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
앙드레 콩트 스퐁빌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품절


윤리와 정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이고, 그 둘은 모두 필요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것들이 각각 갖는 본질적인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그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두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 둘의 차이도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윤리가 필요하고,그리고 윤리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윤리의 복귀를 고찰하기 위해 내놓는 이 첫 번째 설명은 한 세대에서 다른 한 세대로, 즉 정치가 가장 우선인 세대(68세대)에서 윤리가 가장 우선인 세대('윤리의 세대', 또한, 역설적이긴 하지만, '미테랑세대')로 이행한 과정에 대한 실증적,객관적 관찰로도 바꾸어 묘사할 수 있다.-29쪽

그런데 이 이행은 근본적으로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중대한 위기가 생겨난다는 징후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운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이것이 정치의 진정한 기능이다-하려는 감정을 차츰 잃어갈수록, 그들은 윤리적 가치들의 영향력 아래 폐쇄된 채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내게 이 첫 번째 설명은 근본적으로 중의성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우리는 젊은이들이 윤리적 혹은 인도주의적 실천으로 복귀한다는 사실에 물론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복귀의 과정이 고유하게 정치적인 모든 영역을 희생하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0쪽

내가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는 가장 위협하는 건 내가 '보편화된 무관심'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즉, 무엇에 대해서건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우리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작은(51) 사적 영역만을 무한정 개발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사회적 연결이 순전하고 명백하게 해체된 현상-사회학자들이 개인주의의 승리라고 부르는 현상, 혹은 우리 프랑스의 사회학자들이 익숙해진 영어식 프랑스어로 표현한다면, 커쿠닝cocooning이다-51쪽

(각주 22) 나는 여기서 보다 빠른 시간 안에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기 위해, 일종의 "임시적 칸트주의"에 의지했을 따름이다.(중략)칸트는 윤리에 관하여, 적어도 현상학적으로는 옳다. 그는 윤리를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그린다.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각자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뤄지는 행위(예를 들어 보상을 바라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고유하게 윤리적인 가치를 상실한다고 느낀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누구도 윤리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효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는 이러한 효용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때만 고유하게 윤리적인 것이 된다.-61쪽

신문이나 세미나들에서 일상적으로 기업윤리라고 말하는 것이 이런 상인의 행위를 실천하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행위가 보통 윤리의 요구사항에 일치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그것은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중략)그런데 윤리가 이윤의 원천이라면, 그 이윤을 창출하는 일에서 윤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이윤을 창출하는 일은 경영의 영역, 마케팅의 영역, 관리의 영역에 속하지, 더 이상 윤리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65쪽

윤리란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간주하는 것 모두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선험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칸트와 대조된다)우리가 모든 보상이나 처벌, 심지어는 모든 바람과 관계없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모두를 가리킨다. 윤리는 한 양심에게 무조건적으로 의미 있거나 강제되는 것(92) 모두를 가리킨다.-92,93쪽

윤리적으로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윤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94쪽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된다면,윤리는 정치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정치가 자신의 영혼이나 양심을 달래는 데 사용하는 보조물에 지나지 않는다.-153쪽

기업의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기업 내에 윤리가 존재해야 한다. (중략)나는 조금 전에 "여러분 대신에 시장이 윤리적으로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또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 "여러분 대신에 회사가 윤리적으로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176쪽

이타성과 연대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타성이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라면,연대는 사회적 효용성을 위해 지적인 방식으로 이타성을 조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시대에 뒤진 언어로 보이는 '이타성'이라는 표현을 더(183)이상 사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거의 항상 입에 담고 다니는 말이 '연대'인데(그런데 오늘날에 정치적으로는 이 말이 적합하다),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한 나머지 두 단어의 개념을 혼동해서('윤리의 세대'와 비슷하게)'연대'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갖는 선의의 감정'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대'라는 말의 내용,기능성,효과를 무시한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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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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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한다 - 이 상상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적게 믿는 것이 아니라 훨씬 많이 믿고 있다.-10쪽

'공산주의'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 그것은 여전히 분석과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가?라는 자명한 물음을 묻는 대신 정반대의 물음, 즉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옛것과 새것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새 용어들('포스트모던 사회' '위험사회' '정보사회' '포스트산업사회' 등)을 끊임없이 창조해내기를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새로운(16) 것의 윤곽을 놓치고 있다. 새것의 진정한 새로움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것 안에 있는 '영구한' 것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16,17쪽

우리가 왜 위기에 책임이 있는 '월스트리트'쪽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메인스트리트'의 평범한 주태담보 대출자들에게 그 댓가를 치르도록 요구해야 하는가? 이것은 경제학 이론에서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것 - '어떤 사람의 행동이 유발할 수 있는 여하한 손실에 대해서도 보험이나 법률, 또는 다른 어떤 기관이 그/녀를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위험'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가령 내가 화재보험을 들었다면 나는 화재예방에 덜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29쪽

그러면 구제금융안은 정말 '사회주의적' 조치, 미국 내 국가사회주의의 탄생에 해당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사회주의인바, 그 '사회주의적' 조치의 주요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자본주의의 구원에 복무할 때 은행씨스템의 '사회화'는 용인된다. (중략) '도덕적 해이'가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다면? 두가지를 분리시킬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31쪽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은 오로지 의미-없는-진리의 차원에서만, 즉 세계시장 메커니즘의 '실재(the real)'로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쏘르망의 주장처럼 항상 현실이 불완전하고 항상 사람들이 불가능한 완전함에 대해 몽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병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5쪽

'지배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다시 말해 지배계급은 하층 계급이 경제의 현 상태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71쪽

(전략)현재의 위기로부터 정말로 헤게모니적인 것으로서 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판본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생태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자유시장 체제가 과도한 착취로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동원은 생태적 목표, 빈곤에 대한 투쟁,그리고 다른 가치 있는 목적들에 봉사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어떤 새로운 정향의 징후가 포착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72쪽

자본가들은 이윤을 창출하는 기계에 머물러서는 안되는데, 그들의 삶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모토는 사회적 책임과 감사가 되었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치고 큰 부를 축적하게 허용함으로써 자신들을 말할 수 없이 잘 대해주었으며, 따라서 사회에 뭔가를 돌려주려고 보통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이다.오직 사회를 배려하는 이런 종류의 접근법만이 사업의 성공만을 가치있게 만든다. -73쪽

전지구적 책임감의 새로운 기풍은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공익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dispositif)- '도구적 이성', '기술적 착취', '개인주의적 탐욕', 혹은 그밖의 무엇으로 불리든 - 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분리되어, 이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는 손상되지 않게 놓아둔 채 어떤 새로운, 더욱 '정신적인'관점에 의해 (73) 극복되어야 할(그리고 극복될 수 있는) 하나의 자율적 삶 혹은 '실존적 태도'로 이해된다.-73,74쪽

체제 자체에 내재한 (팽창의)강박은 사적인 심리 성향,개인적 죄의 문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자본의 자기추진적 순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삶의 궁극적 실재(Real)로서 존속한다-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초하는 가장 명백한 위험에 대해서조차 맹목이 되도록 만들면서 우리 활동을 통제하는 주체이기에 규정상 통제될 수 없는 어떤 짐승으로서.이는 하나의 거대한 물신적 부정이다- '나는 내가 자초하는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궁극적 붕괴의 불가(77)피성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붕괴를 조금 더 연기할 수 있고,조금 더 위험을 무릅쓸 수 있고,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이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는 하층계급의 '비합리성'과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 자기맹목화의 '비합리성'이며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77,78쪽

주체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은 '나의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 교수 등등으로서)공적 생활에서 떠안고 있는 상징적 결정들과 책임들에 대비되는 나의 '진정한 존재'다. 이에 관한 정신분석학의 첫번째 교훈은 이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은 근본적으로 가짜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막, 혹은 거짓 간격인데 그 기능은 말하자면 체면을 유지하는 것, 나의 진정한 사회적-상징적 정체성을 감지 가능한(나의 상상적 나르시시즘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을 실천하는 방식 중 하나는 그러므로 '내면생활'과 그 '진실한' 감정의 이 위선을 까발리는 전략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83쪽

소비의 차원에서 이 새로운 정신은 소위 '문화적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상품의 유용성 때문에, 또는 지위의 상징으로서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이 제공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 그것을 구매하며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소비한다. -109쪽

오늘날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펼치는 경관은 이처럼 물신주의의 두가지 양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것은 냉소적인 것과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두 경우 모두 '합리적'이며 논쟁적인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물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면서 논증을 무시하는(혹은 적어도 불신하는)반면 냉소주의자는 논증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그 상징적 효율성은 무시한다. -140쪽

자본주의의 경우가 그러한데,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기혁명화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한계의 끊임없는 극복을 통해서만 자신을 재(252)생산할 수 있다. -252,253쪽

이제 우리는 더이상 "몫이 없는 부분"의 입장에서 질서를 전복하는 게임을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질서가 이미 자기 자신의 영구전복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완전한 전개와 더불어,끊임없는 역전,위기,재발명을 동반하며 어떤 면에서 '축제화'된 것은 바로 '정상적'삶 자체이며,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예외로 보이는 것은 '안(254)정된 윤리적 입장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다.-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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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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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진보단체와 지식인에게 수없이 들어온 '신자유주의 반대', '성찰'과 '연대' 등의 사회과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말들이 나에게는 마치 방언처럼 들렸다. 사회과학적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내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삶의 총체적 진보는 아닌 듯 했다. 제도와 정책은 진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삶의 내용과 생활문화는 한참 후진 듯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장은 옳을지 몰라도 내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과 사람의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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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3-1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1년 3월 10일은 고대 교정에 <김예슬 선언>이 나온 지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선언은 참 '잔인하게' 잊혀져 갔네요.

Arch 2011-03-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기호 책에서 김예슬 선언에 대해 나왔어요. 보셨죠?
책을 보니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느낌이랑 냉소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보였어요. 그렇다고 김예슬씨가 섣부르게 행동했다거나 잊혀질만하다는건 아니지만.

저도 직장을 다니면서 이게 아닌건 알겠는데 구조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얼그레이효과 2011-03-13 15:55   좋아요 0 | URL
저도 확 땡기는 그런 '전략'은 사실 없어요..다만. 대학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이 갖는 '분노의 힘'들이라고 할까.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직, '대학의 위기'는 더 말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위기들은 상당히 표면적이라고 생각되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김예슬 선언은 대학의 위기보다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의 위기를 깨우치게 해 준 '사건'이 아니었나, 1년을 정리하게 되네요. 분발해야죠 뭐^^
 
대학의 몰락
서보명 지음 / 동연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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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하다. 대학은 신(8)학과 철학이 부여하는 이상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그 이상은 한 시대, 그 문화권의 선을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체제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생산과 소비와 경쟁이라는 이념을 따라 대학이 움직이기를 요구한다.(중략)대학의 학문과 제도를 기업자본주의의 생산과 판매의 모델로 이해하는 것은, 오래된 대학의 자의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은 필수적이다.-8,9쪽

대학을 개혁할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앞세우기 이전에, 과거의 대학이란 어떤 곳이었고,현재의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 질문을 과거에는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논의했다면, 과연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본질과 사명은 무엇인지 물어야만 한다.이를 위해 대학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논쟁과 이론과 역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9쪽

대학의 사명과 본질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란 조건하에 가능하다. 정신적 간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거리는, 중세 때에는 신학이라는 형이상학으로 가능했고, 근대의 대학에서는 순수한 과학과 문화라는 이념으로 가능했다. 현실의 역사에서 폐해도 많았던 대학이었지만, 정신적 이상을 추구하는 공간이라는 이해를 빼면 대학의 자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27쪽

이미 많은 대학이 기업화되어버린 상황에서 대학이 기업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기업이 곧 국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으로 등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비판적 배움의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 서구 사회에서는 이상적으로나마 그 역할을 교회에서 감당했다. 교회가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세속 사회에서, 대학이 그 기능을 해온 면이 있었(42)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할뿐더러, 대학의 그런 이상적 가치가 부정되는 시대이다. 대학의 위기나 대학의 몰락을 언급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2,43쪽

미국에서도 인문학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을 리서치란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술적인 사고와 증명과 증거를 바탕으로 새것을 추구하는 리서치는 인문학의 고유한 양식이라 할 수 없다. 인문학 공부를 나타내는 말로 '학문'이라는 옛 표현이 영어로는 'scholarship'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 Professor(교수)와 Professional(전문인)의 임무는 profess(공언, 고백)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51쪽

인문학에서 professor의 원래적인 의미는 지식의 창출이나 기술적 능력과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고백적 증언은 게산으로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또 그 진리를 명확한 증거로 구분할 수 없다. 신뢰라는 뜻의 trust는 옳다는 뜻의 true와 어원이 동일하다. professor가 researcher로 이해될 때, 인문학은 형식에 매이게 된다. 각주를 제대로 달고, 인용을 어떻게 하느냐가 인문학의 기초가 되고 trust와 true의 기준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표절 plagiarism이란 최악의 죄를 범하게 된다. -51쪽

근대 대학의 모든 새로운 변화를 담아냈던 표현은 '자유'였다. 이 자유는 양심의 자유 곧 인간의 자유였다. 중세 대학이 '신의 자유'를 사고와 세계의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대학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그 중심이 되고, 모든 당위성을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가 된다. 종교개혁 시대의 양심의 자유가 18세기에는 '생각의 자유'로 등장해 대학의 신조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 의미까지도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88쪽

칸트는 신학, 법학, 의학의 상위 학부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대학을 상상했다. 더 나아가 철학이 신학이나 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이성의 지배만 받는 자유로운 학문이기 때문에 이성의 이름으로 상위 학부를 견제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 이유는 철학의 중심은 모든 배움의 조건인 진리이지만, 상위 학부의 가르침은 국가 차원의 실용성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92-중략)철학은 상위 학부의 가르침이나 연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통해 대학을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철학은 이성의 관심을 지키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유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자유가 보장될 때 국가까지도 이성이 지배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92,93쪽

칸트는 당시 대학 내부의 학문을 두 가지로 분리했다. 통제가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과 절대 자유를 필요로 하는 비실용적이고 사색적인 학문이다. 그 구분은 당시 전문화(Professionalization)되어 가는 대학을 자유로운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그 결과는 칸트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과학이 철학의 한 부분으로 남게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실용적인 학문으로 철학에서 분리되었다.또 철학을 인간의 본성을 가다듬는 학문으로 여겼지만, 철학 자체도 전문화되어, 대학과 제도에 구속된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95쪽

베를린 대학은 독일 역사의 큰 위기 상황에서 출발했다. 1806년 프러시아는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정신적 공황기를 맞았다. 1807년 평화조약을 맺은 이후 프러시아는 계몽과 근대를 지향하면서 사회 모든 분야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 이유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정신적 가치를 책임질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1810년 베를린 대학의 설립은 이런 상황에서 가능했고, 곧 프러시아의 으뜸가는 대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근대 리서치 대학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대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99쪽

베를린 대학은 기존 대학의 제도와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했(99)다. 대학이 아직도 중세 대학의 종교적인 진부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중략) 베를린 대학은 이런 민족 문화를 살리고 학문을 꽃피우는 시대적 요구를 안고 태어났다. 이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등장한 개념이 과학적 연구(Research)였고, 이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대학이 국가를 섬기는 방법이 되었다. 그 후 대학은 지성과 지적인 행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헤겔은 '대학이 곧 우리의 교회'라는 의미 깊은 주장까지 펼친다. -99,100쪽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은 어떻게 되었는가. 물론 신학부가 없어지진 않았다. 피히테는 신학이 리서치 대학에서 존재하려면 교회나 계시의 전통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다른 종교로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학이나 종교의 가르침은 이미 인간의 양삼에 녹아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103쪽

베를린 대학의 신학부를 책임졌던 슐라이어마허 역시도 대학 내에서의 신학이 과학적 학문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신학이 시대를 읽고 변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 틀을 제공해준 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당위성과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103)했지만, 대학 내의 신학이 합리적인 학문성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그 이후 독일 대학에서 과학성을 추구하던 신학은 고등비평과 역사비평 등을 발전시키면서 대학 내 신학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나갔다. 종교의 과학을 추구한 종교학이 나온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바탕이 되었다.-103,104쪽

19세기 중반 이후 현대까지 미국 대학의 발전사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기업 운영(business)을 다루는 경영학이 대학에 등장한 것이다. 경영학부도 19세기 말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고, 그 합법성을 의심받던 기업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측면 때문에, 경영대학은 초기에 기존 인문학 교수들에게 견제도 많이 받았다.-111쪽

교육의 목적을 인적 자원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교육을 응용과학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이념적인 배경에서 나온 발상이다. 인간을 자본주의 생산의 한 요소로 보고, 교육을 그 자원을 만드는 과정으로 판단하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은 글로벌 자본주의 이념이 승리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124)그와 더불어 지식과 교육에 대한 공학적인 인식도 늘고 있다. 오차 없는 계산을 통해,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공학의 방법으로 생산해내고자 하는 것은 예측과 측정이 가능한 인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험 걱정을 해야 하는 인간, 스스로를 경영의 대상이라 믿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124,125쪽

한국 대학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학 모델은 해방 후 미군정 체제하에서 도입된 미국의 주립대학 모델이다.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에 대학으로 인가를 받지 못했던 학교들이 군정기에 정식 대학으로 인정을 받았다. 대학이란 고등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해결해주는 차원도 있었고, 미국식 고등교육의 보편화를 제도화하는 것이기도 했다.(중략) 미국의 주립대학 모델이 이식되는 과정은 한국의 대학이 학문의 백화점으로 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식의 학문화, 학문의 분업화가 대학을 단과대학 위주로 편제한 것에서 이 점은 드러난다. -150쪽

현재 한국에서는 한국의 대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보다 현대 서구 자본주의의 대학론을 시대의 개혁적인 흐름으로 수용하는 타율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대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보다 공리적이고 기술적인 담론만 성행한다. 그 관점에서 볼 때 대학은 문제일 수밖에 없고, 그 존재 이유까지도 의심받게 된다. -154쪽

중세 스콜라 신학이 대학 내에서 신학의 위상을 높게 세워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신학은 이미 분열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신학이 합리적인 분석으로 흘러, 대학 이전 세대의 신학 곧 수도원 신삭의 기도와 묵상과 실천의 전통을 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의 우선권을 설파했지만, 철학과 의학과 법학이 신학적 사고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신학이 학문의 연결성과 통합성을 연구하는 학문(243)적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 철학은 사변적인 학문으로 의학은 영혼과 분리된 몸만 다루는 기술로, 법학은 왕권을 유지하는 세속법의 영역으로 발전해나갔다. -243,244쪽

이런 학문의 세분화 내지는 분열화의 과정은 현재까지 진행중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대학은 독립적인 학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학과는 내적인 방법론과 독특한 주체와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 섭렵하고 다른 학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인정받는 학자가 될 수 있다. 오히려 세분화된 영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을 학문적이라고 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기독교 대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신학이나 종교적 가치가 어떻게 다양한 학문을 연결시키고, 어떻게 한 학문이 전체적인 가치의 부분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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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3-1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아니라, 부탁받은 서평을 위해 접어놓은 구절을 옮겨놓은 것.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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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최상의 해결어로 떠오른 한국 사회에서, 그것을 극복할 인간-언어에 대한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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