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 서양화
선승혜 지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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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의 도록이다.

직접 가서 봤던 생각이 난다.

최근 일본에 가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을 관람한 후 관심이 생겨 빌려 보게 됐다.

이왕가미술관에서 소장했던 일본 근대화들인 모양이다.

일본 역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후 모방하던 시절이라 그런지 인상파 화풍들이 많았다.

일본 가서 서양화를 배운 우리 근대 회화들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인상깊은 구절>

11p

근대 일본 서양화가들은 누드화를 통해 신체에 내재된 본질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유럽의 미적 가치관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누드화는 직설적인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전통적인 춘화와는 달리, 감정이입을 제한하고 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새로운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71p

이러한 산수화 전통에서 일본의 근대 서양화가들은 유럽 풍경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주의깊게 표현하지 않았던 하늘, 날씨, 빛이 풍경화의 주요한 요소라는 것은 매우 새로운 개념이었다. 빛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유화 물감은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전통 산수화에서 풍경화로 전환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9p

일본 산수화의 전통에 날씨와 빛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산수화에서 풍경화로의 전환은 하늘이 天이나 神과 같은 신성한 존재이며, 날씨는 신성한 존재가 암시하는 의사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하늘과 날씨는 무한히 변화하는 자연과학의 대상이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었음을 반영한다.

 문화는 열린 개념이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영역이다. 하나의 문화권이 다른 문화권과 만나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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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왕의 초상화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10
조선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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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초상화에 대해 사회적 의미와 그려지는 과정, 방식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도판이 선명해 어진을 감상하기 좋았으나 6.25 당시 화재로 남아있는 유물이 몇 점 되지 않아 아쉽다.

꼭 6.25 때만이 아니라 수많은 어진들이 그려졌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다시 그려지는 과정이 되풀이 됐음을 알게 됐다.

목조 건물이다 보니 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어진 자체를 왕과 동일시 하여 마치 임금을 보듯 초상에 사배를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감히 사진 촬영을 못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이 추모와 기념의 의미가 강했던 반면 조선은 어진을 위패처럼 제사의 의미로 숭앙했고, 실제 모습을 그리긴 했으나 사후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우 도식적이라 서양의 초상화처럼 예술적인 느낌이 없고 하나의 기념 사진 같다.

미술사적 의미 보다는 역사적 의미가 부각되는 것 같다.

어진의 제작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으나 다소 지루했다.



<인상깊은 구절>

7p

신선원전에 모셔졌던 어진들은 전혀 촬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우리 민족의 어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고에 기인하였다. 다시 말해 어진이란 단순히 왕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궁궐의 행사 장면을 그려 낸 기록화 어디에도 왕의 모습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왕 그 자체로 인식되었던 초상화에 있어서랴. 일제강점시대에도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밀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방에 있던 준원전이나 경기전 어진들은 촬영되어 있지만, 가장 본거지였던 이왕직 산하의 창덕궁 선원전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78p

고려시대 사원에서의 왕 및 왕비의 진영 봉안은 사적으로 명복을 빌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으나 조선왕조의 진전제도는 초상 봉안 처소로서의 보존 및 제사, 이를테면 기념적 성격이 보다 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선조의 내세에서의 명복을 천도하고자 하는데 그 주된 의도가 있었으며, 후자는 어진 봉안 처소로서의 기념적 성격 내지는 제사를 통한 결속이라는 현실적 의도가 주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81p

미천한 신분인 화원들은 비록 그림 재주는 훌륭했지만 임금 앞이라 너무 긴장하고 용안을 우러러보기 미안하여 자주 실수를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사대부 화가인 조영석이 임금을 자주 뵈었으니 그에게 초본을 내게 하여 이를 화원들이 참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조영석은 펄펄 뛰면서 '화기는 천기'이므로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다 결국 의금부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런 일화는 당시 사대부 사회 일각에서 그림 재주에 대해 얼마나 경직된 사고가 팽배해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115p

그 당시 조석진은 상중이었지만 그의 화법이 가장 정묘하다고 판단되어 결국 기용하였다. 숙종 때 김진규의 경우, 친부모의 상에는 차출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조선조 말기 유교의 전통적 관념이 해이해진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대부 신분인 김진규와 화원 신분인 조석진의 차이를 말해 주기도 한다. 참고로 채용신의 경우, 1901년 9월 부친인 채권영의 상을 당했을 때 그는 바깥 활동을 일체 거부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철두철미한 유교적 기상을 지닌 화가라는 개인적 성향에 더해 50세까지만 해도 직업화가가 아닌 무관으로서 정산군수까지 지낸 이력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조석진과는 달랐던 그의 신분이 행동방식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141p

숙종의 이런 처사는 겸양과 검소를 중시하던 조선조 선비들의 눈에는 지나친 처사로서, 상소가 잇달았다. 그중 사간 윤성교의 상소를 보면 비난의 요지는, 아직 건강한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에 모시고, 장녕전이라는 전호까지 내린 것은 지나친 일이라는 것과, 강화도로 봉안함에 있어 승정원이나 의정부도 모르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숙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장녕전을 지어 자신의 어진을 봉안한 것은 전대 임금들이 줄 선왕의 어진을 모시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할 때 참으로 과감한 처사였다. 하지만 장녕전이라는 새로 건립된 외방 진전에 숙종어진이 봉안되면서, 그 후 영조 역시 '계술'이라는 명분하에 만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결국 외방에도 현왕의 존재감이 확대되어 가는 효과가 이어졌다.

148p

이제까지 세초해 오던 초본을 굳이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는 문제와 또 어진을 백관이 봉심할 때 절을 하도록 한 조처를 둘러싹도 사간원과 사헌부는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어유구는 숙종의 이런 처사를 빗대어 "스스로 명예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라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의 말에 빗대어 후대에 미칠 폐단을 심히 경계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자신의 고집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153p

임금 역시 그 초상화도 이미 보였으며, 또 그 형(조영복)의 초상도 보았는데, 아주 흡사했다고 하면서, 조영석에게 직접 붓을 잡으려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조영석은 이미 붓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성교를 듣고 열심히 감동 일을 하고 있다고 아뢰며, "대저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의 반열에 끼지 못 한다"라는 <예기> 왕제에서의 구절을 빌려, 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데는 각기 방도가 있으니 도화서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 이것은 사대부가 그림 재주로 임금에게 봉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조영석의 논지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당시 사대부들의 그림에 대한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63p

정조가 표면적으로는 31세 영조어진 모사가 31세 정조어진 도사의 근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조어진 도사가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또 정조가 80세 영조어진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실제로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의 중심은 자신의 어진 도사였음을 말해 준다고 풀이했다. 이런 면은 특히 정조가 영조의 어진 이모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어진 도사에서는 대신들과 직접 봉심을 거듭하고 7번이나 고쳐 그리게 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런 점은 숙종과 영조의 선왕 어진 모사에 임하는 태도와는 대조적인 것이었으니, 즉 숙종이나 영조 연간에는 선왕의 어진 모사를 주로 먼저 진행하고, 자신의 어진 도사는 후에 진행했으며, 선왕의 어진 모사는 도감을 설치하여 장대하게 치르는 한편, 현왕의 어진 도사를 국왕권이 안정되었던 정권 말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진행하였다는 점 또한 지적하였다.

 결국 이런 면은 정조의 자기중심적 성향도 한 원인이었지만, 이제 숙종과 영조를 거치면서 어진 도사가 이미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 정립되었고, 정국도 좀 더 안정된 국권을 보여 주게 되었으며, 현왕의 존재감 역시 점점 더 굳혀져 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190p

의정부의정 이근명은 이 행렬을 이끌고 11월 추운 겨울에 평양에 가서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 행렬을 보호하고 호위한다는 명분하에 일어난 폭행 사건, 물가상승과 잡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즉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고 가운데, 물가가 오르고 수많은 세금 문제가 민생고를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내탕금까지 쏟아부어 아직 황실이 건재함을 보여 주려 했으나 결코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백성들로부터 충성심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고종의 황제권 타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p

일본인 관료들은 조선왕실을 위하는 제스처로서 지속적으로 어진 화가를 추천하거나 제작에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고종은 1912년 서회미술회에 갓 입학한 김은호가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재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반신 사진 한 장을 김은호에게 주어 어진 초본을 그려 오게 하고, 그 결과에 상당히 만족했던 고종은 당시 이왕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있던 순종어진을 도사할 것을 명하였다.

235p

원칙적으로 어진이란 단순히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전통적인 사고하에 구본과 함께 세초하였다. 그러나 고종 연간부터는 어진에 대한 이런 관념은 상당히 희석되었으며, 고종의 경우 자신의 어진을 비공식적으로 그려 낸 화가 채용신에게 초본을 궁궐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허락한 바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는 아마도 어진에 대한 엄중한 고정 관념은 더욱 취약해졌을 것이라고 보며,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최고의 화가로 자타가 공인했던 김은호의 경우,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니, 자신이 그린 초본을 소지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245p

모두 공신호는 삭훈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조상의 초상화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초상화를 단지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조상 그 자체로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333p

중국 황제상 중 무엇보다도 조선이나 일본과 너무나 다른 것은 분장 초상화일 것이다. <윤진행락도> 화첩에서 드러나듯 이 황제 초상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다종족과 다문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문화적 우위에 있던 한족에 대항하는 통치자로서의 모습, 자신의 혈통인 만주족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활쏘기와 말타기 명수로서의 모습, 우위에 선 자로서 포섭 대상이었던 인도, 무굴, 티베트, 터키인으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서양인으로 분장한 모습 등 청나라 황제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소화해 가면서 화면에 등장했다. 이런 분장 초상화는 하나같이 우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정치적 선전성이 강한 작품들이다. 

 일본 천황상 역시 생전에 연고가 있던 사찰 내 영당이나 신궁에 봉안되었지만, 조선이나 명, 청대와는 달리 메이지 천황 전까지는 국가적 관리나 황실 전체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보다는 추모나 기념적 의도가 강했다. 따라서 화폭도 그다지 크지 않으며, 위풍당당한 군주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어진 그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였다. 이 말은 중국 송대의 정이가 주창했는데, 원뜻은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는 똑같이 그리기 어려우니 신주로 대체하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이 조상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며, 또한 초상화는 조상과의 닮음 여부로 시비도 많았으므로,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초상화를 제작하지 말고 나무로 만든 위패를 모시기를 권장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원래의 이러한 제의적 명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결국 조형적 명제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 화가들은 실제로 초상화를 그려 낼 때 털끝 하나라도 다르지 않게 대상 인물을 화면에 충실히 재현하고자 진력해 왔다. 보는 이들 역시 초상화에 대한 감식안은 참으로 엄격하였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동원되고 그야말로 거국적 사업이었던 어진 제작에서조차 '칠분모(7할의 완성도)'면 가장 잘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런 엄격한 잣대로 인해 초상화의 예술적 성취도는 더욱더 고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38p

일본의 경우, 천황상 제작에 동원된 화가들 모두가 중국이나 한국처럼 초상화 전문 화가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에도 시대 이후에는 직업화가가 아닌 황자나 황녀들마저도 천황상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아마추어 화가가 그린 작품들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궁내청이나 근세 천황상 봉안처인 센뉴지에 당당히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은 취신(取神)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완성도 면에서는 아무래도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의례용 군주상이라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의 행사보다는 사적 추모에 비중을 두었던 일본 특유의 사고에 기안한다고 생각된다.

340p

조선시대의 어진을 성격 짓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어진을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로 보았던 선조들의 인식이다. 어진 제작은 열과 성을 다한 국가적 행사였다. 매 단계마다 길일과 길시를 택하여 왕 이하 대신들이 봉심하였고, 진전에 봉안하기 위한 어진의 행차는 거의 실제 임금을 모시는 수준이었다. 어진 제작 때 초본이 너무 핍진하면 차마 세초하지 못하고 궤에 넣어 봉안하였으며, 또한 초본을 견본에 옮겨 그리는 상초 작업이 끝나 왕의 모습과 자못 닮게 되면 하루 일이  끝나고 물러날 때 어진 제작 관련자들은 모두 이 상초본에 대해 사배례를 올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젠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임금님'이었기 때문이다.

 '어진은 곧 왕 그 자체'라는 인식은 '어진은 바로 그 왕조의 상징'이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이런 인식 아래 조선시대에는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어진들의 보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군주 초상이 발견되면 모두 세초하거나 묻어 버리도록 명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는 세종이야말로 바로 전 왕조에 대한 이런 조처를 가장 가차없이 밀어붙인 왕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류>

100p

선조의 증손인 낭원군 간은 ~

-> 낭원군은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의 차남이므로 증손이 아니라 손자이다.

238p

첫째 능풍군은 일찍 죽었고, 둘째 능양군은 훗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이며

->능양군 즉 인조는 1595년생으로 정원군의 장남이고, 서자인 능풍군은 1596년생으로 둘째이다.

255p

숙종의 비는 김민기의 딸 인원왕후(1687-1757)이다.

->인원왕후는 김민기가 아니라 김주신의 딸이다.

271p

순조는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조만영은 풍원부원군이 아니라 풍은부원군이다. 류성룡이 풍원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278p

익종은 1819년 영돈녕부사 조인영의 딸과 가례를 올려

->조인영이 아니라 조만영의 딸과 혼인했다. 조인영은 조만영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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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 - 명화를 만나다
국립현대미술관.조선일보 엮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2013년도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였던 듯 하다.

못 가 봐서 무척 아쉬웠는데 드디어 도록으로 만나 봤다.

소장 도서관도 적을 뿐더러 책이 커서 대출 불가인 곳이 많아 책바다를 통해 몇 번이나 시도해서 빌린 책이라 더 반갑다.

가끔 서양 유명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 화가들의 작품도 딸려 오는데 그 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지만 자국에서는 나름 명망있는 화가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린 우리나라의 유명 화가들 역시 프랑스로 많이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열린 전시회에도 작품들을 열심히 출품했다.

지금도 유학이 쉬운 일이 아닌데 1950년대에 이미 프랑스로 떠난 화가들이 이렇게 많았나 깜짝 놀랬다.

이런 세계적인 화단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성장하는 것 같다.

도판이 훌륭해 그림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해설에 나온 바대로 眼福 을 누렸다.

처음 근대 회화들을 접할 때만 해도 화가들의 이름도 생소하고 처음 접하는 작품들이라 큰 감흥이 없었는데 자주 보다 보니 눈에 익어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현대 수묵화의 놀라운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여전히 추상화, 비구상은 감상하기가 어렵지만 김환기나 이응노, 유영국의 작품 등은 눈길을 끈다.



<인상깊은 구절>

26p

반인상파의 기류가 포비즘, 에콜 드 파리풍, 추상미술로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논리적, 이지적인 큐비즘과 추상-창조로 연계되는 경향은 극히 한정된 소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우리 미술의 특징이다. 논리적, 이지적 작풍의 빈곤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미의식과도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 익숙해있었던 한국인에게 논리적인 해체와 구성의 경향은 쉽게 수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감성적인 포비즘이나 에콜 드 파리풍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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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8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20-04-29 08:32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입니다.
 
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
이덕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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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결국 절판되버렸다.

책바다를 통해 구해 봤더니 무려 830페이지에 이르고 사이즈도 매우 커서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잘 읽힌다.

철학적인 부분은 다 이해하지 못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러시아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개념을 접했다.

간단히 말해 러시아는 동방과 서방 혹은 범신론과 기독교라는 이중신앙체계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범신론은 자연을 숭배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거대한 국토 면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10세기부터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후 기독교가 사회의 근간이 되었으나 서구와는 달리 동양의 禪 적인 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러시아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이 성립된 듯 하다.

러시아의 이콘을 보면 마치 우리의 불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구의 르네상스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콘화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고 그 안에서 빛과 색을 통해 명상하고 신의 초월성을 관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비언어성의 시각중심주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논리를 통해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신의 초월성을 빛과 색을 통해 직관적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양의 선불교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개혁하면서 동양성을 벗고 서구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배경이 이해된다.

러시아에서 봉건국가가 형성된 키예프 루시의 정체가 바로 스웨덴의 바이킹인가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의견을 지지해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려온 바이킹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던 흑해 인근의 동슬라브인들과 결합해 세운 나라가 바로 러시아라는 것이다.

이 바이킹들은 무조건 남하한 것이 아니라 고대 수상 무역로인 강을 따라 내려와 터를 잡게 된다.

러시아인의 민족적 기원이 흥미로웠다.

책이 워낙 커서 도판도 정말 훌륭하다.

특히 러시아 그림들을 마음껏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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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화 속 현대 미술 읽기
존 톰슨 지음, 박누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현대 미술에 대해 겨우 이름만 알 때라 무척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본문에 나온 작품이나 화가들, 소장처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일일이 찾아보느라 한 시간에 겨우 20 페이지 정도 밖에 못 읽어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던 책이다.

몇 년 만에 재독하니 처음보다는 훨씬 쉽고 무엇보다 모방과 재현을 벗어난 현대 미술의 개념과 철학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그림이라고 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나 바로크의 루벤스처럼 정밀하고 똑같이 아름답게 그리는 게 명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 낙서 같은 현대 미술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회화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특히 사진기가 발명된 후 회화가 구성으로부터 벗어나 색채와 구도, 색조와 같은 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현대 미술은 어렵고 특히 20세기 이후의 개념미술이나 팝아트, 미니멀리즘 같은 것들은 공감이 어렵다.

색면 추상주의도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했던 로스코 전을 본 후로 거대한 색면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에 감동하여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또 덕수궁 미술관에서 주최한 조르디 모란디의 정물화 전을 우연히 본 후 묘한 감동을 받았었다.

이 책에도 소개됐는데 도판만 봤다면 전혀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추상 미술은 특히 직접 작품과의 대면이 중요한 것 같다.

책은 장점이 많다.

도판이 다소 어둡긴 하지만 본문에 나온 그림들을 가급적 전부 실어주고, 화가들의 생몰연대와 작품의 크기, 소장처, 제작년도 등도 소상히 밝히고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다만 현대미술의 개념 자체가 어려워서인지 문장이 쉽게 읽히지가 않는다.

번역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아 우리 저자들이 쓴 현대 미술서를 읽어 볼 생각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색조라는 개념이다.

와토의 <제르생의 상점 간판>이라는 그림의 해설에서 색조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 평면성과 색채인데 두 색채간의 대비 혹은 조화, 전체적인 분위기를 뜻하는 색조가 매우 중요한 요소 같다.



<인상깊은 구절>

22p

모로는 신비주의의 회귀를 부르짖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상주의에 탄력이 붙고 있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예술의 본질은 물론, 그 문화적인 목적의 측면에서도 과격하리만치 시류에 반하는 발언이었다. 새로운 상징주의 예술은 문화의 소양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기능이었다. 모로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거장들은 물론 인도와 중국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인상파식 축소지향적인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식적인 디테일의 소멸보다는 '선, 아라베스크, 인위 예술에서 가능한 모든 장식적 장치를 통해 생각을 환기시키는' 그림으로의 회귀를 원했다.

29p

훗날 자신의 작품이 코로의 바로 옆에 걸려 있는 것을 본 모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슬픈 날이다."

31p

휘슬러는 그림을 통한 도덕적인 설교나 감상적인 내러티브에 기울어진 빅토리아 시대 미술에 반대했다. 그는 '모던'하고, 형식적으로 엄격하며, 음악처럼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34p

모네는 빛의 특정한 분위기나 부수적인 효과, 그리고 색채를 띤 표시의 질서정연한 배열로서의 인지를 추구했다. 사실, 모네는 회화적 추상의 새로운 본질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의 <야상곡> 연작 중 초기작을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과격한 이미지의 단순화까지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도, 사진 기술의 지속적인 발달과 직면하면서 자주적인 시각 언어로서의 회화 진화의 중요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49p

마네는 특히 드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가처럼 마네도 모티프로부터 직접 작업하는 것의 효율성에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했다.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살롱 화가였던 마네는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존중했으며, 여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면서 계속 그 연장선상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마네가 한 번도 다른 인상파와 함께 전시회를 연 적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57p

"조화란, 지배색과 특정한 빛의 영향으로 인하여, 충돌하는 비슷한 색조, 색상, 그리고 선 요쇼들이 명랑하거나, 차분하거나, 혹은 슬픈 조합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조르주 쇠라

60p

폴 세르쥐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고갱의 요구 -모방을 벗어버리고 그 내면의 논리와 상징의 함에 따라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라는-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된다. 사실 한 점의 회화로서의 <부적>은 고갱이 시도했던 그 무엇보다 훨씬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회화 언어를 포용하고 있다. '평면성'이 고갱의 작품에서는 형태가 채색된 형상으로 강조되기 이전에 이미 선에서 생성되는 반면, 세뤼지에의 작품에서는 붓질의 분산만으로도 생겨나, 채색된 영역과 형태와 대비를 이루는 표현 위에 뭉치거나 퍼진다.

66p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일상을 공유하는 실험은 감정의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감수성 면에서는 두 사람이 막상막하였지만, 고갱의 지배적인 성격이나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에 고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71p

지기였던 반 고흐처럼 고갱도 점묘법을 시도하면서 독학으로 색채 이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고갱은 과학보다는 직감을, 광학적 진실보다는 상징적인 힘을 더 선호했다. 고갱은 마침내 색채를 단순한 표현에서 분리하게 되고 바로 이 때문에 19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래로 향한 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81p

"나의 예술의 유일한 목표는 관객 안에서 불확정의 세계와의 산만한, 그러나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딜론 르동

105p

놀데는 말했다. "원형이나  모델 없이... 명확한 정의 없이... 빛과 색채의 모호한 감각만으로도 충분하다... 혹은 그림은 혼자 힘으로 그 형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113p

채도가 높은 색채의 평평하면서도 서로 겹치는 채색면을 강조함으로써 마티스는 -폴 고갱의 발자취를 따르며- 유럽 회화의 색채에의 근대적 접근을 정의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티스는 미국 추상화, 특히 채색면을 강조한 추상화의 탄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4p

기성작은 뒤샹으로 하여금 '미적인 숙고가 더이상 손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닌, 정신의 선택에 불과하게끔' 만들어주었다.

134p

칸딘스키의 추상 이론에서 핵심은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고도 예술 작품의 외형적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란 우선 자신의 '내적 소리'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접촉을 가짐으로써 그 시각적인 면을 형태와 색채로 캔버스 위에 풀어놓는 것이다. 간신히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의 존재를 암식하는 자연 질서와 유사한 이미지들-파란 부분은 하늘처럼 보이고, 어떤 형상은 인간이나 물고기처럼 보이고-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160p

192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세잔의 그림을 실제로 본 뒤 그는 형이상학파와 결별한다. 모란디는 예술계나 예술 시장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볼로냐 아카데미에서 조판을 강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제1타 세계대전 이후 밀려온 볼셰비즘의 파도에 겁에 질린 많은 이탈리아 중산층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처럼 모란디 역시 정치적으로 우파에 섰다. 1920년대 초반, 즉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수년 전에 이미 무솔리니의 지지자였으며 파시스타당의 정식 당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결국 파시즘에 환멸을 느끼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돌아선 후, 모란디는 1930년대 초 이후로는 정치적 발언을 중단했으며 교사화 화가로서의 일상 이외에는 공적인 자리를 점점 피하게 되었다. 

165p

"회화적인 표현이 변했다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고속 열차로 풍경을 가로지를 때, 그것은 조각조작나 묘사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대신 합성적인 가치를 얻는다. 열차의 차칸 문이나 자동차의 차창을 통해 바라본 경관은 속도와 조화를 이루어 사물의 일반적인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페르낭 레제

191p

브라크는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작이란 모든 개념이 지워지고 오직 불안정한 느낌만이 남아있는 '지적 공허'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물:그 날> 같은 작품을 보면 그에게 있어 느낌이란 색채의 상호작용과 보기드문 색상조합의 창조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210p

<신부의 단장>은 매우 디테일하고 환상적인 에른스트 초현실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그가 전통적인 회화 기법 전반 -바탕 채색, 색채 조합, 색채에 광택 입히기 등-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14p

발튀스는 그 자신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조르지오 데 키리코처럼 기법상의 이유로 동시대 화가들에게 거부당했으며, 옛 거장들의 작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탄식했다. 무엇보다 발튀스는 당시 화가들이 회화 공간에 언어 -과도한 설명과 화려한 언변의 비평 논쟁-를 삽입하기 시작한 것에 깊은 불신을 품었다. 대신 그는 바꿀 수 없고, 옮길 수 없는 회화 이미지의 시각적 풍부함을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발튀스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다소 구식인 연극조-부르주아들의 예의범절-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야말로) 발튀스가 오늘날 사회적-성적 노이로제의 예라한 관찰자였음을 보여준다. 

221p

1960년대 이후 날이 갈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쇠퇴하는 성적 능력에 신경을 쓰는 것이 회화와 에칭에 그대로 드러냈던 피카소와는 달리 보나르는 자화상에서 점점 내향적으로 변하는 자신의 성격을 표현한 듯하다.

271p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기대하는 그 자체가 멋지다. 이것이 나의 친구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나눈 긴 대화의 주제였다." -앙드레 브르통

297p

그는 추상 표현주의의 감정적 과잉과 단절하여 '예술 그 자체로의 회귀'를 무엇보다 원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라인하트에게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라인하트는 그림이 한 덩어리의 벌거벗은 시각적 요소들로 줄어드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다.

301p

"예술가의 부름은 삶에 대한 태도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끌어안는다. 동작 하나하나가 선해야 한다. 도덕주의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단 반 골덴

315p

뒤샹에게게는 아무리 열렬한 예술 애호가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는, 예술가만의 영역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공간이 있다.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관객은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예외적인 개인만이 공명할 수 있는 사물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의 경험은 '종교적 신앙 또는 성적인 매혹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미적인 반향이 그것이다.'


<오류>

46p

1860년대, 이제는 나폴레옹3세가 된 조르주-외젠 오스망 남작은 파리의 중심부를 바꾸어 놓기로 결심했다.

->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망 남작에게 지시했다는 표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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