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 평전 프로그래시브 에듀케이션 클래식 2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왜 이 책 제목을 듣고 김혜자 에세이집이라고 생각했을까?
왠 착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김혜자가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운동 하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연관을 시켰던 것 같다
간혹 착각은 우리를 황당하게 만든다

교사인 엄마 말에 따르면 요즘 교육계에서는 이 책 제목이 유행이라고 한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페레가 한 말인지 박홍규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체벌 논란이 한창인 요즘 정답을 주는 말 같다
체벌은 폭력 문화를 낳는다
인권이 발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될수록, 또 박홍규가 꿈꾸는 아나키즘적인 세상이 될수록 모든 종류의 폭력과 억압이 사라지리라 믿는다
체벌이 교육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아이를 어른이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에서도 읽은 말이지만, 나는 본성을 더 믿는 편이다
과연 교육의 효과가 얼마나 될까?
결국 근대의 교육이란 지배와 복종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학교는 규율을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고 근본적으로 국가와 사회, 모든 종류의 기득권과 권위에 복종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지식 전달의 창구로 작용한다
대안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간다

페레가 주장하는 교육이란 간단히 말해 주체성을 가지고 모든 권위에 저항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성 양성이다
지식 전달이나 사회화는 목표가 아니다
한국 교육계를 봐도 지식 전달은 학원에서 훨씬 잘 한다
사회화도 굳이 학교에서 체험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의미로 보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은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학연이라는 인맥을 위한 것 같기도 하다
나도 그랬지만 고등학교만 가면 수업 시간에 자고 학원에서 배운다
한국의 학교는 대학 진학을 위한 중간 거점 역할 밖에 못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목적에도 부합되지 못한다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3년 동안 배울 내용을 2년 만에 끝내고 고 3 때는 수업 시간에도 문제집만 푼다
음악, 미술, 체육 같은 예체능 과목은 아예 1학년 때 다 끝내 버린다
지금도 이런 기형적인 시스템으로 학교가 운영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은 학생들의 자율성이 많이 신장되고 어지간 하면 대학은 다 가니까 좀 바뀌었을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연예인이 선망 직종 1위에 오를 만큼 다양화 되었으니까

만약 내 아이라면 나는 어떤 학교로 보낼까?
대안 학교도 사실은 불안하다
주류에서 벗어난 시스템이 인정을 받으려면 주류보다 두 배는 더 훌륭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 정도로 효율적인 시스템이 쉽게 존재할까?
솔직히 페레의 교육 시스템도 신뢰감이 잘 안 간다
뭐, 지금까지 자유 학교가 유지되는 걸로 보면 지속성을 가질 정도로 견고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성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
페레는 완전히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교재도 그저 부수적인 역할 밖에 안 하고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교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교사는 학생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평등한 관계다
또 학부모와 지역 사회 역시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다
교사가 학생에게 전권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학생과 상의하면서 교육 방향을 결정한다
과연 10여 세의 어린이들에게 이것이 가능할까?

페레의 자유 학교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린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 때 목표는 지적인 인간 혹은 도덕적이거나 규범적인 모범생 양성이어서는 안 된다
상벌의 폐지는 당연한 얘기다
평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기 때문이다
페레처럼 자유 학교 시스템으로 아이를 교육시키면 정말 그 애가 완전히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의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 진정한 휴머니즘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이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유토피아는 불가능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살기 좋아질지 모른다

사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들이 살아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업 교육을 통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지식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필요한 사람만 배우는 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페레가 말하는 그 "자유로운 인간상" 인지도 모른다
미적분이 사는 데 얼마나 필요할까?
국어나 영어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페레는 과학 교육을 대단히 중시한다
과학은 과거의 무지와 교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합리적인 눈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 방식이다
그러므로 일반 학교에서 열심히 외우는 과학 이론의 나열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가르친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세상이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남아 있다
과연 이렇게 배운 아이들이 과연 경쟁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자유 학교 아이들이 기득권층에 편입할 수 있다면 이 학교는 곧 주류로 승격할 것이다
인간은 편견과 어리석음에 차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익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유 학교가 기득권 획득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당장 아이들들 이 곳으로 보낼 것이다
아무리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판단한다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획득에 실패한다면, 즉 생각없는 부자 대신 지각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은 대부분이 거부할 것이다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유 학교가 통할 수 있을까?
구조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자유 학교는 그저 꿈으로만 존재하든가, 아니면 소외 계층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다
자유 학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할까?

페레는 끔찍하게도 사형당하고 만다
바스크 민족에 대한 발포를 거부한 군사 반란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언도받는다
가히 스페인의 박정희 시대라 할 만 하다
체포 한 달 만에 사형당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그 전에 자유 학교 문제로 당국에 찍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전에도 모던 스쿨의 사서가 국왕 암살을 기도해 체포된 적이 있다
그 일로 모던 스쿨은 문을 닫는다
그렇지만 페레의 자유주의 교육은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 오늘날에도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다
특히 영국의 섬머 힐이 대표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교육의 다양화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대는 탈권위주의와 다원화로 대표되는 시대다
한 가지 방법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시대 정신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다양한 형식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저자 박홍규는 정말 대단하다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어쩜 이렇게 다양한 인문학적 관심을 유지하고 글을 쓰는지...
강준만 보다 한 수, 아니 몇 수 위다
글도 전체적으로 다 수준있다
자유주의 교육을 역설하는 자리에서 전교조 선생들에게 날린 한 마디
교사들의 인권을 주장하려면 학생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체벌도 폭력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참교육 운운하는 전교조 선생들도 아이들 통제하려면 체벌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단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위선과 착각이 인간의 본래 모습은 아닐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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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대하여
마이클 왈쩌 지음, 송재우 옮김 / 미토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관용이란 무엇인가?
흔히 중용의 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보다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개념이라는 느낌이 든다
제목을 그럴싸 하게 번역하지 않고 원저 그대로 딱딱하게 번역한 것부터 만만치 않은 책임을 보여준다
겨우 200페이지 짜리인데도 내용이 녹녹치 않다
강의록을 출간한 거라고 그런지 문체가 건조하고 어렵다
상당한 집중을 요한다
어제 졸면서 봤더니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약하면서 읽으니까 좀 낫다
역시 집중이 중요하다

홍세화 책에서 처음 들은 톨레랑스의 진짜 뜻을 알게 된 기분이다
그 때는 단순히 타인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태도 정도로만 알았는데 진정한 의미의 톨레랑스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적극적이고 심지어 전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야 단일 민족 국가로 오래 살아 와서 특별히 부각된 적이 없지만, 소수 민족이나 이민자 문제는 유럽에서 심각한 것 같다
당장 미국만 해도 전형적인 다민족 국가가 아닌가?
새뮤얼 헌팅턴은 이들에 대해 지나친 관용이 미국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하지만, 저자의 책을 읽으면 지배 계층의 억압 논리라는 생각이 든다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적극적 의미의 관용은 내전이나 전쟁을 막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유태인이지만 소수 민족의 정체성 유지는 늘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나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으로서의 관용은 용인되지만 집단으로서의 관용은 억압하는 것이 국가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민족 국가는 종교나 혈연으로 구성된 단체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다
프랑스는 이민자 사회이면서도 동화가 워낙 잘 되서 특별히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프랑스는 공화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기 위해 소수 민족들이 집단으로 권리 행사하는 것을 저지한다
대신 개인으로서의 차이는 얼마든지 용인해 준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닐까?
로마 제국이 세금만 내면 각 민족의 자치성을 보장해 준 것처럼 말이다
물론 현대 국가는 집단의 자치성은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혹시 조선도 중국과 공존하기 위한 관용의 형태로써 사대주의를 표방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이 조선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다
이처럼 관용은 권력 관계가 내제되어 있다
관용을 베푸는 쪽은 힘이 있는 쪽이고 관용을 받는 쪽은 힘이 약한 쪽이다
지배 계층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약자들에게 차이를 인정해 준다
다양한 양식의 관용이 존재하지만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과감히 배제해야 한다

다민족 국가가 연방제에서는 집단을 대상으로 관용을 베푼다
이 집단은 자치권을 갖고 있고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해 이탈자를 응징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집단이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작용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난다
그러나 다수에게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주장하려면 집단으로 대항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완벽한 동화가 옳은지, 아니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게 옳은지...

관용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허용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게임에 경쟁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방해꾼은 추방해야 한다
즉 나와 다른 타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룰 자체를 깨는 사람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비인도주의적인 관습도 당연히 비관용의 대상이다
이슬람의 여성 차별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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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성일권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에드워드 사이드, 이름이 좀 독특하다 싶었는데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들어선 후 미국으로 건너가 영미 문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강의 중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길래 동양에 대한 일반적인 환상을 깨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솔직히 좀 실망스럽다
지금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을 읽고 있는데 솔직히 이 책이 훨씬 학술적이고 분석적이다
사이드의 글을 감정적이고 전투적이다
학자라면 감정을 절제하고 보다 분석적으로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워낙 아랍에 대한 편견이 강하고 아랍인을 무조건 배척하다 보니, 더구나 9.11 사태까지 벌어진 후라 저자가 느낄 불안감이 얼마나 클지는 짐작이 간다
그렇지만 지식인이란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대중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개인 의견을 강하게 피력해서 쉽게 읽히기는 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돌아본다는 의의 정도는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이스라엘에 대해 호의적이다
기독교의 영향일까?
아니면 서구에 대한 사대주의 때문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같은 아시아인인 아랍 편을 들어야 할텐데, 영토는 아시아에 있어도 미국을 추종하기 때문인지 친이스라엘적이다
그와는 별개로 기독교에서, 특히 종말론을 내세울수록 이스라엘 건국을 신의 뜻으로 생각한다
솔직히 뭐가 옳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교회의 해석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되찾은 것은 예수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징표라는 것이다
성경이 절대 인간의 선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정말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교회의 이런 해석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볼 때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위선적인 사람이 되고, 우리를 둘러 싼 권위와 억압에 제대로 저항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중동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다
194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다음날 이집트, 시리아 , 요르단 등이 한꺼번에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선제공격을 감행해 영토를 계속 넓힌다
이스라엘을 후원한 것은 미국이었다
원래 유태인들은 유럽에서 인종 청소를 당할 정도로 공격을 받던 민족인데 왜 미국 앵글로 색슨족들은 그들을 후원하는 것일까?
유태인이 미국의 정계와 경제계를 꽉 잡고 있어서 그런가?
정말 미국은 유태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일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부분을 명확히 밝혀 줬음 좋겠는데 그의 책을 꼼꼼히 다 읽어도 왜 미국이 이스라엘을 후원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시오니즘은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일종의 유태 민족주의다
그 동안 읽은 책들을 종합해 보면 현대는 탈권위주의 시대이고 민족주의는 지양해야 할 이데올로기다
그렇다면 진보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은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을 거부해야 한다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는 일부 아랍인의 테러리즘을 비판한다
또 아라파트 행정부도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라파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인데, 노벨상의 가치를 알 만 하다
오슬로 평화 협정이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지만, 그 협정 자체가 아랍인에게는 불리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라파트는 사리사욕만 채운 채 자리 보전에 연연한다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에 고용된다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스라엘의 시오니즘도 문제지만 테러와 사리사욕, 완고한 교조주의에 연연하는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애국이란 명분 아래 민족주의로 똘똘 뭉쳐 아랍인을 쓸어 버리려고 한다
국가주의란 얼마나 위험한 편견인가!
시민들의 불안감을 이용해 인종 청소를 정당화 한다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쟁을 누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파병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아무 명분도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은 그야말로 개죽음 아닌가!
9.11 테러 때문에 모든 아랍인들이 테러리스트로 매도당하는 현실이 정말 우울하다
국가를 넘어 범지구적이고 전인류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21세기에 다시 민족주의가 고개를 쳐드는 현실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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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테라피 - 독서치료, 책속에서 만나는 마음치유법
조셉 골드 지음, 이종인 옮김 / 북키앙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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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 보다 더 유용했다
"독서의 역사" 는 결국 읽다 포기했지만 이 책은 열심히 읽었다
인터넷 시대에 문학이 갖는 의의에 대해 정의해 준다
그래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독서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부터 바꾸라고 한다
실제로 독서가 심리 치료에 이용되는 예를 제시하는데, 사실 그 효용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삶에 문제가 생길 경우 과연 책 한 권을 읽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독서로 마음의 치료를 할 정도가 되려면 어느 정도 읽기 수준이 되야 한다고 본다
전혀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 심리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불가능 하다고 본다
이를테면 W같은 애가 과연 책 읽으면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책 읽으라고 권해 주면 오히려 화를 낼 거다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용할 것 같다

심리 치료이 핵심은 카타르시스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완전히 빠져 들어 마치 내가 직접 그 상황을 경험한 것처럼 감정을 분출시키는 것이다
소설에 빠져 들기는 쉽지만 완전히 동일시 되는 건 사실 어렵다
내가 직접 소설 속의 상황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완벽하게 빠져 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카타르시스라는 건 단순히 동일시 되는 것 외에도, 내면에 있는 감정을 완전히 밖으로 내다 버리므로써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인데 실제 경험이 아닌 가상 체험, 즉 독서를 통해 이 정도까지 느끼는 건 솔직히 어려운 거 아닌가?

어느 정도의 동일시와 예방 효과는 있다고 본다
배수아의 소설을 (부주의한 사랑) 읽을 때 나는 불륜에 대해, 혹은 규격에 벗어난 삶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됐다
주인공은 유부남을 사랑해서 양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직장도 그만둔다
결국 그 유부남이 집으로 돌아간 후 살기 위해 중국집 웨이스트리스로 취직한다
괜찮은 중산층에서 어느새 하층 노동 계층으로 떨어진 걸 보면서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보통 불륜을 그릴 때는 경제적 상황은 제쳐 두거나 넉넉한 쪽으로 그리기 마련인데 (먹고 살기 힘든데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좀 리얼하게 묘사했다
삶의 실체를 들여다 본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솔직히 그 유부남이 여자 주인공을 떠났다는 게 충격이 아니라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그 상황에 놀랬다
인생 함부로 살아선 안 되겠다, 뭐 이런 다짐을 했다

전경린의 소설을 읽을 때도 상당히 몰입을 했다
일단 그녀의 섬세한 문체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남자 주인공의 멋진 모습에 꽤 빠져 들었다
미흔이 규에게 반하는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었다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이종원이 규 역할을 맡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이종원을 떠올렸다
나는 잘 생기고 쿨한 남자에게 빠져 드는 미흔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K는 잘 생긴 건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사람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하나?
규에게 집중하는 미흔의 그 심리 상태를 나도 겪어 봤기 때문에 꽤 많이 공감하고 마치 실제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혼을 아직 안 해서인지 미흔과 남편 효경의 관계는 별다른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은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만약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면 작가가 아주 훌륭하게 글을 썼거나 (마치 폴 오스터처럼) 본인의 상상력이 대단한 경우일 거다

저자는 독서의 장점으로 이 상상력을 든다
매스 미디어는 아무 힘을 안 들이고도 눈 앞에 장면을 보여 주지만, 책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머리를 써서 스스로 그 장면을 만들어 내야 한다
즉 사고의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곤하면 생각할 필요가 없는 텔레비젼을 보고 좀 더 여력이 남으면 생각해야 하는 독서를 택한다
독서는 대단히 능동적인 과정이다
물론 어느 정도 감정이입이 되고 집중할 때에만 그렇다
확실히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텔레비젼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영상 매체가 발달해도 여전히 책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될 것 같다

나는 비교적 소설을 안 읽는 편이다
베스트셀러는 유치해서 안 보고 고전은 어려워서 쉽게 못 읽는다
수준있는 독서를 하자는 생각 때문에 인문 교양 서적 위주로 읽는다
그렇지만 이 책에 따르면 정보 획득의 목적을 떠나서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 감정을 풍부하게 해 주고 많은 위안을 준다
사실 요즘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독서를 하라고 권한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가 난무한다
그렇지만 진정한 독서의 효과는 정보 획득에 있지 않다
사실 뭔가를 얻으려면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
책을 읽으므로써 자기 삶을 다시 돌아 보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여러 감정에 대한 반응 기제를 배울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돌아 보는 것, 이것이야 말로 독서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저자는 책을 통해 생활의 변화를 끌어내는 과정이 길고 느리지만, 분명히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 치료에 독서 기법을 이용하는 것이리라
요즘 나의 고민이 단순히 책만 읽고 생활 태도에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 말에 약간의 위로를 얻었다
계속 하다 보면 결국은 변한다는 얘기다
앤서니 라빈스가 말한 새로운 신경 회로의 형성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것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욱 적극적인 독서를 하려고 한다
느낌이 안 오는 책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신 공감할 수 있는 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고 내 경우에 대입하면서 내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내는 능동적인 독서를 하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남독 수준의 빠른 읽기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책을 아껴서 읽는다는 어느 일본 독서가의 말이 떠오른다
소설 같은 경우도 메모를 하면서 플롯 구조를 파악하는데 애쓸 필요가 있다
"오만과 편견"  같은 경우 메모하지 않았다면 곧 중심을 잃고 헤맸을 것이다
18세기에 쓰여진 작품이라 그런지 모든 상황이 너무 낯설어 몰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첫 십여 장에 집중하라는 충고가 맞는 걸까?
시작 부분에 제시되는 인간 관계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니까 뒤로 갈수록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간단히 메모를 하면 집중할 수는 있는데, 대신 속도가 느려져 나중에는 메모하다가 흐름을 놓치기도 한다
내 책이면 가볍게 책에 메모도 하면서 줄도 긋고 편하게 읽을텐데 그게 좀 아쉽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같은 책을 두 번 읽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요즘처럼 한 주에 10권 이상 읽는다면 책값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중에 글을 쓰려면 원전이 있긴 있어야 할 거다
개인 도서관을 위해 예산을 세워 놓으라고 한다
서재라는 말 보다 얼마나 듣기 좋고 거창한지!!
어제 읽은 책에서도 6만권의 장서를 소유한 사람이 나오지만, 나도 그런 꿈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경우는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책을 읽는 것보다 모으는 것에 더 의의를 두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가치있고 우아하며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인형이나 우표 모으는 것 보다는 말이다!

이 곳 공공 도서관에는 약 2만 권의 책이 있다
아주 넓은 공간은 아니다
꼼꼼하게 배치한다면 아파트 큰 방 하나만 비우면 충분히 많은 책을 소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방 하나를 서재로 짜면 절대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더구나 내가 읽은 책으로만 채운다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책을 소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 대한 소유욕, 내 손때가 묻은 책으로만 진열하기,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붙받이장을 만들듯 서재를 아예 벽에다 짜서 넣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새 책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시 읽기는 힘들 것이다
하긴 "닥터 지바고" 같은 책은 다음에 읽으면 다른 느낌일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 이나 "위대한 게츠비"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 지금 읽은 것과 나이 들어 읽는 느낌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직장을 옮기게 되면, 즉 도서관 갈 시간도 없고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하면 그 때는 사서 읽을 생각이다
한 주에 한 권만 읽어도 괜찮지, 뭐
그 때부터는 책을 열심히 모아야겠다

저자는 학교가 문학을 어렵게 만든다고 안타까워 한다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 역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 사람이지만, 문학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본연의 기능을 잃고 대학 교수들 밥먹여 주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시간의 시련을 이겨낸 고전일수록 더욱 접근하기 어렵다
있는 그대로 텍스트를 읽고 내 식으로 감동하면 되는데 일단 학문으로 자리 잡으면 너무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
세익스피어가 위대한 건 알지만 그의 모든 작품을 다 높이 받드는 건 넌센스라는 얘기다
대학 교수나 평론가들의 이런 태도가 정작 책을 독자로부터 유리시킨다
당장 국어 시간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저 시나 소설로 느껴도 될 것을 거기다 밑줄 긋고 무슨 의미인지 받아 적고 시험보고, 그러니 개인적인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국어 선생이라면 어떻게 할까?
대학이라면 또 몰라도 중고교생에게 수능 강의 이외의 형식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대안 학교도 아닌데 그 따위로 수업하면 쫒겨날 거다
또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
그러니 페레가 세운 모던 스쿨에서는 교사에게 전권을 주는 대신 그 교사는 수업 준비를 엄청나게 해야 했다
정해진 룰이 없으니 스스로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나라면 문학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일단 학기초에 혹은 학기 시작 전에 필독 도서 목록을 나눠 주고 그 책에 대해 토론한다
당연히 한 클래스 숫자는 적어야 한다
가능하면 10명 이내로
먼저 책에 대한 각자의 느낌을 발표하고 내가 등장 인물이나 플롯, 문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그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거다
수업 평가는 얼마나 참여하느냐, 또 학생이 제출하는 에세이 등으로 주관적인 평가를 한다
(이렇게 하면 내신 성적 때문에 학부모들이 객관성이 없다고 들고 일어나겠지)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보다 자유롭고 개인적인 독서가 되지 않을까?

어차피 선생 될 일은 없으니까 애들에게 교육시키면 어떨까?
"현대 한국 사회의 일상 문화 코드" 를 읽고 느낀 거지만, 교육이란 특히 자식 교육의 경우 학원만 보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참여다
양육이란 단순히 자식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성장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행위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의미 부여를 하면 자식 키워도 부질없다는 생각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아직까지는 아이를 낳는 일에 회의적이지만, 낳을까 싶은 생각도 한 번씩 해 본다
독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애 성격이 책 보다는 춤추는데 끌리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래도 날 닮았으면 좋아할 것 같기도 한데, 동생 생각하면 전혀 안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아이랑 같이 책을 읽고 거기에 대한 느낌을 서로 얘기하면 참 재밌을 것 같다
아이가 자라면서 경험하는 것을 엄마가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양육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큰 의미를 줄 것이다
그러려면 학원에 보내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시간 투자를 아이에게 많이 해야 하는데 전업 주부도 아니고 애가 인생의 목적도 아닌데 현대 사회에서 자아 실현과 제대로 된 양육이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쨌든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함께 책을 읽고,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다
여행이야 말로 (특히 해외 여행) 경험의 폭을 넓히는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식은 부모의 대리물이 아니고 나와는 별개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자식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맹목적인 경쟁적 교육에 빠지지 않을 것 같다
애가 성공하면 기분 좋은 일이고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양육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의미를 느껴야지, 그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려다 보면 결국 아이도 나도 다 같이 불행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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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의 제국
그렉 크리처 지음, 노혜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이 점점 더 뚱뚱해지는 이유는 패스트 푸드점의 판매 전략 때문이라는 분석은 이미 수많은 책에서 다뤄졌다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패스트 푸드점은 비만에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세트 메뉴나 라지 사이즈의 개발로 가격을 올리면서 칼로리도 엄청나게 늘리고 있다
솔직히 1인분 양으로 너무 큰데도 패스트 푸드점은 계속 큰 사이즈만 내 놓는다
T.G.I.F.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1인분 양으로는 지나치게 많다
그런데도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면서 값도 올린다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 가격을 내리면 좋을텐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점점 더 뚱뚱해진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칼로리 공개를 안 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면 그 엄청난 칼로리의 음식들을 아무 부담감 없이 먹을 수 있겠는가?
한 끼 식사에 천 칼로리가 넘을 정도라면 말 다했지, 뭐
그래도 패스트 푸드점은 가격이라도 싸고 칼로리도 패밀리 레스토랑 보다는 더 낮다
물론 패스트 푸드점처럼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 놈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값도 무지하게 비싸지, 칼로리도 엄청나게 높지, 1인분 양도 지나치게 많지, 좋은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 마케팅 때문에 왠지 거길 가야 세련되고 신세대 문화에 동참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비싼 돈 주고 뚱뚱해지려고 기꺼이 간다
패밀리 레스토랑이야 말로 타도의 대상이다

요즘은 돈을 벌어서인지 패스트 푸드점에 갈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직장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맥도널드를 많이 찾는 것 같다
하긴 그 사람들이야 고기가 주식이니까 간단히 해결하는 좋은 식당일 것이다
우리처럼 우르르 몰려가서 같이 밥 먹는 게 아니니까 혼자 편하게 회사 근처 맥도널드 가서 싸게 한 끼 때울 것이다
그래서 다들 맥도널드의 폐해에 대해 목소리를 높힌다
맥도널드 세트 메뉴를 먹으면 기본적으로 5천원은 넘으니까 절대 싼 건 아니다
그런 허접한 음식을 먹으려고 5천원을 지불하느니, 차라리 한식을 제대로 먹는 게 낫다
이건 우리나라 현실이고 미국은 5천원 가지고 한 끼 식사하기가 힘들 것이다
미국에서는 맥도널드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싼 식당이란 얘기다
마치 우리나라의 백반집처럼 말이다

아직도 굶어 죽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넘쳐 나지만, 왠만큼 사는 나라에서는 칼로리 과잉이 심각한 문제다
생산력 향상으로 더 이상 못 먹어 죽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값싼 군것질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저자의 지적처럼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회 복지를 받는 대신, 싸구려 먹거리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기분이 우울할 때 먹는 것과 텔레비젼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그게 제일 돈이 적게 들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하루 평균 4시간 동안 TV를 시청한다고 한다
5시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7시부터 11시까지 줄곧 TV를 시청한다는 소리니, 운동할 시간이 없는 건 너무 당연하다
비디오 게임, 인터넷, TV 등이 더해져 우리는 소파에서 꼼짝달싹도 안 한다
싸구려 군것질거리들로 입을 만족시키면서 우리의 신체는 휴식이랍시고 그걸 즐기고 있다
다른 여가 활동은 돈이 많이 드니 시도할 엄두가 안 날 것이다
당장 운동 하나만 하려고 해도 돈이 든다
이러니 흑인이나 멕시칸들의 비만이 심각할 수 밖에

못 사는 동네는 공원 하나 제대로 없다
그러니 운동할 공간이 없는 셈이다
치안도 형편없어 어두워지면 나가지도 못한다
어디서 운동을 하겠는가?
잘 사는 동네는 치안도 확실하고 공원 조성도 잘 되어 있다
백인일수록 날씬하고 유색 인종일수록 뚱뚱한 건 필연적인 결과다
더구나 백인 중산층들은 시간이 나면 돈을 들여 스포츠 활동을 즐긴다
또 그들은 칼로리가 높은 싸구려 음식 대신 영양이 풍부하지만 칼로리는 낮은 좋은 식품들을 섭취한다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다르다
못사는 사람들은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마음껏 멋기라도 해야 한다면서 비만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잘사는 사람들은 뚱뚱한 것은 곧 자기 관리의 실패라고 보기 때문에 날씬해질 것을 서로 격려한다
인식부터 다른 셈이다

HFCS, 이른바 액상과당은 설탕보다 칼로리가 월등히 높고 팜유 역시 콩기름 보다 훨씬 높다
그렇지만 값이 싸기 때문에 (설탕은 3세계 국가 보호 차원에서 높은 가격에 묶여 있고 싸구려 팜유는 말레이사아와의 무역을 위해 많이 수입했다) 식료품 가격을 내리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다량 유통됐다
더구나 이들은 맛이 더 강하다
훨씬 바삭바삭 튀겨지고 단맛도 강하다
식료품 회사들은 앞다투어 이것들로 바꾸었다
칼로리가 올라간 건 당연하다
정부가 비만을 유도한 셈이다

코카 콜라나 맥도널드의 광고 작전도 대단히 공격적이다
그들은 학교에 광고판을 세우고 배달하는 대신 엄청난 기부금을 제공한다
돈이 없어 체육 시간까지 없애는 마당에 억 단위의 기부금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 급식을 직접 하는 대신 맥도널드나 핏자헛 등에서 직접 배달을 한다고 하니, 칼로리가 얼마나 올라갈지 알 만 하다
이런 이미지 광고는 소비자들도 현혹시킨다
이런 음식들을 먹어야 유행에 뒤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이미지 광고를 한다
패스트 푸드이 폐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비자라면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할 당위성을 느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정착되는 것이다

비만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혹은 반짝하는 아이디어로 돈을 벌어 보려는) 잘못된 다이어트 책들도 문제다
다이어트가 돈이 되니까 여기저기서 그럴듯한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진실은 하나, 적게 먹고 땀이 날 정도의 강도로 한 시간 이상 운동하는 수 밖에 없다
운동으로 일주일에 2500 칼로리를 소비해야 심장병 발생 위험도 줄어든다고 한다
2500칼로리면 적어도 하루에 400칼로리는 소모해야 한다는 얘긴데, 이게 만만치 않을 것이다
걷기로는 힘들 것이고 조깅 정도의 강도로 뛰어야 한다
결국 노력을 해야 이 풍요의 시대에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이 들어서 살 찌는 건 괜찮다고 하는 얘기도 다 신화에 불과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비만은 위험하다
왜 기독교에서 탐식과 게으름을 7대 악의 하나로 꼽았는지 알 것 같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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