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후기>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를 쓰고 나서




1.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라는 칼럼에 대하여


내가 이 칼럼을 쓰게 된 동기는 큰애가 수시모집에서 불합격한 소식을 들었을 때 엄마로서 갖게 된 내 마음가짐이 묘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어머니도 어떤 대가를 바라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자식이 잘 되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에 충실했을 터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수고한 것에 대해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되면 그것에 초연하기 힘들 것 같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이 칼럼을 쓰게 되었다.


아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일터에서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 백화점에서 또는 식당에서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경의를 표하게 된다. 백화점 판매직에서 일하는 어느 사십대 주부로부터, 하루 종일 서서 근무를 하여 다리가 아프고 발이 퉁퉁 붓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삶의 불평이 없진 않지만 그 어떤 불평도 그 앞에선 한낱 투정일 것 같아서.


이 칼럼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기러기 아빠’의 가정이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 다음으로 ‘기러기 아빠’의 이야기를 넣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가정을 해체하고 부부가 떨어져 산다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이 바란 만큼 그 결과가 나온다면 그 어려운 삶에 대해 보람을 느낄 테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얼마나 마음에 타격이 클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기러기 아빠에 대해서 쓰자니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경우의 예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부부 이야기 둘을 가져와 썼다. 하나는 알뜰한 아내의 불행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늦둥이를 낳은 아내의 불행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로 ‘그 상대는 자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더라’라는 메시지를 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기러기 아빠의 이야기로 돌아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넋두리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여기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에 쉽게 썼는데, 결말이 잘 써지지 않아 여러 번 고쳐 썼다.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도 고민이었다. 주제를 제목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개가 나왔다.


주제 1 :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의 착각이다.

주제 2 : 상대는 내게 희생하길 강요하지 않았다.

주제 3 : 희생의 선택은 자신에게 있다.

주제 4 :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이 중에서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를 주제로 생각하기로 하고 이것을 제목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이 칼럼의 맨 끝 문장도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도스토예프스키(소설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이 행복을 불행으로 맞바꾸지 않으려면, 그 결과에 실망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탓을 상대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므로. - 나의 글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중에서 끝부분.


이 글은 자신이 희생한 결과에 대해 불평을 갖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쓴 게 아니라, 그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썼다. 자신의 희생에 대해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덜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한 길을 향해 걸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2. 글쓰기에 대하여


글을 써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글이란 게 얼마나 수학적인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한 문장의 길이가 너무 짧아서도 길어서도 안 되며, 한 문단의 길이가 너무 짧아서도 길어서도 안 된다. 또 같은 낱말을 많이 중복해서 써도 안 되며, 낱말은 다르되 같은 의미의 문장을 중복해서 써도 안 된다. 같은 의미의 문장이 각각 다른 문단에 있을 경우엔 한 문단 안에 몰아넣고 중복되는 것은 빼 버려야 한다.


문장과 문장의 연결, 문단과 문단의 연결도 자연스럽도록 신경 써야 한다. 서로 유기적 관계에 놓이도록 써야 좋은 글이다. 낱말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해야 한다. 문장의 뜻을 살리기 위해 가장 적확한 낱말을 찾아 써야 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의 의무에 가깝다. 이를 위해 나는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글을 쓰는 습관이 있다.


알면 알수록 글쓰기가 쉬워지는 게 아니라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것이 글쓰기의 매력이다. 글 쓰는 일이 쉽다면, 그래서 누구나 쉽게 잘 쓸 수 있다면 아마 난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글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기에 나로서는 글쓰기가 하나의 ‘도전’이다. 도전하며 사는 삶의 좋은 점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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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10-03-1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러 문장을 리듬감 있게 하려 애씁니다. 헌데 쉽지 않네요. 생각의 실타래가 지나치게 엉켜있을 땐 특히 심해지더라고요~^^;;

페크pek0501 2010-03-11 13:14   좋아요 0 | URL
대단합니다. 리듬감까지 염두에 두고 글을 쓰시다니... 전 아직 그런 경지에... ㅋ


좋은 글은 저절로 리듬감 있게 읽게 돼요. 좋은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그걸 느끼게 되죠. 왠지 잘 안 읽혀지는 글이 있는데, 그건 못쓴 글이죠. 최명희의 <혼불>이란 작품이 리듬감 있다는 평을 받아요. 그의 글은 곡만 붙이면 그대로 노래가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가장 좋은 문체는 간결체라고 합니다. 많은 유명 작가들이 동의했어요. 그래서 전 길게 써진 문장이 있으면 많이 자르는 편입니다. 그것이 읽는 독자들도 편하지요.

 


<생활칼럼>

희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이번에 큰딸이 ‘수능’이라 일컫는 대입 시험을 봤다. 그리고 수시모집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믿었기에 나의 실망은 컸다. 아이는 거의 매일,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곧장 독서실로 가서 공부하여 밤 열두 시 넘어 집에 돌아왔다. 그러면 나는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간식을 주고 말벗을 해 주고 새벽 한 시가 되어야 잘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고등학생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삼 년 동안 했던 뒷바라지였다. 그런데 불합격이라니, 그 결과 앞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삼 년간 새벽 한 시에 자고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새벽밥을 먹인 결과가 불합격이란 말이지.”


이에 대해 아이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엄마보고 그냥 자라고 했잖아.”


사실 아이의 말이 맞다. 아이는 간식만 식탁에 챙겨 놓고 먼저 자라고 내게 여러 번 말했었다. 그 말을 듣지 않은 건 나였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가 힘들까 봐 학교와 학원을 자동차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아이가 밤새 공부하면 옆에서 뜨개질을 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어서, 이 정도의 뒷바라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해 주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야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던, 나 스스로의 선택인 셈이다. 아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밤에 편히 잘 만큼 내 신경은 무디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자식으로 인해 수면 부족을 견디며 지낸 것을 대단한 희생으로 착각했었나 보다.


사실 나는 내 생활로 바빠 아이 공부에 마음을 크게 써 주지 못했다. 그저 밤잠을 적게 잔 것 빼고는 특별히 뒷바라지한 게 없다. 그런데도 아이의 낙방에 서운함과 허탈함을 느꼈으니 나보다 더한 어머니들은 어땠을까, 헤아려진다.


자식을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삶의 대표적인 경우가 ‘기러기 아빠’의 삶이 아닐까 한다. 그 아내도 힘든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일 게다. 나는 ‘기러기 아빠’의 사연을 들을 적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아이가 부모가 바라는 대로 성공의 길을 걷게 되면 모를까, 만약 아이가 부모의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면 그 부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부모가 “너 하나 외국에서 공부시키겠다고 우리 부부가 떨어져 사는 것도 감수했는데, 결과가 이게 뭐니?”라고 말했을 때 그 자식이, “누가 엄마 아빠한테 그렇게 떨어져 살라고 했어요?”라고 한다면….


희생은 부모 자식 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도 있다. 어느 부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가 알뜰하래?”


부부 이야기 하나. 남편은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내는 알뜰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백화점 쇼핑을 갔다. 남편은 자신의 옷과 선글라스를 값비싼 것으로 샀고 아내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부부는 싸움이 났다.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난 그렇게 알뜰하게 사는데, 당신은 꼭 그렇게 비싼 물건을 사야 돼?” 이에 대해 남편이 말했다. “당신도 비싼 물건 사지 그랬어?” 그리고 이어진 말은, “누가 알뜰하래? 당신이 알뜰해서 하나도 고맙지 않아, 오히려 그래서 피곤해.”였다. 아내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당신한테 아들을 낳아 달라고 했어?”


부부 이야기 둘. 마흔 살이 다 되어 뒤늦게 늦둥이를 낳은 아내의 사연 또한 이와 비슷하였다. 딸 둘을 낳고 세 번째로 낳은 자식이 그동안 열망하던 아들이었는데, 남편은 아이의 기저귀조차 갈아주지 않았고 아이를 좀 봐 달라고 하면 고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따졌다. “난 당신이 아들이 없어서 허전할까 봐 힘든 걸 감수하고 아들을 낳았어. 난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당신은 아이를 위해 하는 일이 없잖아.” 이에 대해 남편은, “누가 당신한테 아들을 낳아 달라고 했어? 괜히 낳아서 아이의 울음소리에 밤잠도 못 자게 하잖아.”라고 응수했다. 아내는 할 말을 잃었다.


알뜰한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알뜰히 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고 여겼어야 옳았다. 늦둥이를 낳은 아내 역시,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고 싶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늦둥이를 낳았다고 여겼어야 옳았다. 그래야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의 가정이 생겨난 것도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다. ‘자식 때문에’라기보다는 ‘외국에서 조기 유학을 하는 자식을 두고 싶어서’, ‘외국 유학으로 남들보다 월등히 사회적 성공을 거둘 자식을 두고 싶어서’, 그런 욕심에 그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그래야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넋두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부모 자식 간 좋은 관계가 되기 어렵다. 그런 부모에 대해 자식이 부담스럽게 생각할 게 뻔하고 어쩌면 짜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바라게 되면 그 대상을 원망하거나 자기혐오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했든지 그것은 타자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보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도스토예프스키(소설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이 행복을 불행으로 맞바꾸지 않으려면, 그 결과에 실망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탓을 상대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므로.


.....................................................................................


<후기>


수시모집에서 낙방한 아이는 결국 정시모집에선 합격하여 자신이 원하는 학교, 자신이 원하는 학과의 대학생이 되었다. 내 생활로 바빠 밤잠을 적게 잔 것 빼고는 엄마로서 마음을 크게 써 주지 못했는데도, 대학에 무난히 합격해 큰 기쁨을 안겨 준 딸에게 이 글을 통해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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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10-03-0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보다 연배가 꽤나 있으시군요. 저는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비슷해서 제 또래인 줄 알았습니다. ^^;; 따님께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ㅎ

님의 글또한 라캉이 이야기한 '욕망의 주체'란 주제로 환원될 수 있을 듯 보이네요.
내가 추구하는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저런 자잘한 충돌이 생긴 듯. 라캉이 말했듯 인간이 어릴 땐 엄마란 존재의 눈치를 보며 살고 커서도 그러한 종속 관계가 대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기에 결국 제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좇으며 산다는 뭐 그런 말.
지나치게 환원론적이 말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대부분 사안은 지극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잔가지인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ㅎ

페크pek0501 2010-03-07 00:59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기서 거기인 얘기, 그런 경우가 많죠. 책을 읽다보면 같은 내용의 글을 저자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그런 말이 생각나죠.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은 없다. 그저 새로운 방식이 있을 뿐이다.' - 내용은 같은데 표현방식만 다르다는...

젊은 친구를 만나서 영광?입니다. 사실 전 바밤바님이 최근까지 여자인 줄 알았답니다. ㅋㅋ 그런데 님의 글 중에 '누나'라는 낱말을 쓰길래 알았어요.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저는 '많이 읽고 적게 쓰자'주의거든요. 반가웠어요.

 
토니오 크뢰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5
토마스 만 지음, 강두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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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 나와 닮은 사람의 슬픈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를 읽은 글쟁이들은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니’, ‘아니 이건 나잖아’하는 생각으로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이 작품은 한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자세히 보여 주는 성장소설로, 글을 쓰는 ‘토니오 크뢰거’가 그 주인공이다.


이문열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 준 소중한 소설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나와 나의 동족들을 보여 주고 정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독서목록에 의하면 이 작품을 처음 읽은 때는 1998년 6월이었다. 문학에 한참 빠져 살며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을 때였다.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금방 매료되어 ‘아니 이런 작품이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오다니!’하면서 단숨에 읽었었다. 그 뒤에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여러 번 읽어서 다섯 번 이상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주인공에게서 나를 보는 게 경이로웠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은 이유는 주인공 토니오에게서 나를 보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읽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사랑엔 여러 법칙이 있다. 그 중 슬픈 법칙은 둘 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자가 괴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에 민감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으며, 상대가 조금만 자신에게 소홀히 해도 심각해진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이 상대를 더 사랑하기에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와도 같은 것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토니오도 친구를 사랑하면서 그런 경험을 하였다.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는 패자이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 본문에서.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달콤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비해 사랑을 받는 일은 그저 인간이 가진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즐거움을 줄 뿐이다. 사랑에 빠진 토니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랑을 받는 것은 허영심을 위한 메스꺼운 만족감에 불과하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본문에서.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글 쓰는 일이 무조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글을 쓰며 사는 일이 세상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될 때가 있으리라. 가령 여름날 땡볕 속 아파트 공사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나, 겨울날 매서운 추위 속 재래식 시장에서 찬 생선을 손질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글 쓰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리라. 난 편안히 앉아서 ‘쓰지 않아도 될 글’이나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토니오는) 시를 쓴다는 것은 방종한 것이며 원래 옳지 못한 것이라고 자신도 느끼고 있어서, 이런 행위를 기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독특해서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는 일이 잦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고 사는 외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토니오도 그런 사람이어서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유별나 만사에 충돌하고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나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 너(한스 한젠)처럼 그렇게 눈동자가 파랗고, 또 너처럼 단정하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려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정신과 언어의 위대한 힘에 매료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토니오)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게 여겨지는 힘,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느낀 힘, 그에게 고귀함과 영예를 약속한 힘, 즉 무의적이며 말없는 인생 위에 미소 지으며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송두리째 몸을 바쳤다.” - 본문에서.


“그 힘(정신과 언어의 힘)은 그의 시선을 예리하게 했고 인간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허황한 언어의 정체를 간파하게 했으며 인간의 영혼과 그 자신의 영혼을 해명하게 해 주고 그에게 투시력을 부여해 세계의 내면과 또 언어와 행위의 배후에 있는 일체의 궁극적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본 것은 희극과 비참 - 그야말로 인생의 희극과 비참이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잘 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글을 쓴다는 것을. 그래서 우울한 그림자를 달고 사는 이들은 자신은 글을 쓰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기를 바라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토니오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스 한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한스 한젠, 너는 그 옛날 정원 문간에서 나에게 약속한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부디 읽지 말아다오! 이제 너에게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고독 때문에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음울한 시를 들여다보면서 그 맑은 눈동자를 흐리게 하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와 같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본문에서. (난 이 글이 제일 슬프게 느껴진다.)


토니오는 여자로서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친구로서는 한스 한젠을 좋아한다. 그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같은 아들을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식의 저주와 창조의 고뇌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평범성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그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어느 종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 본문에서.


그러므로 이 ‘길을 잘못 든 세속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서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살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고 부르고 또 세속인은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 본문에서.


평범한(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 속에 낄 수 없어서 필연적으로 고독한 사람들. 지금 이 시간에도 토니오와 닮은 이런 사람들은 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지 않아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 무엇을, 글로 쓰는 세계에 침잠해 있을 것이다.


그런 고독한 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게 만든다, 이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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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예사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아닐까 합니다. 예사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툭 부딪치고,
예사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꽥! 소리쳐서,
혼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가끔은 혼자서 빙긋이 웃기도 하는... 상처받기도 쉽지만 상처주기도 잘하는 그런 영혼...

페크pek0501 2010-02-24 16: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고수께서 하수의 방에 들르셨네요. 영광입니다. ㅋㅋ

작가란 그래서 외로운 존재이지요. 남들이 그냥 지나칠 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일기 일쑤... 마찰 있기 일수...그런데 그렇게 예민하지 않고 둔하면 글을 쓸 수 없겠지요.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 평범하다면 예술이 되겠습니까. 유별나도 예술가들을 사랑합니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니까요.

옹달샘 2010-02-2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어 왔지만 진정한 작가정신을 가진 분들을 보면 더럭 겁이 납니다. 저는 발끝도 따라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지요. 감동을 주는 글을 창작해 내는 작가들이 유별나다고 해도 좋습니다. 창작품을 남겨주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유익을 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작가들을 만나는 것보다 작품으로만 만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요?

페크pek0501 2010-02-26 11:24   좋아요 0 | URL
저도 비문학적인 데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들의 모습과 똑같이 않아요. 하지만 또 비문학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문학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이 세계 저 세계, 어느 세계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 들지요. 이 소설의 토니오처럼요.

작가들을 직접 보면 실망이 될 때가 정말 있어요. ㅋ
 


<연애칼럼> 환상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서로 사랑하던 연인들이 이별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변했든지, 상대가 변했든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헤어지는 이유 중 특히 상대에게 실망하게 되어 헤어지는 경우엔, 누구나 상대가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상대는 왜 변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대가 변한 게 아니라 변한 것처럼 보인 것일 뿐이다. 자신이 처음부터 상대에 대해 잘못 알았기 때문.


예를 들면, 단점이 많은 사람을 장점이 많은 사람으로 둔갑시켜 상상했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얘기다. 연인들 간에 “그가(그녀가) 내게 그럴 줄 몰랐어.”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상대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단점을 빨리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어서 시간이 지나야만 밝혀질 이런 오해는 충분히 일어날 만하다. 여기서 기억해 둘 것은 사람은 사고방식이든 성격이든 습관이든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상대가 변심을 했다고 판단된다면 반대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봐야 한다. 나의 어떤 점에 실망이 되어 내게 싫증이 났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상대가 나에 대해 엉뚱한 환상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연인들 사이에서 “이제 너를 만나는 게 하나도 즐겁지 않아.”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 말이 진심인 경우에 한하여 그 연애는 끝장이 난 것이다. 더 이상 상대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남자는 “클로이가(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하고 자문한다. 또 주인공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것일까? 그 답은 자기 확인적인 순환논법이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 클로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며, 클로이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속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싹트고 자라나는 것은 인간에게 상상력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성을 발견하게 되면, 상상력은 그 상대에게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히게 된다. 그래서 그리 아름답지 않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여기서 상상력의 다른 이름은 ‘환상’이다. 환상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사랑한 것도, 변심한 것도 무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감정이 환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탓할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환상이겠다.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조차 몰랐던 스칼렛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져 이 작품은 영화로 더 유명하다. 스칼렛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남북전쟁 직전의 시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위의 많은 남성들은 스칼렛의 매력에 반해 사귀고 싶어 했으나 애슐리만은 그녀에게 무관심하였는데, 그런 무관심한 애슐리에게 그녀는 끌리고 만다. 그리고 애슐리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으로 키워 가며 그 역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미 멜라니의 남편이 되어버린 애슐리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스칼렛은 레트와 결혼한 뒤에도 애슐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사랑을 더 키웠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애슐리의 아내 멜라니가 병을 얻어 죽게 되는 병석에서 애슐리는 멜라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을 들은 스칼렛은 그때서야 애슐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내 멜라니였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니 자신이 사랑한 사람도 애슐리가 아니라 자신의 남편인 레트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칼렛은 애슐리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착각을 하며 그에 대한 사랑을 품은 것이다. 그녀는 애슐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며 나름대로 애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으나, 그 이해는 결국 오해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진 셈이다. 결국 자신이 누굴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모른 채 사랑한 것을 보면, 사랑이란 비현실적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스칼렛이 입증한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던 소녀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여주인공인 소녀는 ‘허석’이란 이름의 젊은 남자를 예전에 염소 옆에서 하모니카를 불던 사람으로 알고 짝사랑하게 된다. 하모니카를 불던 그 모습을 그리며 그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잘못 알았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생긴다. 소녀가 짝사랑에 빠졌던 그 모습은 ‘허석’이란 멋있는 남자가 아니었고 초라한 낯선 아저씨였던 것. 어느 날 그 낯선 아저씨가 염소 옆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걸 보게 되었던 것.


“그날 하모니카를 불던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허석이 아니었다.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은 허석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내 사랑이 이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마땅히 허석이 아닌 이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를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거였다.” - <새의 선물> 중에서.


자신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이미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면 그 소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건 무엇이었을까. 역시 환상의 산물이 사랑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한 엘라


토마스 하디의 <환상을 쫓는 여인>이란 소설에서는 기혼 여성인 엘라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 트리위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 역시 환상이 빚어내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위의 시집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고 그의 시를 능가하는 시를 한 번 써 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총기 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이 생명을 빼앗기 위한 도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남편의 직업에 대해 더 이상 상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시각에선 본 남편은 그저 천박하면서도 물질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환상을 주지 못하는 그런 남편과 살면서 환상을 주는 한 시인을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 소설작품의 공통점은 환상이 사랑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아마 인간에게 환상이란 상상력이 없다면 사랑에 빠지는 일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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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마가렛 미첼 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은희경 저, <새의 선물>

토마스 하디 저, <환상을 쫓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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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 0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2-18 11:14   좋아요 0 | URL
급하지 않습니다. 이 달 안으로 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20권의 목록을 미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저도 오늘 도서관에 가고 바쁜 일 있어서 내일이나 모레에 이메일 보내놓고 댓글로 알릴게요.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0-02-19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제 하루의 방문자 수가 126명이나 되네요. 어떤 경로로 들어오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여기 들어오시는 모든 분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순오기 2010-02-1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블로거뉴스 특종 당첨이네요, 축하해요!
5권 추천하는 건 일도 아닌데요.^^ 다만 20권과 중복되지 않는 책을 추천하려고 알려달라 했지요. 어쨋든 조만간 페이퍼로 작성해서 올릴게요.

페크pek0501 2010-02-19 15:40   좋아요 0 | URL
매우, 퍽, 무척, 무지, 감사 드립니다. 저도 제 글이 당선된 것 지금 알았어요. 책을 구입할 게 있어 홈페이지 들어가서 책을 신청했는데 적립금이 들어와 있잖아요.ㅋ 여러 가지로 감사 드립니다. 아, 전 왜 이리 인복이 많은지요. ㅋㅋ

gimssim 2010-02-2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는 말씀에 공감^^
찬찬히 풀어서 쓰신 글 잘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페크pek0501 2010-02-20 10:35   좋아요 0 | URL
방금 중전님의 블로그에 댓글 남기고 왔어요. 반갑습니다. 글이 잔잔한 호수 같더군요. 좋은 글 많이 쓰세요.

페크pek0501 2010-02-2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간에 사소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중전님의 식탁풍경을 그린 글이 재밌어서? 제가 쓴 댓글을 여기에 옮깁니다.

"행복은 멀리서 보는 숲처럼 아름다운 것"-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236쪽.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입니다. 그 식탁퐁경을 저는 멀리서 보니까요. 그런데 숲 속에 있는 사람은 행복을 감지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숲 속에 있는 사람은 숲 안에 있는 벌레들과 쓰레기가 먼저 눈에 띄거든요. 좋은 방법이 있지요. 그 식탁퐁경을 먼훗날 회상하는 거지요. 그러면 거리가 생겨서 먼 숲을 보는 사람이 되어 멀리 보는 숲처럼 그 식탁풍경도 아름답게 보이고 행복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아, 재밌는 글입니다.

바밤바 2010-02-2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는 것만큼 제 자신의 욕망을 살피는 일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같은 사람이 4대 성인보다 위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욕망의 층위가 달랐을 수도 있지만 4대 성인은 조르바의 넉살 앞에선 초라해 진다고 봐요.^^

페크pek0501 2010-02-21 21: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칼럼을 쓸 적마다 '이렇게 써도 말 되나, 너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의 글이 아닌가'하고 자신이 없을 때가 있어요. 제 나름대로 알고 있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인데,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늘 오늘은 여기까지 배웠다, 내일은 더 배워야지, 하는 자세로 새로운 책을 찾아 읽습니다. '아는 만큼 글을 쓴다'는 것을 잘 아니까요.

바밤바님 덕분에 제 닉네임을 페크로 하겠습니다. 님이 처음 사용하신 이름인데 마음에 듭니다. 이것도 감사...

페크pek0501 2010-02-2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지인 덕분에 이 글의 어느 부분을 방금 고쳤습니다. 첫 문단의 끝문장에서 '상대에 대해 오해하며 인지했기 때문'이라는 부분입니다. '인지'라는 말은 심리학 용어라서 어색하니 다른 자연스러운 말로 바꾸는 게 좋겠단 말씀에 따라 '상대에 대해 잘못 알았기 때문'이라고 고쳤습니다. 글이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배웠으니 즐거운 날입니다.

지적해 주신 그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로, 예전에 문학강의에서 되도록 한자어보다 순수 우리말을 쓰는 게 더 좋다고 배웠는데, 글을 쓸 때 잊을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각성-보다는 깨닫다-라는 낱말을 쓰는 게 더 좋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도 보면 '인지'라는 말도 순수 우리말로 풀어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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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


동창생 모임에 참석을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고정관념이다.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진부하다. 나의 답은 이렇다. ‘동창생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유능한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일 처리를 다 하고 바쁜 티를 내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나 바빠서 그 모임에 못 나갈 것 같아’라고 말하며 바쁜 티를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에코’이다. 이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193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는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이자 저명한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다. 그리고 지독한 ‘공부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이런 대학자가 유머 있는 가벼운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될까? 이런 궁금증이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진짜 힘 있는 사람은 걸려 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는다. 늘 회의 중이라서 전화를 직접 받을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힘 있는 자이다. (203쪽)


이렇듯 휴대폰을 권력의 상징으로 과시하는 자는 오히려 자기가 말단 사원의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203쪽)


이것은 “긴급한 업무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온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 이를 테면 아무데서나 휴대전화로 큰 소리를 내며 통화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일침을 가한 것이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집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책이 많이 있는 걸 본 방문자는 이렇게 묻기 일쑤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나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아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있었는데,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세 가지의 대답을 소개해 놓았다.


질문 :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대답 1 :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 두겠어요?

대답 2 :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지요.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말입니다.

대답 3 :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학의 연구실에 놓아두지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혀 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많은 책들을 마주하게 되면 ‘지식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질문으로 자기 자신의 고뇌와 회한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253쪽)


책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며 사는 나로서도 서점에 있는 많은 책들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하질 않곤 했다. 세상엔 이렇게 책들이 많은데 그것에 비해 난 조금밖에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찜찜함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에코는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지식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


영화가 늑장을 부린다면 그건 포르노 영화가 맞다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의 소개는 참 신선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포르노 영화일까, 아닐까를 구분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단다.


“만일 배우들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 (174쪽)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오로지 그런 장면들(입에 담기 어려운 천한 장면들)만 본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공백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174쪽).”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가. 이 책엔 유쾌하게 또는 통쾌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책 속의 ‘차례’에 있는 제목들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하는 방법 /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 / <맞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 방법 /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앞으로 누군가가 묻는 말에 개성 없이 ‘맞습니다’로 대답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말은 이렇다. 괄호 안은 대답이다.


경찰입니다! 로시 씨이십니까? (카를라, 짐 꾸려!)

아니, 자기 팬티 안 입었잖아! (그걸 이제 알아차렸어?)

보아하니, 당신 10억 리라짜리 부도 수표에 서명을 하고 나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거 아니야? (당신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벌써 탑승이 끝났나요? (저기 하늘에 작은 점 보이시지요?)

뭐라고? 너희들 지금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군.) (112쪽)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싶은 사람은,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101쪽).”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재밌는 답변을 하고 싶은 사람은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106쪽)”라고 대답하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책을 읽든 독자는 저자에게서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은 배우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말을 통해서 보여 주는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이다. 내가 ‘비스듬히’라고 표현한 이 말은 세상을 정면에서만 보지 않기를 의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의 한 쪽의 시각만으로 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하나의 컵을 예로 든다면 머릿속에서 컵을 상상할 때 습관적으로 정면으로 본 컵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컵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볼 수 있다. 컵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 또 오른쪽에서 볼 때와 왼쪽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다. 여러 각도를 달리해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컵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여러 모습의 총합이 바로 ‘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 미국의 시각에서 보자면 ‘테러와의 전쟁’이지만 이슬람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문명충돌’일 뿐이다. 제삼의 시각으로 보면 또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쪽의 시각으로만 보는 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제대로 보려면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게 옳은가 하는 점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봄으로써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하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와 같이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를 통해서 가능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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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0-02-0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고 나서

이 글을 일주일 전에 써 놓고 이제야 글을 올렸다. 대충 써 놓은 초고이므로 다시 한 번 읽고 수정해서 올려야 하는데 늑장을 부린 것이다. 이유는 게을러서다. 좋게 말하면 느긋해서다.

글을 쓰면서 간혹 내 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관적인 생각에 치우쳐 억지를 부리며 글을 썼을 때가 그렇다. 사실 그런 글은 문제가 있는 글로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없으나, 알면서도 부족한 대로 글을 올린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사실, 옛날에 찍은 사진 속의 자신이 촌스럽고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세련되지 못한 내 글에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점점 글쓰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하는,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보낸다.



gimssim 2010-02-24 22:55   좋아요 0 | URL
제 주관적인 생각
'선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물론 예외도 있지만)
글은 그때, 그 순간의 생각의 모습이지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지만 세세한 지류는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겠지요.

페크pek0501 2010-0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남길 지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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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0-02-2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유머감각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말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 피곤하게 만드는 말, 상처주는 말,짜증스런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고 살잖아요.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유쾌해지는 말을 하면서 살면 세상살기가 한결더 즐거울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0-02-26 11:19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특히 불행하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유머감각으로 기분전환이 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