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장바구니담기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불려야 하는가. 영화광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하여 중 /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걸 영화광이라고 부르든(197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 영화주의자들이라고 부르든(198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영화 마니아라고 부르든(199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21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시네필이라고 부르고 있다.하지만 '하여튼'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여기서 나를 이끄는 것은 우리들을 부르는 호명의 방식이다. -66쪽

내게 문제는 영화 마니아가 오디오 마니아와 같은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1990년대에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우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를 보는 시스템에 관심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나는 지금 홈시어터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말 그대로 영화를 '감상하는'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실제로 영화를 제법 보았다는 사람들조차 영화 촬영이나 사운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믿을 수 없는 만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중략)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서(대부분의 경우)문학적으로나,아니면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뿐이다.-68쪽

게다가 대부분 집에서 말 그대로 '그냥'비디오로 영화를 본다.집에서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오직 하이-파이 음질과 화질의 영화를 고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는 하지만,'하이-엔드'시스템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기계의 버전 업에 비례해서, '하이-테크'한 최신 할리우드 영화들로 그들의 라이브러리를 채워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그들의 취행이니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과 나는 점점 더 나눌만한 이야기가 없어지고 있다. -68쪽

첫 번째 오해에 대하여.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수집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그래서 영화를 음미하기보다는 영화(들)을 남들보다 많이 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며,희귀한 영화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중략)물론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과거의'채팅상에서 벌어지는 영화 퀴즈방(속칭 '영퀴방')을 들러 보면 그런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유머 버전일 뿐이다. 왜냐하면 영화 제목을 알아맞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한 편을 놓고, 그 다음이 문제의 시작이다. 영화는 결코 수집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음악이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이끌리는 것을 선택하고, 음미하고,그 안에서 자기의 자아가 반영되어 가는 과정을 다시 되짚으면 되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글이란 결국 자기의 기대의 지평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69쪽

그런데 1970년대에 영화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타자로 취급하던 것이,그리고 1980년대에 부르주아적 변종으로 분류되어 비판받던 계(70)급의 분류가 이제는 그 무언가 하나의 분류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인데,문제는 그 분류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을 어리둥정하게 만드는 지점이다.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종종 당당하게 활동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을 분류해 낼 만한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영화 마니아는 존재한다. 이 숨바꼭질을 분류해 내기 위해서는 역설이 필요하다. -70,71쪽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물론 감식안이 있지만,우리들이 갖고 있는 감식안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결국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안겨 준 홀림에 사로잡혀서 만들어 낸 환상에 대한 굴복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형태의 페티시즘이라는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그럼으로써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쳐 놓은 결계가 있다.그렇다. 이것은 경계가 아니라 일종의 결계이다. 우리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감식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티시즘에 의한 굴복이라면,그 어떤 판단도 오류를 피해 갈 수는 없다.이것은 지난 30년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내는 방식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정교한 분류-처리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공격의 목표가 영화가 아니라 (그렇다면 아주 반론은 쉬워진다),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1쪽

세 번째 오해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있다.우리들 자신 중에는 영화를 사랑하기보다는 영화를 빌려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전적으로 영화 마니아라는 호칭에 대해서 자유롭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이다. 일종의 페티시즘에 관한 증세로 만들어 버리는 규정에 대해서 이들은 가볍게(72)벗어난다.그런데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영화를 빌려 이론을 전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이들이 처음부터 영화를 개념으로 설정하고,그 안에서 그 안의 구성 요소들을 끌어내어 이루어지는 사건들과 그 정황들을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솔직하지 못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철저하지 못하다.-72,73쪽

종종 그것이 영화에 관한 글도 아니면서 정작 영화가 그 글 안에 들어가서 다른 개념들조차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종종 마주치는 실수이다.그것이 유하처럼 시인의 경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그러한 혼란의 경험은 새로운 예술적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이름을 내세워,그리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영화 마니아라는 나르시시즘에겨워 심심풀이로 쓰는 영화에 대한 글은 그 사유 자체를 나쁜 의미에서(그리고 아주 진지한 의미에서) 법도 질서도 없는 혼란으로 이끈다.그는 인접성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73쪽

우리는 자유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결정하게 된 방식을 사후적으로 선택하는 능력이라는 칸트의 조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사회가 호명하는 방식과의 투쟁이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위해서 이 투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76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8-20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0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절판


20세기에 들어 수립된 종교사회학에서는 근대를 종교 쇠퇴의 시기로 보려는 이런 시각을 '세속화 이론'이라고 부른다.이 이론에 따르면,과학 지식이 널리 보급되고 근대 사회제도가 신앙의 사회적 기반을 허묾에 따라 세속화, 즉 사회와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의 지속적 축소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이런 시각은 어떤 반종교적인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그 시각을 뒷받침하는 여러 경험적 자료에 근거한다(그런 자료는 대부분 유럽에서 찾을 수 있으이 의미심장하다).-15쪽

참된 다원성이 존재하는 조건은 지식사회학에서 '인지 오염cognitive contamination'이라고 부르는 용어로 풀이된다.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 행태에 바탕을 둔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뒤섞이다 보면,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된다.그렇게 '오염'이 일어나면,남들의 신념과 가치를 이상하다,기묘하다,사악하다 등으로 규정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차차,하지만 확실히,다른 사람들도 존중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그것은 앞서 당연시했던 현실 인식이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5쪽

전경과 배경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배경적 행동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거의 숙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이때 개인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반면 전경적 행동은 숙고를 필요로 한다.이렇게 할까,아니면 저렇게 할까 하고 묻는 과정이 필수적이다.-30쪽

적극적 관용과 소극적 관용을 구분 짓는 것이 유용하다.적극적 관용은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개인 또는 집단과 마주쳤을 때 순전한 존중과 개방성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반면 소극적 관용은 무관심을 나타낸다."저희들 멋대로 하라고 해."여기서 '저희들'이란 다른 신념이나 행동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용은 대체로 두 번째 유형이다.-54쪽

진리에 이르기란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상대적 포용론의 최종 국면은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며 폐기되어(84)야 한다는 입장이다.우리는 처해 있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른 편향성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며,결국 그처럼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극단적 상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고,심지어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조차 없다고 한다.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내세우는 입장-84,85쪽

인식론적 엘리트는 유일하게 진리를 담지하며,다른 모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결국 상대주의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그 엘리트이며,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91쪽

집단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도덕을 고려하게 하는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다.또한 그것은 데카당스로도 볼 수 있다.사회를 지탱하던 규범이 유명무실화되고,허울뿐이거나 숫제 조롱의 대상이 되며,누구나 남들도 그런 규범에 따라 행동하리라 믿지 않게 되는(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퇴폐적인 사회상,그것이 데카당스인 것이다.-106쪽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극단적인 불확실성도 극단적인 확실성도 위험하다.-132쪽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한다.한 가지 근본적인 요소는 '제도의 필수성 institutional imperative'이다.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도(에밀 뒤르켐의 정의를 따르면,행동,사고,감각의 전통적인 패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19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프런티어21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품절


오늘날 '문화'를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문화'란 기본적인 생활세계의 범주로서 등장한다.예를 들어,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말로 믿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을 지키는 것뿐이다(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율법을 지키는 경우 등)."내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된/치환된(disavowed/displaced)믿음을 표현하는 지배적인 양식인 듯하다. 문화적 생활양식이란, 산타클로스를 믿지는 않지만 해마다 12월만 되면 집집마다 또 공공장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닐까?-13쪽

즉 '문화'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 '진지하게 생각하지'않으면서 실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과학이 이러한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 역시 과학이 너무 진짜라는 사실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근본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반문화세력,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겁도 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문화 속에 매개 없이 속해 있는 사람들,자신의 문화에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14쪽

영웅이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배반당해야 하는 존재다.(31) / 진정한 지도자는 종교적,정치적,학문적 지도자를 막론하고,자기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배반을 도발해야 한다.-31,33쪽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전히 반했을 때,그 사람이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에게 아기처럼 완전하게 의지할 때,이러한 신뢰를 배반하고,그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그의 존재 전체를 부수고 싶다는 이상하고 그야말로 도착적인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32쪽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균열 자체,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Otherness)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다.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은 일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의 정반대,즉 일자의 내재적 이중화의 정반대다.즉 타자성에 대한 단정은 타자성 자체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동일성(sameness)에 다다른다. -42쪽

오늘날의 섹슈얼리티와 예술이 마주친 딜레마를 생각해 보자.끊임(59)없이 새로운 예술적 탈선과 도발을 감행해야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보다 재미없고 기회주의적이고 쓸데없는 짓도 없다-59,60쪽

종교의 광신적 옹호자 가운데 오늘날의 세속 문화를 지독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종교 자체를 저버리는 것(의미 있는 종교적 체험을 상실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자유주의 전사들은 반민주적 근본주의와 대결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린 나머니 테러와 싸울 수만 있다면 자유와 민주주의 자체를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은가?그들은 비기독교적 근본주의가 자유에 대한 주된 위혐임을 증명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리다,심지어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기독교 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후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63쪽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우리가 '공식적으로'원하는 것을 정말로 얻게 되는 것이다.이렇듯 행복은 본래 위선적인 것이다.즉 행복이란 사실은 원치 않는 것들을 꿈꾸는 것이다.오늘날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를 상대로 자본주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요구 사항(완전고용 실행하라!복지국가 유지하라!이민자 권리 보장하라!)을 퍼부을 때,그들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릭한 도발의 게임-주인(Master)이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주인의 무능력을 노출시키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전략의 문제점은 체제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73)들이 사실은 요구가 충족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73쪽

불안의 원인은 죄가 규범으로 승격되는 상황,즉 욕망을 지탱하는 금지가 결여되는 상황이다.이러한 결여로 인해서 우리는 욕망의 대상-원인에 답답할 정도로 가까워진다-금지가 주었던 숨 쉴 공간이 없어진다. 우리가 규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개체성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규범에 먼저 우리에게 저항할 것, 위반할 것,갈 데까지 갈 것을 명한다.(중략)인류 역사상 상호 작용에 대한 규정들이 이토록 빡빡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더 이상 상징적 금지로 작용하지 않는다.오히려 이러한 규정들은 위반의 양식들 자체를 규정한다.-94쪽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쾌락과 제약을 결합한다. 쾌락과 제약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케케묵은 얘기가 아니다.오히려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대립항들의 무매개적 일치(작용과 반작용의 일치)라는 일종의 사이비 헤겔적 개념이다. 해가 되는 그것이 이미 약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쾌락의 궁극적 사례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초콜릿 판매약(cgocolate laxative)일 것이다. 이 약의 역설적인 광고문을 읽어보자.변비에 시달리고 있나요? 그러면 초콜릿을 좀더 드세요!(변비를 일으키는 바로 그것을 좀 더 드세요)-157쪽

국가 제도가 선포하는 비상시국은 진정한 비상시국을 피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는 절박한 전략의 일부다.-216쪽

정말 어려운 일은 묵묵히 혁명을 준비하는 일도 아니요,혁명적 폭발이라는 '사건'의 조건을(218)마련하는 일도 아니다.진짜 힘든 일은 사건이 일어난 후 -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시작된다.-218,219쪽

라캉이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배설이 문제가 된다는 점인 것은 그 때문이다.인간에게 배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이 똥을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똥을 통해 우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 노출/외화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똥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243쪽

헤겔의 지양(Aufhebung)의 최고의 사례는 이것이다. 즉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제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이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체험을 버리는 것이다).여기서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277쪽

그러한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인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한다.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기독교,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2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동네 63호 - 2010.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품절


나르시시즘이 '민족'이 아닌 '주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라면,우리는 또한 이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엮이는 매듭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필자의 가정은 그중에서도 각 세대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 속에서 특정한 나르시시즘이 발현되며,그리고 그것이 다른 세대의 나르시시즘과 독특한 매듭을 형성하는 것에 우리의 '민족성'의 이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467쪽

사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요구는 상상적인 차원에 속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각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지 못하게 되면 그 요구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쉽게 변질되며,그런 한에서 그들은 때때로 타자들과 양립할 수 없는 민족의 고유성을 내세워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부터 예외의 자리에 놓기 마련이다. 타자에게 인정을 갈구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망은 그 주체를 여전히 타자에 종속된 주체, 이타적 주체로 남겨놓기 때문이다.반면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묻는 순간, 상대의 호응이 없으면 곧바로 마음을 닫고 피해자적 태도로 변질되는 특이한 입장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다."그리고 여기서 상실감으로 인한 자의식이 피해자적 위치에서 공고해진 민족주의와 중첩된다."우리는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은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눈과환상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타자를 생각하지 못했던 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470쪽

에 있는,서구인들을 보는 우리의 태도, 즉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470)관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던 우리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다.-470,471쪽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의 가장 밑바탕,다시 말해 '현재 속의 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그보다 더 현재적인 세대,지금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386과 그 언저리에 있는 '현 세대'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경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오히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 세대가 집착했던 것들이 현 시점에 한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전 세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요청되어 온 상상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초자아적 아버지의 옹립, 경제의 재건 등을 통한 나(우리)의 확립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비의 세대가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의 확립을 추구했다면,이제 그 자식 세대,어느 정도는 상실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대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 세대가 자청했던 권위주의,즉 결손된 상징화의 틈새를 뚫고 드러난 잔혹한 초자아적 아-471쪽

버지의 우상일 것이다.아비의 우상을 파괴하고,('세습'이란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계급적인 부조리를 척결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에 몰두한 이들은,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전 세대에 비해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수직적인 차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수평적 차원의 부조리이다.즉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우상 파괴,초자아적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형제애들을 기다리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가 아닌 상상적 '경쟁'이다.-471쪽

실제로 현 세대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의 청산은 경쟁 사회로의 내몰림과 분리될 수 없다.이것을 단순히 희소성의 원칙,경제의 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우리가 생존의 문제에 있어 과거보다 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들의 열망이 궁극적으로는,특히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전 세대만큼이나 혹은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지를,다시 말해 어째서 수직적인 불평등에는 민감하지만,수평적인 차원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472쪽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펙형 인간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만,'나는 타자를 위한 대상입니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구세대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달리,자신이 봉사하는 타자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이것이 또한 학벌사회와 스펙사회이 다른 점이기도 하다).즉 스펙은 자신이 요구되는 대상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함축하지만,그의 영혼은 자신의 구매자인 기업이나 조국을 향해 있지 않다. 팔리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상품이 된 인간은 더이상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의 없는 어떤 냉소적 대상화가 있을 뿐이다.-480쪽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480,4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장바구니담기


관용이 내세우는 중립성의 신화가,실제로는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규범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세속주의 이외에 미국 내외의 관용 담론을 연결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자유주의 관용 담론의 중핵에 위치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이다.도덕적 자율성의 관념은 미국의 안팎 모두에서 관용할 수 있는 주체와 관용 불가능한 주체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자유주의와 문명 담론을 은밀히 결합시킨다.-27쪽

근대 초기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오늘날 인종주의적 법률의 입법화를 저지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관용 담론이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하지만 역으로 관용에 대한 호소가 반드시 폭력과 종속을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예컨대, 오늘날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 평등의 완전한 실현 대신에 이들에 대한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동성애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항하여 이들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후자가 관용을 잔인함과 폭력,공적인 배제와 대립시키는 데 반해, 전자는 관용과 평등을 대립시키년서,관용을 통해 동성애자의 종속적인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33쪽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것들에 대한 행동이나 발언을 참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그것은 사회적,정치적,종교적,문화적 규범들을 부과하는 행위이며,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하는 일인 동시에,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하는 기제이다.더 나아가 정치적 담론으로서 관용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생산 그 자체에 관여하며,문화를 종족 혹은 인종과 뒤섞고,믿음과 신념의 문제를 유전적 형질과 결합시키는 데 일조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탈정치화함으로써,자연스럽게 정체성 그 자체를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한다.-38쪽

탈정치화의 공통된 방식 중 하나는,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40)어, 그 현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현상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이다.-40,41쪽

두 번째 탈정치화 방식도 존재한다.이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정치적 언어를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들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관용으로 대체될 때,타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존중의 문제로 대체될 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통들이 단순히 차이와 공격성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고통이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여겨질 때, 정치적 투쟁과 변혁의 문제는 특정한 행동과 태도,인정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접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긴 하겠지만,불평등과 배제 같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관용을 제시하는 것은,정치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물화하는 것일 뿐더러, 정의의 추구를 단순한 감수성 훈련 혹은 로티가 태도의 개선이라 이름붙인 해결책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정의의 추구는 이제 태도와 행실을 치료하고 개선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42쪽

정리하자면 오늘날 "정치의 문화화"는 비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삶 전체를 소위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며,이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문화와 무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논리 속에서,관용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의 일부로서 문화적 영역-즉, 섹슈얼리티에서 종족성에(53)이르기까지 모든 본질화된 정체성들을 포괄하는 영역이자 현대 자유주의 체제내에서 차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영역-에 적용된다.즉, 관용은("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스스로를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충하는 도구로,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3,5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요소를 주인 안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그 대상의 타자성otherness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바로 이 점이 관용을 한편으로는 동화,흡수와 다른 한편으(62)로는 배제,부정과 구분시켜준다.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채 남아 있다.관용의 대상은 주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거나 주인 속으로 용해되지 않기 때문에,이것이 가진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특성은,주인의 신체 내부에서 계속 유지된다.-62,63쪽

관용이 차이에 대한 적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관리할 뿐인 한, 관용은 각종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다.관용이 무엇에든 적용되는 이데올로기이자 통치의 요소가 된 오늘날,이 심리적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오늘날 관용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주변적 대상으로 표지됨과 함께, 시민과 비시민 혹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자리 잡게 된다.이와는 반대로,관용을 실천하도록 종용받는 이들은,시민윤리와 평화,진보의 이름하에,적개심과 분노를 억눌러야만 한다.-6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관용 대상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정치화된 정체성이면 추구하기 마련인 인식론적,정치적 입장과 충돌할 뿐 아니라,"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비표지된 문화,종족,인종,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계층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 속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와 원칙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88쪽

근대적 주체 형성은,한편으로는 표지된 주체의 차이를 존재론화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이 표지된 주체가 유사한 주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민족-국가의 추상적인 시민권 담론이,여타의 다양한 주체 생산 담론들-즉 기독교인,부르주아,백인,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존재들을 분류하고 규제하는 담론들-과 긴밀히 결합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배제되어 온 이들을 추상적 시민권 담론을 통해 내부로 편입시키는 과정-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일탈적 성격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과정-은, 곧바로 이러한 지위를 재기입하기 위한 좀 더 강력해진 규제와 표지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124쪽

타자의 종속과 비체화abjection가 이러한 종속의 사사화나 경제 영역에서의 종속의 제도화를 통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즉 더욱 완전한 평등이 시급한 문제가 되는 곳에서,관용은 종속과 배제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소환된다.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따라서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전자의 종속적 차이는 이성애적 사회 질서와 가족 질서에 의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130쪽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통치는 만약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저 비생산적으로 남아 있었을,개인과 대중 그리고 초국적인 신체의 힘들을 이용하고 조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더 나아가 주체들의 욕구와 능력,욕망 역시 통치성에 의해 관리되고 지도된다.따라서 통치는 푸코가 "행위의 지도"라고 부른 것,즉 개인의 신체와 사회적 신체,정치적 신체의 행위를 지휘하고 지도하는 것과 관련된다.둘째,행위의 지도로서 통치성은,개인에서부터 인구,신체와 정신의 특정한 부분에서부터 윤리와 노동,시민적 실천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지점을 통해 작동한다.셋째,통치성은 법이나 여타의 가시적인 권력에 한정되지 않으며,광범위하게 펼쳐진 비가시적 권력들을 통해 작동한다.푸코는 사목권력을 통치성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부는 전형적인 예로 보았다.-140쪽

넷째,통치성은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국가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담론에 침투해,이러한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여기에는 범죄학,교육학,심리학,정신의학,인구학,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 담론과 종교 담론,그리고 여타의 대중 담론이 포함된다.이와 같이 통치성은 집중화나 단일화,체계화에 기대는 것이 아(140)니라,근대 사회에 분산된 광범위한 권력과 지식을 통해 작동한다.-140,141쪽

정치적 갈등의 원인을 불관용에서 찾는 관용 담론은,불평등과 지배 같은 문제를 개인적인 편견과 증오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화하고,그 원인을 특정한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탈정치적 접근이다.개인과 그 태도가 갈등의 이유로 제시되자마자,권력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진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의 원인은 편견을 가진 개인이고,관용적 개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233쪽

주체나 사회의 법칙이 문화와 종교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는 이제 유기체적 사회와 동일시되며,자율적 개인의 등장은 이러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것으로 간주된다.여기서 사실상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란,바로 문화와 종교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극복 과정을 거친 자유주의 주체에게 문화란,먹을 거리,의복,음악,라이프스타일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과거 권력으로서의 문화는,이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로 대체된다.자유주의 사회에서 사적 공간이 "비정한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안식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개인을 억압하던 문화는 이제 개인의 즐거움과 안식의 원천으로 변화한다.과거 지배와 비합리성의 원천이었던 종교 역시, 이제 개인의 위안과 자기 충족,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한 주체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변형되어야 한다.-24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