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 전쯤에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쓴다고 하면 의외라고 여기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처럼 블로그 문화가 활성화되기 전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그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
몇 달 전이었다. ‘영화 토론 모임’이 끝난 뒤 밥을 함께 먹으러 가자는 누군가의 말에 내가 운동하러 가야 해서 안 된다고 말하자 무슨 운동을 하는지 묻는 이가 있었다. 내가 ‘발레’를 한다고 답하자 놀라는 이가 몇 있었다. 젊지 않은 내가 대중적이지 않은 발레를 한다니까 나에게서 의외성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날씬했던 거군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고, “발레를 해서 날씬한 게 아니라 날씬한 사람이 발레를 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어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우라 아야꼬, 「살며 생각하며」
사람 대부분이 의외성을 가지고 있다. 미우라 아야꼬의 「살며 생각하며」라는 수필집에 의외성에 대해 쓴 글이 실려 있다. 저자가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 수입이 있는 집이라서 한 은행원이 수금하러 오곤 했단다. “등이 꾸부정하고 초라한 쉰이 지난” 남자 A 씨였다. 그는 남에게 무관심했고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했다. 저자가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소설 현상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정보를 재빨리 알아낸, 시내의 은행에서 근무하는 외무원이 (예금을 들게 만들려는) 영업을 위해 선물을 사들고 왔다. 그런데 A 씨는 도통 무관심했다.
며칠이 지나서 A 씨는 또 왔다. 나는 A 씨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예금을 해 주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축하의 말은 해 주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할당받은 이외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억척스럽게 자기의 성적을 올리려고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의 철저한 이 소극성은 참으로 희소가치라 할 수 있을 보기 드문 존재였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런 무기력한 은행원으로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내인가, 부모인가, 사회인가, 직장인가? 이 무기력은 과연 진정한 무기력인가,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저항인가? 나는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싱거운 무기력한 인생에 동정했다.(88쪽)
그런 어느 겨울 날, 아사히가와에 눈축제가 있었다. 빙상 카니발이 있다고 해서 나는 그날 밤 공원의 스케이트 링크까지 취재하러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링크를 둘러싸고 빙상 카니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스커트 아래 늘씬한 각선미를 가진 젊은 여성이 흐르는 멜로디를 타고 파란 수은등 아래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그 멋진 묘기를 보려고 링크 주위로 몰려와서 한쪽이 혼란을 빚었다. 그때 링크 저쪽에서 한 남자가 스케이트를 지치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무척 세련되고 훌륭한 솜씨였다. 그는 혼란한 군중들 앞에 보기 좋게 딱 멎어섰다. 박수를 보내고 싶은 멋진 모습이었다.
“여러분, 조금 더 물러나 주세요.”
활달한 소리로 말하는 남자의 옆얼굴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A 씨였던 것이다.
‘아니, A 씨를 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가 말을 걸기를 주저했을 때 다른 사람이 그를 불렀다. 역시 A 씨였다.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까?’
어쩌면 쌍둥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와 A 씨의 눈길이 마주쳤다.
“아아, 구경 오셨군요.”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그는 또 늘씬하게 발레를 추는 사람처럼 멋지게 미끄러지면서 멀어져 갔다.(89쪽)
이거야말로 보기 좋은 180도 역전일 것이다. 나는 그때의 놀람을 일생 잊지 않을 것이다. 초라하던 50대의 그는 30대의 어느 남자보다도 더 젊고 아름다웠다.
도대체 어느 편의 A 씨가 진짜 A 씨일까? 나는 스케이트를 타고 있을 때의 A 씨가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의 보람은 스케이트이지 저금의 권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의 사명에 살고 있을 때야말로 참으로 그 사람의 모습이 발휘된다고 나는 생각한다.(90쪽)
나의 생각 : 스케이트를 타고 있을 때만 A 씨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없고, A 씨가 가지고 있는 여러 모습을 전부 합쳐야 A 씨라고 본다.
누구나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 무수한 N(엔)들이 있는 셈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아는 것은 고작 그의 일부일 뿐이니 그의 N(엔)분의 1 또는 N(엔)분의 2 또는 N(엔)분의 3만 안다고 할 수 있다. N들의 총합이 그 사람인데 우리는 타인의 N(엔)들의 총합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를 잘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덧붙여 말한다면 인간은 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의외성이 언제 발현될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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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담인데 발레를 배우면서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될 때마다 얻게 되는 이점이 하나 있다. 발레보단 그래도 글쓰기가 쉽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글쓰기에 필요한 용기가 생긴다는 점이다.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 바이올린을 배운다면 여러분도 바이올린을 켜는 것보단 글을 쓰는 게 쉽다고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