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친정에 가기 위해 이십 분쯤 걸었는데 날씨가 참 좋다고 느끼며 감탄했다. 옷을 든든히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모자까지 썼으니 추울 리가 없겠지만 날씨 자체가 포근한 것 같았다. 공기의 감촉이 좋았다. 차가운 겨울이 아니라 상쾌한 겨울이었다. 겨울도 멋진 계절이구나, 생각했다.

 

 

 

 

 

2. 그 겨울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게 아쉽다. 어머니는 입춘이 지났다며 봄맞이 준비로 거실에 두터운 커튼을 떼고 얇은 커튼을 달아 놓으셨다. 난 겨울이 가는 게 아쉬워서 봄맞이 준비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두르고 싶지 않다. 이 계절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기 전에 이 겨울을 맘껏 즐기리라.

 

 

 

 

  

3. 본문이 오백 쪽이 넘는,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란 소설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기에 리뷰를 써서 정리해 두고 싶었다. 그런데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잘 쓸 자신이 없어서 시작을 못하는가 보다. 이 책엔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이 많아서 밑줄을 많이 그었다. 그중 ‘그냥 빈둥거리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이 지금 기억나네.

 

 

....................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 사람들은 흔히 작가가 되기도 한다네.”
나는 싱긋 웃었다.
“저는 그런 재능이 없습니다.”
“그럼 뭘 하고 싶은가?”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환하게 지어 보였다.
그냥 빈둥거리고 싶습니다.”(59~60쪽)
- 서머싯 몸, <면도날>에서.
....................

 

 

 

 

 

4. 언제부터인지 ‘빈둥거리는 날’을 갖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서 빈둥거리기만 하면 되는 날을.

 

 

그런데 그런 날을 갖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일 년 중에서 빈둥거리는 날이 얼마나 될까?

 

 

 

 

 

5. 이번 겨울 방학은 좀 고단했다. 애들은 방학이 있지만 난 방학 없이 일했기 때문이다. 방학이라서 애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바빠지는 건 주부다. 애들 학교가 개학하는 날부터 주부는 방학인 셈이다. 방학 동안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했다. 애들 때문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점.

 

 

 

 

 

6.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고 났더니 눈이 피로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넘게 신문을 들여다본 것이다. 글씨가 작아서 불만이다. 큰 글씨의 신문을 구독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신문이 생기면 좋겠다. 컴퓨터로 신문을 보기도 하는데 전자파가 있는 화면보단 종이가 낫다고 생각. 난 책도 전자책보단 종이책이 훨씬 좋다. 종이를 만지지 못한다면 책의 매력은 반감된다고 생각.

 

 

 

 

 

7. 2014년 한 해 동안 다른 서재에 내가 쓴 댓글의 수는 350개라고 한다. 2014년 한 해 동안 내 서재에 달린 댓글의 수는 335개라고 한다. 내 서재에 달린 댓글보다 내가 15개를 더 쓴 것이네. (내가 세어 본 게 아니라 ‘알라딘’에서 기록해 준다.)

 

 

이것은 내가 댓글을 쓰러 많이 다녀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아마도 다른 님의 서재에 새 글이 두 편 올라와 있을 경우에 댓글을 두 개 쓰고 올 때가 있어서인 것 같다. (내가 다른 알라디너들에 비해 글을 적게 올리는 편이다.)

 

 

어쨌든 내가 받았던 댓글 수와 내가 주었던 댓글 수가 비슷해서 다행이다. 만약 댓글을 많이 받고 적게 주었다면 미안할 뻔했다.

 

 

 

 

 

8. 내일이면 나는 대구에 가 있겠다. 2박 3일 일정으로 시댁에 간다.

 

 

그런데 왜 ‘시집’이 아니고 ‘시댁’이라고 말해야 되나요?

 

 

시집을 높여 이르는 말이 시댁인데, 왜 친정을 높여 이르는 말은 없나요?

 

 

내가 어느 글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일부러 ‘시댁’이라고 쓸 것을 ‘시집’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어색하였다. 읽는 사람도 어색했을 듯.

 

 

친정을 높여 이르는 말이 하나 나오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9. 오늘 아침에 친구들한테서 카톡 문자가 왔는데 명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도 사실은 팔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맏며느리로 일하러 시댁에 가자니 부담스럽긴 하다. 그런데...

 

 

며느리 여러분! 명절 때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단 생각은 안 해 봤나요?

 

 

우리 친정어머니를 보니깐 그렇다. 차례상도 차려야 하지만 친척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손님상도 차려야 해서 명절이 싫다고 하신다. 우리 시어머니도 비슷하지 않으실까?

 

 

시댁에 갈 때 가방 안에 책을 한 권 넣어 가고 싶어서 어떤 책을 갖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무겁지 않은 책이 좋겠지.

 

 

언제 책을 읽느냐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이다. 책이 수면제의 역할을 해 주니까.

 

 

또 읽지 않더라도 읽을 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어서 좋다.

 

 

 

 

 

10. 쓰다 보니 벌써 10번일세.

 

 

여러분에게 인사.

 

 

"명절을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상투적인 인사로 끝냄을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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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5-02-1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게 지내신 페크님, 이제 개학하면 조금 한가해 지시려나.
그렇다고 그렇게 한가해질 것 같지도 않아요. 새로운 일거리가 페크님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저는 방학 때라 많이 한가해서 시간 활용 잘 할 줄 알았는데 어영부영 다 가버렸어요.
3월 오는 게 두렵습니다. 그 전에 더 읽고 더 쓰고 해야 하는데 언제나 게으름의 발목이...
명절 잘 보내시고, 저도 대구 시댁에 갑니다. 친정도 대구입니다. ㅋ

페크pek0501 2015-02-16 14:42   좋아요 0 | URL
반가운 님아!!!
저는 봄방학이에요. 이 황금 같은 짧은 방학에 설날 연휴가 끼어 있어서 아쉽지만요...

저도 3월 오는 게 싫습니다. 늦게 왔으면 좋겠어요.
자꾸 마음으로 시간을 뒤로 보내는 습관이 생겼어요. 젊지 않다는 증거인가요?
게으름의 발목... 저는 게으름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녀요. ㅋㅋ

올해도 파이팅, 입니다. 아작!!!!!!!!!!

blanca 2015-02-1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저 면도날 넘 좋아해요. 페크님의 감상도 궁금해요. 계절의 오고감이 나이들수록 조금 더 각별하게 느껴져요. 영화 `시`에서 꽃 보고 울었던 여인의 정서가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5-02-16 14:47   좋아요 0 | URL
아, 블랑카 님...
님이 쓴 서머싯 몸에 대한 글을 잘 읽었답니다.
밤중에 폰으로 본 것이라 로그인을 하지 않아 댓글을 못 달았는데...
나중에 달아야지, 했어요. 그리고 깜빡 했다는... (저는 절대로 폰으론 글을 쓰지 않기로 저 자신과 약속했거든요...ㅋ)

아, 님은 젊은데 벌써 계절의 오고감에 각별함을 느끼면 어떡해요? ㅋㅋ
반가웠어요. 님도 명절 잘 보내시길...


stella.K 2015-02-1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어느새 봄볕이더니 오늘은 봄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우수가 되려면 아직 며칠 더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도 서머싯 몸은 읽고 싶은데 늘 마음에만 있어요.ㅠ
시댁 잘 다녀 오십시오.^^

페크pek0501 2015-02-16 22:15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이 읽으신다면 <달과 6펜스>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군요.
서머싯 몸의 작품으로 네 개의 작품을 읽었는데 모두 저를 실망시키지 않네요. 좋았어요. 읽고 나면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요. 또 다른 작품을 읽어 볼 생각입니다.

님도 설날 잘 보내세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요. ^^

2015-02-16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6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5-02-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면도날 저도 작년 말에 읽은 책이어요. 꽤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리뷰를 쓰려고 하다가 말았는데요, 같은 책을 읽었다니 반갑습니다. 글구 시어머니가 스트레스 받는 건 잘 상상이 안갑니다... 며느리와의 한판 대결을 앞둔 그런 스트레스일까요 -.- 설 잘 보내시고, 무엇보다 건강하세요!

페크pek0501 2015-02-16 22:21   좋아요 0 | URL
하하~~
시어머니의 스트레스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죠.
음식 장만을 위해 며칠 전부터 장보기를 해야 하고, 자식들이 오니 이불을 꺼내 줘야 하고 얼마나 일이 많습니까. 저라면 싫을 것 같아요.

손녀 손자들을 보면 반갑고 간다고 하면 더 반갑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호호~~

마태우스 님도 설 잘 보내세요. ^^

마태우스 2015-02-16 23:02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저는 설 당일만 서울 갔다 올 거구요, 나머지 연휴는 오로지 일만 할거랍니다. 일! 일!

페크pek0501 2015-02-16 23:09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 님은 능력자, 이십니다. 행복한 남자죠. ^^

yamoo 2015-02-1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이 재밌다는 전언이 여기 저기 들리는군요...한 번 구경이라도 해 봐야 겠습니다..ㅎ
그나저나 대구에 내려가시는군요.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15-02-16 22:23   좋아요 0 | URL
서머싯 몸은 소설을 매력적으로 쓰는 것 같아요. 광팬이라서 다 찾아서 볼 생각입니다. 네 작품을 읽었는데 다 좋습니다.
강추~ 합니다.

님도 설날, 잘 보내세요...^^

hnine 2015-02-16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빈둥거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많지 않은거 같아요.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가봅니다. 욕심이 없어야 하고 집착이 없어야 하고 빈둥거리고도 남들은 바쁘게 뭘 하고 있지 않나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반성에 빠지지않을 수 있어야 하고...참 어렵더라고요.
대구까지 먼 길 안전히 잘 다녀오세요. 팔도 아직 성치 않으시다면서 쉬엄쉬엄 하셨으면 좋겠네요. 저도 오늘 차례 준비할 장 보면서 매번 만들던 식혜를 그냥 만든거 구입해버렸네요. 그것도 무슨 대단한 반란이라고 몇번을 망설이면서...^^

페크pek0501 2015-02-16 22:26   좋아요 0 | URL
님이 빈둥거리는 것에 대해 잘 설명해 주셨네요. 맞아요. 쉽지 않겠어요.
그러면서도 빈둥거리는 날을 갖기를 바라게 되어요.

식혜를 사신 일, 참 잘하신 일이라고 봅니다. 바쁠 땐, 힘들 땐 요령이 필요합니다. 저는 나중에 제가 차례를 맡게 되면 일하는 사람 한 분 오시게 해서 할 겁니다.
그러려면 돈을 계속 벌어야겠죠? 히히~~

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 고맙습니다.

세실 2015-02-1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주말중 하루는 빈둥거립니다. 전엔 주말에 집에 있으면 시간이 아까웠는데 아이들이랑 과자 먹으며 책 읽거나 TV 보는 시간도 좋으네요~~~

울시어머니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지요. 큰며느리(울 형님)는 당일 아침에 손님처럼 왔다가고, 옆집 사는 막내며느리(저)는 투덜거려... 힘드실거예요. 감기도 걸리셨네...
아 명절이 싫다! ㅎ
그럼에도불구하고 편안한 명절되세요^^

페크pek0501 2015-02-22 16:51   좋아요 0 | URL
하하~~
그 큰며느리 분, 참 편하게 사시네요.
큰며느리라면 적어도 2박 3일은 시댁에 있어 줘야 하죠. 저처럼요.
그래도 집으로 돌아올 땐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이 드는 걸요.
더 함께 있어 드리지 못해서 말이죠. 이젠 연로하셔서 저희가 모셔야 하는 건데...

세실 님 떡국은 많이 드셨어요?
저는 많이 맛있게 먹었답니다. 맛있는 음식이 없었다면 불평 많은 설날이
될 뻔했다는 ... 먹는 재미로 버텼다는... ㅋㅋ
 

 

 

며칠 전,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라는 책을 펼쳐 보고 깜짝 놀랐다.

 

 

“불행한 이가 일단 통찰력을 가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에밀 시오랑)“라는 글이 이 책의 서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수가!

 

 

이 인용문은 발터 벤야민 저, <모스크바 일기>라는 책의 서문에 있어야 했다. 내가 2주일 전에 그렇게 써서 서재에 올렸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켜서 확인 들어갔다. <모스크바 일기>는 아예 ‘미리 보기’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틀리게 쓴 게 확실했다. ‘미리 보기’로 보고 인용문을 옳긴 것이니까. (내가 올린 문제의 그 글에도 ‘미리 보기’로 봤다는 것을 밝혔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모스크바 일기>를 검색해 보고 나서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라는 문구 밑에 있는 책들을 검색해 보다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의 서문을 봤고, 이것을 <모스크바 일기>의 서문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를 구입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책으로 서문을 보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틀리게 쓴 것을 바르게 쓰면 다음과 같다.

 

 

....................
불행한 이가 일단 통찰력을 가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에밀 시오랑)
- 프레데리크 시프테 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서문에서.
....................

 

 

다시 정리한다.

 

 

에밀 시오랑이 쓴 이 글은 <모스크바 일기>의 서문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의 서문에 있는 것이다.

 

 

 

 

 

 

 

 

 

 

 

 

 

 

 

.....................................................................................................
죄송합니다. 저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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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2-14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런 의미에서 좋아요 한 방 제가 했어요.ㅋㅋㅋ

페크pek0501 2015-02-14 13:43   좋아요 0 | URL
에공... 빠르시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실 수 있죠?

님에게 우정을 팍팍 느끼는 순간입니다.^^


2015-02-14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5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5-02-1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당연히 이해하지요^^ 그럴수도 충분히 있습니다~~~
이제 주말이 끝나가고 있어요. 이번 주말은 유난히 아쉽기만 합니다.
멈춰라 얍!!!

페크pek0501 2015-02-16 14:15   좋아요 0 | URL
호호호~~~
제가 실수한 것을 아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냥 넘어가면 제 글이 항상 엉터리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정직하게 신고를 한 것입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그분들에게 감사드려요. 모른 척해 주셔서...
그런데 그런 건 알려 주셔도 좋지요. 비밀댓글로 알려 주시면 더 좋고요.

저도 월요일이 싫어요. 흐흑~~
저는 2월 말까지 봄방학입니당...^^
 

 

 

1.
오늘 스케줄은 뭐지?

 

 

이러면서 아침에 일어났다.

 

 

맘에 드는 날이다. 특별한 스케줄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 다 해 놔서 집안일도 할 게 없고 학교 수업도 없는 날이다. 병원에도 친정에도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많이 걷고 들어와야겠다. 집에 오면 책이나 많이 읽어야지.

 

 

이런 날도 있으니 살 만하다. 매일 바쁘다면 어찌 살꼬?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아직 손상되지 않은 하루가 있음에 기분 좋은 아침,
커피 한 잔 들고
컴퓨터를 켜는 한가한 시간. 

 

 

 

 

 

 

2.
한 편의 글을 완결해서 쓰던 시절이 있었다. 원고지 분량으로 말하면 15매 내외의 수필을 줄곧 썼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언제부턴가 완결된 글 한 편 쓰는 게 어려워졌고 헝겊 같은 단상 쪼가리만 쓰고 있다. 혹시 내가 단상 쪼가리들이 모여 언젠가 근사한 옷 한 벌 지을 수 있길 기대하고 있는 건가?

 

 

아마 그런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단상 쪼가리들을 쓰면서 ‘생각’이란 놈이 무럭무럭 자라길 바라는 거겠지.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생각’이므로. 


 
글 잘 쓰는 작가는 완결된 글 한 편을 어떻게 쓸까?

 

 

이걸 알아보고 싶어졌고 그래서 구입하고 싶은 책이 생겼다. 고 박완서 님의 산문집이다.

 

 

 

 

 

 

 

 

박완서 산문집 세트 - 전7권

 

 

 

 

 

 

 

 

 

 

 

 

 

 

 

 

 

 

 

 

 

집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있는데 ‘<쑥스러운 고백>-박완서 산문집 1’과 겹치는 게 많다. (‘<쑥스러운 고백>-박완서 산문집 1’에는 39편의 산문이 실려 있는데 그중 내가 읽은 것이 31편이었다. 그렇다면 구입하지도 않은 신간 <쑥스러운 고백>을 내가 거의 읽었다는 얘기가 되네. 그래서 1권은 빼고 2권부터 구입해야 되겠네.) 

 

 

산문 하나 소개.

 

 

<쑥스러운 고백>이란 책에 ‘주말농장’이란 산문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책으로 읽었다. 저자는 주말농장을 갖고 있는 친구를 따라 가 보고서 ‘주말농장’의 실상을 알게 되어 이런 산문을 쓰게 된 것.

 

 

....................
농사꾼들이 한여름의 폭양을 무릅쓰고 몇 뙈기의 밭, 몇 마지기의 논에 목숨을 매달고 농사를 짓는 옆에서 오락삼아 취미삼아 농사짓기 놀이를 벌인다는 건 농사꾼에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이요, 그들의 성실에 대한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유린일까. 저녁 나절 농사꾼들이 넓혀 놓은 농로(農路)로 자가용을 몰아 그 골짜기 마을을 벗어나면서 우리가 그날 하루 얼마나 큰 해독을 그 마을에 뿌리고 떠나나 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박완서 저, ‘주말농장’이란 산문에서.
....................

 

 

....................
또 일 주일에 한 번쯤 나가서 농사 흉내를 하고 돌아온다는 게 도시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결코 이로울 게 없을 줄 안다. 아이들은 순진한 것만큼 철딱서니도 없다. 아이들다운 직감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생활 양식의 격차를 단박에 알아차리고 우월감과 특권 의식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하다. (...) 결국 주말 농장을 통한 도시 아이들과 농촌 아이들과의 만남이란 한쪽에는 부질없는 우월감을, 한쪽에는 상처를 주는 결과밖에 못 남길지도 모르겠다. (...) 도시에서 각종 공해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듯 농촌에선 주말 농장이라는 새로운 공해가 농민들의 정신 건강을 해친다면 어쩔 것인가.
- 박완서 저, ‘주말농장’이란 산문에서.
....................

 

 

‘주말농장’을 비판한 이 글은 우리로 하여금 반성적 사고를 하도록 이끈다.

 

 

....................
뿐만 아니라 그때의 기억은 나로서는 꽤 충격적인 것이어서 ‘주말농장’이란 제목으로 소설화하기까지 했다.
- 박완서 저, ‘주말농장’이란 산문에서.
....................

 

 

나도 <주말농장>이란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이 작품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단편 소설집에 들어 있다.

 

 

같은 제목으로 산문 형식으로도 쓰고 소설 형식으로도 쓴 저자의 역량에 새삼 감탄한다.

 

 

산문집을 읽고 배울 생각에 설렌다.

 

 

고운 단풍잎 같은 설렘 하나 흔들리는 어느 겨울날의 시간 속에 있다.

 

 

 

 

 

 

3.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 일본의 유명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말했다. 가장 좋은 문체는 간결체라고.

 

 

내가 읽기에도 간결체는 잘 읽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고 멋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닮고 싶은 문체도 간결체이다. 그래서 간결한 글을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나서 썩은 나뭇가지 자르듯이 확 확 쳐내면서 수정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헤어스타일로 말하면 숏커트가 되겠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어느 정도로 간결체를 쓰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집에 있는 책으로 찾아봤다. '어느 바보의 일생'이란 단편 소설에 이런 글이 있네.  

 

 

....................
15. 그들
그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커다란 파초 잎이 뻗은 그늘에서-그들의 집은 동경에서 기차로 딱 1시간이 걸리는 어느 해안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16. 베개
그는 장미 잎의 냄새가 나는 회의주의를 베개 삼아, 아나톨 프랑스의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 베개 속에도 반신반마의 신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20. 족쇄
그들 부부는 그의 양부모와 한집에 살게 됐다. 그것은 그가 어느 신문사에 입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란 종이에 쓴 한 장의 계약서에 힘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약서는 나중에 보니 신문사는 아무런 의무도 없고, 그에게만 의무가 있는 것이었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저, <아쿠타가와 대표단편선>에서.
....................

 

 

이 책 읽은 것 같은데 다시 보니 낯설다. (그러니 책은 읽어서 뭐하나요? 생각도 나지 않는데... ㅋ)

 

 

 

 

 

 

4.
어제 알라딘에 들어와서 댓글 하나 썼다. 어느 님이 쓴 페이퍼를 읽고서다. 그 님은 하고 싶은 일이 없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단다.

 

 

초라함. 이건 나와 가까운 친구가 아닌가.

 

 

그 님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나중에 생각하니 웃긴 댓글이었다.

 

 

..........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습니다.
다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시작을 못할 뿐이에요.ㅋ
능력만 따라준다면,
예를 들면, 일간지 논설위원, 칼럼니스트, 드라마 작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등...

 

아, 쓰고 보니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되고 싶은 거네요...

 

제가 웃겼나요? 하하~~
..........

 

 

그러고 보니 내겐 어떤 직업이 제일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가 쓴 수필과 독후감 여러 편을 모두 읽으신 어느 국문과 교수님이 수필보다 독후감이 훨씬 낫다면서 창작을 하지 말고 평론을 공부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하셨는데, 그때 기분 나쁘게 들었었다.

 

 

‘흥, 내가 글을 못 쓴다는 거지? 두고 봐. 그 말씀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말 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말씀이 옳았다. 난 창작엔 소질이 없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평론을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능력이 있다면)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 <결혼의 여신>같은 작품을 쓴다면 멋지겠다. 거기서 남상미가 맡아 연기한 ‘송지혜’라는 인물이 매력적이었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 시댁에 봉사할 의무, 가족에게 밥해 줄 의무가 없어야 작가로 성공할 것 같아서다.

 

 

남자 친구는 있는 게 좋겠다. 하지만 결혼하자고 조르면 안 되니깐 혼자 살고 싶어 하는 남자면 좋을 듯. 입양해서 아이 하나 키우는 것도 좋겠다. 단, 아이 봐 줄 사람 하나 있어야겠지.

 

 

아, 그렇게 키울 거라면 입양할 자격이 없겠네. 

 

 

 

 

 

 

5.
요즘 머리맡에 두고 읽고 있는 책이다. 다 훑어본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 보곤 한다. 

 

 

....................
기대
기대하는 마음은 기대하는 대상을 조금씩 갉아먹어 가면서 무너뜨리며 동시에 자신도 무너져 내리게 한다. (…) 기대하는 무엇은, 애초부터 먼 곳에 있다면야 손쉬운 포기도 가능할 터인데, 팔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곳에서 깃발처럼 펄럭인다. 그렇지만 도착하고 나면 늘 거기에 없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서 다시 다가오라고 손짓한다. 늪처럼, 허우적거리면 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173쪽)
- 김소연 저, <마음사전>에서.
....................

 

 

난 기대의 이러한 특성을 이미 알아버렸나 보다. 그래서 바라고 있는 것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나 보다.

 

 

....................
걱정
걱정은 유대의 힘을 엄청나게 발휘한다. 같은 고민거리를 지닌 자들은 머리를 맞대로 도원결의한다. 해결책이 나오면 안 된다. 영원히 보류되는 해결책 아래에서 그 유대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의 모든 주부들이 대동단결하여 바쁜 것은, 자녀 교육과 시댁 이야기와 저녁 반찬 걱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걱정은 속수무책이고 대안이 없고 영원히 지속된다.(153쪽)
- 김소연 저, <마음사전>에서.
....................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닐진대 걱정을 그림자처럼 달고 사는 우리.

 

  

삶이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보내는 시간 같아서 이런 글을 뽑아 봤다. 

 

 

걱정이 끝나는 날은?

 

 

그 날은 삶을 마감하는 날이겠지.

 

 

그러니 삶을 사는 한, 걱정을 달고 살아야겠지.

 

 

그러므로 걱정을 달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겠다. 그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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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2-07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이어요. 드라마 작가!
돈도 많이 벌고. 내 작품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거 보는 재미가 짜릿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내 대본이 책으로 나와서 쟁쟁한 배우들이 대본 읽고 낄낄대고
흥미로워 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겠죠.
영화는 시간 제한이 있어서 계산을 해야하고.
암튼 이게 그렇게도 안 되는 걸까요?
드라마 잘 쓰는 작가들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ㅠㅠ

페크pek0501 2015-02-08 11:51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이라면 드라마 대본 잘 쓸 것 같은데... 제 생각엔요...
연극 대본과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그쪽으로 경험이 많으니
한 번 도전해 보시면 어떨까 해요. ㅋㅋ

저는 30대 초반에 소설과 드라마 강의를 들으러 다녔답니다.
숙제가 있어서 해 봤더니 소설 쓰기보다 드라마 쓰기가 더 어렵더군요.
각자 인물에게 그 캐릭터에 맞게 대사를 준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작가를 존경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꿈이 있던 그 시절이 저의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배우는 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지금도 꿈이 있답니다. 하하~~

stella.K 2015-02-08 18:20   좋아요 0 | URL
에고, 안 그래요. 그나마 요즘엔 대본을 통 쓰질 않아서
다 죽었어요.ㅠ
사실 뭘 보여줄 거냐와 캐릭터가 확실하면 뭔가 쓸 것 같은데
그놈의 스토리와 캐릭터가 문제인 거죠.
그게 드라마의 전부잖아요.ㅎㅎ
맞아요. 30대까지가 그래도 뭐가를 열심히 할 때인 것 같아요.
40 넘으니까 기력이 달리지 않아요?ㅎㅎㅎ

페크pek0501 2015-02-09 20: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보단 젊으시니...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ㅋㅋ

2015-02-08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8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5-02-10 11:21   좋아요 0 | URL
저는 이 글을 왜 비밀글로 올렸을까요? ㅎㅎ

페크pek0501 2015-02-12 16:43   좋아요 0 | URL
호호~~
저는 또 그게 극비인줄 알았잖아욧. 호호~~
어쨌든 비밀댓글이니까 비밀로 해 줄 테야요...
그래야 입 무겁단 소릴 듣겠죠?

yamoo 2015-02-0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ㅎ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평론을 공부하시고, 독후감을 꾸준히 쓰셔서 평론가도 데뷔를 해 보심이..^^

며칠 전 나귀님 페이퍼를 읽고 박완서 산문집을 모두 처분한 걸 후회했습니다. 그렇지만 엎어진 물...ㅜㅜ 페크님 페이퍼에서 다시 박완서 산문에 대한 글을 보니, 후회가 다시 밀려옵니다..크~

stella.K 2015-02-09 18:17   좋아요 0 | URL
ㅎㅎ 야무님의 불행이 나의 즐거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ㅠㅋ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15-02-09 20:44   좋아요 0 | URL
하하~~
야무 님.
버리실 거면 저한테 버리시지...

그러니깐 책은 쌓아 놓고 봐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어느 분이 어떤 책에 이런 글이 있는데 좋더라, 하면
바로 찾아볼 수 있잖아요. 제가 갖지 못한 책에 대해 좋다고 하면
얼마나 궁금하고 사고 싶던지요...

평론은...
으음~~
고민해 보겠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여요.
제가 뭘 제일 잘할 수 있는지 아직도 찾지 못한 1인입니다요... ㅋ

페크pek0501 2015-02-09 20:43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은 농담도 잘하세요... 호호~~


마녀고양이 2015-02-1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럼요 그럼요 그렇네요~

우린 참 다양하게 삶을 느끼는 것 같아서 저는 사는게 좋아요~ 그죠 페크언니~

페크pek0501 2015-02-15 12:07   좋아요 0 | URL
오우! 마고 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어요? 바쁜 일은 끝난 거예요? 반가워요.
다양하게 느끼기 때문에 소설이 재밌는 것 같아요.
각 인물들이 같은 생각이라면 무슨 재미로 읽겠어요.

생각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댓글입니다. ^^
 

 

 

1. 불행과 통찰력이 만나면

 

 

며칠 전에 이메일을 열어 보았더니 알라딘에서 보낸 이메일이 들어와 있다. (스팸 광고는 질색이지만 책에 관한 건 환영한다.)

 

 

‘[알라딘] "발터 벤야민" 의 신간 <모스크바 일기> 출간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이다.

 

 

<모스크바 일기>라는 책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겠다. 궁금해서 알라딘 메인으로 들어가 이 책을 검색해 봤다. (발터 벤야민의 딱딱한 이론서를 두 권 가지고 있는데 일기도 썼다니 궁금하잖아.) 그러고 나서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라는 문구 밑에 있는 책들도 검색해 봤다. 그중 하나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라는 책이다. 이 책을 ‘미리 보기’로 봤더니 이런 글이 있다. 

 

 

....................
불행한 이가 일단 통찰력을 가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에밀 시오랑)
- 프레데리크 시프테 저,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서문에서.
....................

 

 

으음~~. 기억해 둘 만한 글인 것 같아 일단 노트에 적어 두었다.

 

 

이렇게 뒤집어 쓴 글은 어떤가?

 

 

통찰력을 가진 이가 일단 불행해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찰력과 불행과의 만남이 아닌가. 이 두 가지의 만남으로 더욱 불행해진다는 것이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찰력’만큼이나 ‘불행(불행을 당하는 일)’도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중요한 요인이다. 다시 말해 통찰력이 없다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 듯이, 불행이 없다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

 

 

에밀 시오랑의 글을 보고 내가 낸 결론은?

 

 

‘불행한 만큼 성숙해질지어다.’

 

 

 

 

 

 

2. 불행의 악영향

 

 

그렇다고 불행을 찬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불행이 인간을 얼마나 망가지게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까닭이다. 서머싯 몸도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달과 6펜스>에서)라고.

 

 

서머싯 몸의 다른 작품 <면도날>에서 불행이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 주는 일화가 나온다.

 

 

결혼한 지 2~3년이나 지나 아기까지 있는데도 꼭 연인처럼 열렬히 사랑하는 부부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남편과 아기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내만 살아남는다. 아내의 이름은 ‘소피’이다.

 

 

“소피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죠. 온 동네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대고……. 그래서 밤낮으로 사람이 붙어 있었는데, 한 번은 정말 창문에서 뛰어내릴 뻔했대요.”(<면도날>, 326쪽)

 

 

소피는 갈비뼈가 한두 개 부러진 정도여서 병원에서 퇴원한 후엔 요양원에서 몇 달 지냈다.

 

 

“거기서 나온 다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술에 취하면 아무 남자하고나 자는 거예요. (...) 그러더니 깡패 같은 사람들하고 붙어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다음부턴 우리도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죠. 잔뜩 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어요. 뒷골목 술집에서 만난 스페인계 남자랑 같이 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 남자도 지명수배자였던 거예요.”(<면도날>, 326쪽)

 

 

소피가 이렇게 망가진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 속 인물 이사벨의 생각은 이렇다.

 

 

“(...) 소피가 그렇게 망가진 건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천성적으로 불안정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밥(남편을 말함.)에 대한 사랑도 좀 지나쳤잖아요. 만약 품성이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죠.”(<면도날>, 327쪽)

 

 

이 소설의 화자인 몸의 생각은 이렇다.

 

 

“남편과 아기가 죽었을 때 소피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술과 난잡한 성교라는 끔찍한 타락으로 스스로를 내몬 거지. 자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한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거야. 더 이상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얘기지.”(<면도날>, 328쪽)

 

 

아편을 즐기는 상태에까지 이른 소피.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면도날>, 370쪽)

 

 

불행이 아무리 정신적인 성숙을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불행을 환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행으로 겪을 고통도 싫지만 불행을 겪은 이후의 악영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3. 딱 요 정도의 불행만 필요한 게 아닐까

 

 

불행을 겪어야 행복의 진한 맛을 알 수 있는 건 맞는 얘기이긴 하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의 비교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쁘게 살아 본 자만이 한가함의 행복을 알듯이. 실패한 경험이 있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보다 성공의 기쁨을 더 크게 느끼듯이.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사는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탄광에서 일하다가 밖에 나오면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 내내 우중충한 탄광에 처박혀 있던 우리로서는 탁 트인 공기를 마시는 게 너무나 좋더라고요. 푸른 초원이 얼마나 가슴을 벅차게 하는지, 잎은 아직 돋아나지 않았지만 가지가 옅은 초록색 안개에 덮여 있는 듯한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면도날>, 179쪽)

 

 

나는 이 글을 ‘불행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글로 읽었다. 만약 그들이 탄광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탁 트인 공기를 마시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불행이 꼭 필요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불행이 없어도 행복을 느낄 순 있을 테니까. 또 자신뿐만 아니라 남이라도 불행을 겪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니까.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의 크기는 각자 다르다. 아무리 큰 불행이라도 잘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연인과의 이별로, 누군가는 사업의 실패로, 누군가는 아내를 잃은 일로 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불행이 필요할까?

 

 

각자 폐인이 되지 않을 만큼의 불행, 각자 삶의 의욕이 손상되지 않을 정도의 불행만 필요한 게 아닐까. 딱 요 정도의 불행만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수정한 것에 대하여

 

위의 글 1번의 인용문(에밀 시오랑의 글)은

<모스크바 일기>의 서문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의 서문에 있습니다.
여러 책을 검색해서 보았기에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고쳤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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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5-02-0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컴의 면도날이 생각나요.
군더더기가 없는 글이에요. 몇번이나 글을 매만지시는건가요?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15-02-02 23:48   좋아요 0 | URL
오~ 양철나무꾼 님!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왕림해 주시다니 기쁘군요.

하하~~ 썩은 나뭇가지 자르듯이 확 확 쳐내면서 쓰지요.
헤어스타일로 말하면 숏커트 정도 되려나요...

이 글은 짧은 글이라서 별로 수정할 데 없었지만
긴 글은 정말 몇 차례 수정을 하게 되지요.
언제쯤 한 번에 완성되는 글을 쓸 수 있을까요...영원히 그렇게 못 쓸 것 같은 예감이...
반가웠습니다. ^^

hnine 2015-02-0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정말 에밀 시오랑 다운 말을 했군요 ^^
전 이 사람이랑 코드가 너무 잘 맞는거 같아요. 그래서 문제예요 ㅠㅠ
고통으로 인해서 좀스럽고 앙심을 품게 된 사람이 따로 있다기 보다 누구나 이런 면을 조금씩 다 성격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아요, 정도의 차이일뿐.

페크pek0501 2015-02-02 23:50   좋아요 0 | URL
에밀 시오랑의 글은 어둡고 깊은 맛이 있죠.
닮지는 않았고 그저 흠모해요.

맞아요. 누구나 그런 면이 있을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요.
저는 누구나 극한 상황에 놓이면 범죄자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자주 놀러 가겠습니다. ^^


세실 2015-02-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종종 되내이고는 합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하루에 부담없이 만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10% 뿐이라니.... 전 10%안에 드는 행복한 사람ㅎ( 속물인가요?)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한 소피가 안되었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는 소피도 이해가 안되네요.
행복과 불행은 늘 우리 곁에 있는듯요^^

페크pek0501 2015-02-02 23:53   좋아요 0 | URL
알라디너들은 다 10프로 안에 들겠는데요.
책값을 아끼지 않으니까요.

세실 공주님은 아마 소피를 이해 못하실 것 같아요.
호호~~ 워낙 교과서 님이라서 말이죠.

행복과 불행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오늘 행복과 불행의 오솔길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어요.

지금은?
님과 얘기 중이니 행복한 페크 되시겠습니다. 호호~~

stella.K 2015-02-0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하나님께서도 감당할만한 시험 외엔 주시지 않으신다잖아요.
그런데 불행이나 시험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 같아요.
감당할만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내 수준이 어느 정돈데 이런 시험을 주시는 거야?
여쭙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전 조금만 어려움이 닦쳐도 겁나고 두려운데 말이죠.

발터 벤야민 추종자들이 많던데 나중에 함 읽어봐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5-02-02 23:56   좋아요 0 | URL
저도 제가 감당할 만한 수준을 모르겠어요.

님도 겁쟁이? 저도 그렇습니다.

겁이 많아서 누구를 제대로 미워하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벌 받을까 봐서요.

또 봅시다. 굿 밤~~~


마립간 2015-02-03 0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을 주었습니다. ; 불행이 더 큰 불행으로 남게 되는 것은 그 불행에서 스스로를 단련(인내와 노력)을 할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이야.

어느 정도의 크기가 `딱 요 정도의 불행`인지를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페크pek0501 2015-02-04 18:12   좋아요 0 | URL
좋은 아버지를 두신 따님입니다요... 정말로요.

마립간 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제 글에 뭔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3번에 글을 추가해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님이 제게 팁을 주신 거죠. 감사드려요.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이 저도 아쉽습니다. ^^

오랜만의 방문에 반가웠습니다. ^^


아무개 2015-02-03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립간님 말씀처럼
`딱 요 정도의 불행`의 크기나 무게 ...그런것들을 알수 없다는것이 늘 아쉬워요.
종종 여러 책에 등장하는 최소의 불행과 최대의 행복을 위한
`어느정도의 경제적 능력`이라는것도
대체 어느정도를 말하는건지도 참....
물론 모두 다 상대적일수 밖에 없다는건 압니다만.
제게 딱 요 정도의 불행과 어느정도의 경제적 능력이란게
어느 수준일까...뭐 그런 궁금증이랄까요.

그나저나 역시 서머셋 몸은...좋습니다. 네 참 좋아요^^

페크pek0501 2015-02-04 18: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뭐든 상대적이죠.

마립간 님과 아무개 님 덕분에 글을 추가해 넣었답니다. 마지막 3번에요.
읽어보세요...
만약 이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두 분 덕분입니다.
한 턱 쏘고 싶은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머싯 몸의 광팬으로서 요즘 이 책에 빠져 지냅니다.
많이 읽어서 뒤에 조금밖에 남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예요.

우리 딸이 토스트를 만들어 놨다고 해서 먹어야 해요. 하하~~
행복한 저녁 되세요. ^^
 


 

1. 시시해서 소중한 : 뭐가 그렇게 바쁜지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후딱 지나간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건지, 생활의 수정이 필요한 건 아닌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서 내 나이가 많아진 것에 깜짝 놀라게 되는 날이 있는 건 아닌지 종종 생각한다.

 

 

뭔가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닌가 하고 걱정하며 망설였던 삼십 대 초반의 나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하루를 사는 일은 지난날의 어리석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인 듯 여겨진다. 

 

    

내가 매주 해야 할 일주일치 일이 정해져 있는데, 늑장을 부리다간 다 하지 못하는 수가 있어 발 빠르게 움직이며 산다. 매주 이곳 서재에 글을 올리는 것도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업 준비하고, 수업하고, 혼자 계신 어머니를 보러 친정에 가고, 집안일 하고, 운동하고, 책을 보고, 글을 쓰고, 블로그에 들어와 보고... 어젠 두 욕실 청소하느라 힘을 다 뺐고 그랬더니 팔이 아프고... 등등.

 

 

시시한 삶이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시시해서 소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2. 아껴 읽고 싶은 : 빨리 먹지 않고 천천히 아껴 먹고 싶을 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이다. 맛있는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

 

 

다음의 글이 담겨 있는 책을 천천히 아껴 읽고 있다.

 

 

....................
삶에 대한 열정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나, 삶에 대한 열정에서 태어나지 않는 시는 없다. 문장이 서툴거나 비유가 식상하다는 것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 쓰는 사람이 도무지 자기 삶과 갈등이 없다는 데 있다. 시는 갈등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으로 지속된다.(162쪽)

 

시의 의의는 평범한 가운데 깃들인 비범함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 발견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그 구체성은 내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외부 현실의 발견에 의해 획득된다. 시는 당구로 치면 ‘스리쿠션’이고 바둑으로 치면 ‘성동격서聲東擊西’이다. 요컨대 시의 언어는 항상 ‘간접적’으로 제시된다.(162~163쪽)

 

시를 읽는 것은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읽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진실에 눈뜨게 해 준다. 우리 삶은 미세한 실핏줄들로 얽혀 있다. 나날의 습관과 고정관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실핏줄들은 끊임없이 삶에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실어 나른다.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 미세한 혈관들의 지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163쪽)
- 이성복, <고백의 형식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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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시’를 ‘문학’으로 읽어도 되리라.

 

 

 

 

 

 

 

 

 

 

 

 

 

 

 

 

 

 

 

 

 

 

 

3. 통증 : 테니스 선수들이 잘 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테니스 엘보. 이 병으로 팔이 아파 고생하고 있다.

 

 

그저께 병원에 가서 팔에 주사 두 대를 맞았다. 아팠다. 아팠지만 참았다. 이런 주사 정도는 백 대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내가 무서운 건 당뇨병이나 암 같은 거지 이 정도의 주사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내가 통증을 잘 참는다고 생각했는지 의사가 물었다.

 

 

“아프지 않으세요?”

“아파요.”

“잘 참으시네요.”

“(...)

 

 

내가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이 나이가 주사가 아프다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는 나이인가? 애도 아니고. 이십 대도 아니고.

 

 

애 낳을 때의 통증에 비하면 주사 바늘은 아무것도 아닌 거지. 출산 시의 통증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총 맞은 무릎에서 깊숙이 박힌 총알을 빼낼 때의 통증.’ 이에 비하면 주사는 총 맞은 무릎을 살짝 건드렸을 때의 통증이랄까.

 

 

총 맞은 무릎을 살짝 건드렸을 때와 깊숙이 박힌 총알을 빼낼 때의 통증의 차이. 이 차이를 생각하면 주사 바늘은 아무 것도 아닌 거지.

 

 

의사는 나에게 팔의 상태가 심각하니 6개월 정도 병원에 다녀야 완치된다고 말했다.

 

 

괜  찮  다. 완치되는 조건이라면 이런 주사 정도는 얼마든지 맞을 수 있다.

 

 

하도 낫지 않아서 병원을 바꿔 봤다. 이번 병원은 아는 영어 쌤이 본인이 효과를 봤다고 추천한 병원이라 믿음이 가네. 손님들이 많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는데 그래서 더 믿음이 가네.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에 이어 오십견에 이어 이젠 테니스 엘보까지.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4. 다행인 것은 : 며칠 전, 신문에서 같은 내용을 다룬 영화와 소설을 비교해 쓴 어떤 필자의 글을 읽고 든 생각.

 

 

‘참 글을 잘 쓰는구나, 내가 이렇게 쓰려면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 할까?’

 

 

기가 죽네. 이름 있는 일간지에 연재할 만큼의 역량이라니. 그 역량의 산은 높고 높겠지.

 

 

내가 내 글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이유. 글 잘 쓰는 사람들의 글을 매일 읽고 매일 기가 죽으니까. 이곳 알라딘 서재에서만도 글을 잘 쓰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읽고 기가 죽으니까.

 

 

가야 할 길은 먼데 내 걸음은 더디다. 하지만 먼 길을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더디게 가는 재미도 있으니까. 더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재미가 있지. 그리고 이게 나에게 맞는 신발이라는 게 중요하다.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살 순 없잖아.   


  
다행인 것은 책은 여전히 재밌고, 책 읽다 보면 여전히 글을 쓰고 싶어진다는 것.

 

 

확인해 보니 이곳 알라딘에서 구입한 책은 총 444권이었다. 동네 서점에서도 많이 샀으니 그 이상이겠다. (알라딘에서 2002년부터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내 서재가 생긴 것은 2009년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라딘의 내 서재가 생긴 다음부터 책을 많이 사기 시작했을까? 또 알라딘의 내 서재가 생긴 다음부터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서재가 생긴 뒤에 책을 덜 샀고 책을 덜 읽었다.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예전에 비해 체력이 약해진 점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란 소설이다.

 

 

 

 

 

 

 

 

 

 

 

 

 

 

 

 

 

 

 

 

 

 

 

 

5. 일상의 아름다움 : <면도날>을 266쪽까지 읽었다. 인상 깊은 구절이 많아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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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 날 오전을 무척 즐겁게 보냈다. 먼저 뤽상부르 공원에 가서 한 시간쯤 그림을 감상하다가, 공원 여기저기를 한가롭게 거닐면서 젊은 시절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에 관해 열심히 토론하며 둘씩 짝을 지어 자갈길을 걸어가는 학생들도, 보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도, 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자리에 앉아 조간신문을 읽는 노인들도 모두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서 식료품 가격이나 하인들의 잘못된 행실에 관해 수다를 떠는 중년 과부들도 그대로였다.(96쪽)
- 서머싯 몸, <면도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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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왜 좋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잘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런 일상 풍경의 스케치가 그냥 좋다. 그냥 끌려서 여러 번 읽게 된다.

 

 

내가 또 하나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 비 오는 게 좋은 이유.

 

 

밤에 비가 오는 걸 보면 좋아서 마음이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을 갖는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요기까지다. 그 이상은 불가능.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비가 와서 좋은 이유를 글로 써 보려고 한다. 그리고 빗소리를 글로 나타내 보려고 한다. 언젠가는.


 

 

 

 

 

 
6. 인간의 오해 : 오해하기 좋아하는 건 인간의 특징인 듯하다.

 

 

<면도날>에서 래리(남자)와 이사벨(여자)이 방에서 나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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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가자.”
래리는 방에서 나와 문을 잠갔다. 그가 1층에 있는 사내에게 열쇠를 건네자, 사내는 두 사람을 능글맞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내가 자기들이 뭘 했다고 생각하는지 이사벨도 짐작이 갔다. 그녀가 말했다.
“저 늙은 남자는 분명히 내 순결을 의심하고 있을 거야.”(128쪽)
- 서머싯 몸, <면도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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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가 한 방에서 나오는 걸 보면 그렇고 그런 상상을 하는 것.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진실의 얼굴보단 가짜의 얼굴을 보며 살 때가 더 많은 게 우리의 삶일지도.

 

 

 

 

 

 

 

7. 인간이란 : 서머싯 몸이 이해한 인간을 더 감상해 보자.

 

 

범죄자 같은 사람을 사귀는 이유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한테만은 해롭게 굴지 않을 거라는 착각 때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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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내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결혼이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상대가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자신에게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163쪽)
- 서머싯 몸, <면도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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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질적으로 나쁜 사람이기 때문인가?

 

 

어떤 기질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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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이상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범죄자들은 피나게 노력해서 기발한 계획을 짜 놓고는 결국 그것 때문에 감방에 들어가지. 그리고 감방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똑같은 일을 저지르길 되풀이하고 또 다시 감방에 들어가. 만일 그만한 노력과 영리함과 자원과 인내심을 다른 정직한 일에 쏟는다면,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 올라 꽤 잘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태어나길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거야. 범죄를 좋아하는 거지.”(147~148쪽)
- 서머싯 몸, <면도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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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인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내 결론.

 

 

 

 

 

 

 

8. 적정선 :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비뚤어진 사랑이 될 때가 있다. 아들의 마음을 무시한 채 아들이 결혼할 배우자를 정해 주며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어머니. 아들이 싫다고 하는 데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어머니.(어느 드라마에서.) 

 

 

“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야.”라고 말하면서.

 

 

자식은 이렇게 항변할 수 있다. “저의 행복을 위해서라고요? 저처럼 살아 보세요, 행복한지. 저는 어머니로 인해 불행한 적이 많았지 행복한 적이 없다고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사랑에 관한 내 생각. 많이 사랑하고 조금 이해하는 것보다 조금 사랑하고 많이 이해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랑에 관한 내 생각. 사랑이란 본인이 절실하게 원할 땐 선택권을 주는 것.

 

 

사랑에 관한 내 생각. 사랑이란 상대를 웃게 만드는 것.

 

 

사랑에 관한 내 생각. 돈가스를 튀길 때처럼 사랑을 줄 때에도 적정선이 있는 게 아닐까? 덜 익어도 먹을 수 없고 타서도 먹을 수 없는 돈가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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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공 선생에게 물었다. “자장과 자하 두 사람 중 누가 더 뛰어납니까?” 공 선생이 대꾸했다. “자장은 좀 지나쳐서 문제고, 자하는 좀 미치지 못해서 문제지.” 자공이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 공 선생이 대꾸했다. “그게 아니지. 말을 그대로 알아듣지 말게. 지나치는 것은 결국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일세.”(252쪽)
- 신정근,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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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猶不及. 지나치나 미치지 못하나 그게 그것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9. 작전상 무심함 : <마음사전>에선 무심함의 종류를 일곱 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기막힌 발견이다. 저자의 그 발견에 경이를 표하고 싶다.

 

 

일곱 가지 중에서 ‘작전상 무심함’이란 게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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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상 무심함 - 관계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믿고 적극 활용하려는 그는, 스스로가 무심해야 그쪽에서 관심을 드러내리란 계산을 철저히 하고 있다. 실은 아주 섬세히 모든 걸 관찰하지만, 모르는 척한다. (...) 일부러 무심해 보이기 위해, 대화를 하면서도 창문 쪽을 응시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며 자신의 표정과 헤어스타일 같은 것을 슬쩍 점검해본다. 잘 보이고 싶어서.(267쪽)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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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상 무심함, 따뜻한 무심함, 호방한 무심함, 이기적 무심함, 유니크한 무심함, 무심한 무심함, 무심하기엔 너무 쩨쩨한 당신 등에 대한 글을 읽고서 나는 어떤 무심함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봤다.

 

 

 

 

 

 

 

 

 

 

 

 

 

 

 

 

 

 

 

 

 

 

10. 우려먹으며 : 특이한 건가? 요즘 난 여행이 싫다. 귀찮아서 싫다. 집에 있는 게 좋다. 외국 여행을 하기 위해 친구들끼리 계를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런 그들의 활력이 보긴 좋다.  

 

 

책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은 좋다. 이 책, 저 책을 여행하며 사는 중이다. 눈으로 하는 책 여행을 좋아하니깐 실제로 발로 다니는 여행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뭔가 하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이 알맹이가 되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의 껍데기에 불과해지는 게 아닐까? 마치 사랑에 빠진 여자가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그 나머지는 사랑의 배경이 될 뿐인 것처럼.

 

 

나의 글쓰기는 알맹이인가 껍데기인가? 무엇이 내 삶의 알맹이이고 무엇이 껍데기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알맹이를 껍데기처럼, 껍데기를 알맹이처럼 여기며 사는 건 아닌지. 

 

 

모든 건 한때, 공부도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달에 열 권씩 책을 읽었던 삼십 대 초반에 나는 늘 그렇게 읽으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늘 ‘빈 시간’이 똑같이 생길 줄 알았고, 늘 열정이 똑같을 줄 알았고, 늘 체력이 똑같을 줄 알았다. 독서 노트에 기록하면서 읽은 책이 4백 권이 되었을 때, 이런 속도라면 천 권이 금방 될 줄 알았다.

 

 

언제부턴가 그때 일 년 동안 읽었던 책의 양을 몇 년에 걸쳐 읽어야만 되는 속도로 책을 읽게 되었다. 과거에 내가 독서광이었다면 현재의 나는 책광일 뿐이다. 

 

 

책을 많이 읽던 그때가 중요한 시간이었던 걸 그땐 몰랐다.

 


그 시간에 읽은 책들을 이렇게 우려먹으며 살게 될 줄 몰랐다.

 


한약을 여러 번 우려먹듯이 내가 읽은 책들을 우려먹으며 글을 쓰고 있다.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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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1-24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 침 맞는거 싫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 소리가ㅎ
이 나이에는 그저 조용히 있어야하는거죠.ㅜㅜ
지금까지 한의원에서 침 맞은적이 없네요.

저도 비 오는 날 좋아해요. 특히 카페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 풍경 보고 있으면 꺅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읽고나서 더욱요^^

범죄자는 범죄를 좋아하는구나... 스릴을 맛보는걸까요?

달콤한 주말! 여유 만끽해요, 우리^^

페크pek0501 2015-01-24 14:42   좋아요 0 | URL
그 병원은 통증의학과의원이에요.

범죄자는 뭔가를 얻기 위해 천천히 오르는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은 것 아닐까요. 일확천금을 좋아하는 성향이랄까요.

님도 비 오는 날 좋아하시는군요. ^^ 우리는 비슷... ^^

요즘 활력 넘치는 님의 그 정기를 제가 좀 받게 해 주세염...


다크아이즈 2015-01-2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면 안 되는데 우리 나이가 그럴 시기
성한 곳이 없는 몸으로 굳건히 글을 쓰시는 페크님 파이팅~~^^

페크pek0501 2015-01-25 15:27   좋아요 0 | URL
하하~~ 오십견이 다 나았는가 싶더니 또 새로운 병이...

테니스 엘보가 다 나으면 또 어떤 새로운 병이 생길지 몰라요.
우리 조심하자고요. 고맙습니다. ^^

hnine 2015-01-30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해요. 적정선에 관한 내용은 요즘 저도 자주 생각하는 거예요.

깊은 숨 한번 쉬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15-01-31 22:31   좋아요 0 | URL
하하~~ 공감하시는 분 만나니 반갑네요.^^

독서도 적당히 해야지 적정선을 넘으면 건강을 해칩니다.
취미 생활이란 것도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은 거지만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할애하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 모자라 삶이 엉망이 되잖아요. 저도 적정선을 지키며 사는 게 힘들 때가 있어요.

반갑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