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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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가지 태도를 접할 수 있었다.


1. 재미도 없고 별로인데 왜 좋다는 거죠?

2. 엄청 좋은데 뭐가 좋은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 의문을 머리에 달고 첫 페이지를 폈다.

나는 어디에 서게 될까,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짧기도 하고.


완독 후 3번의 태도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3. 사소해서 좋다, 라고.


거대 악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사소한 선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 같다.


어떤 인간이 되려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사소하기 그지없어서 세상 모든 걸 사소하게 보고

그렇기에 자기 삶에서 사소하게 남더라도 

그런 인간이 어째서 우리에게 중요한지.


이 소설의 소재인 막달레나 세탁소의 여성 착취를 파헤치며

고발 소설로 썼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긴장감과 자극, 재미를 만들 수는 있었을 지 모른다.


독자의 분노와 정의감이란 선명한 공감도 몇 배는 더 쉽게 끌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 방식이 지금의 이 소설보다 더 문학적이었을까. 


소설가는 철저하게 그 길을 벗어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사소한 것들을 다루는데 그 방식조차 사소하다.

그게 이 소설의 메타적 미학 같다. 


심지어 펄롱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생부의 존재조차 크게 다루지 않을 정도다. 

지나치듯,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태도로 흘려보낸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태도...


출생의 비밀조차 드라마로 만들지 않겠다는 절제.


이 일관성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기 마련이고, 

중요해 보이는 장면, 강조하고 싶은 순간이 반드시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썼던 문장을 땀흘려 지워내는 키건을 느낀다.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 대신 덜어내는 쪽을 택한 선택들, 그

그 과감함과 노련함이 읽는 내내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뚜렷하게 남는다.
“아, 사소한데 좋다, 아니, 사소해서 좋다."


알고 보면 이 소설의 바탕에는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거운 실화가 깔려 있다. 


키건은 그 거대한 덩어리를, 마흔도 채 되지 않았고 

생부의 얼굴도 모르며 어머니마저 잃은 한 소시민, 펄롱에게 조용히 얹어 놓는다. 


하지만 펄롱은 그 짐을 지고 허우적대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에게 딱 맞는 무게만큼, 

자기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진다.

그래서 그는 수녀원에 감금된 소녀를 ‘구출’하지 않는다. 

구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도록, 그냥 데려온다. 


사람들은 묻는다. 딸이냐고. 

어느 범죄 집단에서 빼내 온 아이냐고 묻지 않는다. 

소녀 역시 그 침묵에 조용히 동참한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나귀였다.

(119p)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전등이 켜진 구유 앞에 멈춰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셉의 밝은 옷도, 무릎 꿇은 동정녀도,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도 아니다. 

크리스마스라면 당연히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들은 모두 주변으로 밀려난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옆에 서 있던 당나귀다. 

말 없고, 사소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


집요하게 사소해지기로 한 작가의 태도-.


펄롱은 소녀를 구한 게 아니라 곁에 남긴다.


단발적 '구제'보다 

사소해 보이지만 지속적이란 면에서 오히려 '구원'에 다가든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결코 시시하지 않은 감동이 와 닿는다.


사소해서 좋다.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대신, 

사소하게도

사람 하나를 인간으로 남겨두는 이야기라 좋다.


정말로 사소한데, 그래서 더 좋다.

키건은 바로 그걸 해 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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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

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략)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111p)


이 부분은 소설 쓰기적 관점에 봤을 때, 시점의 오류처럼 보인다.


이 소설 전체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였으나

초점 인물은 펄롱이다. 

화자가 펄롱의 눈을 통해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전지적 작가(제3의 누구/내포작가)는 펄롱을 내려다보며, 

혹은 옆에서 동반하며 펄롱에 관해 쓴다. 

펄롱이 보는 것 생각하는 것도 꿰뚫어본다.


펄롱이 슬프고 기쁜 때도 알아본다. 

정확하게, 때로는 일부러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만들어 비뚜름하게.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이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그런데 여긴 시점이 이상하다.


네드의 행동이 은총이 아니었나.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이건 펄롱의 느낌이다.

고로, 그 문장의 주체와 화자는 명백히 펄롱인데 펄롱이 타자화되어 

'펄롱의 곁에서',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나의) 곁에서

(나의) 구두를


이라고 바꿔서 읽었다. 내 경우는, 더 좋았다. 


혹시, 자유간접화법으로 전지적 작가가 개입한 것이라면, 

오류나 실책까진 아니지만 과히 설득적이진 않다. 

왜 갑자기 전지적 작가가 이 모든 걸 정리하려 하는가.

거리감 느끼게시리.


더구나 그 다음엔 또, 바로 주어도 없이 


잠시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로 이어지지 않나.


의도적이라고 하면 그 의도가 잘 읽히지 않는데,

물론, 이건 독자인 내쪽의 빈약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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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무의식 공방 시리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현실문화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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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문화 출판사의 공방시리즈. 이런 시리즈는 많이 나와야 한다. 엄청나잖아!! 랑시에르, 아감벤, 양창렬 번역자까지! 표지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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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증언하는 사람 - 빅토르 클렘페러 읽기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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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일단 심상치 않아 봬서 읽기로 했다. [희망이란 결국엔 하나의 감정일 뿐이지만, 그래도 어떤 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 문장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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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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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 왔다. 처음엔 편지였고, 그 다음엔 시와 연설, 나중엔 이야기와 기사, 그리고 책이었으며 이젠 짧은 글을 쓴다.

(7p)


존 버거는 1926년 생을 얻고 2017년에 죽음을 얻었다.

팔십 년간 글을 썼다면 91세까지 살았으니, 11세부터 글을 썼다고 셈한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많이 쓰는 것보다 '오래' 쓰는 게 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어른이 돼서, 할 일 다 하고, 

시간이 좀 남기 시작하고, 머리에 생각할 여유가 좀 생기고...


그럴 때 쓰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상을 받은 말든, 잘 쓰든 못 쓰든...

어렸을 때부터, 그냥 써 온 사람이 조금은 글쓰기에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주변에서 보면 그렇다.


글 잘 쓰는 사람 치고, '오래'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썼다.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나이들어 글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써서 나중에 80년 간 글을 써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글쓰기에 관해서만큼은 뭔가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존 버거가 그렇듯이.


번역은 두 언어들 사이의 양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세번째 꼭짓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씌어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진정한 번역은 이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


(8p)


좋은 문장은 결이 많다.

그 많은 결은 동일성과 상이성을 모두 품고 있다.

이 떄의 '상이성'이나 '이질감' 또한 전체로 보면 

'맥이 통한다'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좋은 문장이고-존 버거가 썼으니까-

그런 만큼 결이 다층적이다.


여기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소설,을 한 번 넣어보자.


소설은 현실과 언어 사이의 단순한 대응이 아니다

소설을 현실의 모사나 재현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친다


소설은 현실과 언어의 이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인용글처럼). 

삼각형의 번째 꼭짓점에는 사건이 일어나기

인물이 말을 하기 , 세계가 아직 이야기로 굳어지기 전의 어떤 상태가 놓여 있다


감정이 아직 감정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상태

의미가 의미로 확정되기 전의 불안정한 떨림이 거기 있다.

그래서 소설은 일어난 일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소설은 언제나 이미 일어난 뒤로 물러나

그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필연을 더듬는다

사건은 결과로 제시되지만

소설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건이 불가피해지기까지의 시간이다.

말해지지 않은 선택들

침묵 속에서 축적된 압력 같은 것들... 


소설의 문장은 현실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현실이 언어가 되기 전의 상태를 다시 통과하려는 시도.


나는 그래서, 진정한 소설은 언제나 시작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소설은 어디서 시작하더라도 언제나 이미 시작되어 있었던 지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문장은 출발선이 아니라 도착점에 가깝다고 있다.

말해질 없었던 , 말해질 필요조차 인식되지 않았던 것에 

마침내 언어가 닿는 순간

나는 그런 소설이 아닐까 한다


많은 경우,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설은 이야기가 되기 이전의 세계를 다시 불러오는 문학이다.

그렇게 소설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그러나 바로 늦음 덕분에 소설은 비로소 명확해진다.


소설을 읽고 ",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라고 느끼는 것보다

", 어떤 상태를 통과했다."라고 느낄 ,

읽은 소설이 좋은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가 베스트셀러 소설, 혹은 인기 소설, 혹은 좋은 소설이라고 하는

과연 소설다움에 정말 근접해 있는지 묻고 싶다.

난해하고 복잡하고 말인지 없다고 해서, 인기 없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아니라고 단정할 없는 이유가 바로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어떤 '사건'이나 '감정'이나 '상태가

워낙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리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난해한 소설은 역시 반기지 않는다.

다만, 소설을 덮고 어딘가를 통과한 느낌인데, 몸이 고단하고 피곤하긴 해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 있을 같다고 막연히 느끼는 순간...

그게 소설 읽기의 마력같다


일부러 오지만 찾아 다니는 여행가가 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을 만한 곳에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긴 의미가 무수하고...


닿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수는 없는 아닌가.  


읽었는데 이리 길게 거리가 있다.

언제 이렇게 썼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것만 해도 버거는 역시 대단하다.


쓰는 사람은, 생각할 거리, 거리를 아낌없이 제공하는 법이다.

80 사람답다.


진짜로 이제 겨우  페이지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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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27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 좋아하는 작가예요.
이 책은 제게 없네요.
전자책으로 찾아봐야겠어요.
,,,,
정말 몇문장만 읽어봤는데, 너무 좋네요!

젤소민아 2026-01-27 12:41   좋아요 1 | URL
네, 저, 이제 10쪽 읽었는데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그래서 밑줄긋기 포기! 이런 책을 다 밑줄긋고 아예 한 권 더 사는 게 낫다는요~. ㅎㅎ 같이 읽어요 그레이스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51
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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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가르쳐주신 스승님이 꼭 읽으라는데, 엄두가 안 난다. 단테의 ‘신곡‘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포함해, 죽기 전엔 읽어야 하는데 읽을 생각만 하면 겁부터 나는. 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도 있구나...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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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6-01-26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저 이 책 오래 전에 읽었는데 아주 웃기고 재밌었던 기억이에요.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심이 어떨까요…저도 단테 프루스트는 같은 심정으로 아직 못 읽어봤습니당…

젤소민아 2026-01-26 23:12   좋아요 0 | URL
ㅎㅎ 초록비님 말씀에 용기내서!! 당장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6-01-27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19세기도 아니고 17세기에 나온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포스트 모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크게 기대하지는 마시고 쫄지도 마시고 그냥 읽어버리세요. ㅎㅎ

젤소민아 2026-01-27 05:57   좋아요 0 | URL
쫄지 않을게요~~ㅎㅎ ‘파멜라‘도 읽어야는데...리스트가 기네요~~감사합니다!