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클래식 보물창고 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민예령 옮김, 노먼 프라이스 그림 / 보물창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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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를 쓰기 위해 이 책을 검색해 보니 동일한 제목의 책이 엄청 많아서 내가 원하는 출판사의 책을 찾기도 힘들다. 이처럼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책이 나왔는데도 지금까지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대개의 고전이 그렇듯 대충의 내용은 알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모를 뿐더러 책의 제대로 된 '맛'을 알지 못한다. 특히 <보물섬>처럼 만화로 나온 이야기라면 더더욱 책을 안 잡게 된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화를 가끔 보긴 봤는데 마지막까지 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실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이 만화에서 진짜 나오는 장면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장면인지는 모르겠으나 악당이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인물이었고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유럽 내에서 더 이상 땅을 차지하기 힘들어지자 바다로 눈을 돌리던 당시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보물섬>과 같은 모험, 특히 바다에서의 모험에 대한 소설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당시는 바다로 나가서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돌아오는 일이 그들에게 로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보물이 있는 섬이라니, 지금이라도 혹할만한 이야기다. 그 보물이라는 것이 결국은 해적질을 해서 빼앗은 남의 물건이지만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이 또한 당시 상황이 그러한 것을 무조건 나쁘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가치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단순히 물건만 빼앗은 것도 아니고 사람 목숨까지 빼앗으며 감춘 보물을, 숨긴 당사자는 죽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차지하는 모습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될 듯 싶다.

 

  어린 소년에 불과한 짐이 우연히 배를 타고 보물을 찾으러 떠나면서 겪는 모험 이야기가 그야말로 잠시도 눈을 못 돌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처음 배 타고 나갈 때의 짐과 모험을 하고 돌아올 때의 짐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짐의 행동을 따라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독자는 적어도 한 가지는 안심할 수 있다. 적어도 짐은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돌아왔다는 사실. 짐이 없는 상태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소설을 보면 이런 형태가 꽤 있다. 지금부터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말이다. 아마 그것이 당시의 유행하던 방식이었나 보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보물이긴 해도 짐과 그 일행이 보물을 찾아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독자는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보물섬은 가짜였다느니 알고 보니 누군가가 가져갔다느니 하면 허탈할 텐데 말이다. 물론 요즘에 그런 식으로 쓴다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다고 비난을 받겠지만(그래서 대개는 판타지로 접근하던가 꿈이었다는 식으로 맺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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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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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만한가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분명 교직을 이수했건만 무슨 과목을, 어떻게,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니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분야에서 일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배웠던 것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현장에서 싸우고 있었겠지.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을 했고 한동안 그 사실은 잊혀졌다. 그런데 희안하게 딱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푸투닉호'라는 단어다. 아니, 스푸투닉호의 의미도 아니고 그 뒤에 숨겨진 냉전 시대의 상황도 아닌, 단지 그 단어에 대한 기억 뿐이라니, 나도 내가 한심하다. 어느 과목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이가 연로하신(분명 정년퇴임한 교사가 아닐까 싶다.) 교수님이 낮은 소리로 강의를 하시는데 이 말만 꽤 여러 번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는 도대체 저게 뭐길래 저렇게 자꾸 강조를 하나 싶었다. 당시만 해도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역사나 정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아이 키우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뒤에 숨겨진 여러 정황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스푸투닉호의 거창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으며 왜 그렇게 교수님이 그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참 일찍도 이해했고 지금은 쓸모도 없지만.

 

  책을 읽자마자 아주 오래전의 그 스푸투닉이 떠올랐다. 바로 오몬 라가 그러한 우주비행사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치르는 일련의 고생과 희생이 대개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뉴요커가 극찬한 이유가 순전히 '작품성'에만 기인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즉 오론 라 개인의 역사이기 이전에 소련이라는 나라의 비열함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그야말로 시대정신을 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더 의미있는 갈채를 받았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 보여지는 그대로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은 그닥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끄집어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구가 들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권력의 집요함과 허무함, 그리고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짜로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나갔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설마 그건 사실이겠지). 마찬가지로 달이라는 곳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진짜 달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설마 이것도 사실이겠지). 이쪽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어보면 또 그 말도 맞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빅또르 뻴레빈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체제의 모순과 허구성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달 착륙 사실에 쏟아지는 그 숱한 의혹을 가지고 새로운 소설을 쓰는 누군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소설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감탄사가 나오기에 충분했다.

 

  어느 사회든, 어느 조직이든 집행부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그렇기에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나와서 어떤 발표를 할 때도 과연 저들이 말 하는 것 중 얼마만큼이 진실일까 궁금한 경우가 있다.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일'이 있을까. 예를 들면 천안함 사건 같은 경우, 누군가는 진실을 알고 있을 텐데 진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일까, 아니면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일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여타의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추측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우주 비행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송국 사람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대개는 그처럼 알면 안되는 사람들은 '사고'가 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려고 그토록 노력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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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트라우마 - 어느 외교 전문기자가 탐색한 한미관계 뒤편의 진실
최형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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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왕이나 세자책봉을 인정받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스스로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다고 위로하지만 그걸 보며 의미상으로는 속국이었음을 느끼곤 했다. 실질적으로 정국을 따로 운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의 신임을 받기를 원하는 상황을 보며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가 당시 국제정세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라는 상반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현대사를 돌이켜보니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이라고 말하면 좋겠지만)이 든다. 박정희가 5.16쿠데타(이 용어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만의 기우일까.)를 일으키고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점이나 전두환이 12.12로 정권을 잡은 후 마찬가지로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국민들이 과연 그들은 미국의 인정을 받았는지를 끊임없이 캐물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국이 둘을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인정해줬더라면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일까. 거기에 더해 5.18 민주화 항쟁 당시에도 미국의 승인이 있었는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을 보며, 만약 미국의 승인이 있었다면 그 후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의문이다. 물론 그런 의심의 기저에는 당시 군을 움직이는 주체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인정받는 문제는 그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상황을 보며 한심하게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지금도 형태만 약간 달리할 뿐 비슷한 양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하긴 어디 그 문제만 그런가만은, 이럴 때마다 역사는 결국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불과 60년 전의 문제가 아직까지,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의 판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힘을 조금이라도 보태서 해방이 되었다면, 당시 분단되지 않았다면, 아니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을 미국이 방조 내지는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었었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금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을 자극한 것이 아니냐 내지는 북의 조짐을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이 있는데, 저자는 여러 근거를 들며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한쪽의 말만 듣고 진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저자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에게 그다지 중요한 나라도 아니었고 많이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는 말은, 상당부분 이해가 간다. 당시의 국제상황을 보건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에 치우쳐 있기 전이었을 테니까.

 

  미국을 비난하고 미워하면서도 미국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도 그것을 알기에 이 기회에 미국을 제대로 알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정확히 하자는 의도에서 해방을 전후해서부터 지금까지의 미국을 파헤쳤을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약간 불편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한국의 입장은 간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북한과 휴전협정을 맺은 당사국이라고는 하지만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다. 아무리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자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제3자 아닐까. 즉 우리가 북한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미국이 취하는 입장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헌데 저자는 우리가 취한 행동, 특히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햇볕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마음이 아무렴 우리만 할까. 물론 그렇다고 북한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북한이 우리의 보수 정권을 엄청 규탄하면서도 돕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북한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이 미국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시절 북한을 두고 미국과 마찰을 빚을 때 미국의 유해발굴을 위해 돈을 주듯 우리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고 접근했어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하튼 앞부분은 미국의 의도에 집중하며 읽었다면 뒷부분은 거기에 덧붙여 말이 통하지 않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찌하면 좋을지(그래서 갑갑하긴 했지만)에 집중하며 읽었다. 적어도 북한과의 문제에 있어서 통미보다는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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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어드벤처 4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아트 어드벤처 서양 편 4
정나영 글, 김강호 그림 / 상상의집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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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음악회는 잘 안 갔지만 전시회는 가능하면 데리고 다녔다. 책에서 보는 그림과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나라 미술관에 가서 직접 보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전시회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 열심히 보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끌고 다녔다. 그림에 별 관심 없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끌려' 다녔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그토록 투덜거리며 따라다니던 큰아이가 전시회 다녔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땐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웬일이냐고 했더니 그땐 철이 없었다나. 뭐, 어쨌든 지금이라도 다니길 잘했다고 이야기하니 다행이다. 그러면서 모네의 '수련' 그림을 봤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책에 그림의 사이즈가 나온다 해도 우리가 보는 건 어쨌든 책 사이즈를 넘을 수 없는데 한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을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을 나도 고스란히 기억하는 바다. 이처럼 직접 보았을 때 느낌이 살아 움직이는 법인데, 만약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직접 본다면 훨씬 더 충격 받지 않을까 싶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지만 정작 누군가가 내게 그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못하겠다. 마치 고전의 제목을 이야기하면 작가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지만 정작 그 책은 읽지 않았던 것처럼 작품 이름은 말할 수 있지만 화가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책은 읽었는데 미켈란젤로는 워낙 유명하니까 당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읽을 생각을 안 했나보다.

 

   <천지창조>가 서서히 사라지자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루리와 수호가 과거로 돌아가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를 이루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각 장이 끝나는 부분의 정보 페이지에 있다. 설정 자체가 황당해서 어른들이야 만화는 잘 안 보려고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그 부분도 궁금해서 샅샅이 읽게 된다. 일반 책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만화책을 엄청 빨리 보던데 이상하게 나는 만화책 읽는 속도가 더 느리다. 여하튼 만화 부분에서는 아주 약간의 정보만 취하면 되고 진짜는 정보 페이지다. 부디 아이들도 정보 페이지를 읽어야 할 텐데. 그나저나 언제 시스티나 성당을 직접 가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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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이 고장 났어요! 튼튼곰 3
이수영 글.그림 / 책읽는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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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에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약간의 지장이 있긴 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끊길' 잘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언제부터 텔레비전을 안 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집은 남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무척 조용하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렇긴 하지만.

 

  텔레비전의 폐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과감히 텔레비전 전원을 끄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학교에서도 저학년 아이들이 밤늦게 끝나는 드라마 이야기 하는 걸 보면 그닥 좋아보이지 않는다.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사실 자체도 그렇고, 결코 어린 아이들이 볼만한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부모들이 좀 자제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이다. 뭐, 내용이야 너무 뻔하고 결론도 처음부터 예측 가능하지만 민수네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 보며 자기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특히 텔레비전을 무지 좋아해서 아침에 늦잠 자는 모습이나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만 쳐다보는 모습이라던가 밥 먹으면서도 가족의 얼굴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는 그림을 보며 반성할 필요도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도 예전에는 밥 먹을 때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었는데 요즘은 가끔 그런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더라도 말이다. 우리집은 거실에 텔레비전이 들어앉을 공간이 없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모니터는 너무 작으니까. 대신 간혹 다같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며 먹고 싶을 때는 상을 들고 방으로 간다. 아주 가끔.

 

  리모컨 때문에 싸우다 텔레비전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휴일을 텔레비전 없이 보내게 된 민수네는 처음에 공황상태에 빠지지만 차츰 일거리를 찾는다. 볕이 좋아 이불 빨래를 다 함께 하고 모처럼 아들과 놀아주는 좋은 아빠가 된다. 달리의 늘어진 시계가 있는 사막이었다가 차츰 뛰어노는 숲 속으로 변하는 그림만 봐도 민수네 가족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거실에 텐트 치고 그림책도 읽어주는 멋진 시간을 보내니 민수가 텔레비전을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집이 이처럼 변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현실의 가정은 그렇질 못하다는 것이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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