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진, 왕의 초상화 ㅣ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10
조선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9년 1월
평점 :
임금의 초상화에 대해 사회적 의미와 그려지는 과정, 방식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도판이 선명해 어진을 감상하기 좋았으나 6.25 당시 화재로 남아있는 유물이 몇 점 되지 않아 아쉽다.
꼭 6.25 때만이 아니라 수많은 어진들이 그려졌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다시 그려지는 과정이 되풀이 됐음을 알게 됐다.
목조 건물이다 보니 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어진 자체를 왕과 동일시 하여 마치 임금을 보듯 초상에 사배를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감히 사진 촬영을 못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이 추모와 기념의 의미가 강했던 반면 조선은 어진을 위패처럼 제사의 의미로 숭앙했고, 실제 모습을 그리긴 했으나 사후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우 도식적이라 서양의 초상화처럼 예술적인 느낌이 없고 하나의 기념 사진 같다.
미술사적 의미 보다는 역사적 의미가 부각되는 것 같다.
어진의 제작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으나 다소 지루했다.
<인상깊은 구절>
7p
신선원전에 모셔졌던 어진들은 전혀 촬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우리 민족의 어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고에 기인하였다. 다시 말해 어진이란 단순히 왕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궁궐의 행사 장면을 그려 낸 기록화 어디에도 왕의 모습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왕 그 자체로 인식되었던 초상화에 있어서랴. 일제강점시대에도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밀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방에 있던 준원전이나 경기전 어진들은 촬영되어 있지만, 가장 본거지였던 이왕직 산하의 창덕궁 선원전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78p
고려시대 사원에서의 왕 및 왕비의 진영 봉안은 사적으로 명복을 빌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으나 조선왕조의 진전제도는 초상 봉안 처소로서의 보존 및 제사, 이를테면 기념적 성격이 보다 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선조의 내세에서의 명복을 천도하고자 하는데 그 주된 의도가 있었으며, 후자는 어진 봉안 처소로서의 기념적 성격 내지는 제사를 통한 결속이라는 현실적 의도가 주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81p
미천한 신분인 화원들은 비록 그림 재주는 훌륭했지만 임금 앞이라 너무 긴장하고 용안을 우러러보기 미안하여 자주 실수를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사대부 화가인 조영석이 임금을 자주 뵈었으니 그에게 초본을 내게 하여 이를 화원들이 참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조영석은 펄펄 뛰면서 '화기는 천기'이므로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다 결국 의금부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런 일화는 당시 사대부 사회 일각에서 그림 재주에 대해 얼마나 경직된 사고가 팽배해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115p
그 당시 조석진은 상중이었지만 그의 화법이 가장 정묘하다고 판단되어 결국 기용하였다. 숙종 때 김진규의 경우, 친부모의 상에는 차출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조선조 말기 유교의 전통적 관념이 해이해진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대부 신분인 김진규와 화원 신분인 조석진의 차이를 말해 주기도 한다. 참고로 채용신의 경우, 1901년 9월 부친인 채권영의 상을 당했을 때 그는 바깥 활동을 일체 거부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철두철미한 유교적 기상을 지닌 화가라는 개인적 성향에 더해 50세까지만 해도 직업화가가 아닌 무관으로서 정산군수까지 지낸 이력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조석진과는 달랐던 그의 신분이 행동방식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141p
숙종의 이런 처사는 겸양과 검소를 중시하던 조선조 선비들의 눈에는 지나친 처사로서, 상소가 잇달았다. 그중 사간 윤성교의 상소를 보면 비난의 요지는, 아직 건강한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에 모시고, 장녕전이라는 전호까지 내린 것은 지나친 일이라는 것과, 강화도로 봉안함에 있어 승정원이나 의정부도 모르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숙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장녕전을 지어 자신의 어진을 봉안한 것은 전대 임금들이 줄 선왕의 어진을 모시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할 때 참으로 과감한 처사였다. 하지만 장녕전이라는 새로 건립된 외방 진전에 숙종어진이 봉안되면서, 그 후 영조 역시 '계술'이라는 명분하에 만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결국 외방에도 현왕의 존재감이 확대되어 가는 효과가 이어졌다.
148p
이제까지 세초해 오던 초본을 굳이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는 문제와 또 어진을 백관이 봉심할 때 절을 하도록 한 조처를 둘러싹도 사간원과 사헌부는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어유구는 숙종의 이런 처사를 빗대어 "스스로 명예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라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의 말에 빗대어 후대에 미칠 폐단을 심히 경계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자신의 고집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153p
임금 역시 그 초상화도 이미 보였으며, 또 그 형(조영복)의 초상도 보았는데, 아주 흡사했다고 하면서, 조영석에게 직접 붓을 잡으려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조영석은 이미 붓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성교를 듣고 열심히 감동 일을 하고 있다고 아뢰며, "대저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의 반열에 끼지 못 한다"라는 <예기> 왕제에서의 구절을 빌려, 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데는 각기 방도가 있으니 도화서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 이것은 사대부가 그림 재주로 임금에게 봉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조영석의 논지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당시 사대부들의 그림에 대한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63p
정조가 표면적으로는 31세 영조어진 모사가 31세 정조어진 도사의 근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조어진 도사가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또 정조가 80세 영조어진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실제로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의 중심은 자신의 어진 도사였음을 말해 준다고 풀이했다. 이런 면은 특히 정조가 영조의 어진 이모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어진 도사에서는 대신들과 직접 봉심을 거듭하고 7번이나 고쳐 그리게 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런 점은 숙종과 영조의 선왕 어진 모사에 임하는 태도와는 대조적인 것이었으니, 즉 숙종이나 영조 연간에는 선왕의 어진 모사를 주로 먼저 진행하고, 자신의 어진 도사는 후에 진행했으며, 선왕의 어진 모사는 도감을 설치하여 장대하게 치르는 한편, 현왕의 어진 도사를 국왕권이 안정되었던 정권 말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진행하였다는 점 또한 지적하였다.
결국 이런 면은 정조의 자기중심적 성향도 한 원인이었지만, 이제 숙종과 영조를 거치면서 어진 도사가 이미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 정립되었고, 정국도 좀 더 안정된 국권을 보여 주게 되었으며, 현왕의 존재감 역시 점점 더 굳혀져 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190p
의정부의정 이근명은 이 행렬을 이끌고 11월 추운 겨울에 평양에 가서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 행렬을 보호하고 호위한다는 명분하에 일어난 폭행 사건, 물가상승과 잡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즉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고 가운데, 물가가 오르고 수많은 세금 문제가 민생고를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내탕금까지 쏟아부어 아직 황실이 건재함을 보여 주려 했으나 결코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백성들로부터 충성심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고종의 황제권 타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p
일본인 관료들은 조선왕실을 위하는 제스처로서 지속적으로 어진 화가를 추천하거나 제작에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고종은 1912년 서회미술회에 갓 입학한 김은호가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재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반신 사진 한 장을 김은호에게 주어 어진 초본을 그려 오게 하고, 그 결과에 상당히 만족했던 고종은 당시 이왕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있던 순종어진을 도사할 것을 명하였다.
235p
원칙적으로 어진이란 단순히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전통적인 사고하에 구본과 함께 세초하였다. 그러나 고종 연간부터는 어진에 대한 이런 관념은 상당히 희석되었으며, 고종의 경우 자신의 어진을 비공식적으로 그려 낸 화가 채용신에게 초본을 궁궐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허락한 바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는 아마도 어진에 대한 엄중한 고정 관념은 더욱 취약해졌을 것이라고 보며,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최고의 화가로 자타가 공인했던 김은호의 경우,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니, 자신이 그린 초본을 소지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245p
모두 공신호는 삭훈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조상의 초상화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초상화를 단지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조상 그 자체로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333p
중국 황제상 중 무엇보다도 조선이나 일본과 너무나 다른 것은 분장 초상화일 것이다. <윤진행락도> 화첩에서 드러나듯 이 황제 초상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다종족과 다문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문화적 우위에 있던 한족에 대항하는 통치자로서의 모습, 자신의 혈통인 만주족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활쏘기와 말타기 명수로서의 모습, 우위에 선 자로서 포섭 대상이었던 인도, 무굴, 티베트, 터키인으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서양인으로 분장한 모습 등 청나라 황제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소화해 가면서 화면에 등장했다. 이런 분장 초상화는 하나같이 우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정치적 선전성이 강한 작품들이다.
일본 천황상 역시 생전에 연고가 있던 사찰 내 영당이나 신궁에 봉안되었지만, 조선이나 명, 청대와는 달리 메이지 천황 전까지는 국가적 관리나 황실 전체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보다는 추모나 기념적 의도가 강했다. 따라서 화폭도 그다지 크지 않으며, 위풍당당한 군주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어진 그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였다. 이 말은 중국 송대의 정이가 주창했는데, 원뜻은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는 똑같이 그리기 어려우니 신주로 대체하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이 조상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며, 또한 초상화는 조상과의 닮음 여부로 시비도 많았으므로,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초상화를 제작하지 말고 나무로 만든 위패를 모시기를 권장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원래의 이러한 제의적 명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결국 조형적 명제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 화가들은 실제로 초상화를 그려 낼 때 털끝 하나라도 다르지 않게 대상 인물을 화면에 충실히 재현하고자 진력해 왔다. 보는 이들 역시 초상화에 대한 감식안은 참으로 엄격하였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동원되고 그야말로 거국적 사업이었던 어진 제작에서조차 '칠분모(7할의 완성도)'면 가장 잘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런 엄격한 잣대로 인해 초상화의 예술적 성취도는 더욱더 고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38p
일본의 경우, 천황상 제작에 동원된 화가들 모두가 중국이나 한국처럼 초상화 전문 화가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에도 시대 이후에는 직업화가가 아닌 황자나 황녀들마저도 천황상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아마추어 화가가 그린 작품들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궁내청이나 근세 천황상 봉안처인 센뉴지에 당당히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은 취신(取神)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완성도 면에서는 아무래도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의례용 군주상이라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의 행사보다는 사적 추모에 비중을 두었던 일본 특유의 사고에 기안한다고 생각된다.
340p
조선시대의 어진을 성격 짓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어진을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로 보았던 선조들의 인식이다. 어진 제작은 열과 성을 다한 국가적 행사였다. 매 단계마다 길일과 길시를 택하여 왕 이하 대신들이 봉심하였고, 진전에 봉안하기 위한 어진의 행차는 거의 실제 임금을 모시는 수준이었다. 어진 제작 때 초본이 너무 핍진하면 차마 세초하지 못하고 궤에 넣어 봉안하였으며, 또한 초본을 견본에 옮겨 그리는 상초 작업이 끝나 왕의 모습과 자못 닮게 되면 하루 일이 끝나고 물러날 때 어진 제작 관련자들은 모두 이 상초본에 대해 사배례를 올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젠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임금님'이었기 때문이다.
'어진은 곧 왕 그 자체'라는 인식은 '어진은 바로 그 왕조의 상징'이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이런 인식 아래 조선시대에는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어진들의 보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군주 초상이 발견되면 모두 세초하거나 묻어 버리도록 명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는 세종이야말로 바로 전 왕조에 대한 이런 조처를 가장 가차없이 밀어붙인 왕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류>
100p
선조의 증손인 낭원군 간은 ~
-> 낭원군은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의 차남이므로 증손이 아니라 손자이다.
238p
첫째 능풍군은 일찍 죽었고, 둘째 능양군은 훗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이며
->능양군 즉 인조는 1595년생으로 정원군의 장남이고, 서자인 능풍군은 1596년생으로 둘째이다.
255p
숙종의 비는 김민기의 딸 인원왕후(1687-1757)이다.
->인원왕후는 김민기가 아니라 김주신의 딸이다.
271p
순조는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조만영은 풍원부원군이 아니라 풍은부원군이다. 류성룡이 풍원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278p
익종은 1819년 영돈녕부사 조인영의 딸과 가례를 올려
->조인영이 아니라 조만영의 딸과 혼인했다. 조인영은 조만영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