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미술가 - Art in Nature
김해심.존 K. 그란데 지음 / 보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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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예술작품이란 특정한 공간에 설치되거나 전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그야말로 전형적인 전시, 조각품만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앗'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책을 만났다. 이런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내지는 이것도 예술작품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만한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설치미술을 보고 재미있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이었지 자연에 속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어느 건물이나 공원에 설치된 작품은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언덕에, 산속에 설치한 작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음, 가만 생각해 보니 간혹 어떤 사람이 혼자서 산속에 돌탑을 쌓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듯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처럼 전문적인 미술가는 아니었기에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나 보다.

 

  왜 우리는, 아니 나는 공원이나 야외 미술관, 혹은 건물 주변에 있는 것들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연 속에 있는 건 작품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솔직히 브루니가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배를 만들었다는 '승선'이라는 작품은 설명을 보니까 작품인 줄 알지 사전 정보없이 그곳을 간다면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니와 바바리의 공동작품인 '개울 길'을 보면 무척 부럽다. 그처럼 개울을 정비하는데도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그들의 문화가. 우리 같으면 예술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포클레인과 레미콘을 불렀을 텐데.

 

  자연에 있는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고 최대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순응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라웠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이다. 산에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뭔가가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런 표식도 없고 설명하는 누군가도 없다면 말이다. 사진으로 봐도 글쓴이가 설명하지 않으면 도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거나 어떤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는 작품도 많았다. 역시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구나. 암튼 공원에 작품을 설치해도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지구미술가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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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우 이야기 동화 보물창고 51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전하림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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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정에서 한 달간 지낸 적이 있다. 큰아이가 네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함께 곰돌이 푸우를 많이 봤다. 지금도 '곰돌이 푸우'하면 떠오르는 것이 낭랑하면서 마음씨 착해 보이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목소리와 어리숙해 보이지만 친근한 푸우 목소리와 푸우가 노래하는 모습이다. 거기에 더해 10월의 한적하면서도 따사로운 햇살이 함께 떠오른다. 그것은 당시 시골에서 지냈기 때문에 떠오르는 영상이다. 만약 곰돌이 푸 비디오를 그냥 아파트에서 봤다면 지금처럼 그런 아련한 향수로 기억나진 않을 것 같다. 그 후로 둘째가 컸을 때도 푸우를 많이 봤던지 곰돌이 푸우가 기억나는지 물어보니 당연하단다. 그러면서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아직도 어딘가에 인형도 있을 것이다.

 

  비록 원래의 곰돌이 푸우가 내가 지금 기억하는 푸우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 곰돌이 푸우가 무지 좋다. 꿀을 따 먹기 위해 노래하며 나무 위를 오르다가 결국 덤불로 떨어지던 모습, 로빈에게 우산을 가지고 와서 비가 오는 것처럼 벌을 속여달라고 부탁하는 모습 등 여러 내용들이 영상으로 떠오른다. 만약 영상으로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그러면 순수하게 내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등장인물들을 재창조했겠지. 하지만 영상으로 접했기 때문에 다른 장면들을 더 쉽게 기억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추억을 떠올리는 좋은 시간이었다.

 

  비디오를 보면서도 푸우의 재치와 유머 때문에 웃었지만 책으로 읽으니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특히 푸푸우가 토끼네 집에 가서 꿀을 너무 많이 먹어 문에 낀 이야기, 어찌나 재미있는지 혼자 깔깔대며 웃었다. 뭐, 문에 끼인 장면이 재미있다는 게 아니라 푸우가 토끼에게 안에 누가 있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재미있다. 어른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는 대화지만 어른이 읽어도 무척 재미있는 대화다. 분명 객관적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재치와 유머, 위트(같은 뜻의 단어를 반복해서라도 이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을 못 찾겠다.)가 잔뜩 느껴지니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먹는 것 앞에서는 모든 것이 리셋되는 푸우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다른 인물이라면 너무 자제심이 없다느니 돼지 같다느니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푸우는 그마저도 귀엽다. 친구에게 꿀단지를 선물하기 위해 들고 가다가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깜빡 잊고 꿀을 다 먹질 않나, 친구 집에 가서도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만 찾는 푸우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친구들을 아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푸우가 전혀 밉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사랑스럽다. 어디 푸우 뿐인가. 모든 친구들이 그렇다.

 

  앞 부분에서 푸우는 항상 거꾸로 쿵쿵대며 걷는다기에 왜 그러나 의아(비디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했는데 마지막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로빈이 푸우의 다리를 잡고 계단 올라가는 장면을 떠올리니 어찌나 웃기고 귀엽던지. 그걸 또 '로빈이 푸우를 거꾸로 들고 올라갔다'고 하지 않고 '크리스토퍼 로빈 뒤로 푸우가 계단 올라가는 소리를.'이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재치라니. 곳곳에 이런 재치가 있어서, 책 읽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실 웃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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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덩 덩 둥덩 가야금 소리 들어 볼래? - 가야금 명인 황병기 우리 인물 이야기 28
송재찬 지음, 이윤희 그림 / 우리교육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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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것이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것이 변하는 게 아니라 예전에 경험했던 것을 다시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거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어렸을 때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맥락에서 설명하자면 국악을 전혀 접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국악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내 경험해 비춰봐도 학창시절에 들었던 가요나 팝송을 지금 들으면 아련한 향수까지 합쳐져서 더 감미롭게 들리지만 판소리를 지금 듣는다고 해서 무척 좋다거나 하진 않는다. 물론 요즘에는 국악도 현대에 맞춰서 만들기 때문에 예전의 그런 것과는 다르지만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 국악을 제대로 접해주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솔직히 말해서 해금 연주곡은 간혹 들었지만 가야금 연주는, 우연히 들은 적은 있어도 적극적으로 찾아 듣지는 않았다. 주변에 가야금이 좋아서 배우는 어른도 있고 가야금을 매일 연주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는 지인의 딸도 있다지만 여전히 내게는 먼 이야기다. 마음으로는 우리 악기니까 사라지는 걸 바라지 않지만 그 주체가 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가야금이 어떤 악기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헌데 이 책을 읽어보니 가야금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병기라는 인물이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때 그것을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 애쓰고 무엇보다 악보로 옮겨 적어서 다른 사람들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만들었다니 그 분야에서는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악보가 없이 스승으로부터 연주를 듣고 외워서 배울 수밖에 없었단다. 게다가 정악과 산조가 엄격히 구분되어 정악하는 사람들은 산조하는 사람들을 경시하기까지 했단다. 황병기가 처음으로 정악과 산조를 함께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하니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음악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황병기'라는 사람이 있어 세계적으로 가야금을 알릴 수 있고, 그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가야금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꾸준하게 이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는데 정말 다행이다. 황병기라는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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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아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3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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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추리소설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야말로 그냥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탐정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중요한 조사까지 마친 그 명석함이 부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보다는 설명하지 못할 어떤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그와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홈즈 시리즈를 읽으며 느꼈던 어떤 감정이 오늘 문득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어렴풋해서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요즘에도 추리소설을 무지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인간의 본능에 그런 코드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의 추리소설은 읽어보질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으나 셜록 홈즈나 포와로 시대보다 훨씬 치밀하고 정교하며 독자가 도저히 범인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예전의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무언가 거리감이 있을 법도 하다. 기계화가 되어서 인간미가 줄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고기왕의 아빠처럼, 아니 작가처럼 나도 한때 추리소설을 엄청 좋아해서 탐정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은 없기에(초등학생인데도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신 형사가 될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형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철없던 시절의 일이다. 중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봤던 책의 대부분은 추리소설이었으며 같은 반 친구네 홈즈 시리즈 책이 있다기에 빌려보기도 했다. 그 친구가 중간에 전학가는 바람에 많이 읽지 못했지만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얼굴의 형태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딸에게 엄마는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을 기억 못하는 내게 이건 아주 대단한 일이다.)하고 있는 걸 보면 추리소설의 영향이 컸나 보다.

 

  고기왕과 아빠인 고명달이 사는 모습을 보니 참 재미있게 산다. 대신 주변사람은 속터져 죽겠지만. 엄마가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가자마자 집을 옮기고 카페 겸 탐정 사무소를 내고 사는 두 남자라니. 이건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정말 이런 남자가 있으면 한숨밖에 안 나오겠다. 매월 세금 낼 거 걱정하고 어쩌다 들어오는 수입으로 간신히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참 잘 지내고 있다. 도저히 우리 둘째와 비슷한 또래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자랐다. 이런 아들이라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겠다. 그런데 그런 기왕이도 초등학교 때 커다란 시련을 겪었고, 다행히 잘 견뎌냈기에 오유리의 아픔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기왕이에게는 비록 아들에게 해주는 게 뭐가 있을까 의심이 되긴 하지만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아빠가 있었고 옆에서 묵묵히 함께 있어준 든든한 친구가 있었기에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유리는 그런 가족과 친구가 없었다는 점이 다르다. 어쩌면 유리의 언니를 등장시켜 가족의 모습을 대비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런지.

 

  한 소녀가 친구들 문제 때문에 자살을 하자 기왕이가 주변 인물을 탐색해가며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밝혀내는 과정에서 요즘 청소년들의 시니컬한 면 속에 감춰진 연약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자살이라는 큰 사건을 그냥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다룬 듯해 불편했다. 꼭 무겁고 어둡게 다룰 필요는 없지만 그야말로 '탐정놀이'의 소재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사실 기왕이처럼 주변 인물을 직접 탐색한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지만.

 

  짧은 문장과 다음 수를 먼저 읽는 듯한 대화 덕분에 300여 페이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처럼 톡톡 튀는 듯한 글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묘사가 많은 글은 지루하다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런 문장이 왜 이렇게 그리운지 모르겠다. 쉽게 읽고 쉽게 잊어버리는 책보다는 잔잔한 내용이라 읽을 때는 조금 힘들더라도 읽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고 두고두고 생각나는 그런 책을 만나고 싶다,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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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감정 - 읽으면 행복해지는 동화 I'm Happy 아이 앰 해피 24
바브라 케인 지음, 신민섭 옮김, 앤 패터슨 그림 / 루크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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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가감정의 대표적인 게 '애증'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것-심하게 말하면 증오하는 것-으로 흔히 사랑하니까 미움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살면서 하나의 일에 대해서 한 가지 감정만 느낀다면 얼마나 편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 감정의 실체가 명료하므로 해결책도 간단하지 않겠냐 말이다. 그러나 어디 삶이 그리 단순한가. 우리 내면에서는 두 가지 감정이 수시로 싸운다.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할 나이가 얼른 되었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면 엄청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나 정신없이 바쁜 게 좋기도 하면서 푹 쉬고 싶기도 한 것도 일종의 양가 감정이 아닐런지. 뭐, 이런 경우야 갈등할 소지가 별로 없지만 살다 보면 두 가지 상반된 감정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삶의 연륜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나조차 이런데 어린 아이들은 오죽 답답할까. 심지어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동생이 태어나서 한편으로 귀엽고 기쁘지만 한편으로 동생이 밉고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나쁜 애인가하고 말이다. 아니, 그 정도까지 생각할 나이가 되었으면 다행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나이에 갑자기 동생이 태어난다면 충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지 싶다. 그래서 퇴행을 하는 것일 테고.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고소하기도 한 감정,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차후에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양가감정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표현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남의 상황을 공감하고 역지사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인데 이 책이 그 기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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