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군대 라는 말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아픈 추억들이 있다.
이 아픈 추억 이라는 것 또한 절실하게 , 간절하게 배움 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 이다.
하지만 얻고 배우는 인생의 크나큰 차이는 사뭇 개개인 다를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그 자체가 힘들다 생각한다.
누구나 힘들다, 누구나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차이는 사뭇 다르지 않다.
해병대, 특수부대를 나오고 힘들게 군 생활을 하여야만 군대 생활을 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멋진 군생활이라고 할수는 있지만 그 차이라는 것또한 별반 없다.
군대라는 그 안의 사회와 격리된 생활이 힘든것이다.
방위 생활도 나름데로 힘들고 취사병, 서무병도 다 나름 데로의 그 고충이 크리라.
군대는 군대 라는 그 자체가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들을 이겨냈다는 자체 만으로도, 몸건강히 잘 세월을 이겨 냈다는 자체만으로도 휼륭히 군생활을 잘 해낸 것이다.
추운 겨울 12월의 어느날 군대를 입대했다.
하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눈이 펑펑 밤새도록 내렸다.
첫날 그 어설픈 군인의 군복을 입고 내리는 창밖의 눈을 보노라니 과연 내가
제대 라른 것을 할날이 있을까? 정말 갑갑 하고도 보이지도 않는 그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퇴소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아내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훈련소 따라 오면 고무신 거꾸러 신는 다기에 전주터미널에서 군대가는 것도 아닌것 같이 가까운 곳에 가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버스에 올라 오지 않았던가? 같이 훈련소 까지 올것을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그 밤에 나는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못할것 같은 두려움에 밤을 지세워야만 했다.
과연 내가 이 훈련소를 나가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 것이 두려웠다.
시간이 지독하게도 흘러 훈련소를 퇴소하고 후반기 교육을 광주에서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3개월 시간동안도 두려운 것은 어느곳으로 자대배치를 받는 다는 것인가?
아내가 면회오기 쉬운 곳으로 제발, 가까운 곳으로 자대배치를 받게금 해달라는 기도가
나의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두려웠다.
내 소원이 다해 원하는 곳으로 배치를 받아 자대 배치 받던 그 날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자대를 배치받아 신고식을 하려 하는데 날 쳐다보는 그 많은 고참들의 시선...
그 눈빛들이 비슷한 나이의 사람에게서 나는 그 눈동자가 참으로 두려웠다.
나는 기갑부대, 전차 조종수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를 그 때처럼만 했으면 아마 고시라도 합격했을 것이다.
배워야할 것도 많았지만 외워야할 것도 많았고 연이은 훈련과 밤의 근무, 나의 신병생활은 그저 냄새나는 그 구막사 화장실에서 아내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받을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은 군대를 갔다온 사람만이 알아줄 것이다.
구타 근절이라는 목표아래, 구타가 사라지고 가혹행위가 점차 없어진다 고는 하는 그 시절이었지만 구타는 음성적으로 윗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판치고 있었다.
맞는 다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윗 고참들 부터 맞는 그 소리, 그 소리가 무섭다. 내 차례가 다가오는 순간이 두렵다.
정말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앞도 볼틈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군생활을 해나갔다.
그리고 내가 일병 2호봉 때쯤 어느 토요일 부대원들이 한 내무반에 모여 비디오를 보는 시간이 왔다. 그러던중 누군지 정중앙에 의자를 놓고 앉아 많은 병사들이 볼수가 없었다.
누군지 보니 하사관 출신인 나와 입대가 비슷한 하사였다.
기갑부대 특성상 하사관이 부대원 40%를 차지 하고 있었고,이 정중앙에 앉아있는 하사는 우리 고참들과 후임들이 가장 싫어하는 눈에 가시같은 하사였다.
고참들에게 교육을 당시 그렇게 받았다. 절대 하사관들에게 경어도 쓰지 말것이며 깡다구로 절대 지지도 말라고...
내 바로 앞에 않아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입에서는 쌍소리가 나오고 비디오 전세냈나.. 들릴듯 하게 내가 내밷고 말았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리였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 순간이 정말 싫었다.
그말을 듣고 말싸움이 붙었고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가는 것은 오랜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당직사관에게 보고가되고 부대원전체가 군장을 싸고 연병장을 돌았다.
고참들은 잘 했다며 격려를 받았지만 나는 무언가 깊숙한 깊은 곳으로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결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기분이...
적중했다.
중대장에게 보고가 되어 진술서를 시작으로 사고경위에 대한 내용증명과 여러 정황이 담긴 수십장의 종이를 쓰고 또 쓰고 밤을 거의 새우듯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징계위원회와 사실처럼 하는 상황재연, 내가 배우가 된듯하다.
그렇게 일주일 가까이 가는 그 순간이 너무도 길었다.
어떻게든 정확한 말이 없고 군기교육대를 갈것이냐, 영창를 갈것이냐,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앞을 알수 없는 그 시간이 고통의 두려움 이었다.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것은 몸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통받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10일간의 완전군장에 연병장을 도는 것으로 매듭 지어졌다.
내 안에서 나온 나의 말한디의 위력은 이처럼 나를 힘들게 15일의 댓가를 치루게 만들었다.
군인은 군인 다워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주관이었고 고참들에게는 책임있는 후임,
후임에게는 솔선수범이지만 강하고 자기위치를 아는, 그리고 후임답게 하는 후임이 되게금 가르쳤고 어쩌면 강요를 많이 하였는듯 하다.
웬지 나약해지고 군인 답지 않은 느낌을 그 즈음 후임들에게서 느꼈다.
보상심리는 아니 었지만 저게 군인 맞나 하는 후임도 여럿이 보였다.
그때가 상병 6호봉 때이다.
이제 병장도 채 2달이 남지 않았다.
그러던중 내 인생의 관점과 군생활을 확 두바꾼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