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거짓말이 허용되는 조건

 

 

친정어머니가 혼자 살기에 적적할까 봐 친정에 자주 들른다. 내가 감기몸살에 걸렸다고 말하며 며칠 동안 가지 않으면 친정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어 우리집에 온다. 와서 아픈 나를 보고는 체중이 빠진 것 같다면서 마음에 그늘이 진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이젠 나에게 거짓말을 둘러대는 요령이 생겼다. 아프다는 말 대신 할일이 많아서 친정에 갈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거짓말은 친정어머니와 나, 두 사람 다 편하게 만든다.

 

 

우리 대부분은 진실만을 말해야 옳은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산다. 하지만 때때로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상대방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대체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고 여겨질 때 거짓말을 할 것이다.

 

 

만약 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면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게 될 듯싶다. 그래서 때로 거짓말이 필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친구가 옷을 새로 사 입고 나와서 “이 옷 어떠니?”라고 묻는데 진실을 말한답시고 “별로 예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해 준다면 그 친구의 기분은 어떨까? 항상 진실만을 말해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두 사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연히 어느 커피숍에서 친한 친구의 남편이 어떤 여자와 만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니 연인 관계로 보였다. 이때 이 얘기를 그 친구에게 해 줘야 할까 말까? 어떤 것이 그 친구를 위하는 일이 될까? 만약 이 얘기를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남편에게 속고 사는 바보가 되는 것이고, 불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의 감정이 점점 깊어져서 그 친구가 더 큰 불행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남편이 비밀리에 연애를 하다가 언젠가는 연인 관계를 정리할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굳이 그 말을 전해서 그 친구를 불행에 빠뜨릴 필요가 없다.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가 있는데 동생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어머니가 충격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이 사실을 숨겨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이것은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자신이 어머니라고 가정하고 어떤 답을 원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고 결정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할까? 어떤 이는 어머니가 심적 고통을 받더라도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이는 어머니가 심적 고통을 받지 않도록 알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실을 꼭 밝혀야 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당한 경우다. 가령 어느 축구 시합에서 누군가가 반칙을 했고 그 반칙을 공개하지 않으면 상대편 선수들이 피해를 당하는 경우에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또 죽어가는 암 환자에게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에 대해 의사나 가족이 말해 줘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이 암 환자에게 고통을 준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으면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장발장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감옥에서 19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석방된다. 그런 장발장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은 미리엘 신부였다. 미리엘 신부는 장발장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 준다. 그런데 그런 신부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장발장은 성당의 은그릇을 훔쳐서 도망쳐 버린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경관들에게 잡혀 성당으로 끌려온다. 장발장은 다시 도둑질을 한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장발장에 대해 화를 낼 줄 알았던 미리엘 신부는 뜻밖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수고들 많소. 그런데 장발장이 아니시오? 당신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져가시라고 드린 물건 가운데 은그릇만 가져가셨기에 왜 은촛대는 안 가져가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는 벽난로 위에서 은촛대 두 개를 가지고 오더니 장발장에게 내밀었다. 장발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떨결에 은촛대를 받았다. 이 일에 감동한 장발장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다.

 

 

미리엘 신부가 거짓말을 했던 것은 장발장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이 그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은 장발장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거짓말이 되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 미리엘 신부의 거짓말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거짓말도 잘만 하면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거짓말도 잘하면 처세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다. 어느 누구에게나 불이익이 가지 않는다면 해로운 진실보다 이로운 거짓말이 낫고, 악의의 진실보다 선의의 거짓말이 낫다.

 

 

누구든 미리엘 신부를 ‘진실성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이 허용되는 조건’은 그처럼 ‘진실성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의 거짓말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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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파이낸스투데이에 게재된 글입니다.

 

(생각 하나가 머무는 시간)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는 칼럼 16번째의 글입니다.

 

출처를 밝히지 않는 중복 게재는 독자를 속이는 행위라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출처를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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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구입했다. 이 책에는 재밌는 제목으로 쓴 글이 많다. 그 제목들 중 하나가 ‘내가 죽어라 반복하고 연습해서 얻은 것들’이다.

 

 

누구나 살면서 필요에 의해 ‘죽어라 반복하고 연습해서 얻은 것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고 다음과 같이 열거해 본다.

 

 

 

 


내가 죽어라 반복하고 연습해서 얻은 것들 :

 

노트북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컴맹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노트북 자판을 보지 않고 빠르게 타자를 치는 것.


악보 보고 피아노 치기.


수영.

 
연필화.


자전거 타기.


글을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여 드디어 완결된 글을 쓸 줄 알게 된 것.


책을 몇 번 재독하여 다음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아는 것.(어떤 단편 소설은 일곱 번까지 읽어 봤다.)


(예전에) 오랫동안 ‘매일 한 시간씩 걷기’를 실천하여 (지금) 걷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 것.


발레를 배워 실력이 향상되고 키가 커진 것.


다리찢기.(예전보다 다리와 다리 사이의 폭이 넓어졌다.)


나에게 상처를 준 친구를 미워하는 대신 연민을 느끼는 것.


일어나기 싫은 주말 아침에 세 끼를 다 먹기 위해 늦잠을 포기하는 것.(늦게 일어나면 두 끼밖에 못 먹어서 건강에 안 좋다.)


하기 싫은 설거지를 음악 들으며 즐겁게 하는 것.


책 구입할 때 절제하여 구입할 책의 수량을 줄이는 것.


식구들에게 잔소리를 하려다가 참는 것.


아파서 누워 있을 때 괴로워하지 않고 달콤한 휴식으로 생각하는 것.

 

 

 

 


최근 깨달은 것 :


열심히 하려는 것보다, 잘하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일 꾸준히 하려는 것.

 

 

 

 


아직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 :


매주 하루 정해서 빈둥거리는 날을 보내는 것.


미세먼지가 있는 날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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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라 반복하고 연습해서 얻은 것들

 

 


손가락 딱소리 핑거스냅. 혀 위에 방울을 만드는 것. (...) 사진기 앞에서 자연스러운 피사체 되기. 피아노. 컴퓨터. 문방구에서 절제하는 것. 안면근육으로 환하게 웃는 법. 무서워 보이는 표정 짓기.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 가볍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경쾌하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 문자에 하트 찍기. 이모티콘 쓰기. 웃으며 거절하는 것. 쓸데없는 물건 버리기. 할 말을 다음 박자에 하는 것. 잘난 척하는 법. (...) 밤공기에 콧구멍을 벌름대고 보도블록의 울퉁불퉁함에 엉덩이를 맡기고 바람의 보드라움에 거북이처럼 얼굴을 내놓는 것. 무의미한 것들의 유의미함을 몸소 실천하는 것.(126~127쪽)

 

- 김소연, <나를 뺀 세상의 전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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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의 위대함 :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 이반 일리치가 죽기 직전의 시간에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독자는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느끼는 것들을 공유할 수 있다. 즉 독자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서도 죽음에 직면한 자의 느낌을 알게 된다. 이런 게 소설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2. 긴장감과 궁금증 때문에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소설 :
악인을 죽여서 살인자가 되어 버린 한 남자가 있다. 비록 살인범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의 편에서 진실이 밝혀질까 봐 독자는 마음을 졸이며 소설을 읽게 된다. 나중엔 범인으로 밝혀질 걸 알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은 지금 밝혀지는 건 아니겠지, 하며 조마조마해진다. 팽팽한 긴장감과 궁금증 때문에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이런 소설을 좋아한다. 꽤 두꺼운 이 소설을 오래전 금방 읽었던 걸 기억한다. 그만큼 독자를 끄는 흡인력이 있다.

 

 

 

 

 

 

 

 

 

 

 

 

 

 

 

 

 

 

 

 

 

 

 

 

 

 

 

 

 

 

다른 이유로 긴장감과 궁금증을 느끼며 읽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이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표제작인 ‘대성당’도 특별했지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여 의식이 없는 아이가 회복될 것인지 죽을 것인지 궁금하여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음이 따뜻한 작가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소설 같아서,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게 만든 소설이라서 감탄, 감탄.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을 흥미롭게 읽었다. 어떤 소설은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잘 몰라서 생각하게 만들었는데 이 점이 좋았다.

 

 

 

 

 


3. 내가 쓰고 싶은 글 :
내가 가장 읽고 싶은 글은 문학적인 문장이 돋보이는 글이 아니다. 정보와 지식이 돋보이는 글도 아니다. 대단한 주제를 다루는 글도 아니다. 깊은 사유로 깨달음을 주는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4. 자신의 허물은 덮고 남의 허물은 크게 본다 :
내가 어느 서재에서 다음과 같이 댓글을 쓴 적이 있다.

 

 

“저는 비교적 바른 어린이로 컸어요. 맘에 걸리는 건 내 이득을 위해 비굴할 때가 몇 번인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지우개로 지우고 싶죠. 때로는 재수 없는 아이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이 재수 없어 하는 아이, 였어요. 저도 여기까지 성장 소설을 써 봤습니다. 작위적인지 아닌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걸로... 역시 굿~ 밤~ ㅋㅋ”

 

 

과거 속의 나를 잘 살펴보면 남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하는 걸 느끼게 되면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누군가에 대해 관대해진다. 문제는 자신이 걸어 온 길을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허물은 덮어둔 채 남의 허물만 크게 보게 된다. 

 

 

 

 

 

 


5. 어렵게 쓰는 필자, 쉽게 읽는 독자 :
칼럼 한 편을 완성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 나면 지친다. 잘 썼든 못 썼든 나로선 최선을 다했으므로 피로를 느낀다. 그런데 내 칼럼을 읽는 독자는 대충 읽을 것이다. 필자가 문단 구성을 어떻게 했는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등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난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나를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한 번 읽어 보라고 내가 최선을 다한 글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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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63쪽)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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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체처럼 게으름뱅이 독자를 미워하지 않는다. 내 글을 독자가 대충 읽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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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3-03 1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글은 쓸 때보다 읽을 때 조금 더 빠르게 읽게 되니까요.
손보다 눈이 빠를거예요. 그리고 가끔은, 손보다 눈이 더 게으릅니다.
(뒤의 내용은 저희 외할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라고 해요.)
쓰는 사람만큼 잘 알지는 못해도, 읽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즐겁게 읽을 수는 있어요.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음, 저는 읽는 사람이니까요.
잘읽었습니다.
페크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9-03-04 19:10   좋아요 2 | URL
저도 남들의 글을 읽는 독자가 될 때가 많지요. 그런데 저 역시 꼼꼼하게 읽기보다 빠르게 읽으려고 합니다. 독자와 필자는 다를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래서 니체는 독자를 게으름뱅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미세먼지가 심해서 어떻게 지내시나요? 마스크를 써도 미세먼지를 먹고 살고 있는 것 같고 집 실내 공기도 좋지 않은 걸 느낍니다. 언제 끝날까요? 이럴 때 비가 내려 주면 참 고마울 것 같아요.
그래도 좋은 기분으로 보내야 하겠지요... 저녁 먹고 책 읽으며 미세먼지를 잊어볼까 합니다.
굿 데이~~.


cyrus 2019-03-04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깨달음을 주는 글을 쓰고 싶은데, 의도하지 않게 남들을 가르치려는 듯한 글을 쓰게 돼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9-03-04 19: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요령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화살을 남에게 쏘지 말고 자신에게 쏘며 글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저녁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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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친절은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복수심을 일으키며, 작은 선행은 잊혀지지 않는 경우에 좀벌레가 생겨난다.(153쪽)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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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멘트 : 커다란 친절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상대방을 초라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 친절을 베풀더라도 상대방이 잊게 될 정도로만 해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부작용(좀벌레)이 있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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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인간은 너무도 즐길 줄을 몰랐다.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가 더 잘 즐길 수만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을 꾸며내려는 생각도 가장 잘 버릴 수가 있는 법이다.(152쪽)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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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멘트 :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면 갑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갑질을 하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모두가 삶을 즐길 수 있기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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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나는 동정을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자비로운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수치심이 없다.
내가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는 동정심 많은 자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내가 동정을 해야 할 때라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동정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보기 전에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고 싶다. 그대들도 그렇게 하라. 벗들이여!(152쪽)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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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멘트 : 동정이 가는 사람을 보면 괴로워해야 하리라. 동정을 베풀면서 뿌듯함을 느낀다면 그건 자신을 위한 일을 했을 뿐이다. 동정을 베푼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남들이 모르게 동정을 베푸는 게 좋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선기금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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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벗이 그대에게 악행을 저질렀을 때는 이렇게 말하라. “나는 그대가 내게 한 행동을 용서한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악행을 했다는 것. 이것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154쪽)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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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멘트 : 벗이 내게 악행을 저지른 것은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벗이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을 악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벗이 악인이 된 것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5.
니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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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단지 밤인 게 아니다. 오늘과 다른 날을 향해 가는 밤이다.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게 하는 밤이다.

 

불행은 단지 불행인 게 아니다. 오늘의 불행과는 다른 것으로 이동하게 하는 불행이다. 어쩌면 불행은 행복을 향해 가는 통로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불행을 겪고 나면 평범한 삶에도 감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훗날 불행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 경이로움은 지나간 시간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 <페크의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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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27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샤를 페로에 대한 이야길 적었는데 웬지 제 페이퍼 주제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ㅎ

페크pek0501 2019-02-28 13:51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니체의 차라투스~를 읽으면 꼭 시집을 읽는 것 같습니다. 비유가 많기도 하거니와, 이건 대체 무슨 뜻으로 쓴 거지? 하고 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참 보게 만들거든요. 쓰윽 읽고 마는 독서를 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시집과 닮았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제목 :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너가 오해했구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이런 말을 건넨 경험이 누구나 있음직하다. 한쪽은 상대방의 말을 잘못 받아들여 기분이 좋지 않고 다른 한쪽은 오해가 생긴 것에 사과를 한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안 된 경우다.

 

 

사십 대인 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다. 장례식장에 가면서 내 슬픔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큰 슬픔에 잠겨 있을 고인의 어머니를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하였다. 혹시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큰 충격으로 병이 나신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고인의 어머니가 문상객들을 환한 웃음으로 대하는 걸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상상 밖의 일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죽은 지인이라 안타까움이 더 컸기에 나의 상상으로는 자식의 죽음 앞에 어머니가 기절을 하든지 아니면 삶의 의욕을 잃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나중에 남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 어머니는 죽은 딸이 천당에 간 것으로 여긴다는 거였다. 난 그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는 비상식적이고 솔직한 인물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뫼르소다.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지내던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도 평소와 다름없이 식당에서 태연히 점심을 먹는다. 또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나서 살인 동기에 대하여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런 뫼르소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마침내 뫼르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검사는 이렇게 말한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희극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검사의 말뜻을 헤아리면 이러하다.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는 해수욕을 해서는 안 되고, 이성과 부정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며, 희극 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려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며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살인을 한 뫼르소에게 무기 징역이 아니라 사형이 선고되는 게 마땅하다.’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가 ‘모든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며 생활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에도 한 가지 잣대로 누군가에 대해 정상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또는 도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우리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기분을 알 수 없으며,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의 기분을 알 수 없다. 그것을 알려면 잠자리가 되어 보아야 하고 개미가 되어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마음을 알려면 타인과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볼 수 있겠는가.

 

 

일례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사람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은 제각각 다른 삶을 살아서다. 눈사람을 재밌게 만들었던 누구에게는 눈이 즐거운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눈사태로 가족을 잃었던 누구에게는 눈이 끔찍한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같은 ‘눈’이지만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타인에게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해 우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만 그래도 납득하기 어려울 땐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 섣불리 단정하여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남들이 보기에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뫼르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가 있을 때 그에 대해 속단하지 말고 차라리 ‘뫼르소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는 게 현명할 것 같다.

 

 

 

 


원문은 여기로 ⇨ http://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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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4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02-24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어머님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어머니 참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이건 정말 존경의 뜻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그러기 쉽지 않거든요.
하지만 또 문상 온 사람들 때문에 더 그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문득 먼저 세상을 떠난 자제분이
생각 나시겠지요. 괜히 제가 다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래도 하나님 믿는 신앙을 가지고 계시니 잘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정말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저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거 인정하는대도
막상 이해관계에 얽히면 또 다를 수 있거든요.ㅠ

페크pek0501 2019-02-26 22:53   좋아요 0 | URL
신앙의 도움으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게 종교의 좋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뫼르소도 어쩌면 죽음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슬픈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이는 죽음을 삶의 고통이 끝나는 시간으로 여길 수 있어요. 죽음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를 테니까요. 그래서 그 어머니 이야기를 넣어 봤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떤 일에 부딪히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한계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cyrus 2019-02-24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을 이해하려다가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싶으면 직접 만나면서 대화를 나눠봐야 해요. ^^

페크pek0501 2019-02-26 22:57   좋아요 0 | URL
종종 오해를 하기도 하고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하죠.

우리도 어떤 땐 자신을 이해 받지 못해서 뫼르소와 같은 처지에 있게 되기도 할 것 같아요. ‘나를 왜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라고 느껴질 때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