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이십여 년 전 일이다. 전화로 점을 볼 수 있는 철학관이 있다는 지인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돈을 송금하고 점을 본 적이 있다. 나의 생년월일과 생시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으면 역술인이 한 시간 뒤쯤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와 ‘나’에 대해 얘기해 주는 방식이었다. 오래돼서 역술인에게서 들은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내가 뭔가 일을 하고 있고 ‘바위를 뚫는 의지’를 가져서 결국 해 내고 만다고 했던 말만 뚜렷이 기억한다. ‘바위를 뚫는 의지’라는 말이 문학적 표현 같아 지인과 통화하며 함께 웃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그때는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독서에 열중하던 시절이라 그 말이 기분 좋게 들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열중하는 일이 있긴 한데 내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했으나 지구력이 강해서 포기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기한 것은 내가 주부이고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는데도 역술인이 한사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우겼다는 점이다.


‘나의 서재’에 첫 번째 글을 올린 날(2009-01-30)부터 시작하여 오늘이 천 번째 글을 올리는 날(2025-11-14)이다. 그때 듣던 ‘바위를 뚫는 의지’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충 계산해 보면 약 십칠 년간 한 달에 다섯 개의 글을 올린 셈이다. 어떤 달은 네 개의 글을 올렸겠고 어떤 달은 여섯 개의 글을 올리기도 했겠다. 확실히 난 지구력이 있는 사람이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인가 보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노력했다기보다 즐  겼  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라고 내게 묻는 이가 있다면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낱말과 문장을 가지고 많이 노십시오. 많이 놀수록 효과가 커집니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고 그 문장들을 노트북을 사용하여 타이핑으로 필사해 ‘나의 서재’에 올린 적이 많다. 그것들을 포함해 이곳에 올린 모든 글은 내가 약 십칠 년간 ‘낱말과 문장을 가지고 놀던 시간들’의 결과물이다. 예전에 비해 나의 글쓰기 능력이 조금이나마 향상되었다면 ‘낱말과 문장을 가지고 놀던 시간들’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며칠 전 남산에 가서 가을을 느끼고 왔다. 


  간 김에 2025년의 가을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천 번째 올리는 글을 기념하며 가을 풍경을 함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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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14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폐크님.천밴째 글쓰기 축하드려요^^

페크pek0501 2025-11-14 13:54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에 비하면 천, 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지요.ㅋㅋ
그러나 저 개인으로 볼 땐 의미가 있어요. 처음에 리뷰를 올렸더니 서재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요. 우연, 이 큰 작용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25-11-14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 년 후에도 저 단풍이 지금과 같기를.....

아, 저도요 축하드립니다 천번 째를요!

축하를 하러왔다가
깜박 잊었지 뭡니까.
카스피님 축하 글 보고 다시....

페크pek0501 2025-11-14 14:00   좋아요 0 | URL
천 년 후엔 단풍도 달라질까요? 잘 모르겠어요. AI 시대가 자연까지 변화시킬지 모르죠.
차트랑 님의 축하 댓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hnine 2025-11-14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0이라는 숫자가 각별하지요.
저도 1,000번째 리뷰를 올리고 나서 혼자 흐뭇하여 자축하는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어요. ‘올해 몇권 읽기‘ 같은 목표도 세워본 적 없는데 어느 날 문득 리뷰가 1,000번째 된 걸 보니 그때까지의 시간이 감격스러웠나봐요.
pek님, 천번째까지 꺾이지 않는 의지로 달려오셨듯이 앞으로도 한결같으시리라 봅니다.

페크pek0501 2025-11-14 13:59   좋아요 0 | URL
나인 님, 대단하십니다. 리뷰가 천 편이라니요. 우와!!!
알라딘에는 리뷰의 고수들이 많이 계시긴 하죠. 비교하면 저는 햇병아리이죠.
그래도 천 번째, 이다 보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별 일 없는 한, 앞으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달릴 듯 합니다. 나인 님 뒤를 살살~~ 따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25-11-14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 초기에 즐겨찾는 서재의 의미있는 숫자를 갭쳐해서 알려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일 100명 방문이라든지, 누적 1000명이라든지, 서재지수 999 라든지, 페이퍼 100이라든지....
의미있는 숫자를 캡쳐해주는 방문자에게 책 선물을 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하고, 또 방문자는 알 수 없는 즐찾 100명이라든지 하는 날에는 작게 이벤트를 열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ㅎㅎ

페크pek0501 2025-11-15 13:26   좋아요 1 | URL
저도 생각나는 게 있어요. 방문자 3만 명이 넘었다고 제가 페이퍼를 썼었지요. 그땐 그 숫자가 황송하더라고요.ㅋㅋ
맞아요, 책 선물 이벤트가 있었어요. 저는 삼행시를 짓는 어느 서재 님이 연 이벤트에서 책 선물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벤트를 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희선 2025-11-14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 님 축하합니다 오랜 시간 글을 쓰셔서 천번째 글에 이르렀군요 앞으로도 즐겁게 글 쓰시기 바랍니다 단풍이 예쁘네요 이번엔 좀 늦었지만 아직 단풍을 볼 수 있군요 시간이 흐르면 한국에서 단풍 보기 어렵다는 말이 있기도 하던데... 가을 얼마 남지 않았겠습니다 이번 가을을 더 짧은 느낌이 들 듯합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11-15 13:32   좋아요 0 | URL
1000번 째, 라고 제목을 붙였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같은 뜻이라도 숫자가 주는 느낌이 따로 있지요.
단풍을 이번엔 못 보게 될 줄 알았어요. 단풍을 볼 수 있는 기간이 길었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오래 버티지 못하네요. 꽃도 그렇고요. 짧아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희선 님은 저보다 글을 더 많이 올리셔서 훨씬 많은 누적수를 기록할 것 같군요. 딱 떨어지는 숫자가 될 때 저처럼 페이퍼로 알려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stella.K 2025-11-15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무는 여름 보단 가을이 화려하죠.
저 화려함도 이번 주까지고 내일 비가 오고나면 거의 다 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천번의 글 축하해요!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2천 때 또 알려 주세요!^^

페크pek0501 2025-11-16 19:41   좋아요 1 | URL
아, 누구신가요?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요. 반가워요.
저는 꽃보다 단풍이 더 맘에 끌려요. 뭔가 익어가는 느낌이랄까요...
천 번이 대단한 것 같지만 제 서재에 댓글 남기시는 분들 중에서 천 번을 옛날에 넘으신 분들이 많죠.
2천 때라 하시니 너무 먼 미래 같습니다. 글 올리는 행위를 앞으로 천 번을 더 해야 한다니...ㅋㅋ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또 하나씩 올리면서 2천회를 맞이해 보겠습니다.^^

모나리자 2025-11-15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천 번째 글이라니요 대단하세요 ~!!
바위를 뚫는 의지 정말 있으시군요. 남산의 가을 풍경도 너무나 아름다워요! 자연이 주는 색깔은 흉내 낼 수 없는 것 같아요. 눈이 호강 하네요.^^

페크pek0501 2025-11-16 19:45   좋아요 2 | URL
모나리자 님,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하~~
그러나 모나리자 님은 마이페이퍼와 마이리뷰의 수를 합치면(제 서재 오른쪽 상단에 나와 있는 숫자를 더하면 되지요) 저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어느 새 즐찾 등록은 643명이 되었답니다. 백 명을 기록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바위에 낙숫물이 떨어져 구멍을 내는 ‘기적‘을 믿겠습니다.^^

서니데이 2025-11-18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도 알라딘 서재에서 리뷰와 페이퍼를 많이 쓰셨군요.
자주 읽어서 잘 몰랐는데, 벌써 1000번째가 되다니 축하드립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5-11-19 13:0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은 저보다 훨씬 많이 올리셨죠.
천 번, 이라고 하니 정말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ㅋㅋ
서니데이 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겨울이 와서 저는 좋습니다. 폭염에 시달리느라 여름이 지내기 힘들었거든요. 창문을 열면 찬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져요. 강추위만 없다면 겨울을 가장 사랑하겠습니다.^^

yamoo 2025-11-21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1천번째 글을 쓰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무렵부터 알라딘을 했는데...왜 저는 500개도 못썼을까요?? 게을러서 그럴 겁니다. 아마도..그런 지구력을 가진 페크님이 부러울 따릅입니다. 얼마 전에 하루에 그림 하나씩이라도 그리자..라거나, 하루에 글 하나 쓰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은 했더랬습니다만..여전히 생각만..^^;;

페크pek0501 2025-11-26 16:19   좋아요 0 | URL
1천번째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앞으로 1천번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 같아요. 야무 님은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화가 겸 글쟁이, 는 더 멋지지요.
저도 ‘매일 쓰자‘라는 폴더가 있답니다. 몇 번 하다가 흐지부지 되었답니다.^^
 
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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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돈이 많았던 고리오 영감이 두 딸에게 전 재산을 다 쓴 뒤에 그 딸들에게 외면을 당한 채 싸구려 하숙집에서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 읽는 재미를 준다.


고리오 영감 다음으로 주목할 인물이 라스티냐크다. 그는 고리오의 둘째 딸 델핀과 사귀게 되는데 하숙집에 함께 사는 고리오 영감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애를 출세의 도구로 삼으려던 라스티냐크는 델핀을 사랑하게 되고 고리오에게 아버지를 대하듯 잘해 준다. 고리오가 병들어 죽어 갈 때 라스티냐크가 보살피고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지내 준다. 


하숙집 주인인 보케르 부인이 하숙인 고리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고리오의 시신을 감싸 줄 시트를 내 주면서 시트 값을 계산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보면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가 느껴져 지금의 이 시대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출세 지향적인 라스티냐크라는 청년이 출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발자크(1799~1850)가 19세기에 쓴 이 소설은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청년이 상류 사회의 귀부인과 친분을 맺어 신분 상승을 꿈꾸고, 고리오의 두 딸은 각각 애인를 두고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고리오는 결혼한 딸이 딴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보며 나무라기는커녕 딸의 행복을 응원하는 등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남편이 자기의 친자식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첫째 딸 나지가 아버지인 고리오에게 전하는 장면은 놀랍기까지 하다.


대답하오. 당신이 낳은 아이 중에 내 자식이 있소?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어느 아이요?라고 그는 물었어요. 장남인 에르네스트라고 대답했어요.(323쪽)    


아버지의 분별없는 사랑과 집착이 낳은 비극


부모의 사랑이 비극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사랑의 한계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보케르 부인이 파리에서 사십 년째 운영하는 싸구려 하숙집에는 여러 명이 하숙하고 있다. 그 하숙인들 중 고리오 영감은 제면업으로 큰 돈을 번 사업가이다. 부유한 농부 집에서 외딸로 태어난 그의 아내는 고리오에게 종교적 찬미와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하게 칠 년을 살고 나서 죽었다. 이들 부부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홀아비가 된 고리오에게 부성애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인 아내를 잃자 그의 사랑은 두 딸에게로 옮겨간다.   


고리오는 매년 육만 프랑 이상을 벌어들이는 부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천이백 프랑 이상 쓰지 않았다. 딸들의 기분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다. 가장 우수한 선생들이 훌륭한 교육처럼 보이는 모든 기예를 그녀들에게 가르치게 했다.(124쪽)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딸들이 원하면, 이 아버지는 서둘러서 그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그는 그 선물의 대가로 단지 한번만 껴안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124쪽)

 

고리오는 두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며 딸들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준다. 첫째 딸 나지는 레스토 백작의 부인이 되고, 둘째 딸 델핀은 뉘싱겐 남작의 부인이 됨으로써 두 딸은 상류 사회에 진입한다. 


제면업자였던 고리오는 오 년간이나 딸들과 사위들이 일을 그만두라는 종용을 해 오자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들은 고리오가 장사를 계속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내도 없고 일거리도 없는 이 노인은 마음이 오직 자식에게 쏠려 머릿속에 딸들 생각만이 꽉 차 있게 되었다. 과부가 자신의 인생길을 오직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데 바치듯이, 홀아비 고리오는 인생길을 두 딸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바친다. 


딸들은 씀씀이가 커 결혼한 뒤에도 돈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면 하숙집을 찾아와 아버지에게 돈 부탁을 한다. 고리오는 그 돈이 어디에 쓰는지 알고도 돈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가령 딸들은 무도회에 입고 갈, 금은박으로 장식한 의상을 마련하기 위해 또는 애인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돈 부탁을 하는 것이다. 


어째서 고리오는 딸들의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었을까? 금은박으로 장식한 의상이 필요한 딸에게는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살면 안 된다고, 애인을 위한 돈이 필요한 딸에게는 남편을 두고 애인을 만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거나 타일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딸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고 싶은 고리오는 영속 연금 공채를 팔기도 하고, 종신 연금을 저당잡히기도 하고, 도금한 은 식기를 팔기도 하면서 돈을 마련하며 점점 가난해진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해진 딸들은 그 익숙해진 관계를 당연시하고 보답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결혼한 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한 괴로움 때문인지 고리오는 병이 든다. 병은 회복되지 않고 가벼운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 상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라스티냐크는 고리오가 잠든 줄 알았다. 크리스토프라는 소년이 고리오의 딸들을 부르러 심부름을 갔다 와서 보고했다. 소년의 보고에 따르면 고리오의 첫째 딸은 남편과 다투고 있어서 갈 수 없다며 다 끝나면 곧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둘째 딸은 무도회에서 새벽에 돌아와 지금 자고 있어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고리오가 자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었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그 애들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368쪽)


결국 고리오는 앓다가 죽는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그가 임종할 때 그 자리에 사위들은 물론이고 두 딸도 없었다. 딸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아버지가 돈을 다 써서 가난하기 때문일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물론 아버지가 부자라면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딸들이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아버지가 자기밖에 모르는 딸들로 키웠다는 점이다. 즉 효심이 있는 딸들로 키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딸들이 원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고리오는 한마디로 말해 두 딸을 잘못 키운 아버지였다. 잘못 키웠기에 결혼한 뒤에도 아버지에게 돈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리오는 아버지로서 딸들을 어떻게 키웠어야 했을까? 고리오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제어할 줄 아는 자식으로 키웠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면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돈 문제를 해결하는 딸들이 되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것이 부모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고기를 잡아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말은 고리오에게도 필요한 말이겠다. 


자식에 대한 사랑의 한계선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한 사건이 뉴스에서 보도되기도 하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은 판단을 무디게 하므로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매로 다스리라라는 속담은 헛말이 아니다‘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도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사랑은 내려가고 걱정은 올라간다’는 속담도 있다. 사랑은 언제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어 주게 되고 걱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끼친다는 말이다. 이런 속담들만 봐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는 쉬우나 그에 비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베풀기만 하는 사랑이 좋은 게 아니다. 자식에게 집착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모로서 꼭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분별력이다. 사랑은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잃기 마련이다. 분별력을 갖고 부모가 자식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본다.

 

분별력이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 사랑에 한계선을 정해야 할 것 같다. 한계선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고리오는 자기 딸들이 먼 훗날 자기처럼 가진 것을 자식에게 모두 내 주어 빈털터리의 몸으로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터이다부모들이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되, 자식이 자신의 인생과 똑같이 살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딱 그 선을 한계선으로 정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면 자식 사랑의 부작용이 생기지 않으리라 믿는다.


파리와의 대결을 외치는 라스티냐크


고리오가 지는 해라면 라스티냐크는 뜨는 해이다. 시골 출신의 순수한 청년이었던 법대생 라스티냐크는 사치 허영 불륜 출세욕 탐욕 등이 난무하는 혼탁한 도시인 파리에 어울리는 인물답게 공부는 뒷전이고 사교계에 진출하고자 한다.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는 보트랭이 출세하는 방법에 관해 알려 준 것이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겠고, 그가 무도회에 직접 가 보고 느낀 것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겠고, 무엇보다 파리 자체의 분위기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려는 것을 암시하듯, 소설의 마지막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다음과 같이 우렁차게 말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쪽) 


라스티냐크는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리오 영감이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해 불행을 낳았듯이, 출세에 대한 집착이 강한 라스티냐크 역시 행복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행복’과 동행할 수 없으므로. 



<내가 뽑은 밑줄긋기>....................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149쪽)


돈이 바로 인생이야.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315쪽)




<리뷰를 마치며>.................... 


발자크의 작품은 「붉은 여인숙이라는 단편 소설로 처음 만났다.「붉은 여인숙」은 워낙 수작이라 내게 짙은 여운을 남겼다.  


「고리오 영감」은 아버지가 가진 것을 모두 딸들에게 주고 나서 딸들에게 외면당하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고리오 영감과 리어왕을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고 푸시킨의 단편 소설 「역참지기」가 떠올랐다. 

 

「역참지기」는 이런 내용이다. 역참에 머물던 경기병 대위가 역참지기의 딸에게 반해 버려 그녀를 데리고 사라져 버린다. 아내 없이 사는 홀아비 역참지기는 사랑하는 외딸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는 딸이 그 경기병 대위와 편안히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다.


「고리오 영감과 「역참지기」는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집착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날씨가 쌀쌀해져 오랜만에 순댓국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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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1-08 1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딸을 키우는 아빠라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자식은 부모를 닮아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부모가 아무리
싫어도 그 영향을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우리 딸들은 저와 애들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느껴요. 저는 비록 제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하고 불효자로 살고 있지만, 제 딸들은 너무 잘 자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딸 바보라 자식 자랑만 남기고 가네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5-11-09 10:12   좋아요 0 | URL
자식 사랑 실컷 하셔도 됩니다.ㅋㅋㅋ
원래 아빠들은 딸에 약하죠. 엄마들은 아들에 약하고요.
유전자의 힘은 세죠. 어딘가 모르게 부모를 닮거든요. 외모도 많이 닮고요.
저 역시 애들 키우는 일에 많이 마음 써서 키운 것 같지 않은데 잘 자라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감은빛 님 덕분에 무플을 면했네요. 감사드립니다.^^

잉크냄새 2025-11-09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그것이 고전이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겠죠.

페크pek0501 2025-11-09 11:1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소설에서 유부녀를 사귀어 출세하려는 청년을 보니, 우리 사회에서 한때 유행했던 제비족, 이 생각나더군요. 제비족들은 출세보단 돈을 뜬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젊은 남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기혼 여성을 상대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전이 말해 줍니다.^^

그레이스 2025-11-09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고리오영감은 어떤지요?
저는 을유가 좋던데,,,
화자의 마지막 다짐이 기억에 남는군요!

페크pek0501 2025-11-11 11:0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민음사를 선호하는 편이고 다른 출판사의 고리오 영감과 대조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잘 읽히는 걸로 보아 번역의 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을유는, 저는 글자 크기가 작아 요즘은 사 보지 않아요. 예전엔 그러니까 젊을 땐 을유 팬이었죠.ㅋ 고리오 영감, 쓸 게 많았는데 반 이상 삭제했는데도 긴 리뷰가 되었어요. 그만큼 언급할 만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요.^^

희선 2025-11-12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거리를 두어야 할 텐데, 고리오 영감은 그러지 못했네요 돈보다 사랑을 더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고리오 영감 같은 사람은 지금도 있겠습니다 부모가 잘해줘도 자식은 뭘 잘해줬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 자식 어려운 사이일 듯합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5-11-14 11:12   좋아요 1 | URL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도 부모와 자식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있어요. 자식을 사랑하게 되니 고통이 따르다고 했죠. 적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을 덜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金慶子 2025-11-16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돈이지요.
그래서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도 돈으로 한 것 같아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에게는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식에게는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페크pek0501 2025-11-18 12: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중요한 건 돈돈돈, 입니다. 발자크 자신이 가난을 경험했던 터라 ˝돈이 바로 인생이야.˝(315쪽)라는 말이 마치 자신의 외침처럼 느껴집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반가웠습니다.^^

모나리자 2025-11-16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을 요즘의 딸바보라고 할 수 있는데 도가 지나칠 정도로 딸들만을 위해서 살았네요.
결혼한 여자들이 불륜을 하고 사치를 하는 것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소설에 잘
표현한 것 같아요. 재산을 나눠 받고 나면 돌변하는 자식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볼 수 있지요.
그 옛날에 쓴 고전이지만 지금에도 공감할 수 있고 인간 사회는 어느 시대나
비슷하고 닮았다는 사실도 놀랍고 인간의 본성 또한 똑같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교훈적인 내용도 들어 있어서 재밌을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5-11-18 12:21   좋아요 0 | URL
우리 남편도 딸바보, 랍니다. 딸이 원하는 건 무조건 들어주려고 해요. 오늘 외식하면 안 돼? 오늘 찜질방 가면 안 돼? 라고 물으면 다 된다고 합니다. 안 되는 게 없습니다. 결국 다음에 가자고 하며 제가 악역을 담당하지요.ㅋㅋ
예. 시대를 초월해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한 것 같아요.
자식에 대해서는 사랑의 절제, 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적당한 거리 두기, 가 필요해 보입니다.^^
 
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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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뉴스위크 선정 ‘역대 최고의 명저100’에 뽑힌 반전(反戰)소설이다. 1945년 연합군이 독일의 드레스덴 시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은 사건을 소재로 삼아 보니것 특유의 블랙 유머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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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1-09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레스덴 가보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5-11-11 11:06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드레스덴이 더 궁금해집니다.^^
 

*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어느 서재에서 커트 보니것의 책을 보고 그의 에세이를 재밌게 읽었는데 소설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댓글을 쓴 적이 있다. 뒤늦게 알았다. 내가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그것도 정독하여 완독했다는 것을. 그 소설의 제목은 「제5도살장」이다. 이 책은 반전(反戰)소설이다. 책에 대한 내 기억이 흐려진 것은 리뷰나 100자평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나중에 꼭 쓰기로...)


나는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학살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적의 대학살 소식을 듣고 만족하거나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34쪽)


나는 또 아들들에게 학살 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는 일하지 말고, 우리에게 그런 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경멸하라고 말해왔다.(34쪽)


로즈워터는 빌리보다 두 배는 똑똑했지만, 그와 빌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위기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들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로즈워터는 독일군 병사라고 오인하여 열네 살짜리 소방수를 쏘았다. 뭐 그런 거지. 빌리는 유럽사 최대의 학살을 보았는데, 그것은 드레스덴 폭격이었다. 뭐 그런 거지.(131쪽)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커트 보니것이 왜 블랙유머의 대가인지 알게 된다.  



 


**












김성민,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김성민 저자가 쓴, 소설 「스토너」의 서평에서 뽑았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소네트의 의미를 묻는 아처 슬론 교수의 질문에 스토너의 몸이 굳어 버린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기분을 느낀다. ‘모르겠나, 스토너군?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스토너 자신도 정의할 수 없었던 문학에 대한 이끌림을 슬론 교수는 사랑이라고 정의한다.(145쪽)


스토너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 실패한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마지막 장면이 그 시선을 뒤집는다. 놀라운 반전 아닌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스토너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148쪽)


스토너가 물었던 ‘넌 무엇을 기대했니?’,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는가?는 어쩌면 부차적인 질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희미하게 기억되고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더라도 스토너는 문학을 향한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헌신했다. 자신과 동일시한 문학을. 그는 어떻게 기억되는가를 위해 자신을 버리거나 문학을 희생하지 않았다. 패배로 보이는 삶을 한 꺼풀 벗겨 보면 그 안에는 단지 패배라고만 부를 수 없는 한 사람의 고투가 있다. 스토너는 조용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스스로에게 영웅이 되었다.(149~150쪽)


스토너는 남이 추구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 추구하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기에 영웅이 되었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  

어느 날 저녁 무렵, 방에서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닭장 속에서 많은 닭들이 모이를 먹고 있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비좁은 공간에 있는 닭들을 보니 가엾게 여겨졌다. 닭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의 이기심을 새삼 느꼈다. 


거실에서 딸이 나를 불렀다. 


“엄마 치킨 왔어.”


그 소리를 듣자마자 거실로 나갔다. 배달된 프라이드치킨의 바삭한 맛은 일품이었다.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마시며 우리 가족은 즐거운 환성을 질렀다. 


“역시 치맥이 최고야.” 


나는 인간의 이기심 따위는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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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30 0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5도살장은 예전에 SF소설이라고 들어서 (절판상태라)헌책방에 뒤져 읽은 기억이 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SF소설이라기 보다는 블랙유머에 가까운 책이더군요.근데 제가 가진 예전 책들에는 커트 보네거트라고 적혀있는데 요즘은 커트 보니것이라고 하나 봅니다.이름만 들어서는 같은 작가인 줄 전혀 알지 못할 뻔 했네요^^;;;

페크pek0501 2025-10-30 10:40   좋아요 0 | URL
SF소설은 아니죠.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의 드레스덴이 폭격당한 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독일군 포로였던 보니것이 경험한 것을 소설화한 거죠, 단상집처럼 생각의 파편들을 늘어놓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도 하고 외계인이 나오기도 하죠. 외계인이 나오는 건 아마도 꿈이든지 정신분열 증세든지 할 것 같군요.
어느 책엔 발자크를 발자끄, 라고 표기하더군요. 출판계에서 하나의 표기법으로 통일했으면 해요.^^

yamoo 2025-10-30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니것 에세이와 소설 전부 합쳐서 5권 정도 읽었습니다. 근데 저 <제5도살장>을 읽다가 말았어요. 얼른 읽어야 하는데...언제 읽을지..

그나저나 아래 시진 죽입니다. 저기 어딘가요? 지난 번 부산 여행 때 찍으신건가? 저도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페크pek0501 2025-10-30 10:49   좋아요 0 | URL
보니것 광이시군요. 저는 그의 에세이를 재밌게 읽어서 여기 서재에도 많이 발췌해 올린 적 있죠.
지금 그 에세이 제목이 생각 안 나서 태그로, 찾아봤네요, <나라 없는 사람>이란 에세이였어요. 제 두뇌의 배터리가 이제 다 된 듯...ㅋㅋ
부산입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꼭 가 보십시오. 저런 풍경 보면 부산에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2025-10-31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02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아리안 샤비시,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남자는 쓰레기다’라는 말에 대하여


사실 남자들의 쓰레기 같은 행각은 어느 나라나 다르지 않은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92쪽) 


대중도 이미 알고 있는 부끄러운 통계가 차고 넘치지만 그중 하나만 들자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네 시간에 한 명꼴로 여성이 살해당하고 그중 절반은 남편이나 애인 같은 친밀한 파트너가 저지르는 범죄다.(93쪽)


영국에서 살해당한 전체 여성의 절반은 파트너 혹은 전 파트너의 손에 죽었고(남성의 경우 이 비율은 3퍼센트에 불과하다) 매주 두 명의 여성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쓰고 편집하는 데 2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영국에서는 3백 명 넘는 여성이 살해당했고 그중 92퍼센트는 남성의 범죄였으며, 특히 절반가량은 파트너나 전 파트너가 범인이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살해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통계적으로 봤을 때 여성은 자신이 연인으로 사귀었던 남성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여성은 연인을 잠재적인 살인자로 생각해야 하는 인지부조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폭력적인 파트너와 헤어지려고 하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살해당할 위험에 취약해진다. 도망치는 것도 종종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다.(95쪽)


물론 모든 남자가 쓰레기라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리가 알을 낳는다는 말이 수오리도 알을 낳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소수 남성들 때문에 전체 남성이 욕을 먹곤 한다.



사회화에 대하여


남자들은 잘 울지 않고 행여 눈물을 보였다가는 더 혹독하게 비판받는다.(97쪽)


요즘 남성들이 그들의 아버지 세대보다 두 배 더 눈물이 많다는 사실만 봐도 여기에는 생물학적 제한보다 사회적 제한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남성성은 서서히 남성의 감정 표현을 허용하고 있다.(98쪽)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유문화사)에 나오는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여성성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받으며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여성이 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대로 길들여져 여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만 그럴까? 


남자는 어릴 적부터 눈물을 거부하는 것을 배운다. 눈물을 흘리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거나 눈물이 헤프면 큰일을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요즘 예전에 비해 남자의 눈물에 너그러워진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요즘 남성들이 그들의 아버지 세대보다 두 배 더 눈물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이 달라지면서 사회화 내용도 달라졌다. 




**

잘 쓴 리뷰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중 두 권을 소개한다. 리뷰집이나 서평집이나 또는 에세이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연수, 신형철, 김애란, 심보선, 최은영,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 


824쪽의 두꺼운 책인데 가격이 저렴하고 내용은 알차다. 글 잘 쓰는 작가와 좋은 글이 다 모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증보판은 <안나 카레니나>부터 <은둔자>(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110)까지 총 아흔일곱 작품에 대한 서평을 담았던 기존 판본에 <불타버린 지도>(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111)부터 <제5도살장>(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150)까지 서른네 작품에 대한 서평을 더한 것이다.

이 책에 함께한 작가들은 모두 134명.- 알라딘 ‘책소개’에서. 

 















김성민,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 「스토너」와 「페스트」의 리뷰를 읽고 이 책에 반해 버렸다. 장편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는 김성민 저자의 글솜씨가 탁월해서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

여담 : 

우리 알라딘의 자랑거리인 서평가 로쟈(본명은 이현우) 님의 글이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의 본문 첫 장에 실렸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서평을 쓰셨다잘 쓰셨다.


또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의 뒤표지에 로쟈 님의 글이 실렸다. 추천사인 듯하다.


유명한 분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깜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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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18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작가가 읽은 세계문학...두껍고 가격이 착하다니 얼른 구해서 봐야겠습니다. 목차를 일단 보러 가야겠네요. ㅎㅎ 좋은 책 추천 감솨~~^^

페크pek0501 2025-10-19 16:21   좋아요 0 | URL
하하~~ 가격이 착한 책은 왜 그렇게 제 눈에 잘 띄는지... 안 살 수 없게 만드네요. 그래서 가격 대비 좋은 책을 구매했지만요... 리뷰집 중 가장 나은 책일 수 있겠어요. 글 잘 쓰는 필자들만 모아 놨으니까요. 한 편씩 읽는 재미가 있답니다.^^

모나리자 2025-10-22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의 책 인용문을 보니, 늘 그래 왔듯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여성 수난시대는 여전하다고 생각되네요.ㅜㅜ
조금씩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평집 책은 두께가 어마어마하군요. 그래도 잘 쓴 글을 읽는 기쁨이 있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5-10-25 10:0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여성 수난시대, 는 여전합니다.
서평을 읽는 즐거움은, 제가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은 나와 다르게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읽고, 제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은 어떤 책인가 궁금해서 읽는 거죠. 모나리자 님, 반가웠습니다.^^

2025-10-27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28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25-11-09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성민 작가의 책 제목을 보니 김민정 시인의 시집 제목과 비슷하네요.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이라고 2016년에 나온 시집이 있거든요.

페크pek0501 2025-11-11 11:12   좋아요 0 | URL
아, 시집 제목과 비슷하군요.
오늘 아침에도 김성민 님의 책을 읽었는데(리뷰집으로 반 이상 읽었어요) 정말 잘 써요. 작가 프로필에 ‘부엌에서 책을 읽는다‘라고 나와 있고 글 어디에선가 본 걸로 보아 ㅡ 평범한 주부였다, 라고 본 것 같아요. 남다른 역량이 느껴져 전문 서평가, 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