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입과 먹는 입 -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What's Up 5
김항 지음 / 새물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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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야말로, 책을 그냥 '스쳐 보는' 느낌을 가장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이 1페이지부터 300페이지까지 있다고 합시다. 120페이지가 다다르도록 스쳐보는 느낌에서 나오는 그 어떤 찝찝함. 하지만 뭔가 읽었다고 티는 내고 싶은 체면. 찝찝합은 책을 1페이지부터 다시 읽으라고 하고, 체면은 그냥 지금 이 태도로 책을 대하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이 두 요인 중 어떤 것이 승자가 될 줄 압니다. 김 항의 본 책을 '체면'으로 읽는다면, 당신은 그 어떤 것 하나 이 책에서 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체면은 이 책이 만들어놓은 사유의 운동장 속에서 거침 없이 뛰어 노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만 보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매만지고 싶은 것을 뛰어 넘어, 책 속 사유의 운동장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싶은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더럽힐 준비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맑스의 독서법이 그랬다고 하지요 아마) 빨간펜을 준비하고, 책의 '도그지어'를 많이 만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책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놀랍게도 이 놀라운 책은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듯합니다. 제가 추천한다고 해서, 이 책의 진가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것은 저 스스로에게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오만입니다. 저는 이 책에 나오는 벤야민, 슈미트, 데리다, 훗설, 헤겔, 하이데거, 아감벤,푸코, 가라타니 등등 그 어느 한 사람의 이론도 확실하게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으로 말미암은 고백은 이 리뷰가 다시 이 책을 읽기 위한 작은 다짐이라는 것을 의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짐은 어쩌면 '모자람'의 인정으로 출발하는 것이요, 그 인정을 통해 생긴 여백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지적 여정의 진정성이자, 지적 대가들을 접할 때 느끼는 질투 어린 존경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뛰어들어갈 수도 없지만, 그래도 체면이 아닌, 찝찝함을 선택한 후에 대면한 이 책에 대한 사유를 조금 말해볼 차례입니다. 아쉽게도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없는 제 지성의 단계로 인하여, 이 사유는 인상 비평에 머물 수도 있고, 약간의 어설픈 태도로 중점들을 제시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결국 좀 과감하게 말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유의 경계라는 판 자체를 뒤엎어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에서 줄곧 강조했던 표현이었으며, 푸코 또한 '한계경험'이란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조금은 시시한 제 과감한 요약을 감수한다면, 이 책에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사이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호모 사케르]에서 체험했던 한 측면. 경계 자체에 의해 구분되어진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는' 한 기준. 그 기준을 향한 사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 속에서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 기준이란 말을 '경계'라는 개념으로 바꿨을 때, 경계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준을, 그 경계를 의심하는 것이 낯섭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심하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또 철학의 자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는 당연한 차원일 것입니다. 여기서 김 항의 사유에 대한 고유성은 '주권'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으로 인하여 관계되는 인간, 그 인간과 연결된 국가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이 책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김항은 국가라는 존재에 조건지어진 인간을 사유하며, 홉스에서 출발하는 국가와 인간의 계약론,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주권'의 의미에 대하여 물음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 기나긴 사유의 전쟁은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통한 '예외상태'와 '결정'을 묻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호모 사케르]에서 복습한 예외상태의 중요한 지점. 누가 법이며, 그 누가 법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 질문에서 우리가 당연한 한 이로 인정하는 주권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법 안과 밖을 넘나드는 '결정자'. 그 유명한 아감벤의 '포함하는 배제'라는 관계를 실천하는 주권자. 정치 철학의 사유로서, 김 항은 그 결정자와 예외상태에 대한 측면을 강조합니다.  

4. 조에와 비오스라는 삶의 형태들.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경계에 의해 '버려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벌거벗은 이들, 벌거벗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의 존재는 정치 자체에 대한 '안온한 공포'를 체감하게 합니다. 여기서 제가 '안온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공포의 존재가 사유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투명한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버려지는 삶을 외면하려고 발버둥치는 지금, 오히려 이 사유는 '고발적'이며, '폭로적'입니다. 다만, 김 항은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그 이론이 갖고 있는 힘의 항구성을 위해, '기계적인 삽입'을 경계하라고 주문하는 듯 합니다. '호모 사케르'를 이 비루한 인생사의 풍경들에 대입하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호모 사케르가 추상화된 이론으로서 갖는 폭발적인 감정을 체감하는 것이 아닌, 난삽하고 성급한 지적 삽입을 통해 예상치 못한 조루를 체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 김 항의 이 사유의 전쟁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이 지나치게 '수사적'이며, 그 반지성주의자들의 어설픈 모토인 '현학적'이라서가 아니라, 이 책에 수놓아진 수많은 이론들의 '휘발'/ '증발'을 막기 위한 김 항 스스로의 전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저는 이런 전략이라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이 책을 통해 가장 쉽게 찾아오는 유혹. 책을 통해 상상되는 여러 장면들은 사실 우리 스스로의 상상력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을 한 번 더 읽을때 떠오르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 그 광경들이 아마 이 책이 요구하는 사유의 끝자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5. 우리 시대의 정치를 존재케하는 말하는 입들이 삶의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그 연명 마저 권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먹는 입들의 존재를 '포함하는 배제'로 작동시킬 때, '입들'을 가진 이 인간/동물. 그 /의 존재에서 늘 왔다갔다하는 우리 시대의 정치란, 어쩌면 참 빈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정치'에 대한 사유에서 우리는 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를 훈련받아 왔고, 제안받아 오면서도, 그 훈련과 제안에서 '현실'이란 시간에 지나치게 억눌려, 서로의 사유에 상처를 줄 때 쯤, 그 상처가 빚어내는 언어의 지점들은, 우리를 세상의 늑대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늑대인 나, 늑대인 나를 벗어나고 싶은 나를 다 챙기면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뱉어냈던 역사를 반성의 시간에서, 회복의 시간에서, 치유의 시간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은 '상식인'의 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식인이 사회가 허용하는 '상식'에만 머무른다면, 그 상식의 힘은 미진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 책이 몰아붙이는 상식은 결국, '변혁을 갈망하는 / 요구하는 상식'으로서, 우리는 그 상식을 '비-상식'이 아니라, 상식의 새로운 판으로 사유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에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불가능성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에서, 우리는 충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동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6. 마지막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김항의 몸부림에서 이른바 '센서'라는 개념을 통해 문학이 가졌던 열망, 실제로 확보했었다고 믿었던 사회와의 책임 혹은 신뢰 관계에 대해, 저는 김 항이 고진을 일갈하는 것에 희망을 봅니다. 이 일갈은 단순히 '종언'이라는 말에 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종언의 맞대응이 아니라, 종언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힘을 들여 사유하려는 그의 노력에 대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접촉한다는 것을 포괄하는 감각한다는 것의 이 의미에서, 문학이 가진 새로운 정치성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저자처럼 했습니다. 

7. 광주의 에티카 부분은 아마도 전진성 교수가 줄곧 강조하는 기억의 문제, 기념의 문제, 추모의 문제, 미화의 문제 차원과 함께 사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이 대목은 따로 글을 써보고 싶군요. 

이 책은 닳고 닳아야 하는 운명에 속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학과 서양의 이론 수입이라는 그 헛물 켠 비판의 시선을  뛰어넘는 것은, 이 책 자체가 가진 집요함입니다. 어쩌면 이 집요함은 사유와 사유를 맞붙히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겠지만, 이 마스터베이션은 순전한 자기 만족이 아닌, 타인과의 소통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족'은 이 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책을 위해 또 다른 책을 쌓아두고 보게 하는 이 책의 존재에 대해 계속 '보물찾기'를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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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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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자마자 주문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야' 리뷰를 씁니다. 책이 나올 당시, 미리 기대를 한 사람들의 반응들을 종종 체감할 수 있었고, 지하철 익명의 젊은이들 손에, 학교 동료들 손에 이 책의 커버가 보일때마다, 얼른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정작 그러진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니 책에 가졌던 주변 이들의 감흥들과 '글-흔적'들이 하나의 '소-역사'가 된 듯합니다. 저자로서의 유시민이 군데군데 얽어 놓은 현 정치의 '꼴'에 대한 판단을 훑어 보면, 상당히 오랜 고난의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어찌보면 참 많이 남았다는 요상한 아쉬움의 한탄도 해 보게 됩니다. 뭐가 많이 남았는지는, 아마 우리 모두가 침묵 속에 공감할 그 어떤 나쁜 공기들의 흐름이겠지요. 하지만우리는 '기다림의 역사'에 모든 것을 맡긴 채, 그 '기다림의 철학', 알튀세르가 말한 '상식의 철학'에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철학은 철학 자체에 대한 의혹을 그 존재의 이유로 삼듯, 우리는 상식의 철학을 뛰어 넘은, '대철학'(알튀세르가 말한 대철학과는 다른 뜻으로)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대철학'의 길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읊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인간 주체의 의지와 양심, 그리고 세계에 대한 도덕의 열망을 이성적으로 믿었던 칸트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진리 자체를 의심했었던, 그렇기때문에 자신에게 하나의 얼굴만을 강요하는 이들을 비판했었던 푸코에게 그 길을 물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치철학이라는 세계 안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는 지식인들을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 정치철학은 민주주의를 되묻게 되었습니다. 특히  '7-80년대'라는 신화의 시대를 건너온 많은 이들이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작용과 부작용을 알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숙제에 놓였다는 진단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민주주의'를 꿈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는 민주화 자체가 아닌,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 등 다양한 꼴의 민주화가 갖는 의미들을 찾고 해석하는 작업을 자연스럽게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무엇보다 '현실정치'가 갖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법'을 사회학적 관점에 다룬 몇몇 책들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법은 그동안 법의 만들어짐 속에서 그 결과물을 두고, 해석의 싸움을 구경하는 차원으로 우리에게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정작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법안이 나왔다. 법안이 나옴으로 골치아픈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등 언론의 간략한 메모지만, 그 메모에 담긴 풍경들을 보면서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것이 적용되는 과정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권력관계의 심층적 의문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둘러싼 '전문적이다'라는 어떤 이미지의 강박은 그것을 더 강조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법은 우리에게 '지켜야되는 어떤 것'으로 자리잡지요. 우리는 법의 이면에 대해 뭔가 심정적으로 파헤치고 싶은 게 있지만, 섣불리하진 못합니다. 주로 우리는 법에 대한 '지킴이'이라는 위치에 머무르고 맙니다. 그러나, [헌법의 풍경], [불멸의 신성가족]의 김두식이나 [부러진 화살]의 서형이 보여준 결실은 법을 둘러싼 어둠의 심연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곧 '지킴이'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 소시민들에게,  '법-물음이'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법-물음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뉴스에서, 신문에서 봤던 그 법의 탄생에 개입된 무수한 권력의 입들을 외면이 아닌 직시의 자세로 보게 될 것입니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는 '법-물음이'로서 저자가 갖는 우리 시대 최상위의 법인 '헌법'에 대한 사유와 그 '헌법'에 기초한 사회의 이상을 이성적으로 기술해보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따라가다보면, 법이라는 것이 내세우는 논리성에서 비논리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비논리성이 갖는 권력의 오류와 횡포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것들을 현실 정치 안에서 직접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 그리고 그 상황들에 대한 성찰로 인해, 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괴물'이 되었음을, 이 '괴물'은 그 무엇보다 권력을 그릇된 길로 욕망하는 자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법이란 우리의 삶을 참조하는 언어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헌법은 결국 우리의 삶과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08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그리고 권력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내 신체의 고백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고백과 별개로,  오랜 학업 과정을 통해서 배운 중요한 법의 기본 내용들마저도, 그것을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순간에는, 참 멀게 느껴진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머리속에서 알고 있는 그 쉬운 말들도, 사실 얼마나 지켜지지 어려운 것인가를, 그리고 그 참 투명하고 딱 부러지는 구절들, 너무 명확해서 더 이상의 반박도 필요없을 것 같은 구절들이 막상 현실의 가장 불투명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 분명 양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듣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소리가 오늘의 현실 정치가 갖는 비양심적인 꼴의 상황들과 맞닥뜨릴 때, 우리는 우리 사회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의 위치에 도달했는가를 묻게 됩니다. 유시민은 여기서 '후불제'라는 '책임'의 언어를, 성찰의 수사를 제시합니다. 그냥 민주주의가 아닌, '후불제'라는 조건의 민주주의 말이죠. 후불제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책임을 통감하게 되고,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다 보면, 우리는 그 책임의 알 수 없는 연원을 따라가며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사를 통한 시간의 이해, 현재 우리의 위치를 다시 짚어보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이 '이해'를 살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참 우습지요. 이해와 살핀다라는 말이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시민은 학자에서 정치가로, 그리고 행정가로 다시 지식소매상이라는 야인의 위치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그 규정된 위치에서 늘 유념했던 정치적 상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상이 현실과 타협했던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이해라는 말 자체를 통해, 저는 현실의 정치와 이상의 정치, 그리고 당위적인 것과 당위를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의 이해를 묵직하게 사유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시민의 말과 글, 그 언행 속에서 때론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았고, 그 자신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들은 그 상황을 알고 있고, 또 지금 어느 한 구석에서는, 그가 이 책에서 두껍게 기술한 그 여정을 다시 한 번 걷기를 희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그가 '상식인'의 입장에서, '상식적'인 언변을 꾸준히 제시할 수 있는 이로 남았으면 합니다. 고로 이 책에 담긴 지극히 '상식적'인 시선은 어쩌면 이 책이 갖고 있는 시선의 평이함으로 제한하여 해석하기보다는, 유시민 자신이 우리 사회와 맞닿을 수 있는 하나의 '소통-선'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딱 이 정도의 훈훈함, 딱 이 정도의 일갈로 이 민주주의의 꼴을 넓게 사유할 수 있는 그가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 스스로 '신용있는 인간'임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이기를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야말로 후불제를 허락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리이자,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를 위한 기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스 베버는 공준이라는 개념을 통해, 법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공준을 토대로, 그 지킴의 의미에서 물음의 의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헌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 예외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는 자에게 그람시가 말한 철학자로서의 시민은 당신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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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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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고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를 불태워버릴만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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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소통법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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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이란 단어를 넌지시 쳐다보고 있으면, 이것은 어떤 '요구'를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것 같다. 소통이 너무 잘 되어서 '소통'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너무 안 되기 때문에,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상황 혹은 요구하는 시간. 그렇다. 소통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갈급한 무엇이었다. 그것은 넘치지 않았으며, 그렇기때문에 늘 결핍의 무엇으로 자리잡은 채,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은 실천의 단어였으며, 현실의 단어였다. 워낙 '이상적'인 단어의 지위에 올랐기때문에,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만큼이나,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는 자아가 있는 스스로에게 '소통'이란 것을 어느 한 구석에 놓아둔다.  

긴 상황 혹은 맥락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요즘만큼 '소통'이란 단어가 불편한 적은 없을 듯하다. 그 분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이건 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이 그리고 이 책뿐만 아니라, 강준만이 여러 책에서도 늘 강조하는 '진영'을 넘어선 이상적 가치. 그것을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제대로 실천하기가 어렵다. 강준만의 책을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그가 얼마나 '뭉쳐 있음'을 싫어하는지 알 것이다. 이 '뭉쳐 있음'은 물론 연대와는 다르다. 연대는 '뭉쳐 있음'이 아닌, '묶여 있음'이며, 그 '묶여 있음'은 언제든지 풀릴 수 있는 '느슨한 자율성'을 기본 조건으로 갖는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자면, 우리는 '진영을 위한 소통'이 아닌, '진리를 위한 소통'을 해야 한다. 이 소통의 방식은 역사를 통해 줄곧 강조되었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늘 이것을 주문하지만, 사실 이러한 주문이 매번 빗나가는 것은, 현실정치에 대한 지나친 환멸로 자기 위안을 삼으려는 대중들의 문제 때문이기도하다.   

보론에서 강준만이 넌지시 내비치지만, 고인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 인한 어떤 원한의 심정들이 그 자체로만 그쳐버린다면, 그 죽음을 통해 진정 우리가 그를 애도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한 현실 정치에 대한 망각 차원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를 망각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한 노력을 더 이상 (이택광의 표현을 빌려)' 먹고사니즘'의 가치에서만 판별할 수는 없다.  

소통이 왜 지금 불편한 심경으로 다가온 단어가 되었는가. 그것은 소통이 주는 이상적 색채가 우리들의 뇌리에서 떠나가고, '소통'이란 단어를 에워싼 그 수많은 '허언'들에게 우리 스스로가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통한다는  것에서 소통의 비극을 먼저 상상하게 된 우리들의 내면은 이미 '정치의 불통화'를 예상하고 목도하며, 또, 더 나아가 '불통의 정치학'이라는 안타까운 광경으로 채워져있다는 점. 그것을 우린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불통의 정치학은 즉, 소통에 대한 냉소로 다가온, '탈정치적' 방식일 수 있다. 내가 참여하고 개입해야 할 정치적 사건, 정치적 현상에 대해 '통하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최후의 보루이자, 일종의 '참여'라고 자족하는 상태 또한 우리는 머나먼 나라의 일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강준만은 이 책을 통해 '집단과 진영'의 '뭉쳐있음'을 깨고, '지위재'의 오만한 불통을 고치며, 더 나아가 '급진적 보수', '보수적 급진'이라는 중간파의 태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한다. 강준만의 책이 그렇듯, 이 책은 강준만이 늘 강조해왔던 주제들의 '동어반복'일 수 있다. 많이 낯익고, 자주 겹친다. 이것은 과연 그의 멈추어 있음인가. 아니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의 예전 주장의 한 톨이라도 바뀌지 않았기때문에, 그가 하는 지금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그의 지적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소통의 열정은 왠지 처음부터 점검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강준만의 책 중에서 가장 '윤리적'인 저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이 어르신의 일관된 비평적 시선에서 어느덧 '한 원로의 비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을 정도의 어떤 준엄함도 느껴진다. 그가 내 청소년기에 주던 '짜릿한 자극'의 소통도 이제 조금 둔감하게 느껴지는 것 보니, 내가 이 '자극적인 사회'와 잘 소통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강준만의 글-세계와 잘 소통하고 있는 건지. 애매하다. 그 애매함의 여백때문에 소통은 또 '요구된다'. 뭔가 초심을 잃었을 때, 가장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무엇이 잘 안 잡힐때, 마음의 사전처럼 복기하면서 읽으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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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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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무엇보다 '시간적'이다. 그것은 '오지 않은 / 보이지 않는 / 없는 '미래를 '오는 / 보이는 / 있는' 미래로 당기기위한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담긴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이 말은 '신성한 시간'으로 다뤄져야 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신성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좀 솔직히 말하자면, '우생학적 기준'이라는 것은 '혁명'이란 단어 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의 신화는 그런 '우생학적 기준'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 애씀 가운데 가려진 상처입은 자들은 결국 '혁명이라는 것을 함께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되곤 했다. [오빠는 필요없다] 같은 책에서 지적하는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남자들이 행하던 폭력성. "나는 혁명을 하기 때문에, (여자인) 너는 시다바리만 하면 돼"라는 습성은 민주화라는 거대한 상징에 가려진 우리들이 안고 온 상처였다. 쉽게 질문하자. 혁명을 한다는 것에도 '자격'을 따져야 하는가? 혁명은 과연 '공공적'인가? 87% 이상이 '대학물'을 먹었다는 이 한국 사회 내에서, '배운 남자', '배운 여자'들은 이 무슨 당연한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을 하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실은 '혁명'도 자격있는 자들만 할 수 있다는 무의식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자격'은 자연스레 포함과 배제라는 경계의 선으로 작용한다. 그런 측면에서 20대들은 정말 뭘까? 요즘 그렇게나 유행한다던 아감벤적인 표현으로 그들은 '호모 사케르'적인 위치에까지 간 것일까? 사실 이 질문 너무나 많이 나왔고,  그래서 피곤하다. 너무나 많은 옹호와 반론글들이 쏟아졌다. 그 속에서 늘 다루어져왔던, 뱉어져 왔던 '검색어'는 [88만원세대']였다.  

우 선생에게 죄송한 표현이지만, 우 선생은 이 책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우 선생이 '스타'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던 20대들은 그렇지 못했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20대들은 [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 나오는 외국인물 재연 배우의 위치를 얻었다고나 할까. 20대들은 이 책 이후 끊임없이 '재연'되어야했다. 어쩌지도 못하는 배우들, 그냥 슬픈 삶을 사는 배우들,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는 배우들. 사회는 우리에게 '20대'역할에 너 정말 딱 어울리겠네, 너 20대 연기해. 나이도 정말 20대니 좋고, 이거 뭐 '리얼리티 프로 컨셉'으로 딱인데라는 지적에 딱 들어맞는 배우들. 이 배우가 진짜 배우와 틀린 것이 있다면, 대본 속에 자신들의 진짜- 삶이 들어있다는 것. 그렇지만, 이 책 이후 나타나게 된 어떤 '슬픈 현실'에 귀속되어, 그 현실 그대로 살아가야만 할 것 같은 암울함. 거기에 정말 그 암울함 그대로 나타나는 현재의 시간들에 대해 '항변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배우들의 삶. 그것이 지금도 자신들만의 '인간극장'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20대들의 삶이 아닐까. (아니 사실 우리 모두의 삶도 그렇겠지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는 좀 걱정이 앞섰다. 이 책에서 '혁명'이란 단어보다는 '우석훈'이라는 이름이 더 '소비'될 형국이 걱정된 것이다. (본 저서에도 우석훈 선생 나름대로의 성찰이 나오지만) 우석훈 선생의 [88만원세대]론은 사실 진정한 혁명적 기운을 생산하는 텍스트라기보다는, 그가 다루고 있는 20대들이 선망하는 '성공학의 텍스트'로 더 인기를 얻을 것 같다는 우려가 더 크다. 우석훈처럼 살아보자구. 공부도 하고, 책도 내고, 명망도 얻고, 좋잖아!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그리고 그 지식인을 '소비'하는 나를 포함한 대중들의 위치를 볼 때, 지식인들의 텍스트를 다루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텍스트보다 늘 지식인의 이름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름값 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이것을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 선생이 잘 사용하는 표현처럼, '구조'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우석훈 선생이나 진중권 선생의 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나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건 비단 지적 독보와 우월감의 확보 차원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냥 '구경꾼의 시선'으로 '스타'보듯이 치뤄지는 냄새라고 할까. (내가 속한 대학원내에도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진 선생의 강의는 '미학자'진중권에게 한 수 배워 보자 혹은 '미학'을 진중권을 통해 두텁게 사유하자가 아니라, 명망있는 '진중권'을 보기 위한 이들의 엄청난 수강신청으로 귀결된 듯 보였다. 좀처럼 듣지 않아  간당간당했던 그 과목의 과거를 추억하면)그래서인지, '사실 자신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는 대답'인데도, 괜히 '명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질문들, 당연한 질문들을 해대며, 그 명사들에게 '귀여움'을 '주목을' 받고 싶은 주변인들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리고 지식인들과의 술자리. 이후 나오는 대화들. '나 이렇게 성공한 지식인들 잘 알아' '우와 나도 좀 소개 시켜줘'에서 끝. 내가 너무나 '영악한' 해석을 한 것일까.  우석훈은, 진중권은, 김현진은, 한윤형은, 노정태는, 허지웅은, 이택광은 그렇게 '소비'되고 있었다. '이름값 효과' 가 더 좋은 미래를 위한 초석인지 혹은 이 책에서 꾸준히 언급하는 영악한 20대들의 '자기계발 전략'으로 소구될 것인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후자가 된다면 난 참 암울할 것 같다.  

일상의 심미화가 그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오늘날, 글 좀 쓰고 공부도 좀 한다는 20대 친구들이 '비평가'라는 직업을 선망하는 현실(인터넷에서 그렇게나 볼 품 없는 직업으로 까이는)을 볼 때, 조금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들에게 '혁명'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었다. 어떤 새로운 현상이 나오면, 참 이론들을 잘 적용하고, 그 현상에 대한 지적은 잘 했다. 하지만, 그 현상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시간이 되면, 그들은 그것을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빼려고 했다. 비평을 하는 자신의 신체는 무엇보다 '깔끔한 신체'가 되어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망있는 비평가/ 지식인들의 '똘끼'였다. 뭔가 고리타분하지 않고, 나름 '간지나게' 사회를 통렬하게 '까는' 그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똘끼'를 '간지'나는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이기. 그리고 자신은 지금 당장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체험할 수 없으니, 대리적으로 만족하려는 습성들. 그래서 그들은 지식인들이 내놓는 '진보적 창조력', '진보적 상상력'을 생활 속으로 실천해야 할 그리고 함께 토의해봐야 할 텍스트로 간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성공적 롤 모델'로 꼽기 위한 자격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래, 간지나는 우석훈, 너 정도라면 이 정도 상상력. 이 정도 똘끼나는 명랑함 추구해야지. 암. 그래야 내가 너 따라 배우지. 그리고 친구들과 수다떨 때, 너 흉내 좀 내고, 너 자랑 좀 하지." 

너무 암울한 해석이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암울함을 초래한 것은 이 책의 잘못이 아니다. 이 책은 이런 나의 우려를 더욱 건강한 진보적 상상력의 지속으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도그지어'가 될 것 같다. 나는 언젠가부터 '진보적 상상력'이란 말이 참 재수없게 느껴졌고,  그것을 참 잘 집어드시는 대기업들의 정책을 보면서, 더 큰 환멸을 느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실 건강한 희망을 얻었다는 헛된 확언보다는, 이 세상이 정말 이 정도로 씁쓸하다는 '극단의 회의'를 체감했다. 물론 그것은 미래를 껴안고 싶은 냉소주의의 전형적인 내숭이다. 이 책에 나오는 진을 짜는 방법, 그리고 20대들을 위한 권리 선언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사회의 '영악 지수'가 너무나 높지 않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뭔가 꿈틀거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나는 당장의 실리를 찾기 위한 책망은 하지 않으련다. 우 선생이 늘 사유하는 것처럼, 어디에서든 뭔가 움직이고, 뭔가 말하고 있고, 뭔가 울고 있다. '둔한 한국'이 아닌, '성난 한국'의 점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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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우석훈 박사의 한양대 강연회 이야기
    from 꿈먹는 하마가 되자! 2009-10-17 01:58 
    10월 14일의 늦은 오후, 한양대 사회과학대학 401호에서 우석훈 박사의 강연회가 있었다. 강연회가 있었던 곳에선 비교적 젋은 학생들이 많았으며, 20대 직장인, 40대 정도 되는 분도 참석했다. 본래 7시 30분에 강연회를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강연자의 교통사정으로 8시부터 시작했다. 강연의 제목은 이었으며 최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의 "Cluster and Grouping"개념을 토대로 설명해갔다. (onsider님..
  2. 무장해제
    from Fly, Hendrix, Fly 2009-10-27 23:54 
    지금 나는 외피을 뒤집어 쓰고 있는 지 모르겠다. 쎈 사람 둘과 있다보니 종종 내가 쎄졌다는 생각들을 하곤 한다. 착각이다. 분명 그건 차이가 있다. 알라딘 블로그를 뒤지다가 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읽는다. (이름값 효과에 대한 단상 - 얼그레이효과) 나는 사실 이름값 효과를 누리고 있으면서 내 이름이 상승했다는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지도 모르겠다. 조한혜정과 우석훈. 그들의 주변에 있다고 그걸로 내가 그들이 되는 게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이다. 우..
 
 
활자유랑자 2009-10-14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얼그레이효과 2009-12-1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