내 체력은 이천수다..
한번은 백마 이마트 옆 금호 아파트 27층 사는 사람이
쟁반 국수를 시켰는데
엘리베이트가 수리중이였다.
아마 그 사람도 내려오기 귀찮아서 시켜 먹었나보다.
그래서 27층까지 한번도 안쉬고 뛰어 올라 간적도 있다.
국수는 면발이 생명이기 때문이였다.

암튼 스티커 돌리기 2주째 배달이 딱 10개 들어왔다.
그 다음은 14개 그 다음은 20개..

노하우는
배달 갈때마다..배달 안할때도 한가할땐 사다드릴테니까
담배, 음료수 쌀, 등등 필요한거 시키세요..돈은 한달후에 후불로 주세요.

내 생각은 적중했다.
배달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홀에 손님 많게 하는 노하우 :

난 우선 인사를 기분 좋게 크게 하기..
그리고 내가 앉기 편하게 테이블을 바꿨다.
그리고 다른 알바 애들한테도 손님이 부르면 항상 대답 크게 하기..
또는 손님이 눈만 굴려도 달려가기..
항상 우리끼리 잡담하지말고 손님 주시하기...
그래서 교육후 젓가락이 바닥에 떨어지면 손님이 달라고 하기도 전에
우린 그 테이블로 가지고 갈수 있었다.
물론 맛도 있었지만 써비스 전략이 더 효과적이였던거 같다.

원할머니 족발 보쌈집에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4시간 알바한지
4달만에 월 이백 오십을 받을수 있었다.

난 5개월 후
알바 시작한지 9개월만에
꿈의 옥탑 500만원짜리가 아니라 옥상 넓은 1000만원짜리 옥탑으로 옮겼다.

4시간 배달 알바하면서 한달에 이백 오십 버는 노하우 2탄(알바로 내집사기)
 
번호:32803 글쓴이: 풀잎향수
조회:1389 날짜:2004/09/17 11:57
 


넓은 옥상이 있는 옥탑은 정말 꿈만 같았다.
이제 시골에 다녀오면 나한테 연락도 없이
제사랍시고 내방에 손님들이 가득하여 새벽에 내쫒기는 일은 없어서 좋다.
난 빨간 돼지를 늘 한마리 키운다.
애지중지하던 빨간돼지를 주인 아들이 손데는 일도 없을것이다.
그 아이는 2년전 우연히 연희관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하는데
울학교 주차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어느듯 성장하여 나와 소주를 함께 나눌 나이가 된것에 놀라기도 했다.

암튼
다시 욕심이 생겼다.
내 집이 가지고 싶었다.

복지타운 옆에 상가엔 떡집이 있다.
어차피 우린 5일 근무이니 토요일과 일요일을
활용하면 될거란 계산이 나왔다.
한번은 원할머니집에 좀 늦겠다고 전화를 한후
그 떡집으로 찾아가서 혹 알바안구하냐고 물어봤다.

마침 주말 새벽에 배달이 많은데 차 있느냐고 물어보신다.
네 차있어요.
바로 대답하고 다음주 토요일, 일요일
새벽 4시 30분 부터 나가기로 하였다.
오후 4시 30분까지 12시간 이틀이면 24시간을 또 활용할수가 있다.
1시간에 1,500백원정도로 기억하는데 그건 확실치 않다
1500백원 X 12시간 X 8일 = 144,000원

원장님께 어디 중고차 싸게 살만한데 없냐고 여쭤보았다.
원장님이셨던 박ㅇㅇ원장님께서 평소 예쁘게 보셨던지라
당신이 타시던 프라이드를 어차피 잘 안타신다고 내게 무상으로 주셨다.
나의 첫 차가 프라이드다,
그래서 난 아직 프라이드를 좋아한다.
지금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시골에서 요양중이시다.

떡집에는 떡을 만드는 곳이지만 기름도 짜고, 고춧가루도 빻고 한다.
난 먼지 알러지가 있는데..
고추가루 냄새를 맏으면 계속해서 재채기를 한다.
떡집 내내 알바를 하는 동안 사장님은 내가 감기를 달고 사는줄 아셨다.

가만히 보니 떡집 주변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에만 들어가고 몇군데 안되는 어린이집 정도만 들어가고 있다.

난 먼저 주변에 교회가 몇개인지 학교가 몇개인지를 파악해보고.
교회, 학교, 어린이집, 그리고 각 가정에 배부할 스티커를 바로 만들었다.

원할머니 족발집 스티커를 돌리며 함께 돌리니 일거 양득이였고..
떡배달도 점점 늘어갔다.
떡집에서 일한지 5개월만에
당연히 내 배달료도 시간당 8천원으로 뛰었다.
8000원 X 12시간 X 8일 = 758,000원


실력을 갖춰야 월급도 더 많이 오를거 같았다.
떡집에서 일할려면 손에 허물이
세번에서 다섯번은 벗겨져야 떡을 만들수 있다.
처음 막쪄낸 반죽은 보통 사람이면 뜨거워서 만지질 못한다.

난 허물이 4번 벗겨지고서야 떡을 제데로 만들수 잇었다.
그래서 지금도 뜨거운것은 잘 만지나보다^^
내가 제일 잘 만드는 떡은 바람떡, 꿀떡 , 개떡이다.
떡집에서 일한지 1년만에 난 사장님보다 바람떡, 꿀떡, 개떡은 더 잘 만들수 있었고..

그 떡집은 상가 안쪽에 어두운 구석에 있었는데
1000원에서 3000원짜리 묶음을 만들어 밖에 가판대를 만들었다.
많이 팔렷다.
난 1달에 8일 일하면서 1백만원을 받았다.


알바생 여러분!!!
시간으로 돈 계산안하고 월급으로 제데로 받을려면
사장님보다 일을 많이 아시는게 가장 페이 결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쨌든 옥탑으로 옮긴지 2년만에 난 서울 천연동에 평수가 작은 집이지만
서울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제일 꼭대기에 아파트를 마련하였다.

이젠 내 집이다.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미혼]] 4시간 배달 알바하면서 한달에 이백 오십 버는 노하우 3탄(알바로 학비벌기)
 
번호 : 2699   글쓴이 : 상담사
조회 : 13743   스크랩 : 0   날짜 : 2004.10.18 00:46
 







4시간 배달 알바하면서 한달에 이백 오십 버는 노하우 3탄(알바로 학비벌기)
 
번호:34475 글쓴이: 풀잎향수
조회:844 날짜:2004/10/12 11:26
 



12시 좀 지나서..
전화가 왔다.

요즘은 몸이 딸려 주말에 하지만,
다행히 내일이 창립 기념일이라 휴무다.

그전엔 나를 많이 애용해 주셨던 일산의 사장님..
12시 50분에 연대 앞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이눔의 플래닛에
미련이 남아 좀 늦게 나갔다.(이도 빨리 끊어야 하는데..)
택시도, 기사도 있으련만
늘.. 나를 찾아주셨던 그 사장님이 고마웠다.

동문이래서
또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자기 젊을때 같아서
애용해 주시는거랜다.(근데 대화 나눠보니 미심쩍다..^^)

그러면서도
얌마!! 왜이렇게 늦어?
돈 많이 벌었나보지?
등등의 얘기는 거슬린다.

더럽고 아니꼽게 보여도
웃으며..
그것에 반응안보이는것..
그 모든것이 알바비에 함께
포함된일이라 생각한지 오래다.
난 술 취해도 안그러는데..(ㅡㅡ;;)

그분은 늘 나의 말문이 터지길 원한다.
왜 하느냐..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
돈 필요하면 돈 많이 주랴?
그러면서 주정도 부린다.
(그래 난 돈이 필요하다..ㅡㅡ;;;)
그냥 술주정으로 받아 들인다..
구구절절이 얘기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웃으며...
주무세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께요..
그래도 안자고 혼자 주절주절..

내가 대리운전을 처음 시작할땐
명함을 새겨서
우리학교 교수님들..의사들..간호사들..
같이 대학원 다니는 원생들..
다 뿌렸다.

나의 퇴근후 알바..
내가 세운 솔로 회사는 "기분좋은 귀가" 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 호수를 넣어 빌딩이라 하였고,

나의 학교 이메일을 넣어 회사 주소라 하였고(그래야 동문이라 아니까)
나의 핸드폰을 넣어..(주) 기분 좋은 귀가" 대표 ㅇㅇㅇ로 하였다.
반응은 제로 였다.
신뢰가 부족한듯 하였다.

난 교육대학원이나,
언론 홍보 대학원,
경영대학원,
또한,
대학원의 모든 행사에 일부러 가서 사회도 보며,
나에 대해 각인 시켰고..


홍대입구, 합정동 등지의 룸싸롱, 가요주점 등지에 명함을 돌렸다.
장난 삼아 타보는 사람이 하나둘 생겼다.
차에는 항상 술 깨는 음료와
피로회복제를 넣어 다니며
나눠드렸다.

명함을 뿌리고 2-3개월 지나니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학비 벌려고 한다며
일부러 찾아주시는분도 한둘 늘었고,
여학생들은 안전귀가의 보장성때문에
웃돈 2-3천원을 더 줘가며 찾아주기도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난 대학원 다니는 동안 한학기 5백만원을
한푼도 월급에서 학비로 넣어 본적이 없다.
5학기 2천 5백 여만원의 돈을 월급에서 한푼도 들이지않았다.

그러면서 새벽 3-5시에 귀가..
9시에 출근하고
늘.. 점심은 우유한잔 꿀떡 꿀떡 마시고
나머지는 잠으로 때웠다.
근무중에 조는것으로 인해 책 잡히는것이 싫었다.

간혹..
졸다 걸리면 구박 받는게 죽음보다도 싫었기때문이다.

주말은 늘..
레포트에 치여서 학교 도서관에서 살아야만했다.
그래서 올해 2월에
난 아무나 받을수 없다는 독수리 황금패를
모든 대학원생들이 보는 자리에서 받을수 있었다.
또 다른 성취감이었다.

암튼..
그 선배라는 사장님은
술만 취하면 날 찾았었는데..
오랫만에 찾은걸 보니 그동안 안 마신듯하다.
멀쑥한 모습과 금테 안경으로 보아 잘 나가는듯하나
나는 뭐하냐느니?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안한다.
언젠가 얼핏 한 얘기로 보아
철강회사 몇개를 운영하며,
부부 불화가 잦은듯하다.
좀 외로워 하는것 같기도 하다.

난 평소처럼 3만원을 받고 가기로 하였다.
빨리 내려 드리고 구리 가기로한 예약손님을 태우기 위해선
연대 앞에 적어도 30분 후엔 도착하여야 한다.

그 사장님은 날 더러 한잔하자고 한다.
힘든일이 있나보다.
술마시면 운전때문에 안된다고 극구 사양 하였지만..
서울까지 대리운전 시켜준덴다.

구리갈 손님 예약이 있다고 하였다.
그 돈까지 합쳐서 돈을 준덴다.
막무가네다.
어쩌면 내 맘속엔
횡재했네...가 더 차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 한번도 보따리를 풀은적이 없지만,
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뭐가 힘든지..
나보다 네가 뭐가 더 힘든지..

화장실에 다녀오니
보도블럭 옆에 세워진 내차 와이퍼엔 10만원이 꽃혀있었고 그 사람은 없다.
소주를 몇잔 마셨지만..
돈 2-3만원때문에 서울나가는 대리운전은 싫었다.
(내가 대리운전자인데...^^)
다행히 안걸렸다.

독립문에 도착하여..
늘 자주 다니는 ..
같은 임대 아파트에 사시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포장마차에 들렀다.
오늘도 포장마차에 떨어지는 이 빗소리가 너무 좋다.

2000년
내가 독립문에 발을 들이고
처음 이동네서 대리운전 알바를 하고 집에 가는길..
눈이 엄청 내렸다.
새벽 4시경..
눈발이 그렇게 휘날리는데...
오뎅국물 한그릇 더 주시며..
사는게 다 그려!!
하시던 할머니라..
초라한 포장마차이지만..
아직도 그 포장마차와의 연을 끊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무릎이 많이 아프다 하여 파스를 사다 드렸더니..
그 이후로 들리면 아들 대하듯 하신다.

가락국수 하나에..
오뎅국물..
소주 한병..

나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술값 6천원 지불하고 나니
9만 4천원 벌었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저만치 더 와 있겠지?
가을을 즐기기엔 난 아직 부유하지 못하다.

졸린다...

알바생 여러분!!
어떤 일이던
더럽고 아니꼽게 보여도 그것에 반응하지말고
그 모든것이 알바비에 함께 포함된일이라 생각하기 바란다.
때론 나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세상을 이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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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만으로 안된다, 목숨을 걸어라"
"아버지 무패의 비결은 자기수양과 정진이었어요"… 아들, 최배달 일대기 엮어 책·영화화


“아버님은 의외로 약한 분이었습니다. ‘무패의 파이터’였긴 했지만 말년엔 몸 이곳 저곳이 안좋아 자주 통증을 호소하곤 하셨습니다. 특히 관절이 좋지 않으셨어요. 손목이나 무릎 같은 곳이 심했습니다. 손목을 뒤로 젖히지도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머님이 아버님 팔·다리를 주무르며 마사지 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3040세대에겐 ‘고우영, 대야망’으로, 2030세대에겐 ‘방학기, 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고 최배달(본명 최영의)씨.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39년 17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7년 도쿄 무도대회 가라테(空手) 부문서 우승한 뒤, 미국·남미·중국 등을 돌며 고수들과 무예를 겨뤄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전설적 인물. 그가 창시한 ‘극진(極眞) 가라테’는 오늘날 일본 공수도의 대명사로 군림하며 러시아·북한 등을 포함한 세계 100여개국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최배달의 장남 최광범(30)씨는 강한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형외과 레지던트라는 직업 때문인지 그가 풀어내는 ‘기억’엔 의사로서의 개인적 소견이 양념처럼 곁들여졌다.

“젊었을 때 워낙 심하게 몸을 쓰셨던 것 같아요. 극한의 상황에서 계속 단련을 하셨으니까,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었을 테죠. 아버님은 생전에 약 100번에 걸쳐 황소와 대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47마리의 뿔을 꺾고, 4마리는 즉사시켰죠. 그때 쓰러지는 소에 무릎이 깔린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400㎏도 넘는 황소가 무릎을 덮쳤으니…. 제 생각으로는 당시 미세골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이 퇴행성 관절염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봅니다. 운동을 무리하게 하는 사람들은 퇴행성 관절염을 조심해야 하거든요.”

쏘는 듯한 눈빛에 다부진 체격

부친을 닮아 그럴까? 최광범씨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탱글탱글하니 쏘는 듯한 눈빛에 프로레슬러 같은 체구, 활기 넘치는 다부진 몸집이 사진으로 본 ‘최배달’을 쏙 빼닮았다. ‘한 가락’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하. 저희 3형제가 다 그래요. 저는 174㎝에 92㎏, 둘째는 175㎝에 95㎏, 막내는 181㎝에 95㎏입니다. 모두들 운동을 좋아하죠. 저는 킥복싱과 헬스를 했고요, 둘째(최광수·29)는 체육대를 나와 킥복싱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막내(최광화·23)는 아직 학생인데 검도를 익혀 서울 검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최광범씨는 만화가 방학기씨가 스포츠신문에 ‘바람의 파이터’를 연재(1989~1993년)할 때, 작가 앞에서 실전 자세를 시연해 이해를 도왔던 무술 모델. 그런 그가 왜 ‘극진 가라테’가 아닌 킥복싱을 배웠을까?

“우리나라엔 가라테 도장이 없습니다. 아버님이 태권도와의 마찰을 우려, 고국에는 극진 가라테를 들여오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물론 가라테를 배우고 싶었었죠. 어렸을 때 아버님께 ‘좋은 도장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이 뜻밖의 대답을 하시더군요.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좋은 도장’이란 겁니다. ‘매일같이 갈 수 있고, 틈 나는대로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란 거지요. 저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장이 킥복싱 도장이었습니다.”

‘배달’은 자식들에게 “기본부터 착실히 다질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항상 ‘내가 많은 사람들과 겨뤄 상대를 쓰러뜨렸지만, 그 비결은 결코 화려한 공중돌기나 발차기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장의 무기는 오직 ‘정권치기’ 하나였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발차기가 화려할수록 위력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전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미국 프로레슬러 톰 라이슨과 붙었을 때 얘깁니다. 만화에선 공중에 붕 떠서, 링 3면을 돌아가면서 발로 차, 가속도를 붙여 그 힘으로 톰 라이슨을 가격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상황은 그와 다릅니다. 상대도 평생을 갈고 닦은 고수 아닙니까? 그런 상대의 빈틈은 눈 깜빡하는 순간, 0.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 순간을 잡느냐 못잡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그런 상대 앞에서 벽을 세 번씩이나 차면서 빙빙 돌면, 그게 통하겠습니까? 그때도 아버님의 무기는 단 한 방, 상대가 ‘깜빡’하는 그 틈을 파고든 정권치기였다고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라” 역설

최광범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버님을 보면 늘 ‘칼 끝에 서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아버님은 항상 자신을 다듬으며 정진하셨거든요. 집에서도 좌선을 하시고, 천천히 산책하며 차를 마시곤 하셨습니다.”

“아버님에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그 말을 몹시 싫어하셨어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 아니냐’는 거죠. ‘자기 상황에 따라 단지 성실히 노력하는 정도로는 이뤄지는 것이 적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목숨을 걸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거다 싶으면 목숨 걸고 정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배달’에게 최광범씨는 늦둥이다. 52세에 첫아들을 낳았으니 늦둥이도 이만저만한 늦둥이가 아니다. 무예를 위해 결혼마저도 뒤로 미뤘던 것일까?

“어머님이 일본서 유학할 때 아버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24세, 아버님은 45세였습니다. 사실 아버님에겐 어머님을 만나기 전,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사람이어서 집안 어른들이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을 데려오자 집안 어른들이 비로소 인정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이었으니까요. 1974년에 제가 태어나자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님은 귀국 후 한국과 일본을 왔다갔다 하며 생활하셨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패의 파이터에게도 사생활은 있었을 터. 부부싸움이나 자녀 교육문제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배달’의 모습이 궁금했다.

“아버님은 큰소리를 내지 않으셨어요. 소리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부싸움은 제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트러블이 생길 것 같으면 어머님은 아무말도 않고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했어요. 그럼 그냥 모든 것이 조용해졌습니다.”

최광범씨는 ‘최배달’의 아들로서 “고교시절 동급생들의 눈길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딱 한 번 사고를 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후회했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상대편 얼굴이 부서지다시피 했거든요. 의사가 보더니 ‘교통사고가 났느냐’고 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애들이 ‘최배달 아들이 싸운다’며 우루루 몰려 나와 에워싼 채 구경하려 몰려들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우쭐해진 겁니다.”

10여년 전 치료비로 400만원이 나왔을 정도라니, 집에서 엄청 혼났을 법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버님은 아무 표정도 없이 ‘무술은 너 자신을 닦는 거다’라고 딱 한마디만 하시더군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나중에 그러셨다더군요. ‘그래도 맞고 들어온 것 보단 낫다’라고요.”

‘최배달=일본인’ 일본 만화는 왜곡

최광범씨는 바쁘다. 8월 12일 개봉되는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제작 자문을 맡았고, 부친의 일대기를 엮은 책 ‘This is 최배달’(찬우물)을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레지던트 생활 아시잖아요? 병원 일을 보면서 인터뷰도 하고 하려니 도저히 짬을 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아예 휴가를 냈습니다.”

최씨는 인터뷰 말미에 최배달을 다룬 한 일본 만화에 대해 언급했다. 이 만화에는 최배달이 ‘가미카제’ 조종사로 묘사됐고 일본이 패망하자 ‘허망하다’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그려져 있다.

“아버지는 도장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귀화했지만, 죽을 때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창씨개명을 할 때도 ‘배달’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일본인으로 아버지를 묘사한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최씨는 “시정조치가 없을 때엔 극진회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법적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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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부자 가수방미의 놀라운 재테크 비법 첫 공개 80년대 ‘날 보러 와요’ ‘올가을엔 사랑할거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미모의 여가수 방미. 가수가 아닌 재테크 전문가, 100억원대의 자산가로 돌아온 그녀가 들려주는 실전 재테크 노하우. “오후에는 ‘7080 가요콘서트’ 공연이 있으니까 아침 일찍 오세요. 제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준비하고…. 9시 30분쯤 오면 되겠네요.”
말투가 싹싹하고 시원시원했다. 집을 번듯하게 꾸며놓지 않아서 볼 건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오라고 화끈하게 OK한 가수 방미. 한강과 한적한 한남동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UN빌리지 언덕 위의 경치 좋은 집.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드나이트블루 미니스커트와 톱을 차려입은 그녀의 이미지가 상쾌한 아침과 잘 어울렸다. 입구를 따라 거실에 도착했을 때 기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거실에는 TV와 소파 2개, 안방에는 침대 하나, 작은 방에는 콘솔 하나가 전부였다.

 

분명 그녀가 100억원대의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갔는데 말이다. “아니, 필요한 가구만 있으면 되지, 뭘 더 사야 하나. 하나하나 다 갖춰놓고 살려면 한도 끝도 없고, 그런 게 다 사치예요. 하하.”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거실의 통유리창 옆에 있는 책상은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얻어온 것이다. 아이들이 쓰던 책상이라 마징가Z부터 드래곤볼까지 스티커가 빼곡하게 붙여 있다. 부엌의 한 코너에는 스타벅스 커피잔이 소복이 쌓여 있다. 분리 수거를 잘 하는 구나 싶었다.

 

“이거 종이컵 하나에 50원 주잖우. 60개 모으면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공짜라니까!” ‘하하하’ 웃다가 고개를 돌리니 커피숍에서 들고 온 냅킨 한 움큼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박한 생활상이 신선했다. 부자는 어느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구나.

 

종이컵 하나도 버리지 않는 짠순이 살림꾼 그녀는 원래 MBC 코미디언 공채 2기 출신이다. 그러나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1980년 ‘날 보러 와요’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했고,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데뷔하자마자 히트곡을 낸다는 게 어려운데, 참 운이 좋았어요. 갑자기 바빠지니까 혼자서 스케줄 관리를 못 하겠더라고요. 마음에 맞는 매니저도 만나야 하고 그래서 81년부터는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돼 일을 했어요.” 그때부터 영화와 CF에도 출연했고, 라디오 DJ로도 활약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93년 겨울, 그녀는 모든 활동을 접고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노래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10대 댄스 가수들 중심으로 가요계 판도가 바뀌니까 설 자리가 없더라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제 노래가 댄스곡인가요? 아니면 발라드인가요? 그렇다고 트롯인가? 나이 든 가수가 노래 부르면 무조건 트롯이 되잖아요. 그렇게 어중간하게 분류되는 게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을 세우고 가지는 않았다. 일단 보스턴에서 1년 동안 영어 공부를 했고, 뉴욕으로 건너가서 연극 공부를 마쳤다. “미국에 있으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새로운 사람 만나면 말수도 없고, 내성적이었는데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그런 게 없어졌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아는 척하는 게 싫었는데 미국에서는 유학생들이나 아줌마들이 조금만 아는 척 해줘도 너무 반갑더라고요.”

 

그녀는 특히 뉴욕을 사랑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음악, 패션, 공연, 재즈, 영화, 미술, 건축, 새로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곳.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아파트 분양 재테크를 줄곧 해왔던 그녀는 미국에서도 일을 벌였다. 미국에 올 때 1달러당 800원이었던 환율이 IMF(98년)가 터진 뒤 1달러당 2200원까지 치솟은 것. 유학 자금으로 가져왔던 14만 달러와 집 안의 가구들, 고가로 구입한 벤츠 자동차까지 팔아서 한국으로 달러를 송금했다.

 한 달 만에 2배 이상의 환차익을 볼 수 있었고, 그 이익금을 뉴욕에서 콘도 분양받는 데 투자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타이밍을 잘 잡으니까 돈이 불어나더라고요. 미국에 있는 동안 환율의 힘이 꽤 무서운 거구나 느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재테크 공부를 했어요.” 뉴욕 부동산 시장을 누비다 생활력은 강했지만 수입과 지출 관리를 잘 못했던 어머니, 노름의 유혹에 빠졌던 아버지로 인해 부유하게 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그녀를 악착같이 만들었다. 가수 데뷔하기 전까지 줄곧 네 식구가 방 한 칸에서 함께 지냈단다. 그렇다 보니 아껴 쓰는 생활이 몸에 배었고, 돈 모으는 재미에 주파수를 맞추게 된 것이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꾸준히 부동산 전문 서적들을 읽으며 공부했다. LA와 뉴욕을 오가면서 지내다 작년 1년 동안은 뉴욕에 머물며 콘도를 사기 위해 수없이 집을 보러 다녔다. 가는 분양 하우스마다 한국인들이 있었고, 어떤 날은 아침 예약 다섯 팀 모두가 한국 사람인 날도 있었다. 뉴욕의 부동산에 동양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부동산에 관심 많은 사람들과도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년 전에 맨해튼72가 리버사이드 쪽에 있는 30달러짜리 콘도를 샀어요. 맨해튼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죠. 그리고 몇 달 만에 60만 달러에 팔았어요. 일명 ‘치고 빠지기 작전’이라고 하잖아요.” 집을 살 때는 분양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분양 값과 감정가는 다르기 때문에 시세 파악을 정확하게 하고 나서 집을 사야 한다는 것. 특히 미국은 담보금을 50% 내고, 나머지는 대출을 받아 상환하는 방식으로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융자 상품도 이자율을 꼼꼼히 따져서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도 가수 데뷔하면서부터 아파트 재테크를 줄곧 해왔다. 데뷔 당시 그녀의 재산은 한 달 월급 9만원. 비과세 정기적금 4개와 일반예금 통장 1개가 전부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밥값도 아껴 알뜰히 모으는 정도였다. 그러다 80년대 초반에 옴니버스 앨범 중 ‘One night two days’가 히트하면서 1200만원의 목돈이 생겼다. 그녀는 그 돈에 4개의 적금을 해약한 돈까지 보태 아파트를 계약했다. 방 한 칸에서 월세로 살던 처지를 청산하고 신반포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한 것. 아파트가 살기에 편하고 좋다는 걸 이십대 초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신반포 아파트를 내놓고 방배동 아파트를 매입, 10개월 만에 300만원의 차익을 봤다. 다시 여의도, 방배동에 있는 아파트를 옮겨가며 6개월~1년 주기로 매매와 매도를 했다. 1억원으로 샀던 여의도의 아파트가 2년 사이에 5억5000만원까지 치솟는 등 이익금도 커졌고, 평수도 조금씩 넓혀 갔다. “20년 동안 서른 번을 이사했어요. 부동산, 그것도 주택으로 재테크하려는 사람들은 집을 사서 평생 살겠다는 마인드를 바꿔야 해요. 재건축에 들어갈 집이나 꾸준히 집값이 오르는 아파트 등은 차익 실현을 하는 대로 치고 빠지는 거예요.” 현재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주택은 강남의 아파트 한 채, UN빌리지의 100평대 빌라, 논현동의 빌딩 한 채다. 100억원을 호가하는 자산이다. 그녀는 집을 살 때 반드시 대출을 받는다. “평수를 늘리거나 목이 좋은 데로 옮길 때마다 대출을 받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금이 그만큼 있으면서 뭐 하러 대출 받느냐고 해요. 아니 왜 은행 좋은 일을 시켜요?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곳이지, 우리가 돈을 갖다주는 곳이 되면 안 되죠.” 그녀의 은행 거래는 통장 2개가 전부다. 한 개는 3개월 동안 쓸 생활비가 들어 있는 저축통장이고, 또 하나는 대출 통장이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 전에 임대료 수익률을 미리 계산해 봐야 한다. 임대료로 대출 이자를 갚고도 돈이 남는지 따져보는 손익 계산은 필수 사항이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꿈꾸는 파워 우먼

 

 행복의 기준이 뭐냐는 물음에 그녀는 서슴지 않고 ‘경제적 여유’라고 말한다.

 

“돈에 혈안이 돼서 안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돈이 있다면 분명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거죠. 그런데 그 돈이라는 걸 좋아해야 사방 천지에 돈 벌 거리가 보인다니까요. 돈을 사랑하고, 돈 벌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금융 교육을 하고 싶어요.”

재테크는 이론 공부만으로는 안 된다. 실전 투자와 이론 공부를 병행해야 재테크 공식을 터득하게 되는 것. 아파트 부동산 투자와 뉴욕에서의 콘도 분양 투자 등 높은 실적의 포트폴리오를 구상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그녀에게는 꿈이 있다. “맨해튼 중심에 큰 콘도를 살 거예요. FTA도 체결이 됐고, 조만간 미국 가는 데 비자가 필요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동남아 여행을 가겠어요. 비자 받는 게 까다로웠던 미국을 대거 여행이나 공부하러 올 테고, 특히 뉴욕에 엄청난 한국인이 들어올 거예요. 한국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사서 운영하고 싶어요.”

 

뉴욕 하면 방미가 떠올랐으면 좋겠단다. 그것이 그녀의 사업 컨셉트다. 맨해튼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타임스퀘어와 록펠러센터 곳곳에 집과 빌딩을 갖고 있는 21세기 재벌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처럼 되고 싶다는 것. 부를 거머쥐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막 뉴욕 생활을 시작한 유학생들이나 여행객들에게 뉴욕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벌써 2년 전부터 좋은 콘도의 자리와 투자 가치가 있는 매물을 찾고 있다는 그녀. 올가을쯤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듯싶다. 외롭지는 않을까.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 같이 운동도 하고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만나고 싶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네요. 결혼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나요. 제가 요리를 정말 못하는데 남자랑 맛있는 밥 사 먹을 돈은 있잖아요(웃음). 하루 세 끼 즐곧 사 먹자고 하면 남자가 도망갈까요? 하하.” 아직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혼자 지내고 싶다는 그녀. 8월에는 두 달 동안 토론토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바쁜 일상이 휘몰아치기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달콤한 시간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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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실제 월드스타 비와의 인터뷰가 아니라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님께서 지난 6월에 비와 인터뷰를 가졌었는데 그 기사를 바탕으로 제가 비와 단독인터뷰를 했을 때의 상황을 가정해서 써 보았습니다.

 

저는 비를 만난 적도 없으며,

비를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니 저에게 대신 사인받아달라고 메일 보내는 분들은 메일 차단 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전체적인 포멧 자체는 조선일보 기사 양식을 그대로 본 떠 내용만 바꾼 것입니다.

사진 또한 최보식 기자님의 인터뷰에 삽입되었던 사진 두 장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원문에서는 다양한 비교적 가볍고 다양한 질문을 다루었으나,

저의 글에서는 꿈과 목표, 그리고 일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서만 국한적으로 깊이있게 다뤄보았습니다.

 

인터뷰에서 비의 답변은 '비의 어록'이라고 올려진 인터넷 자료와 그의 멘토로 알려진 박진영씨가 예능프로에서 나와서 언급했던 비에 대한 일화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당연히 비 본인의 생각이나 의견과는 무관할수도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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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시절... 꿈 그리고 목표에 관하여

월드스타 비를 만난다는 것에 부푼 가슴을 안고 나는 청담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시아를 뒤흔든 최고의 엔터테이너는 어떤 사람일까?

 

춤과 노래 하나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나와 동년배인 친구에게 약간의 질투와 시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상대였으므로 그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매니저와 인사를 하고 비가 기다리고 있는 창가가 훤히 트인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 월드스타 비...아니 인간 정지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채 소년의 티가 가시지도 않은 순수하고 잘 생긴 청년 한 명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바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 먼저 유년시절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유년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가정형편은 유복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우하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잘 안되어 집안 사정이 굉장히 힘들었으니까요."

 

 

-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수라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어린 나이 때 부터 노력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중2 때부터 춤을 췄어요. 춤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댄스 가수가 꿈이 됐죠. 가수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보질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좀 더 연습하게 되고, 그렇게 하니까 다행히 남들보다 좀 더 좋은 기회가 좀 더 자주 찾아오게 되고 그 기회를 통해 제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가난했던 집안 환경이나 아버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습니까?

 

 

"가난했기 때문에 있는 집 아이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무시하면 저는 더 오기가 생기는 스타일입니다. 그 오기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 같습니다. 가슴에 한이 없고 오기가 생기지 않고서는 남들만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내 인생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내 탓이지 부모탓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 하지만 세상에는 지훈씨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저처럼 무언가 마음먹은 일이 잘 안되고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세상탓, 남의탓, 부모탓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도 그런 분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돌아섰을 때 그 여자에게 보복을 하는 남자들도 있는데..저는 그런 사람들은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돌아선 것은 그 남자에게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돌아서게 만든 자신의 잘못인데도 여자탓을 하고 여자에게 복수를 합니다. 저는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는 자신의 탓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다른 분들도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시면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될거라고 믿습니다."

 

 

- 지훈씨 말을 들으니 저 자신이 정말 부끄러워집니다. 지금은 어려웠던 유년시절의 경험을 딛고 일어나 정상의 자리에 섰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상태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 지금,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지훈씨만의 비결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꿈을 이루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꿈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꿈이라고 말할만한 것이라면 분명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일 것입니다.

 

태어나서 붓 한 번 못잡아본 사람이 위대한 화가를 꿈꾸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부터 춤을 좋아하고, 춤을 잘 췄고, 춤에 대해 재능도 있었고, 주변으로부터 춤 참 잘춘다라는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댄스가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높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정말 꿈으로만 꾸는 분들과 저처럼 꿈을 현실로 이루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믿음에 대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디션에서 18번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18번 떨어지면서 단 한번도 내 꿈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대한민국에서 춤을 제일 잘 춘다고 믿었고, 제가 춤을 추면 누구나 제게 박수치게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꿈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시는 분들을 보면 고작 한두번의 실패에 자신의 꿈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내가 재능이 있을까?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보다 저 사람이 더 잘하진 않을까?

 

이렇게 꿈을 의심하면 의욕도 떨어지고 목표에 대한 집중력도 흐트러지게 되며,

가장 중요한 자신감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꿈은 말 그대로 꿈으로 남게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제가 유명한 가수가 될 것이라는 것은 단 1분 1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자신감을 가지고 무대위에 오르면 제가 가진 능력의 120% 보여줄 수 있고,

그 자신감에 관객들이 저에게 동화되기 시작합니다.

 

꿈이 있다면 꿈을 의심하지 마세요.

 

의심하는 순간 꿈은 거품이 됩니다."  

 

 






▲ ▲2006~2007 비의‘월드 투어’(World tour) 공연 포스터.


# 일에 대한 철학


 
- 연습 벌레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연습을 하길래 이런 소문이 나는 겁니까?

 

 

" 연습벌레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저는 공연이나 스케줄이 없을 때는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합니다.

  연습을 하지 않을 때는 춤에 대한 생각을 하죠. 연습도 하지 않고 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봅니다."

 

 

- 하루 종일 춤과 음악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지만 엄연히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일일텐데 부담스럽거나 하기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니까요. 이런 제가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많은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니까 그 행운이 달아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진영씨가 언젠가 모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비는 나를 만나지 않고 어떤 프로듀서를 만났어도 성공했을 것이며, 그는 가수가 아닌 빵집이나 세탁소에서 점원으로 일을 했어도 분명히 성공했을 사람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뇨(웃음). 진영이 형은 저에게는 엄한 스승이자 좋은 친구입니다. 진영이 형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했을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진영이 형을 못만났더라도 저는 춤을 추거나 연기를 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성공하지는 못했을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춤추고 연기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진영이 형이 저에게 큰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회를 잡은 것은 결국 저의 열정과 노력때문에 가능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누굴 만나느냐가 아니라, 누굴 만나더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8번째 오디션에서 진영이 형이 저를 발탁하지 않았다면, 저는 19번째 오디션을 최선을 다해 준비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성공한 사람 축에 들고, 제 성공에 비결이 있다면 바로 기회를 잡기 위해 최선의 노력으로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누굴 만나느냐보다 누굴 만나더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해야한다....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공을 위한 준비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면, 미리 준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그 노력의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도 매우 가난해서 원고를 복사할 돈조차 없었고, 마땅히 글을 쓸 공간조차 없어서 집 앞 작은 까페에서 글을 오랜동안 써왔다고 알고있습니다.

 

출판이 될지 안될지조차 모르는 글을 수개월동안 끼니도 걸러가면서 집필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짓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차이점은 바로 그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늘 가능성을 먼저 염두해둡니다.

 

최소한 50% 이상의 성공확률이 있어야만 그 일을 시작하죠.

 

그러나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0.1% 의 가능성에서 시작합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 0.1%의 가능성을 1%로, 10%로 30%로 가능성을 키워나가죠.

 

처음에는 0.1%의 가능성에서 출발했지만, 그들은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그 가능성을 끝내는 100%로 만들어 냅니다.

 

제가 할리우드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들과 디자이너, 영화감독들을 만나보고 느낀 그들의 성공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 대단한 연습벌레라고 하는데 사실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연습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연습 방법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 처음에는 무조건 반복합니다. 그 중에서 기본이 되는 안무동작을 끊임없이 연습하죠. 생각하지 않아도

음악이 나오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정도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 다음에 비로서 응용동작을 연습합니다.

 

저의 연습시간 중 90% 기본을 익히는 시간입니다.

비단 저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기본이 얼마나 잘 되어있느냐에서 그 사람의 능력이 판가름 되어 지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일단 많이 읽고 많이 써보아야 할 것이고,

마이클 조던같이 뛰어난 농구선수가 되려는 사람은 프리드로우 연습을 토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춤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 안무를 그 어떤 가수보다도 많이 연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작년 2월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에서 열린 비의 단독 공연.


 
# 가난한 꼬마에서 아시아를 뒤흔드는 월드스타가 된 성공의 원칙
 

 

- 가난한 꼬마가 아시아를 뒤흔드는 명실상부한 월드스타가 되었습니다. 저라면 가끔씩 실감이 나질 않을듯 싶은데 어떠세요?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 인지도가 조금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월드스타는 아닙니다.

 아직 월드스타의 호칭을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부 저를 안 좋게 보시는 분들께서는 월드스타라는 저의 기사에 '동남아스타'라고 비하하는 댓글을

 다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그 분들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2~3년 후에는 제 기사에 그런 댓글이 달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어릴 때 부터 저는 제가 유명한 가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듣는 사람에 따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같습니다. 어릴 때 부터 그럼 이렇게 큰 성공을 하실 줄 알고있으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약간은 거만한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 가수가 안되면 죽겠다는 각오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된다는 생각이나 제 꿈에 대한 의심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지, 제가 잘나서

 나는 반드시 성공할거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각오로 연습하고 죽을 각오로 무대 위에 오르는데 가수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 아, 그러시군요. 정말 자신의 꿈과 목표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지훈씨처럼 사고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 저는 비단 저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디션 볼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뭔 줄 아십니까?

 

  이상하게 생긴 놈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날은 평소의 2배를 더 연습했습니다.

 

  같이 오디션 봤던 친구들은 심사위원 분들에게 그런 식으로 안 좋은 소릴 듣거나 너는 가수가 되기에

  는 못생겼다 아니면 재능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의기소침해져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

  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이상하게 생겨서 가수가 되기에 불리하기 때문에 잘 생긴 가수들보다 춤도 더 잘 추

 고, 노래도 더 잘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들은 날은 2배 더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만약 제가 잘생기고 가수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면 저는 가수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기고, 가수가 되기에는 자질도 부족했기에 다른 가수들의 배가 넘는 연습을 했고,

 다른 가수가 신경쓰지 않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저는 세심하게 더 신경써서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진영이 형이 그런 저의 모습을 높이사서 저에게 기회를 주었고,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되었고, 그 노력이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게 되

 고 , 제 무대를 본 팬들이 저의 팬이 되고, 저의 팬들이 늘어나면서 더 많은 무대에서 설 기회를 얻게

 되고, 그러면서 다시 팬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든지 성공한 분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월드스타 비가 생각하는 성공의 원칙이란 무엇인지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성공이란 물질이나 명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해서 성공한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내가 타고난 재능에 1을 더해 살아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타고난 재능조차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다 발휘하고 자신의 피나는 노력 1을 더해서 자신이 타고난 재능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 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돈과 명예에 상관없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제 펜 여러분들께서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다 쓰고 거기에 피나는 노력으로 1의 능력을 더 써서

 살아가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 바쁘신 일정 가운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좋은 말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시아를 넘어 진정한 월드스타로서 한국을 빛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활동하겠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비가 세계의 비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봐주시고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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